정토행자의 하루

안양지회
행복의 배양토

유년시절엔 3남매의 맏이로 엄마 역할을 하고, 학창시절엔 불의를 못 참는 정의의 사도, 대학 때는 민주화 투쟁, 결혼 후에는 세 아이의 엄마로 거침없이 살아온 안양지회 이경선 님. 거칠었던 인생 역정을 오로지 수행을 통해 탐스러운 열매로 영글게 한 여장부! 그녀의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까요?

2016년 동북아역사기행
▲ 2016년 동북아역사기행

나를 위한 공부 한번 해봐?

현재 인천경기지회 안양 특위 모둠장 소임을 맡아 주로 행복학교1와 통일의병2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토회와의 인연은 201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육아에만 전념하다가 논술 교사를 하면서 대안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논술 수업이 거의 주말에 있다 보니 아이들과의 관계도 어려움이 있었고,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평일에만 일할 수 있는 학습지 교사로 전환하여 8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름 학부모들에게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허리통증이 심해졌습니다. 그 원인은 12cm가 넘는 자궁근종이었습니다. 이를 수술하면서 학습지 교사는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갱년기증상과 우울증, 어깨통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어느 날 안양에서 서초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불교대학 홍보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그때 문득 이번에는 진짜 나를 위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을불교대학을 신청하였습니다.

불의를 못 보는 정의의 사도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3남매 중 맏이로 자랐습니다.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저와 남동생들에게 얼차려를 시키고 술이 깰 때까지 큰 소리로 훈계하는 주사가 있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기’, ‘엎드려 뻗치기’, ‘빗속에서 운동장 구보’ 등을 하며 저도 힘들었지만, 두 남동생이 더 안쓰러웠습니다. 맞벌이하는 어머니 대신 제가 엄마 역할을 하면서 동생들을 돌봤습니다.

아버지는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임무 때문인지, 나약한 정신에 대한 훈계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주 미웠고, 그래서 저 자신도 힘들었습니다.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때리지 않고 키워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런 환경이 저에게는 강한 정신력과, 약한 이를 돌보는 책임감, 불의를 못 참는 정의감을 키우게 한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누군가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싸워서 '정의의 사도'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오지랖녀로 살고 있습니다. (웃음)

위장취업과 결혼생활

대학 들어가서는 군사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 집회에 참여하느라 전공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임용고시 준비하며 실습까지 다 마쳐 놓은 상태에서, 안산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위장 취업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습니다. 철통보안과 감시 속에서 제대로 된 활동도 못 하고 2년 가까이 지내다가,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고향에서 과외교사로 지내다가 친정어머니와 같은 부녀회장 친구 사이였던 현재 시어머니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너무 싫어 그 탈출구로 선택한 남편은 성실하고 선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입에 곰팡내 날 정도로 과묵하였고, 주사는 없었지만 365일 주(酒)님과 친구 하며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 모습에 '내가 술로 지은 과보가 많아 이리 사는구나!' 하며 운명을 탓하며 살았습니다.

양가 맏이로 세 아이를 기르며 주말엔 특별한 가족여행 한번 갈 여유도 없이 시댁과 친정만 오가며 남편 원망 하며 겨우겨우 버티며 살았습니다. 대상포진과 정상치의 4배가 넘는 갑상선 항진증 등 지칠 대로 지친 최악의 건강 상태가 계속되었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든 상태에서 아침에 눈 뜨기도 싫었던 시절이었습니다.

2017년 대전 행복학교 캠프에서
▲ 2017년 대전 행복학교 캠프에서

정토회에서 또 다른 세상을 보다

불교대학 학생 시절에는 어깨통증으로 거의 밤에 잠을 못 자는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들은 법문은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고 교재만 들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때 법당 총무의 권유로 목탁교육을 받았고, 목탁을 치면서 마음이 놀라울 정도로 편해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목탁교육으로 서초, 부평 등 여러 법당을 돌아다녔는데, 그곳에서 만난 활동가들의 열중하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내 고집을 내려놓고 포기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도 했습니다. 드디어 백중 기간 입재와 중간재 때 목탁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법주로 천도재를 지내며, 친정아버지를 향한 참회의 눈물을 쏟아냈던 그때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술 드시고 뇌진탕으로 중환자실에 한 달 반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잘 놀다가도 저녁 무렵 군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콩닥콩닥하며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전역후 군 퇴직자들만 노린 사기로 인삼밭 사업이 망해버리자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 후 친정 가는 게 더 큰 괴로움이었고, 속으로 가족 모두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원망과 저주까지 마음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그랬기에 우주 무주 선망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천도재의 염불은 그대로 내 가슴에 와서 꽂혔습니다. 술이 아니면 자신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아버지만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고 이기적인 내가 보였습니다.

2017년 안양아트센터 행복강연
▲ 2017년 안양아트센터 행복강연

깨달음 이후 지금

경전반 학생이자 담당을 시작으로 하나둘 소임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주저했던 마음은 일을 하나씩 배우며 내려놓아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서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사회변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경전반을 졸업하고 통일의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법륜스님의 새로운 큰 뜻인 행복학교 시범운영팀에 참여하면서 통일특별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행복학교는 정토회와 달리 종교라는 틀을 벗어나, 법당이 아닌 외부 공간에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 긴장과 부담으로 거의 잠을 못 잔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인연이 된 참가자 중 일부는 지금도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마운 선물

8-3차부터 천일결사 입재식에 처음 참여하였는데, 수천 명이 모여 행사 하는 장면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들은 수행담은 내가 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계속 참여하였고, 아침 수행까지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스님과의 동북아역사기행을 통해 통일의병으로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 2시 출발이라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한 시간도 못 잔 경우도 있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8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자로서 스님의 뒷모습을 따라가겠다는 나의 작은 발원이기도 했습니다.

정토회가 개인 수행을 바탕으로 하지만 공적인 가치 실현을 위한 봉사를 중시한다는 것이 매우 반가웠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임 받는 게 두렵고 부담스러워 조금이라도 책임이 적은 것을 원했습니다. 끝까지 책임 소임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으로 명상수련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저에게, 한 도반이 정일사 선물로 '뺀질거리지 마라'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동안의 내 모습을 확연히 보여주는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능력이 안 되어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남에게 제가 못하는 걸 보이기 싫은 마음이 두려움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2019년 행복시민과정
▲ 2019년 행복시민과정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특위 모둠장 소임을 맡으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 두려웠지만, 기꺼이 손 내밀어 알려 주시고 함께 해준 도반들이 있어 지금은 눈치 보지 않고 물어봅니다. 요청하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도반과 함께하는 일은, 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현 모둠장 소임은 제가 연습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이었고 그로 인해 많이 성장했으며,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된다’는 소임의 가벼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업식이 강해서 개인적으로 제 생각과 다른 의견에 바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빈도도 높았습니다. 지금은 옛날보다는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그 업식으로 불편함을 만드는 것은 아직 여전합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의 수행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가족에게는 더 안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행복의 배양토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행복학교나 정토회를 거치면서 '덕분에 행복해졌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누군가에게 행복의 배양토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저만의 행복에 그치지 않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 정년 없는 행복학교 진행자로서 내 노년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보람 있고 가치 있는 행복학교 활동가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해피코리아 가치심기를 위해 남은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또한 통일의병 특별위원회의 경험은 저에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큰 자산입니다. 좀 더 대한민국이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민족중흥과 불교 중흥의 역사적 실현을 위해 통일의병으로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2021.7.14통일특위 전체 캠페인
▲ 2021.7.14통일특위 전체 캠페인


과거 법당 시절 이경선 님은 주간반, 저는 저녁반에서 활동하여 그리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둥그런 눈과 얼굴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 같은 순한 이미지였는데 인터뷰하면서 예상치 못한 이력과 과감한 성격에 깜짝 놀랐습니다. 선입관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게 정말 오류가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위장취업을 할 때 걱정되거나 두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군인의 딸은 단순해요. 방향이 옳다 생각이 들면 그냥 GO! 하는 거예요' 조건 따지며, 이것저것 재고 있는 저를 쫄게 만드는 여장부의 일갈이었습니다.^ ^

글_윤정환(희망리포터 인천경기서부 안양지회)
편집_이정선(경남지부 진주지회)


  1. 행복학교 법륜스님 행복학교는 온라인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고 진행자와 참가자가 행복을 배우고 연습하며 '내 것으로 만드는 체험의 장'입니다. 행복학교는 종교를 떠나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학교 신청: http://hihappyschool.com 

  2. 새로운 100년을 여는 통일의병은 화해·상생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영리민간단체.
    통일의병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강령과 정관에 동의하면 가입 가능하며, 정기회비를 내고 각종 통일의병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
    홈페이지: http://www.tongilkorea.kr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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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수행담 잘 들었습니다.
행복학교 마음편 진행자로 만난 인연이 기억에 남아 혹시 하는 마음에 찾아 보았고, 이렇게 찾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든 다시 꼭 뵙고 싶습니다~^^

2023-09-10 16:11:49

김애자

수행담 감사합니다

2023-08-19 06:53:24

우정화

안녕하세요
우정화입니다
덕분에 행복학교를 잘배우고 지금 관계편하면서 불교대학도 신청했습니다
너무감사드립니다
언젠가 좋은곳에서 한번뵈면 너무 반가울거같애요

2022-09-12 22: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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