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아름드리 보리수처럼
필요한 곳에 그늘이 되어주는 삶

유재학 님의 글을 읽으면서 작은 묘목이 비바람을 맞으며 성장하여 마침내 마을을 지키는 아름드리 나무가 된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목가적인 풍경 속 인물이 되어, 큰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 마치 지금 힘든 일이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닐 거야 하는 위로를 받는 느낌이랄까요? 소박하지만 따듯한 유재학 님의 글에서 배울 점이 많아 감사하고, 소개할 수 있어 기쁜 마음입니다.

밑거름을 주고

저는 충청남도 공주시 마곡사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소 장사꾼이었는데, 장이 서는 날이면 장터에서 화투를 치느라 종종 귀가가 늦어지곤 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이 못마땅하던 어머니는 화투 치러 나가는 아버지의 뒤통수에 대고 화를 내시기도 했지만, 비교적 부모님은 사이가 좋으셨고 그 속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습니다.

유재학 님
▲ 유재학 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개구쟁이 기질이어서 친구가 놀리기라도 하면, 그 길로 똥 한 바가지를 퍼서 쫓아가 으름장을 놓곤 했습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농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전공을 살려서 일선에서 선반, 밀링 일을 했습니다. 이 일은 공구가 빠르게 회전함으로써 금속의 표면을 다듬거나 구멍을 내는 일입니다. 작업 시에 장갑조차 끼지 않는 것이 원칙일 만큼 위험에 노출된 일이고 산업현장에서 두루 쓰이는 부품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전문 기술이기도 합니다.

군대 제대 후에는 청각장애인이 직업 훈련을 받는 대전원명학교에서 선반과 밀링 일을 가르쳤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그들은 집중력이 뛰어났는데, 순수하게 일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매형을 통해 전기 관련한 일을 소개받아서 서울로 올라오게 됐습니다. 전기 일은 문외한이어서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전수해주기를 청했지만, 다들 자기 밥벌이를 지켜내느라 가르쳐주기를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고마운 친구의 도움으로 전기회로 도면을 공부하고, 배선공사도 해보면서 점점 일에 재미를 붙여나갔습니다. 당시 용접 일도 병행했는데, 새벽까지 일하는 날에는 용접 시 일어나는 불꽃과 연기로 인해 부풀어 오른 눈과 눈물을 가리려고 지하철에서는 신문을 사서 펼쳐 들고 앉아 가기도 했습니다. 고단했지만 일 배워가는 재미를 느끼던 시절입니다. 을지로에서 성수동으로, 또 경기도 광주의 지하철 회사로, 직장을 옮겨가며 노후한 배전반이나 전선관을 교체하는 전기기술자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연등행사 사전 준비(오른쪽이 유재학 님)
▲ 연등행사 사전 준비(오른쪽이 유재학 님)

곁가지를 내려 그늘을 만들고

어느덧 제 나이 41살이 되자 미래의 아내를 찾아 다른 노총각 6명과 함께 베트남으로 결혼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결혼정보회사 사장님의 소개로 만난 제 아내는 20명이 넘는 대가족 속에 자라서인지,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의 앞날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 아내는 베트남을 떠나 한국으로 날아왔습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저 하나 달랑 믿고 한국으로 온 아내는, 제가 야간 근무를 나갈 때면 차 안에서 쪽잠을 자가며 새벽까지 기다리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곧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연이어 둘째와 셋째 아이를 안았습니다. 아내는 세 아이를 데리고 한국문화를 배우기 위해 다문화센터를 다녔으니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가족을 이루어 뿌리를 내리니,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대전에서 고물상을 하는 작은형님 일을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물어왔습니다. 우리 가정의 경제 기반이 빨리 잡힐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이 수긍이 가서, 그 길로 사표를 쓰고 대전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직장에 사표를 쓰고 내려갈 때의 마음과 그곳에서의 실생활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전기기술자로서 주어진 일만 성실하게 할 줄 알았지, 물건을 거래하거나 돈이 오가는 일에는 요령이 없었습니다. 형님은 그런 저에게 내심 불만이 있었는지 같이 밥을 먹다 말고, “너에게 주는 월급 정도면 여기서 두 사람을 더 쓸 수 있다”라고 하셔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윤택하고 안락한 그늘을 만들어주고자 선택한 대전행이었는데,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보리수 활동 중(맨 왼쪽이 유재학 님)
▲ 보리수 활동 중(맨 왼쪽이 유재학 님)

풍파를 겪으며 단단해지고

그날은 여느 때처럼 고철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아 회사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정면에서 오는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더 큰 사고를 막아보고자 벽을 들이받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트럭은 벽을 뚫고 나가서 산 중턱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옆자리의 동승자도 저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 일은 제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고 후에 심적으로 힘들던 대전 생활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다시 경기도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전기기술자로 재취업하기까지 일용직을 전전하던 시기라 마음이 불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이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로부터 정토불교대학 입학을 권유받았을 때 선뜻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지역을 이동해가며 일을 찾던 시기에 경전대학을 진학했고,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서 각 지역 법당에서 이동수업을 들을 때가 잦았습니다. 그때 도반들은 처음 보는 저를 친밀하고 격의 없이 대해주었고, 제 마음은 따뜻해졌습니다. 대전에서 겪었던 마음의 상처와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쪼그라든 마음에 훈풍이 부는 듯했습니다. 도반들의 정을 느끼며 제 마음은 안정을 찾아갔고, 자연스레 천일결사 입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천일결사를 시작하고 기도를 드릴 때면 어쩐 일인지 어머니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 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본으로 수출하는 떡갈나무 잎과 망개나무 잎을 산에서 따오시던 고단한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고된 시집살이에도 오랜 기간 묵묵히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고, 주어진 상황을 원망 없이 수용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니, 힘들다고 느껴지던 제 상황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등행사 사전 준비 중(맨 오른쪽이 유재학 님)
▲ 연등행사 사전 준비 중(맨 오른쪽이 유재학 님)

한 그루의 보리수가 되다

통일특별위원회에서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보리수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제안을 망설임 없이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은, 짊어진 짐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주변을 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보리수 씨앗 교육 4기로 졸업하고, 요즘은 매주 일요일에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출근해서 보리수 전기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리수 정진하면서 받아 든 기도문은 ‘우리 아이는 문제가 없습니다.’입니다. 제 아이들은 소위 다문화 가정 출신의 아이입니다. 큰아이는 고3인데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취업하겠다며 은행에 입사원서를 넣었습니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봤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상처받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떨어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경험임을 스스로 알아가도록 기다려주는 일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아이가 도움을 청한다면 흔쾌히 응하겠지만 언제까지나 같이 살면서 해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저 지켜보려고 합니다. 기독 재단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전도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을 때면, 엄마도 아빠처럼 정토회에 나가야 한다는 말로 우리 부부를 웃게 만듭니다. “아빠는 정토회에 다녀서 잔소리를 안 해서 좋아!”

저는 정토회에 인연이 닿아 보리수 정진을 하기 전까지는 봉사에 대해서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과 가족만 보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눈을 돌려 주변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회사에서 오르내림이 있고, 나이 많은 선배의 지적이 간섭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수행으로 자신을 점검하고, 법사님과의 간담회에서 마음을 내어놓으면 금세 가벼워집니다. 일어나는 마음이 길게 가지 않으니, 가정생활이나 봉사활동 그리고 회사생활까지 그저 가볍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 지난 삶을 훑어보니, 꼭 일어나야 할 일들이 매 시기 일어났고, 경험으로 단단해진 뿌리는 쉬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행하고 봉사하는 덕분에 필요한 곳에 그늘을 만들어주며 더불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가등 다는 날(맨 위쪽이 유재학 님)
▲ 영가등 다는 날(맨 위쪽이 유재학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3년 11월호에 수록된 유재학 님의 보리수 소감문입니다.

글_유재학(보리수 3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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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4

0/200

감로명

멋집니다.

2024-06-24 08:00:14

대정진

보리수 처럼 굳은 일 맨 앞엔 언제나 유재학님이 계셔서 든든했습니다.
함께 수행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2024-06-19 09:36:53

평화

행복한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따뜻한 아버지 자리를 지키는 진정한 보리수 거사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수행담 감사합니다

2024-06-19 0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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