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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초 해운대 법당에서 정토행자의 하루 꼭지와 편집자, 희망리포터 7명이 향명법사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냥 컸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아무 문제없던 일이 오히려 정토회를 만나면서 문제였음을 알았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보이는 분위기와 다르게 “저는 많이 조급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시던 향명법사님. 불법 만나 일상의 소소한 것에 깨어있기까지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첫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저는 2남 2녀 중 장녀입니다. 얌전하고 부끄러움이 많아 항상 뒤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지역 유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사냥과 노름을 즐겼고, 여러 여자들을 만나면서 집을 비우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부엌에서 절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성철스님이 재가불자들에게 권했던 '아비라 기도' 수행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어머니는 선방(禪房)에 다녔습니다. 선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집에 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못 가게 하니, 보따리를 마루에 던져두었다가 치우러 가는 척하면서 그 길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어머니가 가고 나면 아버지와 있거나, 부모님 없는 집에서 동생들과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늘 바깥으로 돌다 건강이 나빠져 환갑의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년 하안거 동안거를 선방에서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돌아가실 무렵엔 나누어야 할 것들 다 나누어 주고, 본인의 49제 비용까지 미리 송금하고 가셨습니다. 부모님이 각자의 인생 방향으로 삶을 사는 동안 저 역시 동생들과 잘 지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 이 집 저 집에서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인가, 놀던 한 친구가 “경화야, 너거 집 가자” 했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 했습니다. 친구들은 평소처럼 누구 집 가자라고 했을 뿐인데, 저로서는 ‘아버지가 없는 집’을 들키는 것이 끔찍이 싫어 죽어라 뛰었습니다. 친구들도 뛰면서 따라왔습니다. 필사적으로 앞서 뛰었습니다. 친구들보다 먼저 도착해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집까지 뛰어갈 때 어린 저의 마음은 너무 조급하고 다급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그리 집을 향해 죽을 둥 살 둥 뛰었는지.
결혼하곤 전업주부로 살았습니다. 아이들을 입학시키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 보내는 시간은 무료했습니다. 1997년 봄, 시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전봇대에 붙은 불교대학 전단지가 눈에 들었습니다. 법당을 찾아가니, 유흥가 거리에 노래방이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두컴컴한 것이 무당집 같았습니다. 망설이며 문을 여니, 젊은 청년들이 가득했습니다. 1997년도였으니 북한 동포 돕기 100만 인 서명 운동 때였나 봅니다. 젊은 사람들의 활기에 안심은 되었지만 의심은 놓지 않았습니다.
당시 불교대학은 2년 과정으로 6개월씩 4학기로 나눠 수업료를 냈습니다. 한 학기에 6만 원이었는데, 다 내기엔 조심스러웠습니다. 무당집 같고, 스님도 계시지 않고, 법상도 다른 절과 달라 나름 제 입장에서 계산을 했습니다. 2만 원으로 한 달 들어보고 다시 등록하면 안 되는지 물었습니다. 접수받는 분이 저를 딱! 쳐다보더니 그리 하라고 했습니다. 6만 원 내고 안 오면 제가 손해라 나름 계산적이게 도망갈 준비를 하고 불교대학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과목마다 법사님들이 바뀌었습니다. 학생 세 명에 법사님 한 분. 2만 원 내고 법사님 수업 듣는 건 괜찮았지만, 학생이 세 명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졸음이 쏟아져도 졸 수가 없었습니다. 나누기도 싫었습니다. 법사님 말씀만 듣고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빠지면 티가 너무 나 집에 가지도 못하고, 두 명이 나누기할 동안 나는 무슨 나누기를 하나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 나누기는 듣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혼자 수업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님이 오신다고 법당이 시끌시끌했습니다. ‘법당에 스님이 오는 건 당연한데 왜 이리 부산스러울까?’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스님이 오셨는데, 정말 귀가 열리고 가슴이 뻥 뚫리는 법문이었습니다. 그분이 법륜스님이었습니다.
법사님 코앞에서 졸지도 못하고 결석도 못하며 다녔는데 뭔지는 몰라도 조금씩 달라지는 저를 느꼈습니다. 제 귀에 들어오는 법문이 알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했습니다. ‘더 해봐야겠다. 조금 더 해보자.’는 마음이 졸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업주부로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저 자신을 가족들에게 온전히 맞추며 살았다고 자부했습니다. 97년도 당시는 수행기도문을 받았는데 제가 받은 기도문은 ‘당신에게 맞추겠습니다’였습니다.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는데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나를 잘 모르고 내게 맞지 않는 기도문을 내렸다는 원망이 일었습니다. 마침 지도 법사님의 기도 점검이 있어 질문했습니다.
“기도문이 저랑 맞지 않는데 안 맞는 사람은 어찌해야 합니까?” 안 맞는 이유를 물으시길래 "저는 잘 맞추며 살아왔고 지금도 잘 맞추며 살고 있는데요." 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잘 봐라. 누가 맞추는지 봐라.” 이러시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진짜 누가 맞추는지 봐라는 심보로 남편을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제게 맞춰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명령만 내렸습니다. 제 마음대로 하고 살았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의 힘듦과 수고, 그리고 제 성격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1차 만일결사 중 2차 천일결사 8차 백일기도에 입재했습니다. 입재하겠다는 분명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대절한 버스인데 빈자리가 많다 하고, 전업주부다 보니 막연히 문경이라는 곳에 가고 싶어 버스를 탔습니다. 그날 입재식엔 380명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10명의 예비 입재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예비 천일결사자 결의식 순서가 되었습니다. 10가지 다짐을 스님이 먼저 말씀하면 입재자들이 “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행사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예비 입재자 소감나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스님이 10가지 다짐을 말씀하셨을 때 대답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저는 입재자가 아닙니다!” 그때 들은 대답은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네요. 잘 오셨습니다.”였습니다. 그날 뻗대던 마음과 다르게 지금껏 입재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천일결사 입재 후 집에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법당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충실하게 기도하는 천일결사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다 쉬다, 하다 쉬다 하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법당에서 같이 해볼래요?” 도반의 청에 약속을 했더니 꾸준하게 법당에 나가졌습니다. 도반이 “300배 할래요?”해서 더불어 했습니다. 그렇게 함께 한 인연의 힘으로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2004년 2월 해운대 법당이 개원하면서 동래법당 총무소임자가 해운대, 동래 두 개의 부산법당 대표소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동래법당 총무가 되었습니다. 대중들에게 같이 하자 권하려니 스스로에게 당당함과 힘이 있어야 했습니다.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임이 복이었습니다. 덕분에 어제까지 기도한 수행자가 아니라 오늘까지 기도하는 수행자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싫어하는 선방에 보따리 꾀까지 내어 다니면서 매일 새벽 천배를 하던 어머니. 그 때문에 싸운다는 생각에 절도 싫고, 절하는 모습도 싫었습니다. 엎드렸다 일어났다, 혼자 중얼중얼. '저걸 왜 하지? 아버지가 싫어해서 수시로 다투면서 저걸 왜 하냐고!' 저는 종교는 가지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새벽에 엄마 곁에 가면 “아직 두 줄 더 돌려야 된다.” 하셨던 분. 그때 엄마는 젊은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십니다.
4시 55분에 알람을 맞춥니다. 일어날까 말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5시 임박하게 알람을 맞춥니다. 발딱 일어납니다. 사람 심리가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싫어했는데 매일 천배는 아니라도 엄마처럼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엄마의 유산을 찾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시간을 잘 지킵니다. 일 처리는 미리미리 해놓기 일쑤고, 약속 장소에도 미리 도착합니다. 지금도 대중들과의 간담회나 정담회가 잡히면 정해진 시간을 시계를 봐가며 기술 쓰듯 지킵니다. 수행을 하지 않았다면 이를 장점으로만 알았을 겁니다.
9박 10일 명상수련 중이었습니다. 뛰어가는 아이가 보였습니다. 그 아이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 신발을 꺼내 놓고, 방으로 뛰어가 장롱에서 아버지 파자마를 꺼내 옷걸이에 걸어 보이게 두고 친구들을 맞이합니다. 그때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걸 숨기고 싶었구나!’
‘친구들 도착하기 전에 보여주고 싶은 대로 해야 했구나!’
‘주어진 시간 내에 다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조급했구나!’
고요히 호흡에만 집중하자 나조차 몰랐던 나의 상처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면서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닌 조급함은 상처의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드러내기 싫어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하고자 서두르는 마음이었습니다.
훗날 동생들은 어땠는지 물으니 ‘아빠가 집에 잘 안 계셨지’ 정도일 뿐 아빠의 이중 생활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간에도 받아들이는 것이 달랐습니다. 저만 부정적인 생각으로 상처를 만든 것임을 알면서 크게 나아졌습니다. 지금도 조급함은 올라오지만 저를 옥죄는 상황은 만들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조절하며 살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법당에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어진 실천과제가 ‘나 사랑하기’ 였습니다. 과제를 붙들고 함께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구역질이 났습니다. 왜 그러는지 살폈습니다. 기도 중에 스스로에게 ‘사랑해’라며 마음으로 저를 안는 순간,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나 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온전히 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계속 튕겨 나갔습니다.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참 못났다. 열등감이 심하구나.’
상대에게 늘 ‘나를 인정해 달라, 봐 달라’ 요구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기보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잘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워 늘 뒤에서 존재감 없이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그런 나를 인정하며 배려하니 차츰 타인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상대를 인정하니 그가 이해되었고 서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게 되었습니다.
글_이혜정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금정지회), 허승화(부산울산지부 사하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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