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지도법사님이 늘 강조하는 꾸준한 수행 정진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보향 법사님 역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고, 경계에 걸려 넘어지는 과정을 숱하게 겪습니다. 그럼에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가는 모습이 자못 흥미진진합니다.
명상수련을 거듭하며 비로소 고행과 쾌락을 오가는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야기며, 통증의 실체와 감각의 원리를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이야기는 마치 꿈처럼 들립니다. 기업을 경영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이 길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법사님은 오늘도 험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고군분투하면서도 수행자로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정초기도 3일째 회향법회가 있던 지난 2일, 정토사회문화회관 설법전에서 거목 같은 수행자, 보향 법사님이 저만치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녁부’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저녁 법회 모둠의 규모가 주간 법회 모둠보다 커졌지만, 당시 저녁부는 서초법당에 한정되어 별도의 조직이 없었습니다. 천일결사 4차에서 7차까지 약 10년간 사무처 저녁부 소속 저녁부장으로 있으면서 전국 각 지역 법당에 저녁부를 조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국 저녁부는 안정적으로 정착했으며,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과 활기가 넘쳐났습니다.
반면 사무처나 기존 활동가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저녁부는 말만 많고 일은 잘 못 한다’라는 외부의 부정적 평가와 ‘저녁부는 전달 사항이 잘 공유되지 않고 존재감이 없다’라는 내부의 불평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행사는 관성으로 진행될 뿐 저녁부의 의욕과는 상관없는 듯 보였습니다. ‘왜 역할을 주지 않느냐’고 따지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런저런 제안과 시도를 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양쪽에서 들려오는 불만의 소리는 커져갔습니다.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갈등이 커지던 중에 전국 사업인 ‘통일체육축전’을 저녁부가 맡아 진행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통일체육축전의 체육대회 부분만 보조하는 일을 해오다 전체 행사를 주관하게 된 겁니다. 직접 일을 해보니 그동안 주간 담당자들의 애로사항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이 늦어지고 순서가 밀리면 “빨리 해주세요”, “이때까지 꼭 해주세요”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받던 가장 불만스러운 요구 사항이었습니다. 입장이 바뀌고 보니, 주간 담당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됐습니다. 이렇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경험을 하면서, 회사에 반차를 내고서라도 주간 담당자의 일정에 맞춰주고픈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에서 돈 받고 일하는 것처럼 지시받고 시키는 일만 해서는 불만이 쌓일뿐더러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활동이 힘들게 느껴지고 업식과 욕구 불만에 사로잡힐 때 그 사실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소임이나 수련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가려진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는 것은 사실 지난 시절 욕구를 따라 즐기던 시간이 그리워진 겁니다. 욕구가 충족이 안 되어 불만인 상태에서 마침 가족의 반대가 거세지고, 회사에 바쁜 일이 생기거나 건강상의 이유 등이 건드려지면서 딱 걸려 넘어집니다.
어떤 도반이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100일쯤 지나니까 도저히 하기 싫어 못하겠는데 왜 이러냐고 질문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술 마시고 노래방 가는 것을 즐겼는데 기도하고부터는 못 갔다고 합니다. 근데 100일쯤 지나니까 몸이 아프다는 둥 아침에 못 일어나겠다는 둥 온갖 핑계를 다 댔지만 결국 술 한잔하고 싶고 노래방 가고 싶은 욕구였습니다. 진짜로 못하게 된 경우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또 한 도반은 건강을 되찾으려고 6개월간 담배를 끊었는데 오히려 금단 증상으로 체온이 떨어지고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살이 찌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더랍니다. 그러고는 ‘조금 줄여서 피지 뭐’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몸에 해로운 것을 끊고 좋아지는 과정 중에 탁 걸려 넘어진 겁니다. 한번 마음이 사로잡히면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립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서 잠이 부족하다면 좀 일찍 자거나 가족이 활동을 반대하면 내가 좀 더 숙이거나 하는 방법으로 활동을 하기 위한 길을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설령 경계에 걸려 넘어져도 툭 털고 다시 일어나면 되는데, 그냥 주저앉으려고 할 때 정말 안타깝습니다. 곁에서 도반이 챙겨주거나 정일사와 같은 수련 프로그램이 뒷받침되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같이 간다’라는 마음으로 법사님과 상담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정일사에서 다시 일어나 서로 힘이 되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한번 멀어지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게임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PC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게임이 모바일로 전환되던 2010년에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맞춰 새 국면을 맞이할 두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동종 업계에서는 잘될 것이라는 긍정적 반응이었습니다. 두 프로젝트 중에서 하나만 성사되어도 회사 상황이 좋아질 수 있기에 저도 희망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가용 자본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데다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일할 사람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원을 줄일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라도 시작될 날을 기다리며 성사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으로 1년을 버텼는데, 결국 둘 다 안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막바지에는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서 은행권 밖의 돈까지 빌려 썼는데 기대하던 일이 어그러지니 사업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사업을 접는 순간 자본 회수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만둘 수도 없고, 월급은 월급대로 지급해야 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새벽 5시에 기도는 꼭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는 빠뜨리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이어가고 있는데, 문득 ‘길거리에 나앉은 것도 아니고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죽는소리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고, 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고 관점을 돌렸습니다. 새벽 기도를 하고 회사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차츰 차분해지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돈이 떨어졌다고 요동치던 마음을 가만히 돌이켜보게 됐습니다.
‘진짜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과제가 생겼습니다. 사업이 성공했다면 돈도 벌고 수행하면서 잘사는 인생으로 알았겠지만, 실패한 순간 백척간두에 선 듯 불안하다면 이것은 수행자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무가 쌓여 길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풀리지 않는 사업을 위기라 여기지 않고 지금 일어난 일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해결해나갔습니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직원들이 얼마간 월급을 받지 않거나 생활비 정도만 받으며 도움을 준 덕분에 최소한의 경비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며 힘든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어떤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위기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굳이 괴로워하며 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퇴근 후에는 법당에 출근해(?) 정토회 저녁부 활동을 이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토회 활동을 병행하지 않았다면,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담담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파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아침 기도하던 공덕으로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기에 서울역이 아니라(웃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금강경은 처음 정토회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고, 법사 교육을 받을 때에는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지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수보리 존자가 “어떻게 마음을 조복 받고 어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다 구제하는 마음을 내고,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말이 안 된다 싶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고, 무슨 능력이 있어 일체중생을 구하겠는가, 그것은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런데 법사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가 정토회를 통해 지향하고 실천하는 일들이 바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불교대학과 행복학교를 찾는 사람들 모두 우리와 같은 일체중생입니다. 그들이 찾아왔을 때 이 좋은 법을 놓치고 한 사람이라도 떨어져 나갈까 봐 정성을 다해서 안내하는 분들이 정토회 사람들입니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해외에서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때 아무 대가 없이 보시하고, 봉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경 그대로 사는 길이고, ‘모자이크 붓다’라는 생각이 탁 들었습니다.
곧 법사가 된다는데 화내고 성질대로 하려는 꼬라지를 보면, 자격을 준다고 해도 못 한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새롭게 깨우치며 나를 자꾸 살피니 강한 자각이 들면서 어느새 스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과연 법사가 될 수 있는지 자격을 물었을 때 스님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뭘 많이 알고, 잘하고 그런 게 아니다, ‘무슨 법사가 저래?’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하고 하심(下心)할 수 있으면 법사가 될 자격이 있고, 그걸 못 하고 똑같이 성질내고 싸우면 법사 자격이 없다.” 기준은 그것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분별심이 생길 때만 업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거의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서도 일어나는 업식의 놀음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숙이는 마음을 가진 법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매년 ‘명상수련’에 빠지지 않고 참여합니다. 처음에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시작하지만, 곧 다리가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예전에는 문경수련원에 모여서 명상을 했기 때문에 법륜 스님이 앞에 반가부좌로 딱 앉아 계셨습니다. 다리가 저려도 펴지 못하고 꾹 참으면서 가까스로 견뎠습니다. 그렇게 3일쯤 지나면 통증이 잦아들지만 이번에는 그간 쌓인 피로로 잠이 쏟아져서 졸다가 수련이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다음 해 명상수련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송곳으로 찍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자 갑작스레 분심이 올라왔습니다. ‘매년 여기 와서 내가 뭐 하는 거지?’ 포행을 마치고, 결정심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일부는 실제로 일어나는 통각에 의한 통증이고 나머지는 마음이 일으키는 것이라는데, 실제 다리가 아파오는 것을 어떻게 마음이 일으킨다고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집중했습니다.
일정 시간이 되자 같은 자리에 자극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좀전에 다리가 아팠던 경험으로 통증이 올 것이라는 예측과 통증을 겪고 난 후의 두려움으로 자극에 미리 사로잡히기 시작하는 지점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먼저 밀고 들어오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단지 자극을 지켜보며 통각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통증을 분리해서 작동하는 원리를 보는 단계를 느낀 것입니다. 통증이 다가오는 중에 두려움이 발화하고 그동안 억지로 땀 흘리면서 참았던 기억들이 나를 삼키면서 통증만 느끼게 되자 그 지점에서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 강화되어 중독적으로 순환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의 두려움을 먼저 본다면, 자극이 느낌에서 통증으로 전환되는 그 순간에 아프지 않고 그저 통증으로 봐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리를 확연히 안 후로 명상할 때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습니다. 전에는 알아차릴 새도 없이 자극과 함께 밀려온 두려움에 빠져버렸다면, 이제 두려움이 올라오는 순간을 잡아내어 그대로 두려움을 내려놓습니다.
명상수련 중 체득한 것이 저에게는 중도의 경험이었습니다. 아픈 것을 그냥 참으면 고행주의이고 아프니까 다리를 펴면 쾌락주의인데, 자극을 느끼는 순간 고행주의도, 쾌락주의도 아닌 방법으로 통증에서 벗어나보니 ‘중도가 이런 것이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우울감과 불안감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도 휩쓸리기 전에 알아차리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물론 알아차림이 쉽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명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실한 것은, 한번 분명하게 경험하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도 특별한 일이 아니고 모두 같은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어떤 실체도 없이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끝까지 경험해야 합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막연합니다.
자신의 깊은 업식에 부딪히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습관대로 하게 됩니다. ‘어릴 때 이런 상처가 있었는데’, ‘지금 내 상황이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나?’ 하며 업식에 빠져드는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뚫고 나가서 극복해보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한 겹 걷어내고 또 걷어내면 파란 하늘을 보게 됩니다. 저기 파란 하늘이 항상 있는데 내가 먹구름을 걷어내지 못해서 못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알음알이로 알고는 있지만 확연히 알지는 못합니다. 의심하며 살아온 업식 때문에 ‘진짜 될까?’, ‘말이 그렇지, 우리가 부처님도 아닌데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늘 의심하고 경계하느라 업식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늘 거기에 매여서 실제로 해볼 생각조차 못 합니다.
‘매일 기도하니 좋아졌다’, ‘그냥 바뀌었다’, ‘잘 모르겠지만 좋아졌고, 여기까지는 되는데 다른 것은 아직 안 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과정을 따라가고 있는 지금,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신의 변화 과정을 관찰하면서 확연하게 바라보는 계기를 가지기를 당부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의 불안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생각을 멈추고,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서울 가는 버스에서부터 저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소임을 하면서 늘 갸우뚱하는 제 마음에 대한 답을 법사님과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을까? 금강경 법문을 시작으로 정토회와 인연 맺은 보향 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새 답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하심’을 말씀하실 때 소임하며 가졌던 자격지심을 놓았고, ‘경계에 걸려 넘어지는 이유’를 들었을 때 욕구를 따라 안이함을 쫓고 싶은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은 법사님의 새벽기도 이야기를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습니다. 눈만 뜨면 할 수 있는 수행정진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새벽이 기다려졌기 때문입니다. 유쾌하면서도 단단한 법사님을 통해 흔들림 없이 가볍게 나아가는 길을 배웠습니다. 소중한 가르침,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정현숙 소감-
글_전혜연(서울제주지부), 정현숙(대전충청지부), 정수지(강원경기동부지부)
편집_이현숙(서울제주지부), 허인영(강원경기동부지부)
전체댓글 22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