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백일출가 홍보영상에서 ‘돈 내고 막노동하는 곳’이라는 지도 법사님의 설명을 듣고, 왜 사서 고생하러 가는지 의문을 품었던 최단비 님이 백일출가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 배 중 너무 힘들어 진통제 4알을 먹으며 겨우 참던 통증이, 일순간 어떻게 되었는지도 따라가다 보면 신기할 겁니다. 최단비 님은 우여곡절 끝에 백일출가를 마치고, 재입재까지 하였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시지요.
만 서른이 되던 해, 내 삶에서 반복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더 힘들어지겠다는 자각이 왔습니다. 크고 작은 괴로움의 연속이었지만, 그 덕분에 불법을 만나서 정토불교대학(이하 불대)에도 다니게 되었습니다. 2019년 가을, 서울 안국역에 있던 종로 법당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또래의 청년들과 함께 불대 수업을 들었습니다. 도반들과 마음 나누기를 하고, 간식도 나눠 먹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코로나19 이전에 불법을 만난 덕분에 서로 얼굴 보며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불대 수업이 끝나면 종종 화면에 ‘백일출가’ 홍보영상이 나오곤 했습니다. 왠지 많이 힘들고 큰 각오가 필요한 일 같아서, 내가 갈 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 속에서 지도 법사님은 백일출가를 일컬어 ‘돈 내고 막노동하는 곳’이라고 표현하셨고, 그걸 보며 나는 ‘근데 왜 사람들이 사서 고생하러 갈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뭐 하는 곳이길래 고생을 사서 하러 가는지 궁금해지는 한편, 겁부터 집어먹고 도전하기 싫어하는 내 마음도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쩌면 내 인생에서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일지 모른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20대를 거쳐 30대가 되기까지, 인간관계로 인해 크고 작은 맘고생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인생의 여러 산봉우리를 하나, 둘 차례로 잘 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는 ‘앞으로 더 큰 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과연 그 산들을 넘어갈 힘이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자연스레 백일출가를 결심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한 지도 5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천일결사 기도를 꾸준히 하지 않은 터라 오랜만에 정토회 홈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백일출가 원서를 준비하고, 자기소개서를 쓰는 내내 갈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맞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두렵고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지금 가는 게 맞다’는 대답이 가슴속에서 확고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했다고 해서 두렵고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일출가의 입문 과정인 만 배에 대비해 하루에 300배에서 500배씩 절하던 연습 시간이 그나마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난생처음 해보는 만 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껏 살면서 무릎이 아팠던 적이 없는데, 1,000배를 넘기면서 무릎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무릎이 아프니까 동작이 느려지고, 계속 손을 짚어야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무릎보호대는 물론이고 허리 복대와 손목 보호대까지 착용했습니다. 마지막 날은 극도의 통증으로 진통제 4알을 먹고서야 힘들게 만 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체투지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그때 정말 신기한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5,000배를 넘어가던 이틀째 날, 갑자기 “너무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거라” 하시던 아빠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때마침 무릎은 나갈 것 같고, 허리도 너무 아프고, 손목은 너덜너덜해져서 포기하고 싶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항상 부모님의 그늘 밑에서 쉬어갔습니다. 절을 하면서, 그동안 내 삶의 무게를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남 탓하며 괴롭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만 배를 저 대신 부모님이 해줄 수 없는 것처럼, 내 삶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일입니다.
절을 하면서 먼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제 인생 하나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부모님은 어떻게 자식 셋을 낳아 키우셨을까 싶은 마음에 티셔츠가 다 젖도록 울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서 해우소를 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무릎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마치 만 배 하기 전의 몸 상태로 되돌아간 듯, 해우소 가는 계단을 뛰듯이 걸어 내려갔습니다. 약을 먹은 것도 주사를 맞은 것도 아니고, 무릎에 무슨 기름칠을 한 것도 아닌데(!), 좀 전까지 아파 죽을 듯하던 통증이 사라져 버린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실컷 우는 동안 통증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 건지 연유를 통 알 수 없었지만, 울고 난 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비록 만 배를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내가 먼저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묵묵히 남은 만 배를 해나갔습니다.
꼴찌로 만 배를 통과하고, 본격적인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시작부터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인연이 된 백일출가 47기 도반들과의 관계가 초반부터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나누기 시간이 마치 서로를 공격하는 시간 같아서, 나누기 때마다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집착도 강해지고, 도반과 함께하는 일 수행은 버거웠습니다. 100일 동안 몸도 마음도 참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감정들을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연습을 하면서, 도반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편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상대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느끼면,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빨리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애써 오해를 풀려고 하는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고, 관계를 더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상대를 그저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해서 어쩌면 오해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관점에서 상대방을 보니, 그들도 저를 그저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구나 하고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 눈에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보이기를 바라며, 전전긍긍 살아왔다는 것을 백일출가 후 도반들과의 관계 속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백일출가 동안 힘든 부분이 많았지만, 힘든 만큼 배우고 얻은 것이 더 많습니다. 평소 인간관계가 쉽지 않아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일이 늘 불편하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문경에서 지내는 동안,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것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됐는데, 처음엔 도반들이 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100일 동안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싫은 모습, 좋은 모습 다 드러내놓고 지내다 보니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되면서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역시 사람을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도반이 수행의 전부다’라는 말도 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여러 경계에 부딪혀봐야 장단점이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온전히 잘 쓰일 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생긴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결코 만만찮은 100일이었고,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하고 집으로 가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정말 시의적절하게 백일출가를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경에서 여러 사람과 생활하면서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내 모습이 맞나?’ 싶은 순간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취를 시작해서, 10년 넘게 부모님과 떨어져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외롭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과의 관계에서 괴로웠기 때문에, 혼자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백일출가 동안 제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의외로 좋아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늘 혼자서 밥 먹고, 혼자 자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들만 골라서 했는데, 놀랍게도 문경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 바로 큰 방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613 만인 대법회를 준비하는 동안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과 지리산 수련원에서 함께 지냈는데,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참 든든했습니다. 혼자 지낼 때, 가끔 자다가 깨면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맞나?’ 싶은 의심이 들어 몸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제 내면은 그동안 참 많이 외로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홀로 책상에서 먹는 밥보다 함께 먹는 밥이 훨씬 맛있고 즐겁게 느껴졌으니 말입니다.
한번은 점심 공양 준비하는 분들이 깜빡하고 공양 준비를 놓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문경 수련원 식구들이 공양간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어 자리를 잡더니, 국이며 전이며 무침에 볶음까지 분주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무래도 공동체 생활이다 보니 정해진 공양 시간을 놓치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라, 법사님까지 달려오셔서 공양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나올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고 경이로운 풍경이었습니다. 혼자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백일출가 동안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마음을 모으고, 뜻을 세우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지금껏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주기를 바랐는데, 더 이상 그런 삶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뜻을 세우면,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귀한 가르침을 많이 얻었습니다.
47기 회향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여동생과의 통화에서, 그동안 나 못지않게 가족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엄마에게 큰 빚이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처음엔 동생이 저를 놀라게 하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상황 파악하고, 엄마의 사정을 듣고 보니 마음 추스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일찍 수습하지 못한 엄마가 참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는데,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에게 그렇게 큰 빚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지난 15년간 가족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 심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뒤늦게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 순간, ‘만약에 내가 백일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분명 감정적으로 더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일 동안 마음을 돌아보며 공부한 시간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당장 가족을 위한 해결 방법은 없지만, 나 하나라도 중심을 잡고 바로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의 빚을 두고, 가족과 함께 원망하고 후회하는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계속 허우적대는 것보다, 나 하나라도 수행적 관점을 단단히 잡아 긍정의 씨앗을 가족 안에 심고 싶었습니다.
지난 100일간의 짐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100일을 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재입재를 아빠는 많이 아쉬워하셨고, 엄마는 기꺼이 지지해 주셨습니다. 엄마는 “지금껏 살면서 네 목소리가 이렇게 밝은 줄 몰랐다”고 하시며, 집으로 돌아오던 날 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제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고 합니다.
법사님은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잘 다잡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가족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를 위한 선택이 곧 가족을 위한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이 생겨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는 것이, 내가 처한 현실을 풀어가는 첫 단추를 잘 끼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고, 오직 오늘만 있다.’ 하시던 법사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문경에서 재입재 생활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글_최단비(47기 백일출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전체댓글 13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