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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경기동부지부 향정 법사님 인터뷰는 희망리포터 소임을 맡은 후 처음으로 오프라인에서 대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매달 온라인 회의에서만 만나던 모둠원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집단 인터뷰이기도 해서 참 의미 있고 따뜻한 대화의 장이었습니다. 거의 매 문장 마무리가 ‘감사하지요.’ ‘너무 고맙지요.’ ‘어떡해요, 해야죠. 그냥 했어요.’였던 법사님의 인터뷰를 지켜보며, 참 걸림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다른 걸림 없이, 그냥, 30여 년 하다 보니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향정 법사님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들려드립니다.
6대 독자인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언니와 나를 두고 넋두리하듯 말했습니다. “저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첫째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엎어놨다고 했습니다. 안 죽고 숨을 쉬니 키웠던 겁니다.
서울에서 작은 스텐 공장을 했던 아버지는 낮에는 인상 좋은 털보 사장님으로 딸들에게 애정 표현도 잘했지만, 술만 마시면 아들 타령을 하며 어머니와 다투었습니다. 언니와 나는 건넌방에서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습니다. ‘내가 아들이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대를 이어야겠다는 부모님의 간절한 정성으로 다행히 저와 열다섯 살 터울인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부담은 없어졌으나 쓸모없다는 그 말은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라는 말은 내 인생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풀리지 않던 이 숙제는 깨달음의 장1에서 탁 정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힘들게 합니까?” 스님의 한 마디가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의 삶을 살았던 것뿐인데 내가 그걸 문제로 삼았구나.’ 아버지가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에 갇혀 내가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는 걸 알게 되자 꽉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원망 대신 고마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순한 표정과 다정하고 자상한 말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동갑인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결혼 당시 저는 2년제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남편은 4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결혼하자 남편은 입대를 했는데, 바로 아이가 생겨서 매일 남편에게 편지를 쓰며 홀로 태교를 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쓰다 보니 나중에는 할 말이 떨어져 영어책을 한 페이지씩 써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5대 독자입니다. 저는 6대 독자인 아버지에게 차별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첫아이는 아들이기를 바랐습니다. 낳고 보니 딸이었습니다. 밑마음에 약간 불안한 마음, 딸을 낳으면 힘들어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남편은 달랐습니다. 5대 독자이니 아들을 바랄 줄 알았는데, 딸의 탄생을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저는 둘째로 아들을 낳고 나서야 '이제 할 일 다 했다' 싶어 안심했습니다. 둘째가 딸이었으면 아마 셋째를 낳으려고 했을 것 같았습니다. 둘째가 아들인 덕으로 우리 가족은 행복한 가족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싶어 안심했고,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은 평범하고 소소한 재미를 주었습니다. 딸아이 예쁜 옷 입히고, 눈꼬리가 쭉 올라갈 정도로 머리 묶어주고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보내고, 수영 보내고... 남들 하는 것 다 하면서, 그렇게 해야 좋은 건 줄 알고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서 공부해 수필로 등단했습니다. 그때부터 글쓰기 모임을 시작으로, 기독교단체의 전화상담 봉사도 하면서 조금씩 사회활동을 넓혀갔습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상담원 교육을 받아 학교 상담과 집단 상담을 했고, 도서관과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교육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쏟는 신경을 줄이고 바깥 활동을 늘렸습니다.
그즈음 <불교방송>에 다니고 있던 언니가 그곳에서 <정토>지를 접하고, 정토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언니, 남편과 함께 홍제동 정토법당을 찾아갔습니다. 마치 점 보는 집 비슷하게 생긴 외관에 컴컴한 것이, 보통의 절하고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아늑하고 편안했습니다. 정토회는 수행도 하고 일도 하는 곳이라 흔쾌히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났습니다.
1995년 언니, 남편과 함께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공부하고 살림하고 기존에 해오던 일까지 변함없이 병행하면서 정신없이 바쁜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교대학 졸업 후에도 스님 법문이 듣고 싶어 서초법당에서 하는 '반야심경2'과 홍제동법당에서 하는 ‘금강경'3 직강에 일정을 맞춰놓고 남는 시간을 학교 수업시간표 짜듯 사회활동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토회에서 봉사활동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법문만 따먹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즈음 스님께서 청소년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남편이 저에게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불교대학을 담당했던 법사님께 “일이 너무 많아요.” 하고 상의드리자 “그냥 들어와라.”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토회 안에 내가 하려는 일이 모두 있었습니다. 부처님 법문과 스님 법문이 넘쳐나는데 굳이 나까지 글 쓸 필요가 없었고, 그런 일은 내가 안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할 수 있으니까 더 안 해도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1999년,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JTS 청소년 사업부 실무자 소임을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정토회 실무자는 공동체에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저는 실무자 4기 교육을 받으면서 출퇴근하는 실무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정진 마치고 밥해놓고 정토회에 출근하면 퇴근 시간도 까먹을 정도로 일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이때부터는 많은 시간을 정토회 일정에 맞추어 지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여름·겨울 안거, 여름·겨울 명상수련, 역사기행, 인도성지순례 등에 우선 참여하느라 휴가철 가족여행은 남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저는 일 년 일정을 잡을 때 5대 독자인 남편을 우선 생각하여 시댁 제사 일정을 가장 먼저 잡았습니다. 친정 제사는 남동생이 지내고 있기에 언니는 참석해도 나는 수련 중일 때면 부처님 전에 간단히 공양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남편은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청년부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1999년에는 취미인 사진 촬영으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백일법문 때 50일만 해야지 했는데, 100일 내내 사진봉사를 했습니다. '카프리'라는 이름으로 '정토회 사진 찍는 사람들 모임'도 만들어서 활동을 했고, 길벗 등에서도 봉사를 했습니다. 북한과 제3세계 아이들을 돕기 위해 기획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부드라마인 노희경 님의 작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사진을 제공하여 JTS 감사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저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고 제 빈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아내와 엄마 자리가 비어 있으니 불편하고 힘든 것도 많았을 텐데, 정토회를 그만두라거나 일찍 다니라고 문제 삼지 않은 남편이 고마웠습니다.
딸은 동생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고, 집안 행사에 저 대신 가주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남들 다 다니는 학원도 안 다니고 스스로 일상을 책임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는 스님께 상담했습니다. 아이들이 청소년기를 잘 지내준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다행히 정토회 활동가 자녀들과 우리 아이들이 청소년 수련, 거리모금 캠페인 등에 참여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딸은 중학생 때 좋은벗들 중국역사기행도 혼자 다녀왔고, 대학생 때는 인도 워크캠프에 다녀오는 등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든든했습니다.
스님께서 청소년 사업이 필요하다 하셔서 JTS에 계시는 법사님과 청소년사업부를 만들었지만 자금도, 사업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이었기 때문에 마음껏 해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청소년 수련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JTS에 이 사업에 필요한 사업비가 없었기 때문에 행정자치부에 프로젝트 제출해서 사업비를 마련했고, 학교나 부모들이 안심하고 보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청소년기 아이들과 함께 했습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면서, 참여한 아이들도 좋아라 했고 나 역시 위축되어 있던 청소년 시절의 나로 돌아가 치유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직자를 위한 프로그램, 실직자쉼터 알코올예방 프로그램, 자아성장 프로그램은 외부전문가를 초대하여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사단법인 좋은벗들에서 진행한 ‘청소년 평화캠프 2000’에 인헌중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통일체험 역사기행을 6박 7일 다녀왔습니다.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인헌중학교 선생님 다섯 분과 학생 47명이 중국으로 갔습니다. 현지에서는 좋은벗들 활동가들이 안내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고구려 유적지, 항일유적지, 발해유적지를 답사하고 백두산 천지에도 올랐습니다. 당시 할아버지 연배셨던 방학봉 선생님이 현장에서 설명도 해주셨고 손주 애들한테 얘기하듯이 매일 밤 역사 이야기를 해주셔서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녀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작은 앨범에 사진과 설명글을 붙여 일행 모두에게 전달했던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청소년사업부에서 3년 소임을 마친 뒤 JTS 자원개발부를 만들었습니다. JTS는 구호단체이니 구호물품이 많으면 좋겠다 싶어서 대기업에 물품 기증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더니, 국내에 판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엄청나게 많은 물품을 기증받았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기업들이 많았습니다. 쏟아지는 물건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지만, 그것을 꼭 필요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에 보내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일머리도 생기고 여럿이 함께하는 과정에서 감동도 받았습니다.
‘빈 그릇 운동 백만인 서약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활동가들이 학교에서 강의도 해보고, 거리에서, 학교에서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는 활동을 했습니다. 북한돕기는 금요일 한끼 굶기도 해보고, 지하철, 거리, 해변가 등에서 ‘북한 주민을 살리는 대북 인도적 지원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도 해보았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어지면 망설임 없이 ‘그냥’ 했습니다. 몸은 힘이 들어도 새롭게 일을 만들어서 도반과 함께하는 재미와 보람, 감동이 있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2005년 정토회공동체가 모두 문경수련원으로 이동할 때 저는 서울에 남아서 서울정토회 복지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때 수자타 나눔장터를 만들어서 재미나게 했습니다. 혼자 나르기도 하고 힘이 부치면 둘이서 셋이서 물건을 들고 나르며 도반들과 함께 서초동 길거리에서 나눔행사를 했습니다. 도심에서 낯선 풍경이었지만 문화행사도 곁들이면서 흥겹게 했습니다. 장터를 할수록 물건이 참으로 많이 모였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1년 뒤 공동체가 다시 서울정토회관으로 왔을 때 JTS 북한사업부 소임을 맡았습니다. 처음에 라선-선봉지역 어린이 무료 급식을 지원하던 것을 점차 확장하여 9개 시도에 있는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특수학교 등 53곳에 식량과 생필품을 지원했습니다. JTS 후원품에는 모두 로고를 새겨 넣었고, JTS 대표님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고 아이들을 만나서 사진으로 담아왔습니다. 물론 일상적 지원외에 긴급구호 때도 지원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마지막에 진행하는 선적식 행사에는 활동가와 후원회원들이 함께하며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냥 들어왔고 그냥 했다'는 법사님의 이야기마다 새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던 법사님의 이야기를 2부에서 이어갑니다.
글_ 김옥자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박선희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지원_김혜경(서울제주지부 노원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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