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문경공동체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문경수련원의 가을 축제 김장! 올해는 특히 배추 농사가 아주 잘 되어 유기농 배추로는 나오기 어렵다는 속이 꽉 찬 배추로 행사가 풍성했습니다. 코로나19로 많은 분과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일과 수행의 통일을 엿볼 수 있는 과정을 전할 수 있어 좋습니다. 수련원에서 대중 공양주 소임과 2020년 김장 실무총괄을 맡은 유영근 님의 이야기 입니다.

어느덧 김장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문경에서 맞는 세 번째 가을로 '밖에 있을 때 김장은 해 본적이 없었는데, 일생에 한 번 해보기도 힘든 대규모의 김장을 세 번째 하게 되었구나. 인생이란 게 알 수 없어서 참 재밌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영근 님
▲ 유영근 님

“유영근 님이 이번 김장 실무총괄을 맡아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조장 소임을 맡아서 부분적으로 참여해보긴 했어도, 전체를 살펴본 적은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자, 한편으론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실무총괄은 수련원 내에서 꼭지장을 정하고, 업무를 나누어 각 꼭지장들이 진행할 수 있도록 살피는 역할입니다. 김장 전반에 대한 큰 이해와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 모두가 필요합니다. 대략적인 큰 흐름은 자료를 훑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세부적인 부분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거라 부담이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과 상관없이 김장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습니다. 총괄 회의를 통해 김장 일정과 꼭지장을 정하고, 배추와 무 수확 일정을 정했습니다. 김장 시작하기 한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는데, 크게 시설과 물품 준비, 농사, 양념작업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저는 시설과 물품 준비 부분을 주로 맡아서 꼭지장들과 소통하였습니다. 두 번의 김장 경험을 통해 눈으로 본 것들이 있어서 배추절임 풀의 대략적인 위치라던지, 각 물품의 용도 등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배출절임 풀에서 배추쌓기
▲ 배출절임 풀에서 배추쌓기

그러나 역시 문제는 세부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배추절임 풀의 위치를 기존의 위치보다 1m 정도 짧게 잡아서, 이후 설치해야 할 3단 씻기 틀의 위치까지 틀어져 버렸습니다. 3단 씻기에 물을 사용하니 바닥으로 물이 흘러 넘치지 않게 하려면 틀을 위치에 맞게 설치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두 번째로 신경 쓰였던 건 행복학교였습니다. 행복학교 진행자와 스텝인 분들이 행복학교 기간과 김장을 준비해야 하는 기간이 겹치면서 준비 시간이 부족해졌습니다. 행복학교를 통해 온라인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과 함께 공부해서 좋았지만, 일을 진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생각하거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들이 생기자, 처음 몇 번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을 하든 처음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그리고 내가 없어도 김장은 될 텐데, 이렇게 여기에 감정 소비를 하며 에너지를 낭비해야 할까?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자.’

이렇게 생각을 달리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배추절임 풀은 너무 무거워서 위치가 잘못된 것을 지금 다시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냥 인정하고 다음 일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완벽함을 추구하던 저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법을 조금씩 배웠습니다.

배추절임 풀에서 배추절이기 작업중인 유영근 님(제일 왼쪽 마스크 착용)
▲ 배추절임 풀에서 배추절이기 작업중인 유영근 님(제일 왼쪽 마스크 착용)

그동안 1박 2일로 진행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 김장은 2박 3일로 진행했습니다. 예전에는 외부에서 많은 바라지가 와서 마치 함께 축제를 즐기듯 했지만, 이번에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외부 바라지를 조심스레 받아야 했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김장을 해보니, 정말 2박 3일이 걸렸습니다.

배추자르기
▲ 배추자르기

첫째 날은 배추를 잘라서 배추절임 풀에 넣고 소금물에 절이는 작업까지가 목표였습니다. 문경수련원은 항상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곳입니다. 이번에 함께 한 도반 대부분이 김장을 처음 해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꼭지장들도 처음 해보는 경우가 많아서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배추를 자르는 속도가 빨랐는지 자른 배추가 계속 쌓였습니다. 그래도 큰 조바심은 없었습니다. 두 번의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크게 늦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시간에 잘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소금물 밑에 잠긴 배추를 위로 올리고, 위에 있던 배추를 소금물 속으로 넣어 주는 뒤집기 작업을 백일출가 행자들과 함께했습니다. 늦은 시간에 불평 없이 따로 작업을 해 준 행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배추 뒤집기
▲ 배추 뒤집기

둘째 날은 절인 배추를 건져서 양념을 묻힌 후, 저온 저장고에 넣는 작업을 했습니다. 오전까지 절인 배추를 건지는 것은 잘 마무리되었는데, 오후에 양념을 묻혀서 포장하는 작업이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속도가 안 나는 듯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일기 예보에는 없던 비까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마한 불씨에 기름을 부어 큰불이 되듯, 제 마음도 크게 요동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비를 맞으면서 작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니, 김장하는 모든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정말 내 식대로 상황을 보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애써 준 덕분에 반 이상은 포장하여 저온 저장고에 보관 할 수 있었습니다. 비도 오고, 오늘 다 못 끝낼 것 같으니 예정보다 조금 일찍 끝내고 쉬자는 의견이 나와서 마침 저도 피곤함을 느끼던 터라 일찍 마무리하고 쉬었습니다.

묘당법사님께 절인 배추 뒤집기 작업 안내받고 있는 유영근 님(제일 왼쪽)
▲ 묘당법사님께 절인 배추 뒤집기 작업 안내받고 있는 유영근 님(제일 왼쪽)

셋째 날은 어제 끝내지 못한 작업을 마무리하는 날이었습니다. 배추는 무사히 양념을 뒤집어쓰고 저온 저장고에 들어갔지만, 뒷정리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장에 사용한 물품들을 씻어서 정리해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물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하고 초조해졌습니다. 수도 시설 점검을 하는 동안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도 연결에 대해 잘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과 다들 바빠서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수도는 복구되어 물이 나오고, 뒷정리까지 잘 마쳤습니다.

김장 실무총괄을 하니 어떤 한 가지 일을 하기보다 돌아다니며 전체를 살피는 일을 더 많이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니, 문득 '공양이나 참 준비부터, 물품 관리, 배추를 자르고 절여서 저온저장고에 넣는 작업까지 모두 총괄인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들이 도와주는 거구나. 감사한 일인데 오히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비분별을 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의 제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요동치는 제 마음을 보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짜증 내고 화내는 지금의 내 모습과,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부모에게 떼쓰는 어린아이는 뭐가 다를까?’라고 스스로 물어봤습니다.

그래도 수련원에서 산 공덕으로 예전보다 덜 화내고 덜 짜증 냈던 제 모습에서 저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저에게 김장하느라 수고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김장 첫째 날 봉사 온 바라지 및 수련원 상주 대중들과 함께한 유영근 님(제일 오른쪽 위)
▲ 김장 첫째 날 봉사 온 바라지 및 수련원 상주 대중들과 함께한 유영근 님(제일 오른쪽 위)


수련원에서 살면 이런저런 소임을 맡게 되며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책임을 지고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을 하면, 평소와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유영근 님의 말이 공감됩니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제가 할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다음 김장 때는 또 누가 실무총괄 소임을 맡아 깨달음을 얻을지 기대가 됩니다.


글_유영근(문경공동체)
정리_이미화 희망리포터(문경공동체)
편집_장순복(남양주정토회 남양주법당)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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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품

수고많으셨습니다.
김장김지 맛있게 먹으며 노고에 감사드릴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하나하나 수행의 관점을 잃지않고
하셨네요
많이 배웠습니다.

2020-12-17 05:54:00

박신염

모든일상이 수행임을 오늘새벽에 수행만이 수행이 아님을 깨치게하는 유영근님의 수행일지 잘읽었습니다 부지런히 일상에서도 알아차림에 깨어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2-15 06:07:38

보승화


일과 수행의 통일을 실천하고 계시네요. 일상의 일거리들이 곧 수행임을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12-14 23: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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