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평택법당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을 만큼’

세상에서 본인이 제일 불행할 거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박제연님. 지금은 다 지나간 일, 남 이야기하듯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된 이야기! 수행·보시·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박제연님의 여정을 함께 걸어보겠습니다.

인터뷰 하는 제연님
▲ 인터뷰 하는 제연님

“계집애가 팔자가 얼마나 세려고…”

충청도의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 시절 언니와 작두를 가지고 놀다 검지 한 마디를 잘렸습니다. 십 리를 걸어야 나오는 보건소에서 마취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꿰매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계집애가 얼마나 팔자가 세려고, 누구한테 시집가려고‥” 걱정하며 하신 아버지의 말씀. 당시에는 어려서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그 말씀은 마음 깊숙이 남았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누구를 만난다, 결혼을 한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성을 만나본 적도 없고, 어떤  기대도 없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아 “아저씨”라 부르던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잘 살 수 있다고 한 엄마 말을 듣고 자랐기에 별다른 사람 있겠나. 결혼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누구나 다 어렵게 사니까 그냥 살아질 줄 알았습니다. 힘들어도 일해 가면서  살면 될 줄 알았습니다.

술기운으로 살다 간 남편

남편은 오남매의 막내로 자라며 늘 형들한테 치이고 관심 받지 못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고, 돈이 없으면 외상으로라도 했습니다. 급한 성격이고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기운에 사람들과 싸움도 하고 가끔 경찰서에도 가고는 했습니다. 집보다 밖을 더 좋아했습니다.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술에 취해 집에서도 폭언과 애꿎은 가재도구들을 부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어디 가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 술기운으로 세상을 살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20년 8월 언니네 가족과(맨 왼쪽 제연님)
▲ 20년 8월 언니네 가족과(맨 왼쪽 제연님)

웃음을 잃어버린 나

남편과 결혼 3개월 만에 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에 바윗덩어리 하나가 짓누르고 있는 듯 했습니다. 월세 살며 8개월 된 딸을 키우던 때 옆방에 이사 온 새댁의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과 같은 집에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제 첫인상이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로 맞은 듯 했습니다. "아, 내가 내 인생에 지고 있었구나. 내 삶에 내가 져버렸구나.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예전의 잘 웃던 나로 돌아가자! 웃을 수 있는 마음이 되자!" 이날 이후 이렇게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점집을 찾아다니던 나

남편의 표현 방식과 폭언에 아들은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술기운으로 세상을 살며 가정을 등한시하던 남편도 힘들었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의 방황은  단번에 제 삶을 무너뜨렸습니다. 화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의지가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여기저기 점집들을 찾아다니며 “우리 아들 애 아빠를 닮았나요?”, “아들은 제 할 일 잘하며 잘 살아요?” 그 말 하나 듣기 위해 잘 본다는 곳을 수소문해 가며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마약이 이런 거겠구나"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이러다 내가 잘못되겠구나. 절에라도 가자" 마음을 돌려먹고 지인이 다닌다는 절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전 절이 처음이고 아는 게 없으니 절하는 것부터 가르쳐 주세요…….” 그 보살님은 친절하게 삼배와 주지스님 뵙는 것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왜 절에 오셨습니까?” 주지스님의 질문에 말보다는 눈물이 먼저 나왔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우울증 초기이다.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천수경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자도 틀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집중하고 집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게 되면서 불안했던 마음은 어느 틈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이왕 절에 발을 디뎠으니 언제든 내 입에서 관세음보살이 나오게 하자며 염불을 시작했습니다.

봉사 중 도반들과(왼쪽 첫 번째 박제연님)
▲ 봉사 중 도반들과(왼쪽 첫 번째 박제연님)

남편을 보내고 좌절 속에서도 나를 다독이며

그렇게 점집을 끊어내고 아들의 방황도 잠잠해져 갈 즈음 남편에게 사고가 났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도 이혼은 안 하겠다 다짐했는데 남편은 사고 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가 걱정되었고, 우리 아이들이 아빠 없는 아이로만 생각될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어떻게든 지금보다 잘 살아야 되지 않을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엄마라는 생각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어떻게든 우리 아이들만큼은 그런 시선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고 더 떳떳하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용도 당하게 되고 억울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데리고 괴로움에 몸부림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당연하다 이제 모두 접고 일이나 하자"며 마음을 다독이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방황을 마치고 예전의 예쁘고 사랑스런 아들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을 한때 미워하고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내게 인생을 가르쳐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생활도 일도 안정이 되니 "난 늙어서 일도 관두게 되면 뭘 하고 살지?"하며 다른 곳으로 관심을 두었습니다.

다니던 절을 그만두다

불교대학에 입학한 건 2016년입니다. 정토회를 알게 된 것은 2010년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쯤 됐을 때 어느 절의 법안식에 초대되어 오신 법륜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스님의 즉문즉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들으며 평택시문화회관에 오신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도 참석했습니다. 직장에서 일찍 퇴근하는 주는 매일 핸드폰으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제 마음에 진정한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토불교대학 입학까지는 6년이 걸렸습니다. 불교대학에 입학하고 수행맛보기를 시작하며 그동안 다니던 절도 그만두고 정토행자의 길을 가게 되습니다.

용추계곡에서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맨 왼쪽 제연님)
▲ 용추계곡에서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맨 왼쪽 제연님)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나였구나

법륜스님의 법문은 계속되는 질문을 통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고 관점을 바꾸어 스스로 답을 찾게 했습니다. 하지만 불교대학 졸업 후 첫 소임을 맡으면서  마음속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경전반 학생이면서 경전반 부담당 소임을 하고, 불교대학 임시 3개월 부담당도 맡았습니다. 또 불사 청소담당 소임도 맡았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소임을 하니 버겁고 힘들었습니다. 정말 다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러 소임을 하려니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은 마음이 들며, 스스로의 역할에 소극적인 도반들에게 분별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도반들이 모이는 수행법회를 등한시하게 되고 출석일수가 부족하여 정회원 자격마저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문제 삼는 내가 문제였구나 라는 걸 깨달으며 다시 법회에 나갔습니다. 법문을 되새기며 다른 사람을 문제삼는 내 습관을 돌아보면서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의 도움으로 경전반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앞 줄 가운데 제연님
▲ 앞 줄 가운데 제연님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을 만큼’,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가장 뚜렷한 변화를 겪은 것은 무슨 일이든 ‘그냥’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생각으로 일을 하니 생각만 하다 지치게 되어 ‘그냥’, 일단 ‘한다.’는 마음가짐이 생겼습니다. 잘 해내겠다며 욕심부터 부리지 않고 일단 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둡니다. 예전에는 자존심과 타인의 시선 때문에 못하겠다는 말, 그만두겠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일단 해보고, 그 때 가서 못하겠으면 못한다고 말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께서는 단정한 차림으로 정안수 떠놓으시고 새벽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자손을 위해 두 손 모으고 기도하시는 모습은 내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막연히 나도 나이가 들면 증조할머니처럼 노년을 보내야지 했는데 정토회에 들어와 수행 보시 봉사의 기쁨을 맛보며 막연했던 마음은 목표가 되었습니다.

가운데 제연님
▲ 가운데 제연님


‘너는 언제나 웃는 아이구나.’ 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잘 웃던 아이였지만, 어느 순간 웃음을 잃어버린 때가 있었다는 박제연님. 힘겨운 현실을 견디고 버티며 무언가에 의지하고, 내 밖에서 해결책과 안식을 찾고자 헤매던 시간을 지나오셨습니다. 지금의 박제연님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찾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짓고 계십니다.

글_김미향(희망리포터 평택법당)
편집_이정선(진주법당)

전체댓글 25

0/200

광륜 은경호

제게 염주 쥐고 돌리는 법을 가르쳐 주신 보살님.. 불교대학 동기이시기도 한 도반님...
이렇게 많은 사연이 있었는지 몰랐군요.
예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청정한 수행자로 다시 태어나심을 응원합니다.

2023-11-03 14:42:39

정근환

살아지는줄 알았읍니다... 본인은 열심히 살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읍니다. 그런데 막상 부딧쳐보니 경우가있고 자본이 있어야되고 경험도 있어야 된다는것을 느꼈읍니다. 여하튼 우여곡절끝에 오늘에 이르렀지만 삶이 녹녹치는 않았읍니다. 수행자의 본분을 놓치지 않아야되는데 박제연님은 꿋꿋하게 나가는것에 감사드림니다.저는 관점을 다양하게잡아

2020-12-14 00:48:37

이동민

제연님의 아픈 사연속에서
저를 뒤 돌아 보는 시간이였읍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찾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저도 보시를 통해 자연스럽게 늘 미소짓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020-12-13 12:41:29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평택법당’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