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2.3 인도 성지순례 6일째 바이샬리(Vaishali), 금요 즉문즉설
“이곳 최초의 여성출가 성지에서 출가를 요청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성지순례를 떠난 지 6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마지막 여정은 영축산에서 시작해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에서 끝이 납니다. 순례자들도 어제 영축산에 이어 오늘은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에 바이샬리에 땅을 보시하고 싶다는 인도 스님을 만나기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나왔습니다.

보시하고 싶다고 하신 건물과 땅을 둘러보았습니다. 인도 스님은 아이들을 가르쳐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인도 스님에게 보시를 하고 나왔습니다.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전기밥솥에 밥을 해서 먹은 후 7시 30분에 게스트하우스를 출발해 걸어서 바이샬리 원후봉밀터로 향했습니다. A팀은 새벽에 진신사리탑터를 참배한 후 원후봉밀터로 오고, B팀은 새벽 5시에 라즈길에서 출발했습니다.


40분을 걸어 8시 10분에 원후봉밀터에 도착하자 순례단의 일부가 벌써 도착해서 가사를 수하고 있었습니다. 버스 타이어에 구멍이 나 많이 늦어진 세 대의 차량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도착하자 9시가 되어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린 것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탑돌이를 시작하면서 1250명의 발우에 꿀과 비스킷을 담아 주었습니다. 부처님이 원숭이에게 꿀을 공양 받았듯이 순례단도 꿀을 공양 받고 탑돌이를 했습니다.



이곳에도 아쇼카왕이 석주를 세웠는데, 아쇼카 석주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곳입니다. 순례단은 가사를 입고 합장하고 석가모니불을 외며 탑을 돌았습니다. 1,250명이 흐르는 강물처럼 한 줄로 탑을 돌자 원후봉밀터는 순식간에 노란색 가사 물결로 출렁였습니다.






순례단은 제자리로 돌아와 공양게송을 하고 공양 받은 꿀과 비스킷을 맛보았습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발우에 묻은 꿀은 물로 깨끗이 닦아 먹었습니다.

순례단이 대부분 꿀 공양을 마치자 스님은 이곳 바이샬리에서 있었던 원숭이의 꿀공양과 여성의 출가를 비롯해 부처님의 여러 행적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바이샬리(Vaishali)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큰 나라들은 대부분 절대왕정이었는데, 이곳 바이샬리만 아테네(Athene) 같은 공화정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께서 이 나라를 가장 사랑하셨다’ 이렇게 경전에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또 ‘부처님도 분별을 하셨구나’ 이러겠죠. (모두 웃음) 상가(sangha)의 운영 원리는 바이샬리 민주정치 원리를 상당히 많이 벤치마킹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이샬리, 여성출가를 처음 허용한 도시

이곳과 관련된 무수한 일화가 있지만 바이샬리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여성 출가를 처음으로 허용한 곳이라는 점이에요. 이게 아마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었을 겁니다. 원래 인도에서는 수행자는 오직 브라만만 될 수 있었어요. 그러다가 출가수행을 하는 사문(沙門)이라는 신흥 세력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출가 사문의 경우 브라만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크샤트리아나 바이샤 계급은 되어야 했어요. 사제 계급은 아니어도 높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출가수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노예 계급, 천민계급 출신도 수행자로 받아들였어요.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사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우팔리(Upali)가 출가한 것을 들 수 있어요. 우팔리의 출가를 계기로 계급 평등을 얘기하며 이렇게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네 개의 큰 강이 있지만 바다에 가면 하나가 되듯이,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이 있지만 여래의 법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계급 차별을 타파하셨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남성에 한해서만 그 의미가 받아들여졌어요. 여성은 애초부터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기 혼자만의 이름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출가를 하면 ‘누구의 소유’라는 게 없어지고 자기 혼자만의 이름을 갖게 되잖아요. 또, 출가수행은 나무 밑에서 잠자고, 걸식하고, 옷도 다 벌거벗다시피 하다 보니 여성의 경우에는 성폭행을 당할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여자가 혼자 있으면 주인이 없다고 보았어요. 이처럼 여성이 출가수행을 하기에는 사회 환경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출가 수행한다는 건 아무도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Mahaprajapati, Mahapajapati)이 혼자가 되었어요.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출가했고, 하나 있던 손자 라훌라(Rahula)도 출가했잖아요. 이분은 부처님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양모였는데, 양모가 되고 나서 낳은 난다(Nanda)라는 아들도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어요. 그러니 완전히 혼자된 셈이죠. 당시 인도 사회의 기준으로 ‘주인 없는 사람’이 된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야쇼다라(Yasodhara) 공주도 같은 처지였어요. 남편은 출가했고,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아들도 출가해 버렸잖아요. 나쁘게 말하면 ‘주인 없는 사람’이 됐고, 좋게 말하면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어요.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용납이 안 됐어요. 이게 용납되려면 출가가 허용되어야 했어요. 그래야 여자가 혼자서 자기 이름을 갖고 살 수 있었습니다.

마하파지파티 부인은 정반왕의 장례를 치른 뒤에 부처님께 여성의 출가를 허용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세 번 청했는데 부처님이 세 번 다 거절하셨어요. 얼마 있다가 또 찾아가서 청했는데 부처님이 또 거절하셨어요. 부처님은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상대가 세 번 청하면 세 번째는 주로 수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세 번 거절하신 일을 대중이 더 이상 청하는 경우도 없었어요. 여성의 출가는 부처님이나 마하파지파티 부인에게나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 청하면 들어주거나, 반대로 세 번 다 거절하면 포기를 하는 게 상가의 기본 원칙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세 번 청했는데 부처님께서 세 번 다 거절하셨고, 마하파자파티 부인도 세 번을 거절당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청했어요. 그게 부처님이 카필라성에 계셨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이 또 거절을 하셨어요.

그런 뒤에 부처님께서 이곳 바이샬리로 오셨어요. 그러자 마하파지파티 부인과 야소다라 공주가 출가를 원하는 여성들과 함께 바이샬리로 따라왔습니다. 당시 석가족 중에 이 두 사람과 같은 처지인 여성이 500명이나 됐대요. 라즈기르(Rajgir, 왕사성)에서 부처님의 반대 세력들이 불렀던 노래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는구나. 내일은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갈꼬?’ (웃음)

이런 비판의 소리가 있을 정도로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출가하면서 아들이나 남편 없이 홀로 남은 여성들이 많았던 거예요.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시니까 아마 그런 용기도 있었겠지만, 이 분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그냥 머리를 잘라버렸어요. 여성이 머리를 자른다는 건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굉장한 일입니다. 그리고 늘 시종을 두고 살던 사람이 그냥 입은 옷차림 그대로 바이샬리까지 걸어왔어요. 출가를 허용을 하든 안 하든 스스로 출가해 버린 겁니다. 이것도 굉장한 사건이죠. 그렇게 이곳까지 와서, 출가를 허용해 달라고 부처님께 공식적으로 또 요청을 했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또 거절하셨어요. 이렇게 세 번 청했는데 세 번 거절당했습니다. 각각 세 번씩 세 번 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한 거예요. 마하파지파티 부인이 완전히 실망해서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데, 한 나라의 왕비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그 몰골이 형편없이 초라했어요. 그 모습을 아난존자가 보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출가를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슬퍼하지 말고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들어가서 한번 여쭙겠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을 뵈러 들어갔는데, 이분이 머리가 참 좋았어요. 들어가자마자 ‘여성 출가를 허용해 주십시오’라고 얘기한 게 아니라 이렇게 물었어요.

‘여성도 수행을 하면 해탈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능히 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난존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출가를 허용해 주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마하파지파티 부인께서 부처님을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정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출가를 간절히 요청하는데 왜 허용해 주지 않으십니까?’

‘그렇다. 그분이 나를 키워주신 정성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건 어떤 것으로도 갚기 어렵구나.’

이렇게 부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셨어요.

그런데 이렇게 허용을 하는 대신 여덟 가지 조건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걸 팔경법(八敬法)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수행을 오래 한 비구니라 해도 신참 비구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부터 해서 여덟 가지 규율을 지키는 조건으로 여성의 출가수행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아무리 여러 조건이 붙었다 해도, 조건이 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출가가 허용됐다는 사실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조건이 붙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아서 오늘날의 시점에서 ‘여성을 차별했다’ 이렇게 보는 건 시대 상황에 안 맞아요. 인천 사람한테 부처님께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어서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 이렇게 답하셨는데, 지금 강릉에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동쪽’이라는 대답을 적용해서 ‘이건 안 맞다’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때는 허용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허용을 했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부차적 조건이 붙은 건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어요.

또 한 가지는 이 팔경법이라는 것이 과연 부처님 당시에 나왔겠느냐는 거예요. 나중에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아마 나중에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출가를 허용하지 않으셨는데 아난존자가 찾아가 빌어서 허용을 받았다는 내용도 나중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부처님이 처음부터 허용했다고 하면 비구니 제도를 폐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거절했지만 아난존자가 찾아가 간절히 빌었기 때문에 허용했다고 하면 제도를 폐지하더라도 그게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난존자 때문에 허용한 것이니까 폐지해도 된다’ 이런 근거를 댈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후대에 이런 근거로 비구니 제도를 폐지했어요. 2-3세기 무렵이니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5-600년쯤 지났을 때입니다. 왜 폐지했을까요? 그때는 굽타(Gupta) 왕조가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던 시기예요. 굽타 왕조 시대에는 힌두교가 다시 부흥해서 계급 차별, 성 차별이 옛날의 브라만 시대보다 더 봉건적으로 돌아갔습니다. 불교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사회에 적응해야 했어요. 그런 시기가 4세기 초부터 6세기 후반까지 300년가량 이어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에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측면에서, 비구니 제도 폐지도 불교가 사회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한 방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경전의 대부분이 기록으로 정형화된 게 바로 굽타 시대예요. 그런 점까지 감안한다면 바이샬리에서 여성 출가를 허용한 것과 관련하여 경전에 기록된 상세한 내용은 사실과 조금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곡됐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그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는 뜻이에요. 그런 데서 경전의 글귀 그대로를 무조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신중하지 못한 태도겠죠.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맥락을 꼼꼼히 살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이런 걸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류문화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고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봐야 해요. 이런 걸 요즘은 학문으로 많이들 연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다룬 경전도 어느 시대에 누가 기록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해당 시대와 배경 속에서 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가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법문한 내용이 경전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다 함께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옛일을 떠올리며 잠시 명상을 한 후 아쇼카석주와 스투파를 바라보며 예불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여성 출가 선언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하파자파티와 500여인의 간절한 발원으로 최초의 여성출가자가 탄생한 이곳 바이샬리에서 우리 모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발원했습니다. 대중들은 호궤 합장을 하고 스님에게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32차 인도성지순례에 참여한 저희들은 이곳 최초의 여성출가 성지에서 다시 한번 발심하여 서원하고자 지도법사님께 출가를 요청합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곳은 부처님께서 최초의 여성 출가를 받아들인 곳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 행복과 평화를 전하는 수행자가 되겠습니까?"

“네, 몸과 마음을 다해 수행자의 삶을 살겠습니다.” (반배)

“장하십니다. 수행자여. 이제 여러분은 비록 몸은 세상에 있으나 불법승 삼보를 받들고 오계를 지키는 출가수행자입니다. 어떠한 번뇌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오늘의 출가정신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부처님의 정법 제자로서 수행정진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스님은 출가자의 삶을 발원한 순례자들을 위해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쁨과 행복을 다 함께 노래했습니다. 합창단이 앞으로 나와 ‘행복을 주는 사람’, ‘행복의 나라로’ 노래를 선창하자 순례단도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바이샬리에서의 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차량별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원후봉밀터를 서둘러 나왔습니다.


바이샬리에서 릿챠비족과 마지막 인사를 한 부처님은 쿠시나가르로 향했습니다. 순례단도 그 발자취를 따라 쿠시나가르로 출발했습니다.

한 시간을 지나 멈춰 선 곳은 케사리아 탑(Kesaria Stupa)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탑인 케사리아 탑은 산처럼 우뚝 서있었습니다. 둘레가 424미터, 현재 높이는 32미터, 원래 돔의 높이를 51미터 정도라고 추정한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도착하기 전에 케시리아 탑 앞에서 영상 촬영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을 향해 쿠시나가르로 향하실 때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계속 따라왔습니다. 간다키 강에 이르러서 부처님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지만, 바이샬리 사람들은 강가에서도 부처님을 바라보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 발우를 받아서 바이샬리 사람들이 탑을 쌓았았는데 그것이 이 케사리아 탑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설은 부처님이 7개의 나라를 지나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 장소를 기념해서 세운 탑이 케사리아 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열반의 길에 지나간 곳을 기념한 탑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의 길에 지나간 곳을 기념한 탑이라는 주장인데, 두 가지 내용 모두 내용적으로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념해서 세운 탑이라는 증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영상 촬영을 마치고 스님은 쿠시나가르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케사리아 탑을 지난 지 20여분 쯤 뒤 큰 강을 건넜습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을 배웅했다는 간타키 강입니다.”

쿠시나가르로 가는 길에 생방송 법회를 하기 위해 고빨간지(Gopalganj)라는 도시에 멈춰 인터넷이 되는 숙소를 알아보았습니다.

다행히 생방송 법회를 할 수 있는 숙소를 구했습니다. 방송 준비를 하고 4시 정각이 되어 생방송 금요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 출가가 최초로 이루어진 바이샬리를 거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라(Kushinagar)로 가다가 길옆에 차를 세우고 인근에 호텔 방을 하나 빌려서 급하게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웃음)

한국에 계신 분들은 춥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낮에 기온이 28도까지도 올라가서 얼굴이 새카맣게 타고 피부가 벗겨질 정도예요.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기온이 이렇게 차이가 나네요.”

간단히 인도 성지순례 소식을 공유한 후 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4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고액 사기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무기력하게 사는 딸을 보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고액 사기에 교통사고까지 당한 딸, 애가 탑니다.

“28살 딸이 있습니다. 사기를 당해 지인들로부터 빌린 1억 5천만 원이란 거액을 갚지도 못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5개월째 재활 중입니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는 딸이 4500만 원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딸을 버림과 동시에 하루가 멀다 하고 돈을 갚으라고 협박을 해대더니, 급기야 저한테까지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딸은 여기저기 시달리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무기력하게 집에서 유튜브만 봅니다. 아픈 아이를 내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생활하려니 점점 힘이 듭니다. 답답한 마음에 딸과 함께 죽고 싶지만 장애를 가진 남동생과 이제 고3이 되는 막내가 있어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딸이 저지른 일인데 정작 본인은 수습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아 저만 애가 타서 녹아내립니다. 물론 딸은 성인이 되었으니 죽든 살든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고 저는 제 삶을 살아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24시간을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내다 보니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혼자 나가서 살 형편도 안 되고, 이제는 혼자 스스로 결정내리며 사는 것에 지쳤습니다. 누군가에게 묻고 듣고 나누어서 슬기롭게 극복하고 싶습니다.”

“질문자가 생각하는 ‘슬기롭게 극복한다’는 건 뭘까요? 딸이 알아서 나가주든지 누가 1억 5천만 원을 줘서 해결이 되든지, 딸이 돈은 못 갚더라도 유튜브만 보지 말고 명랑하게 사는 것이 질문자 생각에는 ‘슬기롭게 극복하는 법’일 겁니다. 그런데 그건 모두 내가 변하는 게 아니라 딸이 변해줘야 하고, 다른 사람이 변해줘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옷을 더 입는 건 내가 할 수 있고, 날씨가 더우면 옷 하나 벗는 건 내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입은 옷 상태는 그대로 놔둔 채 날씨더러 ‘따뜻해져라’, ‘서늘해져라’ 명령해 봤자 그건 내 마음대로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질문자가 지금 딸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딸의 남자친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빚쟁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내가 입은 옷은 그냥 둔 채 날씨가 내 옷차림에 맞춰주길 바라는 것과 같아요. 내가 춥다고 느낄 때는 날씨가 따뜻해지고, 덥다고 느낄 때는 날씨가 서늘해지면 좋겠다고 바라는 셈입니다. 요행히 질문자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될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질문자가 볼 때는 슬기로운 해결책, 현명한 해결책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건 결국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됐으면 좋겠다’ 하는 욕망일 뿐이에요.

그러니 정말 슬기롭고 현명한 해결책은 날씨를 탓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날씨에 맞춰 대응하는 거예요. 날씨가 추우면 방 안에 있든지, 그래도 외출하고 싶으면 옷을 좀 두껍게 입고 나가면 됩니다. 날씨가 더우면 방 안에 있든지, 그래도 외출해야 한다면 가볍게 입고 양산을 쓰고 나가든지 할 수 있겠죠. 이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질문자가 딸을 탓하는 건 춥거나 덥다고 날씨를 탓하는 것과 같아요. 질문자는 스스로 결정하는 게 지쳤다고 말했지만, 사실 지금 자기 삶의 주인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딸을 지금 내쫓을 수는 없어요. 지금 내쫓는다면 딸이 자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자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실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니까 그럴 위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질문자는 ‘그때 그냥 집에 있도록 놔둘 걸’ 이렇게 또 후회할 거예요. 지금은 답답하니까 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딸이 죽어버리면 ‘아이고, 내가 딸을 죽였구나’ 이렇게 또 후회할 일이 됩니다. 내가 나가라고 얘기하면 책임이 나한테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아예 입을 다무는 게 좋아요. (웃음) 자기가 원해서 나갔다가 자기가 죽는다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책임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안 나가겠다는데도 내가 내보냈다면 나중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마치 내 책임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딸이 죽겠다고 할 때 ‘그래도 죽지 마라’ 이렇게 말했는데 딸이 죽었다면, 죽은 건 안타깝지만 내 책임은 아니에요. 그런데 딸이 죽겠다고 할 때 ‘그래, 죽어라’ 이렇게 말했는데 딸이 정말 죽었다면, 마치 내가 죽인 것처럼 또 오랜 세월을 후회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데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딸이 빚진 돈을 갚아줄 수 있으면 물론 좋겠죠. 그런데 질문자는 경제적 능력이 그 돈을 갚아줄 만큼은 안 되잖아요.

제 말의 요지는 안 되는 걸 걱정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딸이 질문자와 한집에 계속 살든 집을 나가든, 딸이 돈을 갚든 안 갚든, 질문자가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날씨가 추운 건 관여를 안 해야 해요. 옷을 껴입거나 외출을 하지 않거나 내 필요에 따라 내가 맞추면 됩니다.

딸의 남자친구가 딸을 떠나든 안 떠나든 그것도 관여하지 마세요. 질문자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질문자에게 아들이 있는데 여자친구한테 돈을 4500만 원이나 떼였다면 부모 입장에서 결혼하라고 하겠어요?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떼인 돈도 당연히 받으라고 하겠죠. 이처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딸의 남자친구는 하등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처럼 행동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가 거기에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면 ‘아이고, 그랬구나. 우리 딸이 문제구나’ 그냥 이러고 말면 돼요. 대신 갚으라는 요구를 받아도 질문자가 갚아야 할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왜 그걸 내가 갚냐!’ 이렇게 악을 쓸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서 그냥 질문자가 안 갚으면 돼요. 싸워봤자 질문자만 힘들어요. 그러니 그냥 딸의 남자친구에게는 ‘아이고, 그랬구나. 안 됐다. 안 그랬으면 참 좋을 텐데 얘가 그러네. 내가 얘를 잘못 키웠나 보다’ 이 정도로 말하면 돼요. 더 이상 이렇고 저렇고 할 필요 없어요. ‘내가 대신 갚아주겠다’ 이런 말 할 필요도 없고, ‘나는 못 갚는다’ 이런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웃음) 그건 원래 나하고 관계없는 일, 그 두 사람 사이의 일이니까요. 이렇게 그냥 편안하게 대응하면 됩니다.

그리고 딸의 입장에서 한번 보세요. 1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을 날리고 교통사고까지 당했는데 자기로서는 지금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러니 지금 이 상태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유튜브를 보거나 술을 마시면서 하루하루 견디거나, 안 그러면 죽는 길밖에 없잖아요. 딸이 죽는 게 나아요, 유튜브 보는 게 나아요?”

“유튜브 보는 거요.” (웃음)

“그래요. 지금 상황이 질문자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게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유튜브를 보고 술을 마시더라도 딸이 안 죽고 살아있는 게 좋은 일이잖아요. 유튜브를 보지 말고 나가서 돈을 벌든지 가족들에게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건 질문자의 바람일 뿐이에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보통은 그렇게 잘 안 됩니다. 지금 질문자는 딸의 상황이 안 좋은 걸 보는 것만으로도 본인까지 덩달아 죽네 사네하고 있잖아요. 지금 본인의 수준이 그런데, 질문자를 닮아서 자란 딸이 질문자보다 더 뛰어날 수 있을까요? 1억 5천만 원을 떼이고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도 떠나버렸는데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가서 직장 다니고 돈을 벌 수준이 될까요?”

“아니요...”

“그래요. 지금 자기 수준을 모르고 바라는 게 너무 큽니다. 그러니 우선 질문자가 자기 수준을 높여야 돼요. 딸이 어떻게 살든 성인이잖아요. 그건 딸의 인생이니 그냥 두세요. 죽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는 딸이 안 죽는 게 나으니까 종일 유튜브만 보고 있더라도 그냥 두시고요.

그리고 돈이 하나도 없으면 아무리 갚고 싶어도 갚을 방법이 없잖아요. 돈이 있으면서 안 갚으면 문제가 되지만, 정말로 없어서 못 갚는 건 문제가 안 됩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을 두들겨 패거나 노예로 삼기도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때리면 폭행죄가 되니까 때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있으면서 안 주면 압수를 하지만, 없어서 못 주는 건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 그건 질문자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딸이 그냥 신용불량자가 될 뿐이에요. 또 앞으로 딸이 취직을 하면 그 급여에서 돈이 조금씩 나갈 거예요. 요즘은 취직을 해도 급여가 다 빠져나가지는 않습니다. 월급을 200만 원 받는다면 생활비 150만 원은 놔두고 50만 원만 나가게 되는 식이에요. 기본 생존에 필요한 것은 법에서 보호해 주고 있어요.

그러니 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저 ‘그래도 안 죽고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얘기해 주세요. 그런 딸은 놓아두고, 장애가 있는 동생과 고3 아이를 돌봐야 집안에 평화가 오지 않을까요? 질문자까지 딸에게 매몰돼서 죽네 사네 하면 장애가 있는 동생은 어떡하고 고3인 아이는 어떡해요? 그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런 걸 두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말라.’

딸의 문제가 제1의 화살이라면, 질문자가 거기에 덩달아서 같이 죽네 사네 하면 그게 제2의 화살인 거예요. 또 질문자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이 학교 공부도 못하고 불안에 떨거나 영향을 받으면 그건 제3의 화살이 됩니다. 지금 질문자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 전부가 딸 탓은 아니에요. 딸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내가 대응을 잘못했기 때문에 제2, 제3의 문제가 생겨난 거예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할 때 ‘아이고, 그래도 안 죽고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세상 사람들은 딸을 비난할지 몰라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안 죽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잖아요. 그 생각만 하지, 다른 건 아예 신경을 끄세요. 딸 대신 갚아주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거나 나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유튜브를 보라거나 보지 말라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딸은 그냥 내버려 두고 나는 ‘그저 딸이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이렇게만 기도하는 거예요. 이렇게 질문자가 자기 할 일을 하고 다른 아이들을 돌보면 제1의 화살은 맞았을지언정 제2, 3, 4의 화살은 맞지 않게 됩니다. 관점을 이렇게 가지면 좋겠어요.

물론 실천하기는 어렵죠. 딸의 상황과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냥 있으려면 질문자 말처럼 어려운 건 맞아요. (웃음) 그런데 가만있기 어렵다고 해서 같이 끼어들면 같이 빠져 죽게 됩니다. 딸은 지금 1억 5천만 원을 사기당하고 남자친구도 잃고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으니 지금 얼마나 힘들겠어요? 물론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다면 질문자 입장에서는 정말 기쁘겠죠. 그런데 지금 힘들어하는 딸을 보고 한심해하는 한편으로 같이 빠져들고 있는 질문자를 또 다른 가족이 보면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딸이 한심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도 딸과 똑같은 행동을 지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딸은 어떻게 되든 그냥 놔두세요.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질문자 본인의 삶을 잘 살면 지금의 고통이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습니다. 딸의 문제는 해결 못 하더라도 그것이 더 이상 번지지는 않아요. 이것이 슬기롭고 현명한 관점입니다. ‘한 집에 살면서 어떻게 부모가 가만히 있습니까!’ 그러면 같이 빠져 죽는 거예요. (웃음) 그런 딸을 보면서도 ‘살아있어서 고맙다’ 이렇게만 생각할 수 있다면, 설령 빠져 죽는다 해도 하나만 빠져 죽지, 다른 사람은 빠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슬기롭다고 말해요. 질문자가 나서서 해결하려 들면 같이 빠져 죽게 돼요. 나하고 관계없다고 좀 선을 긋고 편안하게 있으면 어렵다 해도 한 명만 어려운 것으로 그쳐요. 딸이야 빠져 죽든지 기어 나오든지 자기가 알아서 할 테고, 질문자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은 괜찮은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어리석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신 차리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네. 이제야 얼굴에 좀 웃음기가 도네요. 아까는 방송에 얼굴이 다 비치는데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이 생기도 없고 정신도 없어 보였어요. (웃음)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야 질문자도 살고 나머지 아이도 삽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갖고 신경 쓰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한 시간 동안 대화를 하고 다섯 시가 넘어 방송을 마쳤습니다. 서둘러 방송 장비를 정리하고 방을 원래대로 정돈한 후 숙소를 나왔습니다.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쿠시나가르로 향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가 넘어 쿠시나가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짐을 풀고 전기밥솥에 밥을 해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한 후 내일 일정을 점검하고 원고 교정을 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법회를 하고, 국경을 넘어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를 향해 네팔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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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부처님이 열반을 향해 쿠시나가르로 향하실 때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계속 따라왔습니다. 간다키 강에 이르러서 부처님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지만, 바이샬리 사람들은 강가에서도 부처님을 바라보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 발우를 받아서 바이샬리 사람들이 탑을 쌓았았는데

2023-11-13 11:53:29

해탈지

제1의 화살을 맞았더라도 제2 제3의 화살을 맞지 않는 방법 현 상황을 직시하되 빠져들지는 말고 다른 일까지 망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 정신 차립니다.

2023-03-01 21:32:00

서채화

지금 제 상태를 다시금 돌아볼수 있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02-26 11: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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