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2.4. 인도 성지순례 7일째, 쿠시나가르(Kushinagar)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의 여정을 따라 쿠시나가르(Kushinagar)를 순례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전기밥솥에 밥을 해서 먹은 후 오전 7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해 걸어서 쿠시나가르 열반당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이 도착한 후 곧바로 A팀이 도착해서 열반당을 한 바퀴 돌면서 입장하여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갑자기 올해부터 열반당 경내로 일체의 카메라 반입이 금지되었다고 해서 스태프들은 카메라를 모두 버스에 가져다 놓고 영상과 사진을 모두 핸드폰으로 찍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새벽에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온 B팀이 도착하자 스님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곳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장소로 열반상을 모셔둔 곳입니다. 안에 들어가 보시면 마치 부처님이 누워 계시는 것 같은 감동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상황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힌두스탄 평원을 중심으로 한 인도 각국을 다니시면서 교화와 설법을 하셨는데, 교화 과정이 순조로울 때도 있었지만 많은 장애와 저항을 겪고, 또 비난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일이 생기든 저런 일이 생기든 여여하게 정진하고 교화하시다가 세속 나이로 80세가 되던 해, 즉 성도 49년째 되던 해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1년

열반에 드시기 전 해에는 왕사성 밖 그리드라쿠타(Grdhrakuta, 영축산 靈鷲山)에 머무셨습니다. 그때 마가다국의 왕은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자타사투였습니다. 아자타사투왕은 이웃나라인 밧지족을 침략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자문을 구했고, 부처님께서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 설법을 통해 전쟁의 무익함을 알리고 전쟁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1년은 일기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열반경이라고 부릅니다. 그 해 가뭄이 아주 심해서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와 인연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우기를 지나고 다시 모이자고 제자들을 흩어 보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와 둘이서 바이샬리에서부터 동쪽으로 1유순 (약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벨루바나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벨루바나는 대나무숲이라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죽림촌(竹林村)입니다. 그곳에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셨습니다. 벨루바나에 머무실 때 몸이 몹시 아파서 아난존자가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했다고 합니다. 안거 기간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다른 대중들이 올 수가 없으니까 걱정이 된 거죠. 동시에 부처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안거 기간에 열반에 들면 대중이 불편할 것을 생각해서 유수행을 통해 병을 극복하셨습니다. 유수행(留壽行)은 정신을 집중하여 생명을 약간 연장하는 수행입니다. 그리고 안거가 끝나자 바이샬리에 있던 대중들을 모아놓고 ‘3개월 후 열반에 들리라’ 하고 선언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계정혜 삼학을 닦을 것을 다시 한번 당부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법문하십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자, 이제 길을 떠나자’ 하고 바이샬리를 떠나시는데, 마치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뒤로 돌리듯이 되돌아보면서 ‘내가 이 아름다운 바이샬리는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면서 아쉬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코끼리는 몸집이 크고 동작이 느립니다. 늙은 코끼리라고 표현한 것은 그보다 동작이 더 느리다는 걸 말하는데, 그만큼 부처님께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면서 아쉬움을 표현했다는 걸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떠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셨는데, 사라수 숲에 당도하여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건 나무가 옆으로 퍼지는 유형이 아니라 위로 길게 자라나는 나무였다는 걸 말합니다. 저 뒤에 보시면 열반당 앞에 우뚝 서 있는 나무가 사라수입니다.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우셨습니다. 그때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발은 남쪽을 향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 열반상의 모습입니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곳에 자리를 깔고 누우니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사라 나무가 꽃을 피울 시기도 아닌데 하얗게 꽃을 피우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떨어졌다고 해요. 어쩌면 숲 속에 흰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었고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꽃비가 내리지 않았을까 싶은데, 경전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할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난다여, 이것은 신들이 여래에게 올리는 마지막 공양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어떠한 신비로운 현상도 수행자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무지를 깨달아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니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시골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그리고 아난다에게 ‘나는 오늘 이곳에서 열반에 들리라’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아난다는 ‘왜 이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왕사성이나, 사위성이나, 바이샬리나, 코삼비, 카시 같은 곳은 도시도 크고, 부처님의 제자들도 많고, 재가수행자들도 많은데 그중 한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런 시골에 오셔서 열반에 드시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답하십니다.

‘아난다여,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 이곳은 예부터 아주 성스러운 곳이었고, 미래에도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그러자 아난다는 시골에서 열반에 드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면 이 숲이 아니라 저 말라족의 왕궁에 들어가서 열반에 드시면 어떻겠냐고 다시금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처럼 큰 나라들도 있었지만 작은 나라들도 많아서 모두 합하면 300여 개의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이곳 쿠시나가라의 왕족은 말라족이었습니다. 아난다는 그 말라족의 왕궁에 가서 열반에 드시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왕궁이 아니라 숲을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왕궁에 들어가서 열반에 들면 일단 귀족만 참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민들은 왕궁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가 없으니까요. 반면 숲 속에서 열반에 들면 원하는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방이 열린 숲에서 열반에 드시기로 하신 겁니다. 그리고 아난다에게 ‘열반에 들기 전 누구든지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하라’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친견하라는 소식을 전한 아난다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전에 혼자서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 시봉을 25년이나 했는데, 부처님께서 오늘 열반에 드신다고 하니 너무나 슬픈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아난다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너는 마치 내 입 안의 혀처럼 참으로 시봉을 잘했다.’

그만큼 부처님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대변하면서 시봉을 잘했다고 아난다를 칭찬하셨습니다. 아난다는 슬픈 마음을 진정하면서 부처님께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행하면서 늘 부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나면 우리는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사성지를 생각하라. 첫째, 룸비니 동산은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다. 태어날 때의 모습은 이러했다. 둘째, 보드가야는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곳이다. 도를 이룬 내용은 이러했다. 셋째, 사르나트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을 한 곳이다. 설법의 내용은 이러했다. 넷째, 쿠시나가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열반의 모습을 이러했다. 이걸 잊지 않으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

아난다가 또 부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까?’

‘여래의 가르침인 경(經)과 율(律)을 스승으로 삼아라. 여래의 가르침인 경과 실천행을 그대로 행한다면 비록 나와 떨어져 있어도 나와 함께 있는 것과 같고, 만약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설령 나와 함께 있어도 나를 모르는 사람과 같다.’

아난다가 또 부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

‘사념처(四念處)를 의지하라. 몸이라는 것은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 기분이 좋고 나쁨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마음이라는 건 믿을 바가 못 되니 집착하지 말라. 제법(諸法)은 아(我)라고 할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몸에는 성스럽거나 깨끗하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관신부정(觀身不淨)’이라고 합니다. 둘째, 우리는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는데, 그 즐거움이 사라질 때 그것이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을 ‘관수시고(觀受是苦)’라고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은 죽 끓듯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마음에는 항상함이 없고 늘 변하니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고 합니다. 넷째, 만물에는 아(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법무아(觀法無我)’라고 합니다. 이 사념처가 위빠사나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아난다는 다시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지었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합니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말라.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공덕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둘째, 병든 자를 치료하고 약을 주는 것이다. 셋째,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서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하고, 병든 자는 치료받아야 하고, 아이들은 제때 배워야 한다는 JTS의 이념과 구호가 나왔습니다. 가난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상황이 바로 자기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부모의 입장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공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가는 기준과 비슷합니다.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내가 병들었을 때 간호를 했는가, 내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 영접했는가,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왔었는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언제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과 아주 유사한 내용이죠.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이렇게 아난다에게 말하고 나자,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겠다고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명씩 인사를 시키려고 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족별로 한꺼번에 인사를 시켰다고 합니다. 우리도 문상을 가면 사람들이 적을 때는 한 사람씩 문상을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줄을 서서 한꺼번에 조문을 하듯이 그때도 가족끼리 모여서 친견을 했다고 해요. 그렇게 가족별로 모아서 친견을 했는데도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다고 합니다.

모든 인사가 끝나고 이제 곧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니까 마지막 시간이라도 조용히 보내실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고요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경전에는 이 노인이 120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교도 수바드라였습니다. 이교도라는 건 불교도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밤이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사문 고타마를 만나야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는 나를 귀찮게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아난다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고요한 시간이라서 더 이상은 만나기 어렵다고 해도 수바드라는 막무가내로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니까 부처님께서 ‘그는 나를 귀찮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묻고자 찾아온 것이다’ 하고 들여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만난 수바드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저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 누구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당시 인도에는 육사외도를 포함하여 62견해 내지 360여 가지의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상과 진리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바드라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나는 그들의 주장을 모두 알고 있다’ 하고 이야기하신 후 설법을 이어가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탐진치 삼독이 있다면 그들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나는 출가한 지 50년이 넘었다. 지난 50여 년을 쉼 없이 정진했다. 그들의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욕망, 성냄, 어리석음이 있다면 그들의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은 팔정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바드라여,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른 정진을 하고, 바른 살핌과 바른 안정을 취하고 있느냐는 게 중요하다.’

자꾸 그들의 말이 맞는지를 따지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팔정도에 대한 법문을 듣고 수바드라는 단박에 지혜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제자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지금 제 눈이 열렸습니다. 저도 승단의 일원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출가를 청하면 대부분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하고 한 마디로 허락하시는 것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바드라는 오랜 시간 동안 이교도로 살아왔고, 노구의 몸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승가 생활을 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3개월을 살아보고 할 만하면 그때 승낙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바드라가 ‘3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도 저는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대중을 불러 모아서 ‘나에게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내가 열반에 든 뒤 그때 물어볼 걸 하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지금 물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대중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안하게 물어라’ 이렇게 세 번을 요청했는데도 아무도 질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난다가 ‘부처님께서는 이미 많은 법을 설하셨고, 저희들은 다 이해했습니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대중이 슬픔에 겨워서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제자 중 아니룻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러분,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셨습니까?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4념처를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라며 대중에게 4념처를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4념처를 상기시키자 대중들은 그걸 듣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온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세워진 10개의 탑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각국에서 사신을 파견해서 유골을 서로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사리’라는 말은 보석이 아니라 유골이라는 뜻입니다. 각 나라에서는 부처님의 유골을 가지고 가서 기념탑을 세우겠다며 서로 다퉜습니다. 당시 여덟 나라의 사신이 와서 자칫 전쟁이 날 정도로 다툼이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도나 바라문이 ‘부처님께서는 평화를 가르쳤는데, 우리가 부처님의 유골을 가지고 싸우면 되겠습니까?’ 하며, 여덟 나라가 유골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유골이 여덟 나라로 흩어져서 각 나라가 사리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여덟 개의 사리탑을 ‘근본 사리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도나 바라문은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를 가지고 가서 기념탑을 쌓았고, 또 어느 왕족은 유골의 분배가 끝난 뒤에야 와서 부처님 시신을 화장한 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는 총 10개의 탑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법을 전해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앞으로 법을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펜을 끄적이며 이 법이 널리 전해지기를 발원해 보았습니다.

이어서 합창단의 선창으로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스승의 은혜가 있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부처님의 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열반당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니 더욱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스님도 합장을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합창이 끝나고 열반당 참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열반의 모습을 잘 새겼습니까? 이제 열반당을 참배하도록 하겠습니다.”

1250명의 대중이 모두 열반당 안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줄을 지어서 열반상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방식으로 참배를 했습니다. 열반당의 높은 돔 천장 안은 목탁소리와 정근소리가 가득 울려 퍼져서 마치 부처님의 열반하신 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온 순례자들은 열반당 주위를 둘러싸고 서서 열반당에 누워 계신 부처님을 향해 예불을 올렸습니다.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예불을 마치고 200여 명은 열반당 안에 빼곡하게 들어갔습니다. 누워계신 부처님을 향해 스님은 합장을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을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늙고 병든 몸을 이끄시고
먼 길을 걸으셔서 이곳에 이르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평등함을 설파하셨으니
여성이라고 차별받지 않고
신분이 낮다고 차별받지 않고
신체가 장애라고 차별받지 않는
모든 중생은 다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주셨습니다.
출가한 지 51년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움직이듯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끄시고
이곳 쿠시나가라에 이르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 열반당에서 이렇게 발원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하게 머무소서.
이제 세상에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부처님께
이 일을 해달라 저 일을 해달라 하지 않고
세상에 모든 일들을 저희가 앞장서서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들을
하나하나 따라 걸으며
부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일들을
저희들이 이룰 것을 발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다른 사람도 참배할 수 있도록 예불과 발원을 마치자마자 열반당을 나왔습니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순례자들이 여유 있게 열반당을 더 둘러볼 수 있도록 시간을 준 후 인근에 위치한 한국절 대한사를 방문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경제 사정이 많이 안 좋아져서 힘들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주지 스님에게 보시금을 전달한 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화를 나눈 후 절을 나왔습니다.

12시가 넘어서 버스는 쿠시나가르를 출발했습니다.

순례단은 이틀 동안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 마지막 1년의 여정을 따라왔습니다. 왕사성 영축산에서 시작한 열반경은 이곳 쿠시나가르 라마바르총에서 화장을 하고 10개의 탑이 쌓아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내일부터 이틀간은 이런 위대한 붓다의 태어남과 성장을 둘러보러 갑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공간도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쿠시나가르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내내 네팔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쉼 없이 버스를 타고 달려 오후 4시에 국경 마을인 소놀리(Sonauli)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버스에서 내려 인도 출국 심사를 받았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도 출국 심사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습니다. 직원이 단 2명이었고 출입국사무소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인도인 직원들은 난감한 얼굴을 하곤 했습니다. 상부에 지원요청을 하겠다고 하고선 한참 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해서 순례 일정이 많이 지체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인도한국 대사관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정토회 순례단의 출입국 심사를 위해 컴퓨터 3대를 추가로 설치해 주어서 신속하게 심사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예년에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덕분에 오늘은 한 시간 만에 국경을 통과했습니다.

스님이 이미그레이션에 도착하자 한국 대사관에서 영사님과 직원분이 직접 나와서 정토회 순례단의 원활한 출입국 심사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시니까 금방 심사가 끝나네요. 예전에는 몇 시간씩 걸려서 애를 많이 먹었는데요.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저희가 이번 기회에 스님을 뵐 수 있어서 더 영광입니다.”

스님은 두 분에게 선물을 전하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습니다. 그리고 출입국 심사를 담당하는 여섯 명의 인도인 직원분들에게는 스님의 희망편지를 힌디어로 번역한 책을 한 권씩 선물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타 인도와 네팔 국경을 넘은 다음 네팔 입국 삼사를 받았습니다.


오후 6시에 국경을 통과하여 네팔로 넘어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네팔에 있는 한국절인 대성석가사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어제 싸둔 도시락으로 늦은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A팀 순례단은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 쿠시나가르에서 숙박을 한 B팀 순례단은 내일 새벽에 네팔 국경을 넘게 됩니다.

내일은 오전에 A팀과 함께 부처님이 성장기를 보낸 카필라성을 둘러보고, 쿠단 유적지를 지나, 부처님께서 전쟁을 막으셨던 로히니강과 꼴리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인 랑그람을 참배하고, 오후에는 룸비니에 도착하여 A팀과 B팀 전체가 모이는 행사를 하고, 저녁에는 대성석가사에서 1250명이 함께하는 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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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하게 머무소서.
이제 세상에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부처님께
이 일을 해달라 저 일을 해달라 하지 않고
세상에 모든 일들을 저희가 앞장서서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들을
하나하나 따라 걸으며
부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일들을
저희들이 이룰 것을 발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2023-11-20 17:17:21

해탈지

사성지 사념처 4가지 공양 꾸준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누가 옳고 그르다 할 것이 없다 다만 바르고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정진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잘 새깁니다

2023-03-01 22:00:18

박경자

1250명의 순례단과 함께 보낸시간들이 지나고나니 더욱 거룩한시간이었음을 알수가 있네요 감사합니다

2023-02-24 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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