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7.14 농사일, 수행법회
“직장 동료의 자살 이후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연일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하늘은 푸르렀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안거를 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논매기입니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직접 손으로 논매기를 해야 합니다.

행자들이 도착하기 전 스님이 가장 먼저 논에 나가 윗논에 피를 뽑고 있었습니다. 엊그제 자원봉사를 하러 온 거사님들이 한 차례 뽑고, 어제 스님과 행자들이 마저 뽑았지만 아직 피가 남았습니다.


스님이 피를 뽑고 있는 중에 행자들이 도착했습니다. 행자들은 아랫논에 들어가서 피를 뽑았습니다.


윗논에 피를 다 뽑고 나서 논둑을 걸어가던 스님이 행자들을 향해 인사했습니다.

“왔어요? 수고가 많아요!”

행자들은 일렬로 줄을 맞춰 허리를 숙여 피를 뽑으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스님도 아랫논 가장자리로 들어가서 함께 피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해를 등지고 일해야 덜 힘들 텐데, 해를 마주 보고 가면 어떡해요?” (웃음)

묵묵히 피를 뽑다가 간간히 이야기도 나누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서리에는 이양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모를 심었기 때문에 일직선이 아니에요. 모와 모 사이에 있다고 무조건 피가 아닙니다. 여기는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해요.”

모서리 부분은 스님이 특히 주의를 하면서 피를 뽑아야 했습니다.

피를 뽑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지 행자님 한 명이 말했습니다.

“논농사가 제일 쉽다고 들었는데, 저는 논농사가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일반 논농사는 제초제를 뿌리니까 김맬 게 없어서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유기농을 하니까 할 일이 많은 거예요.” (웃음)

피를 뽑다가 스님이 아랫논에 물높이가 많이 올라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물높이를 좀 낮춰야겠어요.”

스님은 논둑으로 가서 물이 빠지도록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어제 논 주변에서 주운 수도관을 가져왔습니다. 삽으로 둑을 허물고 수도관을 묻자 논물이 콸콸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점점 더 높이 떠올라서 등이 따가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스님이 농사 담당자에게 말했습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너무 무리하면 안 돼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논을 뒤로하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수고했어요.”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발우공양을 한 후 오후에는 뙤약볕을 피해 각자 사무 업무를 보았습니다.

처마 밑에 온도계는 38도까지 올라갔습니다. 날이 더워서 스님도 물을 세 번이나 덮어쓰며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5시부터는 2차 만일결사 준비위원회와 정토회 선거관리위원회가 합동으로 스님과 온라인 간담회를 했습니다.

온라인정토회 정식 출범을 앞두고 다가오는 9월 25일에 정토회 임원 선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선거 방식과 절차에 대해 하나씩 점검하고 검토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뜨거운 태양이 산 너머로 지기 시작했고, 스님은 방송실에 자리하고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저녁반 회원 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날씨가 많이 덥죠? 더운데 어떻게들 지내세요? 저도 오늘 정말 더워서 물을 세 번이나 덮어썼어요. 선풍기 갖고는 도저히 안 돼서 물을 한 바가지 덮어쓰고 와서 한 시간쯤 일을 보다가 또 가서 덮어쓰고 해서 오늘은 세 번이나 물을 덮어썼습니다. 날씨가 정말 무덥네요.

대륙성 고기압이 한반도에 머물면서 이렇게 고온 현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이제 우리의 일상에도 이렇게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다가온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이 미래에 대한 경고로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일상에 실제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수행법회 후 백중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세 명의 질문만 받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직장에서 동료 직원이 자살하는 사건을 겪은 뒤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직장 동료의 자살 이후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최근에 직장에서 같은 팀 동료 직원이 자살하는 사건을 겪은 뒤로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 들고 위축감이 듭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만사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고, 또 직장에서 타인들이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신경이 쓰입니다. 수행도 요즘은 절반 정도밖에 못 하고 있고요. 가까운 타인의 죽음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스님께 여쭙습니다.”

“그분의 자살에 질문자가 직접 관여된 게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 유서나 어떤 얘기를 남긴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요. 팀 내에서 제가 데리고 있던 직원이고, 과제를 굉장히 성실하게 수행했던 직원이었습니다. 저에게 어떤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힘들다는 얘기를 한 적은 없고요. 직원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가정에서의 문제 때문인지 직장에서의 문제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업무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스타일이어서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질문자가 갑질을 했거나 그랬다고 볼 근거가 있어요? 중간에 본인이 호소했거나, 질문자에게 갑질 당했다는 유서를 남겼거나, 상사 때문에 도저히 직장에 못 다니겠다고 가족들한테 호소한 사실이 하나라도 있어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 게 없다면 질문자로 인해서 자살했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잖아요.”

“제가 직접적으로 압박하진 않았지만, 최근에 민원 업무가 많았습니다. 제가 그 직원에게 부과한 업무들이 민원을 많이 받는 업무인 데다 그 직원을 뽑은 사람이 저였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이해가 됩니다. 같이 지내던 강아지가 죽어도 울고불고 난리인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사람이, 그것도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가 죽었는데 어떻게 우울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것을 책임의 문제와 헷갈리면 안 돼요. ‘가까이 있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 ‘부모님이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 ‘동생이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 이런 수준인지, 아니면 ‘그 죽음에 내가 관여를 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든다’ 하는 수준인지, 이 문제가 먼저 정리되어야 해요. 그런 다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느냐를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질문자는 업무 성과를 내도록 독촉하는 스타일이고, 평소에 업무가 많고 이번에 직원이 맡은 업무는 민원까지 많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혹시 내가 좀 다그쳤기 때문에 심리적 압박을 받은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죠?”

“다그치거나 압박을 주는 분위기는 아니었고요. 제 입장에서는 늘 부담을 좀 줄여주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직원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요. 사람 마음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직원이 중간에 단 한 번이라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잖아요. 질문자에게나 질문자 위의 상사에게 문제를 제기했거나, 동료한테 문제를 제기했거나, 가족한테 문제를 제기했거나 해서 증거가 남은 것도 아닙니다. 설령 그런 적이 있었다 해도 질문자가 실제로 그 문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더군다나 질문자가 영향을 미치거나 책임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지금처럼 질문자 혼자서 ‘나 때문에 자살한 게 아닐까? 내가 영향을 준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그 사람한테도 도움이 안 되고, 질문자 본인한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이것을 첫째로 알아야 해요.

이렇게 죄의식을 갖는 것과 가까이 있다 보니까 ‘내가 혹시 조금이라도 잘해줬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잘못했다’하는 것과 ‘내가 조금만 더 잘해줄 걸’ 하는 것은 성격이 좀 달라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은 책임이 나한테 있어요. 그러나 내가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것은 이왕이면 조금 더 잘해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직원이 자살한 원인은 본인이 유서를 안 남겼다고 하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추측해 보자면, 첫째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고, 둘째로는 정신적 질병인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리 병원에 가서 치유를 했었다면 좋았겠지만, 치유가 안 되고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에요.

예를 들어 질문자가 직원을 출장 보냈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다면 질문자는 ‘내가 출장을 안 보냈더라면’ 하고 죄책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건 질문자의 책임은 아니에요. 지나 놓고 나서야 출장을 안 보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죽을 줄 누가 미리 알고 보낸 건 아니잖아요. 직원은 출장을 갔고 우연히 사고를 당해서 돌아가게 된 거예요.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 질문자의 얘기만 들어보면 현재 상황에서 질문자가 어떤 책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이 점이 스스로 정리가 돼야 합니다.

둘째,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충격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사는 게 좀 허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이렇게 죽는 건데 아등바등 살 게 뭐 있나’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어요. 이런 마음은 죽음 앞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심리적인 고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증상이 조금 심하면 신경정신과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아야 합니다. 일주일 정도 약을 먹으면 마음의 안정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셋째, 수행적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천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지금 질문자의 마음속에 그 사람이 하나의 맺힘으로 나타나 있거든요.

‘함께 참 잘 지냈다. 이 세상에서는 힘들게 살았지? 나도 모르게 너를 충분히 이해해주지 못했는데 그나마 저 세상에 가서라도 좀 편안하게 잘 지내면 좋겠다. 잘 가서 편안하게 지내라.’

그분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해 주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요즘이 백중 기도 기간이기도 하니까 천도 기도를 해보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네, 그래서 그 직원을 위해 천도 기도를 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 탁 울어버리면 마음이 좀 편하겠는데 한 번도 그러지 못했어요. 울려고 하면 콱 막혀버리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울지 못했습니다. 제 상태가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인지 몰랐는데, 스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상담을 통해서 치유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질문자의 상태처럼 만사가 귀찮아지는 상태는 일종의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 나서 놀란 충격, 성폭행 당해서 놀란 충격, 죽는 사람을 보고 놀란 충격도 모두 이런 충격에 들어갑니다.

이런 충격을 받았을 때 첫 번째 치료 방법은 병원 치료를 통해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진다고 봤습니다. 당장은 슬프고 막 정신이 없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시간을 좀 단축시키려면 치료를 받는 게 좋습니다. 어차피 이런 정신적인 충격도 다 신체적으로 신경이 긴장되고 흥분해서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긴장을 좀 완화시키면 치료에 조금 도움이 돼요. 근본적으로 도움되는 것은 아니지만 응급치료는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천도 기도예요. ‘이제 죽어서 좋은 데 가는구나. 그래, 잘 가라’ 이런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거죠.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의식을 통해서 심적 상처를 치유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수행은 원래 제법이 공한 도리를 탁 깨쳐서 천도를 하는 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그렇게까지는 수행의 수준이 안 되잖아요. 이치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되니까요. 그래서 좋은 곳으로 떠나보내는 의식인 천도재를 행함으로 해서 위로를 받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겁니다.

결국 두 가지예요. 하나는 마음의 상처와 충격이 조금 심하니까 응급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겁니다. 진찰을 받고 약을 먹으면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병원에는 꼭 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백중 기도를 통해 좋은 마음으로 그분을 떠나보내는 거예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내 마음속에서 미움도 떠나보내고 사랑도 떠나보내는 겁니다. ‘좋은 데 가서 편안하게 지내라’ 이렇게 떠나보내는 천도 의식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간다면 나고 죽음이 없는 도리를 깨쳐서 죽고 나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네, 스님. 잘 알겠습니다. 백중 기도 기간에 잘 기도 올리고 마음을 가다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산 사람 하고만 같이 사는 게 아니라 늘 죽은 사람 하고도 같이 살아요. 2600년 전에 돌아가신 부처님 하고도 같이 살고, 30여 년 전에 죽은 부모님 하고도 같이 삽니다. 이렇게 우리는 삶과 죽음을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었다’ 혹은 ‘살았다’ 이렇게 말하지만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도 다 정신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인도에 가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여러분이 아무 소식을 못 듣고 있다면 스님은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살아 있습니다."

“북한에서 한창 식량난 때문에 중국으로 난민이 많이 넘어올 때 제가 6.25 전쟁 때 포로가 되었던 국군 포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경북 지역의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전하러 찾아갔어요. 가족들을 만나보니 그 전날이 그 사람의 47번째 제삿날이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47년간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죽어 있어도 사실은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살아 있는데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죽어 있고, 사람이 죽었는데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사람이 죽었다거나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단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내 기억에서 지우면 죽었고, 여기 남아 있으면 살아 있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도 여러분의 기억에 남아 있으면 살아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천도 기도를 하는 겁니다. 기억 속에서도 떠나보내는 의식을 하는 거죠.

그러나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으면 나고 죽음이란 게 본래 없습니다. 잎이 새로 돋았다고 해서 나무가 살았다고 할 수 없고, 낙엽이 떨어졌다고 해서 나무가 죽었다고 할 수 없잖아요. 나무는 그냥 있고 잎이 그냥 순환할 뿐입니다. 이런 도리를 깨달으면 아쉽기는 하지만 떠나보낼 수 있어요. 아쉬운 마음은 집착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제법(諸法)이 공(空)한 도리를 알면 여러분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천도 기도는 좋은 곳으로 떠나보낸다는 마음을 냄으로 해서 마음속에 맺혀 있는 것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욕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남을 괴롭히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것을 ‘알게 모르게 지은 죄’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갚기 위해서는 베푸는 게 제일입니다. 물론 깨우치기도 해야 하지만, 일단은 베푸는 게 제일이에요. 그래서 재(齋)를 지내는 거예요. ‘천도재’, ‘49재’, ‘백중재’라고 할 때 할 때 ‘재’ 자는 제사 지낸다는 뜻이 아니에요. 귀신이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제(祭)’가 아니라 베푼다는 의미의 ‘재(齋)’입니다. 유교문화와 결합하다 보니 제사상을 차리기도 하는 것인데, 재의 핵심은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거예요. 상 차리는 것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베풂으로 해서 빚을 갚게 됩니다. 그럼 어떤 곳에 베푸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을까요? 가장 가난한 자에게 베풀 때 가장 효과가 있습니다.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과 병 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베풀 때 공덕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공덕이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배 불리는 것, 병든 이를 치료하는 것,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것,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외호 하는 것’ 이렇게 네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우란분재(盂蘭盆齋)’의 ‘재’ 역시 베푼다는 의미예요. 백중 기도를 할 때 염불을 하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이고, 그다음은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백중 기도 기간에는 배고픈 사람을 돕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하든, 재비를 내든, 베풀어야 합니다. 보통은 재비에 대해 재를 지내기 위한 경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베푼다는 의미예요. 그렇게 낸 돈으로 인도의 어린이를 돕든지 북한의 어린이를 돕게 되니까요. 백중 기도는 이렇게 베풂으로 해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졌던 빚을 갚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의미를 가진 문화라고 볼 수 있으니까 다 함께 백중 기도에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남편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왜 아침마다 절을 하느냐고 다그치는 남편에게 숙이지 못하고 함께 싸울 듯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요?
  • 다 같이 1000배 정진을 하기로 했는데, 대중의 요구는 자유롭게 참석과 이탈이 가능하도록 해달라는 것이고, 제가 익힌 수행적 관점으로는 정한 대로 지켜서 해보는 것입니다. 대중의 요구에 수순해야 하는지, 수행적 관점을 관철시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직장 동료가 자살을 해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떠난 직원을 위해서라도 가장 어두운 곳에서 외롭고 배고픈 사람들한테 내가 무엇을 베풀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침 수행법회가 끝나고 백중 기도가 이어지기 때문에 스님은 다 함께 백중 기도를 정성껏 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네. 법회 끝나고 백중 기도가 이어지니까요. 함께 살았던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 일가친척, 도반, 친구들을 생각하며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또 돌아간 사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잠시 명상을 한 후 곧이어 백중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약 30분 간 서울 정토회관을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다 함께 생방송으로 백중 기도를 한 후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정토대전 편찬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전국 법사단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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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감사합니다

2021-07-21 14:36:27

고경희

베풂~ 빚갚는 길

2021-07-20 13:05:41

보리나무

우리는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떠오르는 돌아가신 어머님,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면 여럿의 동료...
모두를 위해서 기도 합니다....

2021-07-19 17: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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