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7.15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
"불교 교리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윗밭에 풀을 뽑았습니다. 스님과 행자 한 명은 예초기를 돌리고 법사님들은 풀을 뽑았습니다.




얼마 전에 마늘을 뽑았던 밭은 어느새 풀이 무성했습니다. 밭과 밭 주변을 예초기로 말끔하게 풀을 깎았습니다.


법사님들은 고랑마다 자란 풀을 손과 낫으로 하나씩 다 뽑았습니다.

밭을 내려가며 길에 난 풀도 싹 깎았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오전 10시 30분부터 정토대전 사상팀과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문경 수련원과 연수원에서 법사님들도 회의를 하기 위해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불교사상팀에서 준비한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4선정, 12연기, 중도 등 각각의 사상 체계에 대해 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요점을 정리한 후 함께 토론을 해보았습니다.

토론을 마치고 나서 스님이 이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불교교리가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

“오늘 함께 읽은 소승 교리 해설을 보면, 소승 교리의 대부분이 붓다의 가르침을 인도의 전통 철학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자식이 죽어서 비탄에 빠진 여인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셨듯이 그 자리에서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붓다의 위대함이에요. 복잡한 교리는 이런 붓다의 모습과 전연 안 맞습니다.

불교 안에 들어온 문화적인 요소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세상을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이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 교리 역시 이렇게 복잡해졌고, 대승의 가르침이 새로 나오자 당시 사람들에게 다시 파격적으로 다가간 겁니다. 대승이 또 복잡하게 변해가니까 중국에서 일어난 선사의 가르침이 또다시 사람들에게 파격적으로 다가간 거예요.

소승 불교의 교리 해설을 보면, 어떤 설명에서도 윤회 사상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참신하게 교리 설명을 해도 대부분의 학설이 사람이 죽어서 윤회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불교 교리가 체계화되는 과정은 곧 불교가 인도 사람이 믿는 윤회를 수용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이 가르치셨던 ‘무아’와 ‘무상’은 윤회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윤회를 받아들여야 인도에서 불교가 정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교가 앞으로 기독교 믿음이 강한 문화권이나 무슬림 지역에 들어가려면 신성을 부정하고는 매우 어려운 것과 같아요. 유럽에서는 지금 자체적으로 비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불교를 바로 얘기해도 되지만, 중세처럼 기독교 문화가 아주 강한 상황에서 불교를 전파하려면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죠. 마치 천주교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제사를 안 지낼 수 없었던 것처럼요. 기독교는 이미 조선 사회에서 유학이 무너지는 시기에 들어왔으니까 제사를 안 지내고도 전파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들어오던 시기에는 제사를 안 지내고는 전파가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 결국 천주교는 제사를 수용했습니다.

이런 것처럼 불교가 인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윤회를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거기에 맞게끔 교리 체계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석을 읽어봐도 윤회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예 경전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불교 경전의 내용에는 윤회를 수용해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교훈적인 얘기도 있고, 지금 여기 깨어있어서 해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고, 이렇게 내용이 모순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전에는 아들이 죽어 슬퍼하는 여인에게 부처님께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가져오라’ 하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여인이 겨자씨를 구하다가 어떤 집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다는 것을 탁 깨달아서 ‘겨자씨를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해설한 주석서를 찾아보면 ‘그 여인은 전생에 어떤 관계였고, 그래서 깨달았고, 내생에는 어떻게 됐다’ 이렇게 설명이 나와 있거든요. 법구경 한 줄 한 줄이 다 그런 식으로 주석서에 해석되어 있습니다. 경전의 많은 부분이 전생 얘기이고, 신이 와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인도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인도에서 신은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신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경전에도 좋은 신, 나쁜 신 등 늘 신이 등장합니다.

이런 문화적인 요소를 정토대전에도 넣을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고수를 불교 음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인도 음식이거든요. 오신채를 안 먹는 것이 불교문화로 인식되고 있는데, 사실은 인도의 문화입니다. 그냥 하나의 문화로 생각하면 괜찮은데 철학으로까지 의미 부여를 해서 해석을 하거든요. 백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문화로 수용하고 갈 건지, ‘진짜 지옥이 있고, 지옥 중생이 천상으로 천도가 된다’ 이렇게 의미부여를 해서 갈 건지 선택을 해야 해요. 고수나 오신채, 백중 등이 문화적 충돌이라면, 윤회는 인도의 전통 믿음과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우리가 지금 같이 안고 있습니다. 문화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고 어느 정도까지 배격할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대로 다 수용하면 새로운 불교라고 할 게 없고, 다 배격하면 세상 사람들이 불교라고 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중도 안 지내고, 윤회도 안 믿고, 교리도 부정하면, 그런 것을 불교라고 알고 있던 사람은 ‘불교 아니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여기서 중도적인 선택이 필요합니다.

초기에 엄격하게 하고 나중에 점점 수용하는 길을 선택할 건지, 초기에 어느 정도 수용하고 대를 이어 가면서 배격할 건지, 이것도 선택의 일환이에요. 부처님은 초기에 배격을 하셨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문화적인 수용을 해왔습니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초기에 도교를 수용했고,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격이불교를 배제하는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초기에 도저히 안 먹히니까 이런 방식으로 간 거죠.

초기에 원칙적으로 철저하게 배격을 하더라도 대중화가 되면 결국은 수용이 됩니다. 대중은 문화적인 요소를 요구하기 때문에 계속 배격을 하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문화를 수용해 줘야 대중이 참여하지, 문화를 배격해 버리면 대중은 참여할 공간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문화를 잘못 수용하면 완전히 종교적으로 가게 되는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단계를 설정하는 수행론에 대해서도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스님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인도에는 요가 등 수많은 것에 오래 전부터 단계론이 존재해 왔습니다. 불교도 단계론의 영향을 받아서 사향사과(四向四果) 단계론이 나왔잖아요. 불교 초기에는 이런 단계론을 부정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에도 단계론이 나오니까 대승에서 단계론을 다시 부정합니다. 금강경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이 바로 이런 단계론을 부정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대승 후기에 가면 또다시 보살 52위(五十二位)라고 해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 (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이렇게 52단계론이 나옵니다. 나중에 선불교가 나오면서 또다시 단계론을 일거에 부정해 버렸죠.

사량 분별을 내려놓는 연습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든지 단계론을 원하거든요. 미국 사람들에게 명상에 대한 질문을 받아봐도 그렇습니다. ‘명상을 하면 얼마나 효과가 있나요?’, ‘제가 잘하고 있는지 어떻게 검증하나요?’ 이런 걸 계속 묻습니다. 그냥 명상을 하면 되는데, 이걸 하면 무슨 이익이 되는지, 무슨 효과가 있는지,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 늘 이런 질문을 하거든요. 그런데 명상이란 이런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로 잡고 앉아있는 것이 명상이 아니에요. 이런 사량 분별을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해가는 것이 명상인데, 명상마저도 지식과 기술, 효율, 이런 측면에서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이익이 안 되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익은 해탈이 아니고 주로 즐거움입니다. 명상도 즐거움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하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다리가 아프든, 졸리든, 이런저런 분별심이 일어나든, 그런 것이 있더라도 구애받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명상인데, ‘어떻게 하면 다리가 안 아플까요?’, ‘과거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하면 생각이 안 날까요?’ 늘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가령 ‘무슨 음식을 먹든 몸에 필요한 음식을 그냥 먹으면 된다’, ‘음식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 음식을 먹으면 맛이 어떠냐’, ‘이 음식은 몸에 얼마나 이로우냐’, ‘이걸 배부르게 먹어도 되느냐’, ‘이번에는 적게 먹어서 배고픈데 이래도 괜찮으냐’ 늘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런 복잡한 불교 교리도 사유하고 사색하면서 만든 것이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적 측면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면서 논쟁을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침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후손들이 이걸 또 주워서 논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불교사상팀의 발표를 마친 후 곧이어 사회사상팀에서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평화 문제, 성평등 문제, 정의 문제 등 불교에서 바라보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토론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농사일을 쉬고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보았습니다.

내일은 정토대전 경전팀을 담당하고 있는 법사님들이 두북 수련원에 와서 하루 종일 함께 회의를 하고, 공동체 법사단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6

0/200

김승동

음. 말로 말이 많으니 말을 삼간다.
이러고 나니, 할 말이 없다. 그냥 사상팀의 대화가 궁금하네요.
궁금해서 궁금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 그래도 도움이 될까해서요.
대화나 토론은 정리를 하는지요?
같은 주제로 일정 기간후 다시 또 대화나 토론을 하는지요?
열심히 하세요. 그럼 정진하세요.

2021-07-28 18:26:53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1-07-22 17:21:35

오호통재라

밑에 호오리한테 한말입니다. 그럼님이 오해할까봐 ㅎㅎ 윤회를 부정하는집단은 단멸론자로서 이는 상견보다 더 나쁜외도의 견해이다. 현생의 행복만을 위한다면서 그럼 뭐하러 이런활동을 하는가. 가슴에손을 얹고대답해보라.과연 여기서의활동이 진정행복한가. 아마 투표를해보면 결과가 말해줄것이다.왔다갔다하는 나이롱신자들이 더 행복할지도. 여기 상근직들의표정을보라.ㅠㅠㅠㅠ

2021-07-22 14:59:4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