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수영법당
정토회는 나의 동반자

개원 몇 달 만에 코로나 시대를 맞아 정리 마무리 단계에 있는 법당에서 윤수연 님을 만났습니다. 평지풍파라고는 없었을 것 같은 고고한 느낌과는 다른 수행담으로 여러 도반들에게 울림을 줍니다. 무슨 소임이든 척척 해내는 윤수연 님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정토회로 인도한 도반과 함께(왼쪽이 윤수연 님)
▲ 정토회로 인도한 도반과 함께(왼쪽이 윤수연 님)

인연

정토회를 만난 후 지난 몇 년 동안 제 삶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투잡으로 생활해야 해서 간 곳이 어린이집이었습니다. 처음 본 원장님은 친절했고 근무하는 동안 저를 많이 도와주고 편의를 봐주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4년 여 근무를 마치고 그 경험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던 2017년 여름 끝자락에, 차 한 잔 하자는 그 원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분은 대뜸 저에게 “너 깨장 아나?”하고 물었습니다. “무슨 께장요? 간장께장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제야 웃으며 “그래~ 네가 아직 알 리가 없지”하며 <깨달음의 장1>과 정토회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

본인이 그곳을 다녀온 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저였다며 불교대학과 <깨달음의 장>에 꼭 가보라고 권유했습니다. 평소 여러 절에 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선원도 아니고 또 ’ㅇㅇ사‘도 아닌 정토회라니 조금 의아한 생각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검색을 했습니다. 딱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던 제가 잠들기 힘든 날, 우연히 찾은 게 “희망편지” 사이트였습니다. 어느 스님인지도 모른 채 그 말씀이 너무 좋아 큰 위로를 받으며 몇 년을 계속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정토회에 계신다니! 그 즉시 버스 안에서 불교대학 신청을 했습니다. 희망편지라는 디딤돌이 없었다면 그렇게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가을, 처음 강의를 들으며 마음이 꽂혀 비로소 제가 찾던 곳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정토회는 저의 돈독한 인생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날들

과거를 돌아보면, 가난한 집의 3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렵게 공부를 마친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부잣집 남자친구와 6년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저보다 저를 더 많이 사랑했고 착했던 그 남자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보여지는 부유함, 화목함 이런 것들이 저를 가난한 환경에서 탈출시켜 줄 것이라 믿고 여기에 사로잡혔습니다. 시집가던 날 “여자는 열 두 폭 치마 폭이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간직한 채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지혜롭게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댁을 오가며 지내던 날이었습니다. 연세 들어 치매기가 있는 시할머님이 여러 자식들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장남인 시가로 오셨습니다.

연년생의 어린 딸과 아들을 키우기도 바쁜 상황에서 3년 동안 시할머님을 챙겨가며 봉양했습니다. 시할머님은 햇살 좋은 어느 날, 제 무릎에서 성품처럼 순하고 곱게 돌아가셨습니다. 시할머님의 장례식이 마무리되자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시부모님은 20년 동안 각 방 생활을 하셨고, 그런 생활로 파생된 불화로 시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시댁 식구들은 시아버지에게 무관심했습니다. 남편마저 모든 걸 저에게 떠맡겨서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받아 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시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7년 여의 악몽 같은 생활을 끝으로 시아버지는 70세를 못 넘기고 앙상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그때 아이들을 챙겨야겠다고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두북에서 김장 봉사(오른쪽에서 세 번째)
▲ 두북에서 김장 봉사(오른쪽에서 세 번째)

이혼

그럴 즈음, 남편의 외도를 알았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이유로 외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아이가 아파 애를 태우고 있어도, 필요한 때 나타나지 않는 남편에 대한 신뢰는 깨졌습니다. 더 이상의 결혼생활은 무의미하다고 마음먹고 있던 날, 남편에게서 이혼 소장이 날아왔습니다. 복잡한 심정으로 초등학교 5,6학년인 아이 둘을 데리고 북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 '와~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못살게 뭐 있노' 하는 대담함이 훅 올라왔습니다. 양육권과 재산권을 두고 법정 조정과 합의로 2년 간의 소송 끝에, 15년 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일체 양육비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두 아이를 안은 채 저는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식구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며 숨 가쁘고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 끝에 얻은 건 갑상선암이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생계 수단이던 공부방마저 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오자 밤마다 소리 내 울며 목소리 내는 연습을 했습니다. 전남편을 원망하고 불면증으로 술을 마시며 나 자신을 힘들게 하던 중 조금씩 목소리가 회복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갑상선 수술 때 발견된 편도 변이로 또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친정엔 알리기 싫었습니다. 아이들이 미성년자라 보호자가 되어 줄 수 없었기에 보호자로서의 남편이 필요했습니다.

재혼

힘든 시기 장애인 봉사 활동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 역시 부인이 가정을 파탄 내고 나간 사정이 있었기에 역지사지의 입장을 서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산이 없으며 성실성 하나밖에 내세울게 없다고 고백했지만 그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결혼생활이 시작되었고, 그이는 아이들과의 관계가 좋아 빈자리였던 아버지 역할도 충분히 잘해줬으며 저를 챙겼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의 등록금과 생활비가 늘 부족하여 공부방을 접고 월세 내는 어린이집을 했습니다.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건물이 팔려 비워 주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빚을 내서 어린이집을 짓고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돈 없는 지금의 남편이 보였습니다. 보호자로서의 남편 역할만 해주면 된다는 저의 욕심 없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남편의 경제력 없음을 탓하며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갱년기와 겹쳐 최고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때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맨 오른쪽)
▲ 부처님 오신 날(맨 오른쪽)

정토회에서

불교대학을 다니며 2018년 <깨달음의 장>에 다녀왔습니다. 10년 동안 눈물도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온 저는 그곳에서 눈물샘이 터져 흘러넘쳤습니다. 미움과 원망으로 점철된 힘든 마음을 친정 식구들에게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더 많이 숨기고, 강한 척 당당한 척 철저하게 위장하며 살았습니다. 그게 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불교대학을 마치고 경전반에 들어가고 천일결사2 백일기도에 동참했습니다. 처음엔 절반 밖에 채우지 못한 적도 많았지만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참회의 눈물로 자신을 돌아보며 꾸준히 해나갔습니다. 그러자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던 저의 속물근성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과 참회

부잣집 아들이라는 사실과 착하다는 이유로 우유부단함은 보지 않고 선택한 첫 번째 결혼. 돈 벌어 성공하겠다는 저의 욕심과 편리에 맞추었던 두 번째 결혼. 이로 인한 과보는 저에게 깊은 상처만 남겼습니다. 결국 모든 건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옴을 알았습니다. 어리석음과 무지에 빠진 내 모습, 야망이 있는 내 모습도 봤습니다. 겹겹이 쌓였던 응어리가 이렇게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보며 정토회가 소개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하는 것마다 재미있었고, 환희심이 났고 하기 싫은 마음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법당 소임도 맡아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2019년 6월, 경찰서에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 온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전남편이 고독사로 3개월 간 방치되어 무연고 시신이 되었는데, 추적 끝에 저에게 연락이 왔던 것입니다. 죽어서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외면 받고 비참하게 떠난 사람. 그 많던 집안의 재산은 이혼 후 탕진하여 억대의 빚만 남기고 간 사람. 나를 버렸다는 원망과 미워했던 마음은 허망했고 연민만 남았습니다. 법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안타까웠는데 마침 백중3기간이어서 기도를 잘 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한 때는 저도 사랑했던 사람이라 가슴 한구석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기도하면서 알았습니다. 동짓날, 제가 살아오는 동안 전남편에게 어떻게 했는지 살피고 참회하는 의미로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같이 사는 동안은 사랑했고 또 결혼할 때 어떠한 시련이 와도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한 맹세를 깬 저를 참회했습니다. 전남편은 어릴 적 엄마 사랑을 받지 못하며 성장했고 돈으로 때워진 아버지 사랑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무연고자로 삶을 마감했으니까요. 이제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전남편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고백했습니다.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고 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덧붙여서요.

기도의 힘

천일결사 기도를 해서 경제적으로 더 좋아졌거나 꿈이 이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는 넘어졌을 때 넘어진 줄 알며, 화나고 짜증 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탓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빚도 갚아 나가야 되고 집안 경제도 책임져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전보다 마음이 힘들지 않고 행복합니다. 지금의 남편에게도 “당신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나의 보호자입니다”라고 제목을 부쳐 참회하며 기도합니다.

불교대학 홍보 때(맨 가운데)
▲ 불교대학 홍보 때(맨 가운데)


경영자로서의 사적인 일과 법당 소임까지 맡아 일을 하는 윤수연 님은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커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보이는 감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삶의 질곡을 헤치며 지나온 사람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은 윤수연 님, 그 모든 것이 수행의 힘이었음을 느끼며 많이 배웠습니다.

글_고정희(해운대 정토회 수영법당)
편집_한숙(서초정토회 서초법당)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2.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3. 백중불교 7대 행사의 하나. 돌아가신 조상님을 생각하며 천도재를 지냄. 

전체댓글 18

0/200

최수정

가을불대 우리조 스텝으로 알고 있는 윤수연 보살님~~!!^^
마음 다해 나누기 해주셨던 내용 그대롭니다.
저도 마음 깊이 있는 내 속을 다 내놓고 진정 행복한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늘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얼굴에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사연들을 대단하고 존경 합니다.♥

2021-04-22 05:01:04

강현화

질곡의 세월을 부처님의 법으로 돌이키신 것을 보고 배워 갑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3-24 18:46:14

수영법당 이정수

더 넓은 대자연의 땅,
大地(대지)같으신 그대의 굴곡진 삶을
숭고한 떨림으로 찬미합니다.

일어날 수 있음은
헤쳐갈 수 있음이기에

그대의 성실함은
삶의 밑거름이 되어

참자유와 참행복의 과실로
꽃피우리라......

2021-03-23 11:38:41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수영법당’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