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수영법당
내 인생의 울타리

불교대학을 졸업하며 받은 법명이 예쁘고 마음에 쏙 들어 아예 속명까지 개명한 수영법당 모듬장 이수미향 님. 맑은 피부와 티 없이 밝은 미소가 이름처럼 예쁩니다. 긴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한창일 때, 적극적인 활동으로 법당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수미향 님을 만났습니다.

늘 슬프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저는 울산에서 떨어진 시골의 유복한 과수원집 2남 5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적 부터 저는 유달리 감수성 예민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는 늘 술을 마시고 새벽에 귀가해서는 엄마를 힘들게 하며 매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 호인이었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180도 돌변해서 우리 형제들은 바들바들 떨면서 숨죽이며 날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자그마한 체구에 말수가 적었던 어머니는 환갑쯤 실명한 할머니를 90세가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30년간 극진히 모셔 효부상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저러시는 건 병이니까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라’ 며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한 시간에 가까운 시골길을 걸으며 학교를 오가는 시간은 늘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학교에 가면 꾸벅꾸벅 졸았고, 칠판에 매 맞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혹시 엄마가 집을 나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졸임에 공부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학교 성적은 항상 하위권에서 맴돌았던 저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월요일만 되면 학교 가기 싫었습니다.

학교를 땡땡이치기 일쑤였고 나중엔 선생님과 언니 앞에서 몇 번이나 자퇴하겠다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평소 저를 어여삐 여기던 선생님은 고집을 굽히지 않는 저를 체벌하기까지 했습니다. 언니는 ‘고등학교도 안 나오면 네 장래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며 저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나서야 학교에 다시 나갔습니다.

죽림정사에서 봉사하면서
▲ 죽림정사에서 봉사하면서

시누이는 나의 평생지기

다행히 학교에서 지금껏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제도에서 울산으로 유학 온 그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진취적이며, 굳건하게 잘 살았습니다. 저는 졸업 후 집을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 형제들이 부산에 정착하게 되어 저는 친구와 둘이서 지냈습니다.

형제들의 보살핌과 경제적인 지원 아래 평범하게 지내고 있던 날, 친구가 자신의 남동생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이는 제 아버지와는 반대되는 성향이고 시골 생활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 서로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남자를 소개받은 사실을 알고 일사천리로 결혼을 진행시켜 저희는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제 친구는 저의 시누이가 되었습니다.

결혼해 보니 남편은 제가 존경할만큼 높은 인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를 아껴주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첫아이를 낳고 지병처럼 저를 감싸고 있던 우울증에, 넋 나간 사람처럼 아이도 팽개친 채 제 감정에 빠져 살았습니다. 시누이가 된 친구가 가까이 있는 시댁을 오가며 수시로 들러 애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행히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둘째가 태어났을 땐 증상이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법복을 입은 행인과의 연결고리

자주 집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간대에 법복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에 가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우연히 학부모 모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정토법당과 불교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에겐 큰 벽으로 느껴졌던 불교대학이 그리 문턱 높은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학부모의 인도로 처음 해운대 정토회를 갔습니다. 2010년 8월이었습니다. 9층에 있는 법당에 들어서니 여느 사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보살 한 분이 법복을 차려입고 목탁 치며 예불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진 일반 신도가 목탁을 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지라 좀 의아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색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법문을 듣는데, 처음에는 다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조목조목 알기 쉽게 풀이해 말씀해 주시는 부분에서는 참 가볍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마음나누기’를 하는데 처음 해 보는 것이어서 갑자기 무엇을 들었는지 머릿속이 멍해지며 떨리기만 했습니다. 제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저를 누르고 있던 자괴감과 스님의 법문을 듣고 뭔지 모르게 한결 홀가분해진 기쁨 같은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날로 바로 가을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대학 졸업식에서 (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 째 이수미향 님 )
▲ 불교대학 졸업식에서 (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 째 이수미향 님 )

소풍처럼 나간 천일결사, 혹시 사이비?

입학 후에 한 달도 채 안 되던 날이었습니다 ‘천일결사’라는 걸 하는데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남편과 초등학교 4, 3학년 이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김천체육관에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도시락 싸 들고 여기저기서 서로 보살님! 법사님! 하는 모습을 보니 ‘아! 내가 사이비종교에 들어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남편에게 너무 부끄러워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하는 생각만 머리에 꽉 찼습니다.

남편은 스님의 법문을 상당히 귀 기울여가며 듣고는 여기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얼떨결에 가족 네 명이 입재를 했습니다. 끝날 무렵 저는 그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외치며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대학을 마치고 경전반 다니면서 스님의 300회 강연 홍보 활동을 하며 졸업을 했습니다.

저의 이유 없는 고독감과 우울함이 어디서 오는지, 스님의 법문을 듣고〈깨달음의 장〉과〈나눔의 장〉에 다녀오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어머니에겐 제일 힘든 시기여서 남몰래 혼자 많이 울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막내였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책임지며 그 압박감에 늘 짓눌려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왠지 조금은 이 회색빛 같은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졌고, 저를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대학 홍보 중 ( 맨 오른쪽 이수미향 님)
▲ 불교대학 홍보 중 ( 맨 오른쪽 이수미향 님)

'훌륭하다'는 그 한 마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법문을 받아들이며 지내던 무렵, 이 좋은 법문을 공짜로 듣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비록 잘 모르지만, 막연히 목탁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희망자가 여럿이었지만 운 좋게 저에게 기회가 와서 그 후 사시 예불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대연법당이 새로 생기면서, 해운대법당에서 지역이 가까운 도반들이 불사팀에 참가하며 한가지씩 소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시예불을 담당했습니다.

자존감도 낮고 아무것도 잘하지 못한다는 열등감과 우울증까지 안고 있던 저를, 총무 도반은 다 같이 회의할 때 여러 사람 앞에서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참 훌륭하십니다’라는 말을 난생처음 들어보는 순간, 저는 ‘훌륭하다’는 그 단어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후로도 총무 도반은 자주 그 말을 해주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었나 봅니다. 거기에 장단 맞추듯이 저는 더 일하고 싶어졌습니다. 그 무렵이 아마 제 자존감이 제일 높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중, 천도재 법주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처음엔 실수할까 봐 몸도, 목소리도 떨며 경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어느 날 스님 법문에 ‘맨 처음 소임을 맡다 보면 하는 사람도 떨리고 보는 사람도 떨린다. 그렇지만 우리는 해 나간다’는 말씀은 저를 위해 하시는 법문 같았습니다. 그러기를 3년, 소임을 마친 후 해운대법당으로 다시 돌아가 법회팀장을 맡았습니다. 총무 도반은 여전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총무 도반은 저에게 많은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도반이 최고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때그때 인연 닿는 대로 하라는 스님 말씀 따라 작년에 개원한 수영법당으로 옮겨 모듬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행을 해오며 저는 미처 몰랐던 제욕심을 알아차렸습니다. 소임을 부탁받을 땐 ‘못한다 병’에 걸려 선뜻 받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다 생각되는 일만 맡았습니다. 그건 제 용량은 작아도 실수하기 싫고 책임지고 싶지 않은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수영법당 개원식 (오른쪽 두번째 이수미향 님)
▲ 수영법당 개원식 (오른쪽 두번째 이수미향 님)

비로소 깨달은 나를 둘러싼 따뜻함

그리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걸 모르고 바깥에서 찾아 헤매고 다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결같이 성실한 남편과 아무 탈 없이 잘 커준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채 살았습니다. 순전히 제 감정에만 사로잡혀 외롭다, 슬프다, 우울하다며 고파병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회의 눈물로 끊임없이 절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 시간은 저에게 환희심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수행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일을 할 땐 연구하며 즐겁게 하라’는 스님 말씀을 되새기며 on-line(온라인) 시대를 대비해 새로운 시스템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부처님 법 만나 안개비에 옷 젖어 들어가듯 수행해온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 법으로 바른길 이끌어주신 제 인생의 멘토, 스승님을 만난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온 가족의 응원 아래 행복하게 수행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를 온전히 보호해주는 법의 울타리 정토회! 이 속에서 저는 안정과 평화로움을 찾았으니 앞으로도 감히 이 길을 박차고 나갈 용기는 추호도 없습니다.

글_고정희 (해운대정토회 수영법당 )
편집_임도영 (광주정토회)

전체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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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안

저도 불자지만.. 참불자의 마음으로 사시네요..응원합니다

2022-03-16 08:38:12

수영법당 이정수

[앞글 이어서]

법회 때 천도재를
청아한 목소리로
완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산중 선사의 거룩한 독경
못지 않음에 감탄했습니다.

후배 도반들의 모범이
되어주시는 수미향님의 앞길에
찬란한 햇살이 함께하여
해탈 열반하시길 바랍니다.

2021-03-24 18:38:46

수영법당 이정수

수미향님의 글을
늦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무게 많큼
수행의 깊이도 남달리
크신 것 같습니다.

제가 수영법당
불대생 1기로 입학하였을 때

주간반 불대 소임을
맡으시면서 갓난아기 법당인
수영법당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애스런 마음을 보았고

법회 때 천도재를
청아한 목소리로
완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산중 선사의 거룩한 독경
못지 않음에 감탄했습니다.

2021-03-23 14: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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