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3.16. 통일의병학교 영상촬영, 통일특위 특별법회 법문 촬영
“우리 민족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에서 하루 종일 강의를 하고 그 내용을 촬영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통일의병학교 3강,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통일특별위원회 특별 법문, 저녁 7시 20분부터 7시 50분까지 행복TV 촬영,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통일의병학교 4강 강의를 촬영했습니다.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통일의병학교’는 작년부터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전국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통일의병학교에 입학하면 역사와 통일에 대한 5회의 영상 강의를 보고 함께 토론하며 통일의 비전을 그려봅니다. 3,4강은 동북아역사기행 강의를 편집해서 보았는데, 영상이 오래되어 오늘 다시 찍게 되었습니다.

평화재단 3층에서 오전 10시부터 3강 ‘역사관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를 주제로 촬영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역사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같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라는 말에는 공간적 관계와 시간적 관계가 있습니다. 공간적 관계란 나와 네가 손을 잡고 우리가 되는 관계를 말하고, 시간적 관계란 어제에 이어서 오늘이 이어지고, 오늘에 이어서 내일이 이어지는 관계를 말합니다. 공간적 관계를 사회라고 말하고, 시간적 관계를 역사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런 관계 맺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두고 ‘사람은 사회적 역사적 존재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역사적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개인의 역사도 있고, 한 지역의 역사도 있고, 한 민족의 역사도 있고, 세계의 역사도 있고, 인류 문화사도 있는 등 여러 종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의 시원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대한제국에서 왔습니다. 대한제국은 조선왕조의 이름을 단지 바꾸었을 뿐입니다. 조선왕조가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해서 종속국이 되자, 그 주권을 되찾으면서 ‘대한’이라는 나라 이름을 쓴 겁니다. 그럼 조선왕조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왕조에서 임금의 성만 바뀐 겁니다. 고려왕조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고구려를 잇는다고 해서 후고구려라고 했다가 ‘후’ 자를 빼고 ‘고려’라는 이름을 쓴 겁니다. 그래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습니다.

그럼 고구려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나는 해모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부여의 계승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여를 처음 세운 해모수는 ‘나는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을 단군의 자손이라고 규정한 겁니다. 단군이 세운 나라가 조선입니다. 조선을 세운 단군은 ‘나는 환웅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나라입니다. 배달나라를 세운 환웅은 ‘나는 환인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환인이 세운 나라가 바로 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를 세운 환인은 나는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의 시작은 ‘한’ 나라입니다.

현재 발굴된 유적으로 살펴보면 어떨까요? 동북아 대륙에서 일어난 문명의 시원에는 황하 문명과 요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요하 문명이 조금 앞섰고, 황하 문명이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크게는 각각 독자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 기원은 달랐듯이 황하 문명과 요하 문명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사이의 거리보다 황하 문명과 요하 문명의 거리가 더 멉니다. 이 두 문명은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상호 교류도 하고, 충돌도 했던 겁니다.

동북아 대륙에서 가장 앞서 나갔던 배달문명

우리 역사의 뿌리는 이 요하 문명이라는 것이 점점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요하강 상류 유역에서 기원전 4700년에서 2900년 경의 유물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는데, 이를 중국에서는 요하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부가 처음 발굴되었는데, 홍산에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홍산문명(紅山文明)이라고도 부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요하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의 연대가 우리의 배달시대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이 문명은 ‘배달문명’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명을 계승한 것이 단군 조선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적어도 한(漢) 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인 B.C 2세기 전까지는 우리가 중국보다 더 앞선 문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우리가 훨씬 앞선 문명이었는데, 철기시대로 들어오면서부터 중국 문명에 밀리기 시작한 겁니다. 철기가 나오면서 중국은 양자강 이남을 개척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우리는 중국보다 앞선 청동기 문명에 안주함으로 인해 새로운 개척에 지지부진했던 겁니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은 건조지대에서 일어납니다. 중국도 서쪽 황하유역이 건조지대입니다. 요하문명의 발굴지인 요하 상류 지대도 건조지대입니다. 중국은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양자강 이남으로 뻗어나갔고, 우리는 요하 상류 지대에서 만주지역으로 문명이 뻗어나간 겁니다. 건조지대에 있던 더 앞선 문명이 남쪽으로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이 환웅의 배달나라입니다. 그것을 계승해서 단군의 조선 나라가 더욱 새로운 문명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배달문명은 청동기는 훨씬 앞섰지만, 철기가 나오면서 앞선 문명의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겁니다.

문명이 앞서면 항상 거기에 안주하게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지지부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유선 전화는 미국이 훨씬 앞서 있었고 무선 전화도 미국이 개발했지만 한국이나 중국도 같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유선을 설치해서 사용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바로 무선으로 전환을 해버렸기 때문에 미국보다 더 빠르고 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국 지하철이 미국 지하철보다 편리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공항보다 한국 공항이 훨씬 잘 지어진 이유도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신흥 강국인 중국이나 베트남이 한국보다 훨씬 더 잘 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선진문명이 지금에 만족하면 새로운 욕구를 덜 느끼게 되어서 곧 후진문명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주변의 후진문명이 더 앞서 가게 됩니다. 역사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발전과 쇠락을 거듭합니다.

처음으로 일어난 의병, 다물군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부터 2000년 전 사이에는 북방 기마민족과 남방 농경민족 사이에 굉장한 각축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중국의 침략을 거뜬히 물리쳤다면, 2000년 전부터는 오히려 우리가 중국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겁니다. 최초의 침략은 한나라 군대였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분열되었고, 번조선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 민족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저항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삼한으로 분열이 되었고, 침략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회복하고자 민간에서 최초의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게 ‘다물군’입니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자는 ‘다물사상(多勿思想)’입니다. 다물군 출신 중에 한 사람이 고조선의 회복을 건국이념으로 해서 새로운 국가를 세웠는데 그게 고구려입니다. 옛 영토를 회복한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게 다시 고려로 이어진 겁니다.

이런 민족사를 제대로 정립해 놓지 않으면, 우리의 민족사를 자꾸 중국의 변방사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물론 중국에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면 중국에 위축되는 측면도 생기고, 중국을 미워하는 측면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국을 이웃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뿌리가 달랐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다 보니 충돌과 협력을 거듭해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많은 시간 동안 서로 경쟁하면서 협력을 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이유

우리 민족이 신라시대에 정교한 예술품을 만들 수 있었고, 고려시대에 대장경과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었고, 조선시대에 한글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민족에게 남다른 고대 문명의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방민족은 문명을 수입해서 사용할 뿐 자기 창조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뿌리부터 가장 선진적인 문명으로 창조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때의 쇠락이 있었지만 다시 부흥을 이어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한류 문화는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변방 문화에서는 절대로 이런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런 훌륭한 문명사적 DNA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이웃 나라끼리는 서로 침략하기도 하고 침략을 당하기도 하면서 원한과 협력을 함께 간직합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지나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갖는 이유는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족사를 잘 정립해서 이런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되면, 한국 사람들의 창조력이 굉장히 앞서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여는 통일의병

이런 희망이 있는 반면 우리 앞에는 전쟁의 위험이라는 큰 장애물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이룬 모든 것들을 일시에 잃어버리기 때문에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합니다.

남한과 북한은 지난 세기에 분단된 상태에서도 경쟁을 하면서 여기까지 발전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이제 그 발전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남북통일은 물론이고 주변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쪽으로만 열려있지 북쪽으로는 닫혀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북방까지 열려야 국가발전에 새로운 비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만들게 되면, 우리가 그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세계 문명의 중심이 지금 양적인 측면에서는 동아시아 쪽으로 일부 옮겨오고 있습니다. 저는 한 세기 이내에 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옮겨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이루고 문명의 중심국으로서 창조성을 발휘해 나간다면, 불행했던 과거 100년을 딛고 희망찬 미래 100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또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만에 찾아온 기회입니다. 지난 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는 한반도 안에 갇혀 있어 늘 약소민족이라고 평가되어 왔습니다. 이제 천 년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을 이루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함께 하는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한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는 일본과 미국, 북한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는 중국과 러시아도 함께 아우르는 통일 국가를 이루어야 통일된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남한이 중심이 되어 무력으로 통일을 해서 중국,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가 된다면 영토가 조금 넓어졌을 뿐 통일의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1+1은 2가 되는 관계일 뿐 5가 되고 10이 되는 관계로 상승 발전하지는 못하는 겁니다. 5가 되고 10이 되는 통일이 되려면 평화적으로 통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는 통일 지상주의는 지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평화만 지키면 되지 통일을 꼭 해야 하나’ 이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은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함께 만들어가는 통일이어야 합니다. 평화를 지키는 것은 현재의 이익을 보장받는 것이고, 통일을 이루는 것은 미래의 이익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비전은 충분히 달성 가능합니다. 남북이 평화적 통일을 이루고, 동아시아 주변국과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서 협력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간다면, 우리는 세계 문명의 한 축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희망을 우리가 같이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큰 꿈을 품고 통일의병을 만든 겁니다. 시민단체 하나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에요. 마치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다물군을 만들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그런 큰 희망을 품고 통일의병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전 촬영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부터는 서초 정토법당으로 자리를 옮겨 통일특위를 위한 법문 촬영을 했습니다. 3월 14-15일에 예정되어있던 특위의병대회가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통일특위 특별법회’로 대체하기로 하고 오늘 촬영을 했습니다.

통일특위에서는 활동가 전체를 대상으로 미리 사전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질문을 직접 읽고, 하나씩 답해주었습니다.

  • 현재 국내외 정세 전망이 궁금합니다. 남북관계가 교착되어 있는데, 북한은 왜 방사포를 쏘는 건가요?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 4.15선거와 코로나19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현 시국 속에서 선거를 바라보는 관점과 통일특위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 현재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의견이 많습니다. 선별해서 중위소득 이하 두 달간 합해 60만 원 지급, 국민 모두에게 100만 원 지급, 대구처럼 재난지역에만 특별재난 기본소득 지급 등 경제에 활력이 되고 국민들에게 힘을 주자는 의견과 재원조달 문제 등 인기영합 정책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스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신입 특위 의병으로서 아직 두렵고 의지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특위의병으로서 자세와 마음가짐을 알고 싶습니다.
  • 9차에는 법당 활동보다 특위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10차 천일결사에서는 법당에서 모둠활동을 하게 되면 법당 모둠활동에 집중해야 할지 아니면 특위 활동에 집중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 10차 천일결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특위의 목표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 좌절한 젊은이들이 특정 종교에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런 젊은이들을 수행자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시 40분까지 통일특위 활동가들을 위한 법문을 하고 10분 쉬었다가 정토회 통일의병을 위한 법문을 촬영했습니다.

저녁 7시 20분부터는 다시 평화재단에서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행복TV’ 촬영을 했습니다. 행복TV는 평화재단에서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입니다. 기존 유튜브 채널이 주로 개인적인 고민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새로운 채널에서는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에 대해 법륜스님과 통찰력 있는 해법을 찾아봅니다. 첫 방송 주제는 코로나19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방송 내용은 유투브에서 곧 만나실 수 있습니다. 30분간 촬영을 마치고 이어서 저녁 8시부터는 다시 통일의병 4강 강의 촬영을 했습니다. 4강은 ‘독립운동사와 진정한 독립운동의 길’이 주제였습니다.

“근대에 일어난 독립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북간도의 경우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조선인의 수가 중국인에 비해 열 배가 넘습니다. 특히 희생된 여성 독립운동가 삼백여 명 중에 중국인은 세 명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조선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독립운동사가 빈약하게 된 이유

특히 1920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투쟁을 하려면 좋으나 싫으나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동북삼성 지역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투쟁을 하려면 소비에트 공산당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남쪽 지역은 중국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에 소속된 사람들은 국민당 정부 아래에서 반공산주의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나 반공산주의에 뜻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있는 위치가 미국이면 미국과 협력하고, 중국의 남쪽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 국민당과 협력하고, 동북삼성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 공산당과 협력하는 식이었어요.

조선인들이 무장 독립운동을 펼친 만주 지역은 다 중국 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던 영역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인들은 동북지역에 있는 항일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연합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連軍)입니다. 동북지역에서 민족을 뛰어넘어 일본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치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동북항일연군에 포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에 해방이 된 후 남북이 분단되고 1948년에는 남한과 북한에는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중에 옛날 소비에트 공산당에 관여했거나, 동북항일연군에 관여했거나, 김원봉처럼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월북해서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은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김원봉은 지금까지도 서훈을 못 받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에 기여를 했다면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남한이 북한과 정통성 경쟁을 하다 보니 독립운동사에서 그 기록을 전부 제거시키게 된 겁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중국 남쪽 지역에서 국민당에 관여했거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안 했습니다.

이 외에도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는데 북한에서 숙청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고, 월북해서 부수상까지 했지만, 김일성 유일권력을 만드는 과정에서 숙청당했습니다. 숙청을 당하다 보니 북한에서도 인정을 못 받고,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 사람이니까 남한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천 년 전 옛날 사람만 잊혀진 게 아니에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정통성 경쟁을 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많은 독립운동사가 그냥 묻혀 버린 거예요. 그게 지금까지도 회복이 안 되고 있습니다. 영화 암살에 김원봉 이야기가 나오자 김원봉을 서훈하자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보훈처에서는 이 사람이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줄 수 없다고 밝혔죠, 왜냐하면 보훈처의 서훈 관련 심사 규정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또는 적극 동조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포상에서 제외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독립운동사에서 다 빠지니까 천안 독립기념관에 가보면 독립운동가라고 기록할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겁니다. 이념이 좌우로 나눠지기 전인 1920년 이전의 역사와 3.1운동, 조선어학회 사건 외에는 독립운동이라고 기록할 게 거의 없는 거죠. 왜냐하면 1920년 이후 무장 독립투쟁에는 남쪽의 민족주의 진영에서 참여한 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폭탄 의거, 강우규 의사의 폭탄 의거 등 몇 가지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사가 빈약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겁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 나면 '힘이 부족해서 지긴 했지만,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해봤구나' 이런 자긍심이 들지 않습니다. 별로 한 게 없다고 느끼거나, 아주 작은 사건을 영웅화시킨 이야기밖에 없다고 느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운동사가 다시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역사가 오래되어서 묻힌 게 아니고,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자기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바람에 발굴되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미완의 독립운동

우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을 곳곳에서 전개했고, 결국 1945년에 광복이 되었습니다. 그럼 1945년에 우리의 독립운동이 끝났느냐? 그건 아니에요. 독립운동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세로부터의 독립이고, 하나는 지배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이에요. 1945년에 우리는 외세로부터의 독립은 이루었지만, 분단으로 인해서 독립운동의 역사가 왜곡이 됐고, 독재 체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4·19 혁명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작년이 3.1운동 100주년이었는데요.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외세로부터의 자주권을 획득해 왔을 뿐만 아니라 지배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인 '민'이 주인이 되는 운동 또한 면면이 이어왔습니다. 그래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모두 독립운동사라고 정리해야 진정한 독립운동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남북이 분단되어 있어서 상당 부분 외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진정한 자주 독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3.1운동 정신의 한 부분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더욱더 심화발전해야 민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분기점이 되는 까닭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민주주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와 통일입니다. 나머지 과제는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1800년대 초에 민이 봉건 지배세력에 저항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3.1운동을 거쳐 200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그 분기점이 3.1운동입니다. 왜냐하면 3.1운동 때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봉건 지배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모두 다 천명하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광복운동 뿐만 아니라 ‘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대한민국 수립 운동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다시 100년 동안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만약 3.1운동이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하나로 꿸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건국이념에 안 넣었으면 5000년의 민족사가 중간에 끊어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3.1운동 당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호를 쓴 이유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명확하게 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대적 과제는 첫째, 나라가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민'이 나라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적 과제를 향해 지난 100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물론 아직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분단 극복과 통일, 그리고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입니다.”

밤 10시가 다 되어 마지막 촬영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서초법당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쳤습니다. 코로나19로 일상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강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명을 두고 법문을 할 때나, 수백 명을 두고 법문을 할 때나, 카메라 앞에서 법문을 할 때나 스님의 모습은 한결같았습니다.

내일은 평화재단에서 하루 종일 각종 회의를 하고, 업무를 볼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7

0/200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07-03 22:38:12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07-01 11:34:14

김은경

항상 무엇인가를 얻어가는 스님의 말씀
항상 즐겁고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5-11 13:23:3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