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5 인도성지순례 3일째(사르나트) B팀
“저 멀리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곳이 화장터입니다.”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B팀이 사르나트를 순례하는 날입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5시 50분에 숙소를 출발해 걸어서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설하기 위해 걸어서 녹야원으로 향했듯 뚜벅뚜벅 새벽길을 걸었습니다.

대중은 버스를 타고 사르나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고, B팀 참가자 225명이 한 줄로 서서 스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먼저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서 법을 설한 다르마라지크 스투파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지심귀명례 석가모니불, 지심귀명례 석가모니불, 지심귀명례 석가모니불...”

한 배 절을 한 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세 걸음씩 걸었습니다.

대중이 모두 입장하자 다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두 번째로 법을 설한 장소인 다메크 스투파를 향해 걸었습니다.

다메크 스투파가 보이는 널직한 공터에 줄을 맞춰 자리를 깔고 앉아 예불을 올렸습니다.

스님은 성지순례 참가자들을 위해 축원과 발원을 한 후 부처님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한 정황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 살고 있던 야사라는 청년이 출가를 하게 된 사연과 최초의 재가 수행자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 사르나트에서 초전법륜(初轉法輪) 후 부처님과 다섯 제자, 이렇게 모두 여섯 명의 깨달은 이(아라한: 阿羅漢, arhat)가 정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사의 출가

당시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구리가 장자(俱梨迦長者)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야사(耶舍)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야사가 마차를 타고 이 숲 근처를 지나가면서 버려진 시체를 보자 인상을 구깁니다. 냄새도 나고 모양도 흉측한 시체에 파리가 붙어 있는 광경이 보기 좋진 않았겠지요. 그러다가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명상하는 수행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는 시체 한 구만 보고도 인상을 썼는데, 여러 시체가 흩어져 있는 사이에서 편안하게 정진을 하는 수행자를 보게 된 거예요.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존경심이 솟아나서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날 저녁, 파티를 하고 유흥을 즐긴 야사는 술에 취해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어납니다. 그리고 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그렇게 아름답던 무희들이 전부 술에 취한 채 널부러져서 잠을 자고 있었어요. 침을 흘리고 토해 놓고 쓰러져 있는데다가 주변에 음식과 술도 여기저기 흩어져 한마디로 난장판이 된 모습을 보자, 전날 자신이 숲에서 본 시체들이 아무데나 뒹구는 모습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며 하며 집을 뛰쳐나와서, 전날 숲 속에서 본 수행자를 다시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부처님을 다시 뵙고, 법을 청해 들은 후 깨달음을 얻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야사는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평소 야사의 행실을 보면 수행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쾌락을 즐기던 부잣집의 외아들이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는 단박에 깨달음을 얻고 출가수행자가 됩니다.

야사가 그렇게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가진 경험 때문입니다. 야사는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극도의 즐거움이었던 것이 다음 날 새벽 극도의 괴로움으로 바뀌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즉, 락(樂)이 곧 고(苦)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고집멸도(苦集滅道)에서 첫 번째 단계인 고성제(苦聖諦)를 이미 체험한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설법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사라지자 그의 아버지인 구리가 장자는 아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곳에 오려면 바루나 강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 그 바루나 강변에 벗어놓은 야사의 신발을 보고 구리가 장자는 바로 이곳으로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경전에 보면 야사가 벗어놓은 신발이 백천의 가치가 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부잣집 아들의 신발이라서 온갖 장식이 된 아주 비싼 신발이었던 것 같아요. 어제 이 설명을 들은 누군가가 그 신발은 ‘샤넬 구두’라고 비유해서 웃었어요. (모두 웃음)

이곳에 오게 된 구리가 장자도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곧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야사는 돌아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들의 대화가 경전에 아주 재미있게 나와 있습니다. 구리가 장자는 야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부잣집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수행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서 어떻게 자며, 어떻게 음식을 먹고, 독충과 야수들이 우글거리는 이 숲속에서 네가 어떻게 산단 말이냐?’

아버지는 이렇게 걱정을 하는데 아들은 거꾸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한 번 보세요.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해 보입니까? 그런데 왜 내가 그 괴로운 세계로 또 들어가야 합니까?’

이렇게 부자 사이에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건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 사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반왕은 늘 아들이 뭘 먹는지, 뭘 입는지, 잠자리는 어떤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부처님의 법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재가 수행자, 구리가 장자

그런데 구리가 장자는 꽤나 영리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아들의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동의해서, 아들의 권유로 부처님의 법문을 청해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구리가 장자는 출가하지 않고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수행할 것을 발원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십니다. 깨달음을 얻은 구리가 장자는 이렇게 부처님께 고백했습니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고
덮인 것을 벗겨서 보여주심과 같고
길을 잃고 헤메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심과 같고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춰 주심과 같이
갖가지 법으로 저희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단에 귀의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칭찬을 하시며, 구리가 장자에게 재가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을 주십니다.

첫째,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한다.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둘째, 남의 물건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함부로 빼앗거나 훔쳐서는 안 된다.
셋째,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욕설이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삿된 소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술을 먹고 취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구리가 장자는 재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남자 재가수행자를 ‘우바새(優婆塞)’라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구리가 장자는 부처님을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합니다. 부처님은 야사 비구를 데리고 구리가 장자의 집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야사의 어머니와 야사의 부인이 마련해준 음식을 드시고 두 여인을 위해 설법을 합니다. 설법을 들은 두 사람도 깨달음을 얻고, 재가에서 수행하기를 발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재가수행자의 길을 열어주셨어요. 이렇게 해서 여자 재가수행자인 ‘우바이(優婆夷)’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이곳 바라나시에서 다섯 명의 남자 출가수행자인 비구(比丘, bhikkhu)가 나왔고, 구리가 장자와 같은 남자 재가수행자인 우바새가 나왔고, 야사의 어머니와 부인과 같은 여자 재가수행자인 우바이가 나왔습니다.

반면 여자 출가수행자인 비구니(比丘尼, bhikkhuni)는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나오게 됩니다.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인이 수행자가 되기를 발원하고 첫 여자 출가수행자가 됩니다.

상가의 구성

이렇게 수행자에는 남자 출가수행자, 여자 출가수행자, 남자 재가수행자, 여자 재가수행자, 모두 네 가지의 분류가 생겨났습니다. 이를 순서대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라고 하고, 모두 묶어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합니다. 상가(sangha, 僧伽)는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부처님의 가르침이 종교화의 길을 걸으면서 출가수행자는 사제가 되고, 재가수행자는 신자로 변질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교’라고 하는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래 사부대중은 모두 수행자입니다.

이렇게 야사가 출가하게 되자, 그의 출가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깜짝 놀랐어요. 평소에 쾌락밖에 모르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수행자가 되었다고 하니 믿기지도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경전 기록이 있습니다. ‘야사가 출가했다면 그 스승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도 한 번 찾아가보자’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기록하는 경전도 있고, ‘야사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면 그 스승은 분명 괴력을 가진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서 야사를 구해오자’라는 반응을 기록한 경전도 있습니다.

부처님을 찾아온 야사의 친구 네 명도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고 모두 깨달음을 얻어 출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잣집 아들이었던 야사가 국제적으로 놀았는지, 이번에는 그의 소식을 들은 이웃나라의 친구들 50명이 떼를 지어 야사를 구하겠노라며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들도 부처님의 법을 듣고는 깨달음을 얻어 모두 출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붓다의 전법선언

그렇게 야사와 그의 친구 네 명, 그리고 이웃 나라 친구들 50명까지 모두 55명의 아라한이 탄생합니다. 여기에 부처님과 이미 깨달음을 얻은 다섯 비구까지 더하면, 이 세상에는 모두 61명의 아라한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경전에도 이곳 바라나시에 61명의 아라한이 승가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60명의 제자들을 두고 한 유명한 선언이 바로 전법선언(傳法宣言)입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너희들도 해탈을 얻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신들의 안락을 위해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있게 법을 설하라.
중생을 연민하고 섭수(攝受)하라.’

이렇게 선언하시고, 부처님께서도 우루벨라(Uruvela)의 병장촌(兵將村)으로 가서 교화를 하시겠다며 길을 떠나십니다. 교화의 큰 발걸음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륜 스님이 지어내서 하는 얘기라고 여러분이 오해할까 봐 어느 경전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지 나눠드린 책에 다 수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경전 독송을 하고 있는데, 날이 더욱더 추워졌습니다. 해가 뜨면 날이 따뜻해질 줄 알았는데,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차가운 바람만 계속 불었습니다. 몸이 오돌오돌 떨릴 정도가 되자 파카와 목도리로 몸을 감싸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원래는 수계식을 한 후 마지막에 법사님들과 함께 유적지를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앉아만 있으면 더 춥기 때문에 유적지를 먼저 둘러보고 수계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많이 춥죠?”

“네.”

“일기예보에는 해가 뜬다고 했는데 날씨가 이상하네요. 인도 날씨는 예측할 수가 없어요. 좀 움직여야 덜 추우니까 순서를 바꿀게요. 법사님들 안내를 받아서 유적지를 먼저 둘러보고 난 다음에 수계식을 하겠습니다.

앞에 보이는 이것은 스투파입니다. 스투파는 사리를 넣고 쌓은 탑입니다.

원래 사리(舍利)는 ‘유골’이라는 의미예요. 다르마라지크 스투파(Dharmarajika Stupa)에도 사리가 있었겠죠.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스투파를 세운 다음 부처님의 사리를 넣었으니까 저곳에도 사리가 있었을 텐데, 후대에 힌두교에서 이 탑을 허물면서 사리가 담긴 용기를 강가 강에 던졌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보면 강가 강에 버린 것이 되고, 힌두교식으로 보면 강가 강에 장례를 치른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강가 강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강가 강에 버립니다. 개념이 서로 다르죠. 그래서 이 스투파는 파괴됐고 아래쪽 기초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는 비교적 잘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위쪽에 보이는 벽돌 부분의 원래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을 거예요. 왜냐하면 벽돌로 쌓은 부분은 반드시 바깥에 회를 바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벽돌을 쌓은 다음 시멘트로 미장을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처럼 벽돌 부분이 노출되어 있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허물어진 모습입니다.

아랫부분에 있는 돌은 자세히 보면 모두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 무늬가 없는 돌은 보수하면서 채워 넣은 돌입니다. 원석에는 모두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운데 위치한 감실(龕室)은 8개의 불상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좌대만 남아있고 불상은 모두 누가 가져가버려서 없어졌어요. 탑의 안쪽은 텅 빈 게 아니라 꽉 차 있습니다. 그리고 안쪽 지하에 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이 부처님의 초전법륜 현장이고, 그것을 알리는 탑도 있다 보니 많은 스님들과 수행자들이 이곳에 와서 수행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굽타(Gupta) 시대에 이르면 승려들이 머무는 집인 요사(寮舍)를 이곳에 짓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이 주위에 건물터가 발굴이 된 겁니다. 또 큰 탑 옆에 봉헌 스투파라고 하는 작은 탑을 많이 쌓았어요.

그런 흔적들의 일부만 발굴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곳에만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지하를 발굴하면 이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일부만 표면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주위도 모두 아래를 파보면 그와 비슷한 모습이 나오겠죠.

그리고 저기 있는 일단의 건물군이 녹야원(鹿野園) 또는 녹야정사(鹿野精舍)입니다. ‘녹야’는 우리말로 사슴동산이라는 뜻이고, 인도어로는 ‘물간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녹야원을 인도말로는 ‘물간다 쿠티(Mulgandhakuti)’라고 부릅니다.”

각 차량별로 법사님의 안내를 받아 유적지 곳곳을 자세히 둘러보았습니다.

순례객이 찾아가는 10대 성지 중에서는 그래도 이곳 사르나트 유적이 가장 웅장합니다. 스님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게 시간을 할애해 주었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수계식을 시작했습니다. 최초로 재가 수행자가 된 구리가 장자와 야사의 어머니처럼 225명이 함께 삼귀의 오계를 받았습니다.

무릎을 꿇어 땅에 댄 채 두 다리를 세워 몸을 버틴 상태에서 합장하자, 스님과 법사님들이 연비를 했습니다.

“뜨겁다고 해서 팔을 움직이면 안 돼요. 팔이 다 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지은 죄업을 다 없애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죄업이 소멸됩니다.”

대중은 청정한 수행자가 되어 스님으로부터 가사를 받아서 입고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을 올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수행자가 되어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대중이 점심을 먹는 사이 스님은 225명 모두와 개인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스님은 개인 사진을 찍어주느라 식사를 못하고, 곧바로 사르나트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박물관이 좁기 때문에 한 번에 안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스님은 한 팀을 40명씩 나누어 5회에 걸쳐 설명을 했습니다.

다섯 비구가 사르나트로 온 부처님을 맞이한 것을 기념한 영불탑까지 걸은 후 버스를 타고 강가 강으로 향했습니다.

배를 타는 곳인 다사스와메드 가트로 가는 길은 사람, 소, 개, 오토릭샤, 자전거, 자동차, 인력거 등 온갖 것들이 뒤엉켜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30명, 40명씩 배를 나눠서 탔습니다. 갈매기가 날아 들어 정말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모두 배에 오르자 스님은 인도인이 성스럽게 여기는 강가 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강가 강은 인도 사람들에게 하나의 성스러운 신으로 섬겨집니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이 강물에 목욕을 하면 모든 죄업이 녹아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해요.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목욕이 아니라 업을 녹이는 성스러운 목욕입니다.

사람들이 업을 녹이는 성스러운 목욕을 하는 장소를 ‘가트(Ghat)’라고 합니다. 우기가 되면 수면이 높아져서 가트 근처 계단 위로 보이는 건물의 창문 아래쪽까지 물이 차오릅니다.

강 반대편은 지금 보이는 백사장이 모두 물에 잠깁니다. 그래서 우기에는 강이 마치 바다처럼 보입니다. 지금은 물이 빠져 있는 시기인데, 가트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둬서 물이 차올라도 그곳에서 목욕을 할 수 있고, 물이 빠져도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계단 하나하나가 목욕을 할 수 있는 가트입니다. 그 위에 있는 집들은 모두 힌두교 순례자 숙소입니다. 하류에서 상류까지 몇 킬로미터에 걸쳐서 가트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힌두교의 기념일에는 강가 강 주변이 모두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인도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곳 강가 강에서 한 번 목욕을 하는 것이 평생소원이고, 죽고 나서라도 시신을 이 물에 한 번 적셔서 화장을 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메고 강가 강으로 와서 이곳에서 화장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가미니(Gamini)라는 젊은이가 부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부처님, 강가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업이 녹아나고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고 믿기에는 수행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그렇다고 믿지 않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고, 그래서 부처님께 질문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가 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나겠구나.’

그 말을 들은 가미니는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듣고는 ‘잘 알았습니다’ 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해주면 가끔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고 또 묻습니다.” (모두 웃음)

배를 타고 하류로 조금 더 내려가니 화장터가 나타났습니다.

“저 멀리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곳이 화장터입니다. 지금도 수십 군데서 동시에 화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신을 끊임없이 메고 오고, 곳곳에 불을 지펴서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대나무를 엮어서 시신을 메고 오는 걸 보세요. 사다리 같죠. 저렇게 메고 와서 화장을 한 후 강물에 던져버립니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시신을 관에 넣는 문화가 없습니다. 아침에 사람이 죽으면 그날 바로 시신을 태웁니다. 시신을 태워버려서 육신에 대한 집착을 없애야 빨리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대나무 두 개를 걸치고 사다리처럼 엮은 위에 시신을 얹어서 위에 천을 덮고, 네 명이 메고 와서 바로 시신을 태웁니다.

그때 시신을 덮은 천을 ‘분소의(糞掃衣)’라고 합니다. 분소의는 부정하다고 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버리는데, 그걸 주워서 입은 것이 바로 승려의 옷이 됐습니다. 저기 보시면 조금 번쩍번쩍하는 노란색 옷들이 버려진 모습이 보이죠? 저것이 원래의 분소의입니다.

시신 위에 천을 덮고 그 위를 꽃으로 덮습니다. 시신을 가지고 와서 강가 강물에 한 번 적셨다가 차례가 되면 시신을 태웁니다. 지금 막 불을 지르는 곳도 있고, 한창 타는 곳도 있죠?

가끔 시신이 타다가 팔이나 다리 한 쪽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냥 집게로 집어서 다시 불구덩이 속에 넣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불을 크게 지펴서 깨끗하게 태우고, 돈이 부족하면 완전히 태우지 못하고 불에 대충 그슬렸다가 강가 강에 넣어버립니다.

입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많이 보셨죠? 구걸하는 사람들도 화장용 장작을 살 돈을 자기가 깔고 앉은 자리 아래에 모아둡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그 자리에 가보면 화장할 때 장작 구입할 돈이 모여 있어요.”

다함께 화장터를 바라보고 돌아가신 분들을 향해 해탈주 삼독을 했습니다.

강물에 잠긴 재를 양동이로 계속 퍼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스님에게 물어보니 혹시 시체 속에서 장신구나 보물이 나올 수 있어서 그걸 줍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해가 비치자 강가에 빨래를 하러 나온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인도에는 빨래하는 카스트가 있어요. 우리는 방망이로 빨래를 때리지만 이곳에서는 빨래를 휘둘러서 돌에 때립니다. 또 우리는 물 밖에서 물을 향한 채 방망이로 빨래를 때리는데, 이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가서 밖을 향한 채 빨래로 돌을 때립니다. 빨래하는 카스트는 늘 물에 들어가야 하니까 술을 마십니다. 인도에는 술을 금기시하고 부정하게 여기지만, 빨래하는 카스트만은 술을 먹어도 됩니다.

마찬가지로 소가 죽었을 때 그 시체를 치우는 천민은 소고기를 먹어도 됩니다. 돼지를 키우는 천민도 돼지고기를 먹어도 됩니다. 술 좋아하고, 쇠고기 좋아하고, 돼지고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은 인도에 오면 천민이 되기에 딱 좋습니다. (모두 웃음)

인도에서는 높은 계급인 브라만으로 올라갈수록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합니다. 원래 불교에는 채식을 한다는 계율이 없지만, 대승불교 시대에 브라만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채식 문화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과 채식은 관계가 없습니다.”

라즈가트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습니다. 스님은 대중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둥게스와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저는 오늘 밤새 차타고 가서 내일 아침부터는 A팀과 함께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야 해요. 먼저 갈게요. 내일 봅시다.”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둥게스와리까지 254km 거리를 차를 타고 부지런히 달렸습니다.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하기 위해 걸어갔던 바로 그 길입니다. 부처님은 보름이 걸렸다고 하는데, 차를 나고 가니 6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하니 밤9시였습니다. 오늘 새벽 4시에 바라나시를 출발한 A팀은 중간에 길이 막히고, 버스가 다니는 길이 통제되는 바람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무려 16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이 교문 앞에 나와서 스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법당을 참배한 후 인도인 스텝들이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스님은 새벽 6시에 아침 식사를 한 후 밤 9시까지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해서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늦은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B팀은 어떻게 수자타아카데미까지 일찍 도착하게 할 수 있을지 지도를 보며 이동 경로를 수정해서 알려준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에 오른 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26주년 개교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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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다시읽어보는 성지순례이지만 항상 새롭고
많은 사진과 함께 읽을수 있어
마치 그장소에 있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04-22 05:46:34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20-02-25 19:22:02

홍숙이

순례 다녀온지 2주 생활하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료집 봐가며 스님의 하루를 보며 새록새록 기억으로 떠오릅니다
가르침을 삶에서 새기고 새겨서 수행자의 삶을 더 충실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2-01 19: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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