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진주지회
착한 남자

누군가를 만나는 건 참 설레는 일입니다. 저는 그 설렘을 안고 진주지회의 손경미 님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궁금해졌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표정이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럴 때 희망리포터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참 뿌듯합니다. 그럼, 제가 만났던 '손경미'라는 세상 속으로 여러 도반님과 함께 걸어가 볼까요?

연탄 갈 시간이다

저는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분이셨습니다. 무섭기도 했지만 자상했습니다. 출근해서도 "연탄 갈 시간이다."라며 전화할 정도였습니다. 형제들끼리 아버지를 ‘우리 집 식모’라고 놀렸습니다.

어머니는 미용실을 운영했는데 참 멋쟁이였습니다. 70년대에 무려 미니스커트, 롱부츠, 매니큐어로 꾸몄고 친구들과 놀기도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가 친구들과 놀다 늦게 들어오는 날은 부모님이 싸우는 날이었습니다. 싸우는 당사자들은 몰랐겠지만, 부모가 싸우는 모습은 정말 아이들한테 큰 상처가 됩니다. 결혼하면 저는 직장을 갖지 않고 아이들만 잘 키우며 부부 싸움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집전교육 후 청년부 도반들로부터 감사의 손편지를 건네받고 기뻐하는 모습
▲ 집전교육 후 청년부 도반들로부터 감사의 손편지를 건네받고 기뻐하는 모습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를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도망 다녔고, 집에 사채업자들이 와서 난동을 피웠습니다. 저는 대학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대학을 나와야 시집을 잘 간다며 빚까지 내서 끝까지 공부시켰습니다. 언니가 시집가면서 제게도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선볼 남자가 군인이란 말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군인이나 간호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어 부모님에게 보태려던 저는, 선보고 한 달여 만에 결혼했습니다. 부모님은 "돈 벌어 우리 보태주고 나면 너 시집갈 때 빈손으로 가게 되니 안 좋다. 젊을 때 시집이나 가거라. 너 입 하나 덜어주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이후 부모님은 파산 신청도 없이 20년 동안 개미처럼 일해, 모든 빚을 다 갚았습니다.

애를 왜 울리노, 나가서 재워라

결혼 후 3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연애하는 기분이라 좋았습니다. 정작 아이가 생겨 생활에 변화가 오자, 여러모로 힘들어졌습니다. 일단 아이를 처음 키워보니 어설펐습니다. 게다가 군인 남편을 따라 타향살이를 하니 가족들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부모님은 빚 갚느라 바빠 애초에 도와달란 말을 꺼낼 수도 없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군 관사에 살았는데 물이 하루 세 번, 1시간씩 나왔습니다. 집이 관사 맨 끝 동이라 물은 30분도 채 안 나왔고, 그나마도 녹물이 섞여 나올 때가 많았습니다. 녹물이 나오면 손빨래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습니다. 손빨래하는 중에 아이는 울고불고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 도와주지 않는 남편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미웠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애를 왜 울리노? 일하려면 자야 하니까 울리지 말고 나가서 재워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아프던지 완전히 가시 같았습니다. 가슴에 딱 못이 박힌 채로 아이를 업고 나와, 그때부터 각방을 썼습니다.

도반의 시어머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도반들과(맨 뒷줄 오른쪽 손경미 님)
▲ 도반의 시어머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도반들과(맨 뒷줄 오른쪽 손경미 님)

그거 던지면 이혼이야

남편에게서는 우리 아버지와 다른 점만 보였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러나?', '어떻게 저렇게 자기만 알까?' 싶었습니다. 말수도 적어서 늘 벽보고 얘기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럴 때마다 저를 무시하는 것만 같아서 서운했습니다. 남편은 진급에 대한 열망이 있어 오로지 거기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장인하고 비교하지 마라. 난 장인처럼 못한다, 나도 힘들다." 매사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단둘이 살 때는 문제가 안 됐는데, 물도 잘 안 나오고 아는 사람도 없는 동네에서 아이까지 기르다 보니 남편과 소통이 안 되는 것이 감정으로 쌓였습니다. 꾹꾹 누르면서 버티고 살았습니다.

한번은 남편과 다투는데 남편이 상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그거 던지면 이혼이니 던지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남편은 상을 던졌습니다. 저는 그날로 남편과 '이혼했다' 생각하고 1년간 아예 말을 안 하고 살았습니다.

암이래. 빨리 와.

어느 날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암이래. 빨리 와." 그렇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암은 초기에 발견했다고 해도 절제를 해야 합니다. 저는 위의 3분의 2 정도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은 멀리 있고, 기댈 곳은 남편밖에 없는데, 수술 첫날 남편이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몸도 못 움직이는데 남편은 "속도 안 좋고 아이들이 걱정된다."라며 집에 가버렸습니다. 황당하고 서운하고 서러웠습니다.

회복하면서 이웃과 특별한 왕래가 없다 보니 집에서 불교 방송을 자주 봤습니다.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법륜 스님이 나왔습니다. 당시 불교 방송에서는 똑같은 15분짜리 즉문즉설을 하루에 4번씩 방영했습니다. 제가 위암 수술을 하고 회복이 빠르지 않아 한창 우울할 때였기에,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것을 몇 번 봐도 다 내 얘기 같고 너무 재밌었습니다. '경전 공부를 하게 되면 법륜 스님께 배워야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2012년도에 광명으로 이사하면서 드디어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새터민 추석 선물 전달(왼쪽에서 세 번째 손경미 님)
▲ 새터민 추석 선물 전달(왼쪽에서 세 번째 손경미 님)

기도가 절로 나오던 날

남편이 새로운 직장에 다니고자 전역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천일결사1를 시작한 첫날, 남편이 “내가 아파. 병원에 가야겠어.”라고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고 그렇게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병원에서 남편은 바로 중환자실로 실려 들어갔습니다.

너무 놀라서 기도가 저절로 됐습니다. 이튿날부터 병원에 요를 깔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냥 무탈하게 살아만 있으라고. 저는 남편이 그렇게 아픈 줄 몰랐습니다. 말을 안 하니까 그저 견딜만한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남편이 말하길, '머리가 터질 정도'로 아팠다고 합니다.

남편은 자기가 죽을 줄 알고 친구를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남편이 병원 치료를 받고 신장투석을 지속하면서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남편은 고통에 질렸는지 더는 일 하지 않고 쉬겠다고 했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들을 계속 공부시켜야 하는데 남편이 쉬겠다니 참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에게 배운 게 있어서 “그래, 정 안 되겠으면 내가 식당에 나가서 설거지할게.”라고 했습니다. 씩씩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끙끙 앓았습니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랬더니 고맙게도 남편은 새로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JTS 송년거리모금(맨 오른쪽 손경미 님)
▲ JTS 송년거리모금(맨 오른쪽 손경미 님)

나누기의 힘

더운 여름날 마산 창원 진주 정토회 도반들과 정진했습니다. 정진 후 도반들과 나누기하면서 남편에 대한 저의 생각은 확 바뀌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도와주지도 않고 우리 아버지처럼 하지도 않고 순 자기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도반들의 남편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 남편은 참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투석을 받는 상황인데도 직장을 성실히 다녀준 덕분에 연금에다 월급까지 얹어 넉넉히 생활할 수 있었고, 피아노 전공하는 아들 유학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집 남편들은 아프면 막 짜증 내고 성질도 내는 모양인데, 제 남편은 워낙 말이 없으니 어지간히 아픈 것도 잘 티 내지 않습니다. 제가 "여보 나 뭐 좀 해줘." 부탁하면 구시렁대기는 해도, 지나고 보면 결국 제가 해달라는 건 다 해 줬습니다.

‘아,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제가 원하는 남편상이 너무 컸을 뿐, 이렇게 좋은 남편을 이해할 생각도 안 해봤습니다. 그저 저한테 맞춰주지 않는다고 징징대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부족한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잔소리 안 하고 살아주는 남편이 고맙다는 걸, 나누기하며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남편한테 팍 숙이게 됐습니다.

롤모델인 수미향 보살님과 함께(왼쪽 손경미 님, 오른쪽 수미향 보살)
▲ 롤모델인 수미향 보살님과 함께(왼쪽 손경미 님, 오른쪽 수미향 보살)

좋아요

근래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고, 남편은 신장투석으로 인해 안검하수 수술도 겨우 했습니다. 저도 손발 저림이 잦고, 나이든 강아지까지 아프니 행복지수가 좀 떨어졌습니다.

남편은 몸이 아프니 "이렇게 살아서 되나?" 하는 맘 약한 소리도 한 번씩 합니다만, 저는 “그런 소리 하지 마. 지금이 좋을 때야.”라며 달래줍니다.

남편은 정토회나 법륜스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제가 SNS에 정토회 관련 소식을 올리면 매주 '좋아요'를 누릅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정토회 활동을 하니, 알게 모르게 제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원래 착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걸 모르고 이 사람 속을 긁고 산 것입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홍보 (오른쪽 손경미 님)
▲ 법륜스님 즉문즉설 홍보 (오른쪽 손경미 님)

후회하지 않는 동행

올해 들어 남편이 더 눈에 밟힙니다. 남편은 내년 3월에 퇴직합니다. 저도 정토회 소임을 더는 받지 않고 남편에게 조금 더 힘을 쓰려고 합니다. 제가 일반 회원으로 돌아가더라도 누군가를 돕든, 환경 실천을 하든, 못 할 일이 없으니까 아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착한 남자에게 시간을 할애해서, 후회하지 않는 동행을 하려고 합니다.


손경미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인공은 물론 그 남편까지 알았습니다. 손경미 님의 남편은 요샛말로 ‘츤데레’입니다. 여러 사연을 겪으며 마음의 변화를 일궈낸 주인공은 ‘내 마음이 변하면 상대도 변한다.’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두 사람이 손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저에게는 손경미 님과 그 남편을 함께 만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글_강지윤 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편집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1.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전체댓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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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희

감사합니다

2024-03-26 04:38:54

허진영

감동입니다. 내 고집을 버리는 길이 행복의 길임을 배웁니다

2023-11-24 13:16:40

대정진

감동적인 수행담 잘 읽었습니다.
두분 나란히 손 잡고 다닐 모습이 상상 되네요.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2023-11-17 14: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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