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아태지회
힙한 빨강머리 정토행자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힙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성있고 무언가 유행에 앞서가는 느낌일 때 쓰는 말입니다. 만화 영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를 떠오르게 하는 빨강머리 최연덕 님은 세상 힙(HIP)해 보였습니다. 정토행자 수행담의 주인공으로 지회에서 최연덕 님을 추천 받고 놀랐습니다. 빨강머리와 수행은 백만 광년은 떨어져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하며 알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상에 집착하는 사람인지, 그럼 힙한 정토행자님의 이야기는 어떤지 들어 볼까요?

세상 힙 해 보이는 슬램덩크 강백호를 닮은 최연덕 님
▲ 세상 힙 해 보이는 슬램덩크 강백호를 닮은 최연덕 님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내가...

저는 호주 이민자입니다. 호주에 와서 영주권 비자 취득을 위해 어린이집 교사로 일했습니다. 아침에 등원 할 때 저에게 달려와 폭 안기는 아이들이 좋았고, 부원장, 원장으로 승진하며 호주 사회에서 인정받고 살아가는 미래를 꿈꿨습니다. 부원장 자리가 나와서 지원 했지만 탈락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저 대신 된 사람은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요. 1년 뒤 다시 지원했지만 또 탈락했습니다. 괜찮지 않았습니다. 저 대신 된 사람은 저보다 경험도 없고, 심지어 저의 보조교사였던 23살 철부지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왜 안되지?” 하는 생각이 슬슬 올라왔습니다. 원장 부원장의 상사 격인 지역 매니저는 제 영어가 틀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원장 출산 대행으로 원장 부원장 교육에 가보니 저만 유색인종이고 나머지 원장 부원장은 모두 백인이었습니다. 지역 매니저는 영어를 잘 못하는 선생님들 때문에 교육의 질이 떨어질까 우려된다고 했습니다. 영어에 대해서 지적을 받았던 저는 그 말이 계속 신경이 쓰였습니다. 지역 매니저가 저 또한 모자란 사람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유색인종에, 거기다 영어도 잘 못해, 호주에서의 저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어 공부를 더 해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승진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원어민만큼 영어를 고급스럽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국이 그립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싶어 괴로웠습니다. 번 아웃이 찾아왔습니다.

어 내 영어 이만하면 괜찮네

고등학교에서 청소년에게 심리학 강의 중인 최연덕 님
▲ 고등학교에서 청소년에게 심리학 강의 중인 최연덕 님

유튜브에 나온 광고를 보고 불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 대학에서 ‘나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다’ 라는 것을 배우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시아계 호주 이민자로서의 저를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아시아계 이민자인 제가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민자로서는 저는 영어로 이미 말할 수도 있었고, 호주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있고, 영어로 과제를 제출해서 A+도 받을 수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어 내 영어 이만하면 괜찮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존감이 올라갔습니다. 원어민 처럼 영어를 잘하겠다는 생각을 내려 놓으니 주변에서는 더 자신감 있고 여유로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지역 매니저가 제 영어 문법을 다시 지적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분은 나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크게 휘둘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이기적인 사람일까?

표면적으로 누나와 사이가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기적인 누나가 자꾸 미웠습니다. 무슨 말만 해도 화가 났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하면서 누나가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제 안에 화가 가득 차 있어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누나 때문에’ 에서 ‘나’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2년 넘게 누나를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 기도도 하고, 깨달음의 장1에 가서도 누나를 왜 미워하는지 열심히 탐구했습니다. 아주 서서히 제가 왜 누나에게 그렇게 화가 나는지 알았습니다.

누나 대학 졸업식 때 찍은 가족 사진, 누나 졸업식 이후 얼마 안 있어 사진 속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맨 왼쪽 최연덕 님
▲ 누나 대학 졸업식 때 찍은 가족 사진, 누나 졸업식 이후 얼마 안 있어 사진 속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맨 왼쪽 최연덕 님

12년 전에 어머니, 할머니가 연이어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병이 심해져서 일을 그만 두었을 때, 누나는 박사학위에 대한 꿈을 접고 취업했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 빨리 취업이 되지 않아, 취업 준비생 생활을 1년 정도 했습니다. 저는 취업을 못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누나 입장에서는 제가 취업을 안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나는 자기는 가족을 위해 희생했는데, 이곳 저곳 골라서 가려 한다고 저를 이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누나 스스로 취업을 선택한 거면서 그걸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기적이라는 말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냥 노는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 하며 제 용돈은 제가 해결하고 있는데, 제가 노력하는 것은 보지 않는 누나에게 화도 많이 났습니다. 당시 저는 100 군데나 넘는 회사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또 떨어지며 자존감이 관리가 되지 않을 때라 누나의 말을 더 아프게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누나가 '전기세, 수도세 다 네 통장으로 돌려’ 라는 짧은 메모 하나만 남기고 집을 나갔습니다. 엄마, 할머니도 잃었는데, 누나마저 저를 버렸다는 생각에 저는 상처를 크게 입었습니다. ‘그래 꺼져.. 너 없이도 잘 살아’ 하고 그 이후 1년 동안 누나에게 일절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호주 이민을 알리려고 누나와 다시 연락을 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제껏 다시 누나 동생이 되어 지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그때 입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10년이 지난 후에도 누나가 이기적으로 보이고 굉장히 독단적으로 비춰지는 것이었습니다.

누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제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누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상황은 자꾸만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마지 못해 가족 여행에 갔습니다. 저는 누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여전히 자꾸 열이 나고 예민해졌습니다. 그렇지만 2년 반 동안 수행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폭발하지 않을 수 있었고, 누나와 대화란 걸 할 수 있었습니다.

누나는 12년 전 집을 나갔을 때, "어떻게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을 수 있냐. 집 나가서 이불도 없이 찬 바닥에서 울면서 웅크리고 잤다."라고 자기 힘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자기가 선택해서 나간 거고, 자기는 돈도 있고 파워도 있었으면서’ 하고 욱 하기도 했지만, 누나도 그때 힘들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았습니다.

누나, 아버지, 최연덕 님
▲ 누나, 아버지, 최연덕 님

충분히 자기 얘기를 한 누나는 제 얘기도 들어줬습니다. 저도 누나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상처를 꺼내 보였습니다. 상처가 올라와서 감정을 토로하듯 하지 않고, "우리 서로 참 의지 했는데.. 참 엇갈렸다, 나는 이랬어, 너는 어땠어" 하고 담담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누나와의 대화로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화에 응해준 누나가 고맙습니다. 누나와 대화하고 나니 혼자 수행으로 치유하는 것보다 더 빨리 회복되는 느낌입니다. 아직 누나도 저도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관계 회복을 위한 출발점에 같이 선 거 같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 “이제 누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목이 메어 선뜻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 뜸을 들이고서야 ‘저희 누나 좋은 사람이에요’ 라고 겨우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실 누나를 제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누나 바라기였습니다. 작고 예민하고 잘 체하는 아이였던 저는 또래들과 선뜻 나가서 놀지 못했습니다. 누나가 학교에서 오기만 기다렸고, 누나 뒤만 졸졸 쫓아다녔습니다. 누나가 좋았고, 누나랑 놀고 싶었습니다. 인형을 사러 가서도 누나랑 놀고 싶어서 누나가 갖고 싶은 인형을 골랐습니다. 엄마가 아빠와 싸우고 난 화풀이를 할 때면 저는 누나 뒤에 숨었습니다. 저는 누나를 의지했고, 누나도 저를 챙겨줬습니다. 사실 누나는 지금까지도 저를 챙겨주려 합니다. 누나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저도 이제는 누나를 챙겨주며 누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괜찮습니다

저는 성소수자입니다. 지인, 직장 그리고 직계 가족에게는 커밍아웃 했습니다. 아직까지 성소수자라서 받는 불이익이나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특히나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 눈치를 많이 보게 되고 긴장도 많이 합니다.

전 정토행자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최연덕님과 남자친구
▲ 전 정토행자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최연덕님과 남자친구

저는 소속 모둠과 〈깨달음의 장〉에서 커밍아웃 했습니다. 도반들은 덤덤하고 차별 없이 대해 주었습니다. 도반들의 반응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 힘으로 전 정토행자를 대상으로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 성 정체성을 알고 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제 성 정체성을 알고 저를 지지해 주는 사람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저에게는 남의 인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동료, 도반, 법사님, 심지어 불교대학 학생들에게서도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업식 속에서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은 수행과제 덕분입니다.

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의 나를 받아 주기’를 저의 수행과제로 하고 있습니다. 화가 난다면 화를 안 내야 한다가 아니라, 화가 나는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침 수행을 하면서 “이 사람에게 화가 납니다. 화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괜찮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이런 나에게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내 화에 끌려가지 않겠습니다”라고 수행 나누기를 합니다. 내가 스스로를 괜찮아하니, 다른 사람들이 저를 인정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힘이 조금씩 길러지고 있습니다.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마치고 전법활동가 교육 과정을 소개받았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공부하며 받은 은혜가 있으니 봉사로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법활동가 교육 과정을 신청했습니다. 당시 대학원 공부로 여유 시간이 없었던 저는 ‘정해진 시간 외에는 더 못 한다’ 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아우 괜찮다고, 그렇게라도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하다’ 라는 반응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대신 돌아온 답은 "그러시면 다음에 하셔도 된다" 였습니다.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어 나 이거 안하면 안되는데..' 생각이 들며 이러다 못하게 될까봐 다급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전법활동가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 안정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영어불대 진행자 복장을 갖춰 입은  최연덕 님
▲ 영어불대 진행자 복장을 갖춰 입은 최연덕 님

불교대학 돕는이,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도 ‘정토회를 위해서 한다’ 라는 한 생각 때문에, 저의 수고에 별로 감사해 하지 않는 도반들에게 화가 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봉사는 오로지 저를 위해서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봉사는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해 한 일에 남이 덕을 좀 볼 뿐입니다. 남에게 덕이 되기 때문에 결국 나에게도 더 좋아져서 지속 가능한 행복이 되는 이치를 이제 이해합니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서 학업이 끝날 때까지 전법회원 활동을 잠시 멈출 예정입니다. 학업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서 '남이 아닌 나'를 위한 봉사 활동 이어가고 싶습니다.


최연덕 님이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라고 말할 때,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괜찮아하니 남들이 나를 괜찮아 하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에 여운이 많이 남았습니다. 경전으로만 배운 ‘상을 보는 자 여래를 보지 못한다’ 라는 말을 ‘빨강머리만 보는자, 연덕님을 보지 못한다’ 로 바꿔 봅니다. 끝으로 “ 힙하다 “ 라는 말이 요즘은 내 눈에 멋있어 보이는 모든 말에 쓰인다고 합니다. 최연덕 님은 힙한 정토 행자입니다.

글_고명주(국제지부 아태지회)
편집_서지영(강원동부지부 수원지회)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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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

최연덕님의 이야기에 공감도 되고 뭉클해서 코끝이 찡하네요. 행복해지시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03-29 10:42:59

빙긋

고맙습니다

2024-03-14 11:31:07

태홍

감사히 잘 읽었어요. 정말 멋지십니다.!!!!

2023-12-13 0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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