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서광주지회
광주 불사조의 아주 평범한 이야기

전화로 처음 만난 박영애 님은 고운 목소리로 수줍어했습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어 그간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수행자'라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확 바뀐 것도 없지만, 마음이 가볍고 매사 불평 없이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된 것만은 사실"이라고 덤덤히 말하는 박영애 님을 만나봅니다.

보리를 이고 오면 10원을 버는 평범한 어린 시절

저는 전남 보성군 미력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엄마 나이가 마흔한 살이었습니다. 3남 3녀 중 다섯째였는데 큰오빠와는 열아홉 살 차이가 났습니다. 지대가 높고 외진 동네라 여자 친구도 딱 한 명이었고 그 친구 집과도 멀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봄가을이면 누에 치느라 고생하는 부모님을 도왔습니다. 뽕밭과 고구마밭을 매고, 나락과 보리를 머리에 이어 날랐습니다. 방학에는 길쌈을 하고 가을이면 알밤을 주웠습니다.

엄마는 이런 일을 할 때마다 늘 용돈을 챙겨주었습니다. 보리를 이고 오면 10원이었습니다. 일하다 말고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면 “어린애가 무슨 허리가 있냐.”라고 하면서도 용돈은 잊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소소하게 돈 버는 재미를 알았나 봅니다.

올케 언니와 인도성지순례에서 (오른쪽 박영애 님)
▲ 올케 언니와 인도성지순례에서 (오른쪽 박영애 님)

함께 살고 밥을 해 먹이는 평범한 학창 시절

비포장도로로 5리(2km)를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더 멀어서 3년 동안 읍내로 나가 자취했습니다. 가난한 우리 동네의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부분 서울의 공장에 돈 벌러 올라갔습니다. 저도 방세를 아끼기 위해 1학년 때는 한방에서 세 명이 살았습니다. 그때는 다 그렇게들 사는 줄 알았기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도 오빠들 도움으로 다녔기 때문에 대학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사실 간호사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포기하고 스무 살에 곧바로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오빠들이 제게 해준 것처럼, 막냇동생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제가 3년간 밥을 해 먹였습니다.

지리산 수련원 바라지장 (아랫줄 맨 왼쪽 박영애 님)
▲ 지리산 수련원 바라지장 (아랫줄 맨 왼쪽 박영애 님)

숫자, 그리고 농사와 함께한 40년의 평범한 공무원 생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시어른들의 눈에 들어 남편을 만났습니다. 며느리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6개월 동안 버스를 타고 주말마다 시댁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까지 하느라 늘 바빴지만,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습니다.

농림부 통계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직접 나가서 생산량을 체크 하는 등 현장 업무가 많았습니다. 농가에 가계부 적는 법을 알려주고, 그 가계부를 회수하여 통계조사를 했습니다. 저도 1979년에 공무원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 매일 가계부를 적고 있습니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매월 엑셀 프로그램으로 결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통계청 사무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40년을 했습니다. 남편이 “당신이 가계부만 안 적었어도 우리가 벌써 부자가 되었을 텐데”라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어릴 때부터 10원씩 받아 가며 농사일을 한 데다 오랜 통계 공무원 생활까지 합하면 평생 숫자, 그리고 농사와 함께 한 것입니다. 힘은 들었지만, 굴곡 없이 평탄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잘 쓰이는 삶

직장을 광주로 옮겨 살던 2014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있었습니다. 그날 스님의 답변이 가슴 시원했습니다. '아는 게 참 많으시구나' 하고 감탄하며 스님의 책을 몇 권 사 읽었습니다. 자연스레 광주법당에 갔고 경전대학은 개근으로 마쳤습니다. 어느 날 광주법당에서 회계 처리 중, 제가 30원을 더 입금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마침 저도 가계부 정리 중에 30원이 모자라 찾고 있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애 님)
▲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애 님)

그 길로 광주법당의 회계 소임을 맡았습니다. 회계 일도 직장에서 하듯 지출결의서를 갖추어 하나하나 정비했습니다. 특기를 살린 셈입니다. 2020년부터는 서광주ㆍ동광주ㆍ전주지회를 관할하는 지부 회계를 맡아 했습니다. 지금 하는 미륵사 회계 꼭지 소임까지 6년 이상 회계를 했는데, 정토회의 투명한 예산편성과 집행 과정이 제 성격과 딱 맞았습니다.

회계시스템이 온라인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회계 소임을 하려면 법당에 직접 가야만 했습니다. 출퇴근 시간이 1시간 이상 걸리는 직장 일에, 퇴근 후에는 법당까지 가서 일하는데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꼼꼼하게 관리하니 정토회에 대한 신뢰도 커지고, 스스로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종종 마음이 힘들 때는 법륜스님의 법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불편했던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해도 충분한 이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눠서 진행하는 것이 더 불편했지만, 다른 사람도 일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곧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12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외로웠을 법도 한데, 자식들에게 오라 가라 하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80세가 되자 텃밭마저 내려놓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작물을 제대로 돌볼 수 없으니 더 이상 욕심을 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84세에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도 “살 만큼 살았다.”라고 하면서 계속 집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양원 자원봉사활동 (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애 님)
▲ 요양원 자원봉사활동 (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애 님)

반면 시어머니는 사랑의 모양새가 좀 달랐습니다. 자식 사랑이 대단했습니다. 매일 전화하고, 손주들에게도 매우 잘해줍니다. 매주 시댁에 방문하니 심적으로 가깝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시자, 병시중을 들던 시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형님네가 서울에 살다 보니 시아버지 제사도, 시어머니 병원비도 제 몫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저희 부부에게 많이 기대고 바란다고 느꼈습니다. 가까이 사는 제게는 부담이었습니다.

매일 전화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집착으로 느꼈습니다. '애들과 시댁에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도 거리감을 느끼고 ‘내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라는 기분이었습니다.

손해 본 것 같았습니다. ‘평생 열심히 살아온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는, 주말마다 가던 시댁에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집착이 아니라 성격이구나

제가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의 진행자, 돕는 이, 반 담당, 모둠장 소임을 거치는 동안 시어머니는 구순이 되었습니다. 매일 1시간씩 저를 돌이키는 공동 정진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성격상 수행 좀 했다고, 법문 좀 들었다고, <깨달음의 장1> 다녀왔다고 무언가가 확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꺾여 내려가지도 않았고 급히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고 보니 더 이상 시어머니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집착하네’라고 여겼는데, ‘아, 어머님의 성격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시어머니의 전화가 오면 '시어머니의 전화구나'라고만 생각합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서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담스러워 한 그분은, 제가 직장생활 할 때 김치를 챙겨주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마음이 열리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법문 듣고 되새기며 살아가다 보니 저에게 온 정토회 소임, 그리고 집안일들이 가벼워지고 ‘그냥 “예”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겠구나’ 알았습니다.

모둠원들과 행복학교 홍보 (맨 왼쪽 박영애 님)
▲ 모둠원들과 행복학교 홍보 (맨 왼쪽 박영애 님)

주중에는 손자를 돌보며 정토회 활동을 하고 주말에는 구순 시어머니와 같이 농사일을 하는 남편을 돕습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다 보니 몸은 좀 힘들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오히려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직장 다닐 때 보다 더 바쁩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제가 잠을 너무 적게 잔다고 염려하지만, 칭찬과 위로의 말도 많이 해줍니다.

광주 불사조, 모자이크 붓다를 꿈꾸다

성격상 지나간 일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몸이 아픈 곳도 없습니다. 교통사고가 두 번 크게 나서 한 번은 폐차했는데 별로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둠장 회의에 들어갔을 뿐인데 어느덧 서광주지회의 불사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불사조라고 매일 수행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하는 게 없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을 했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옳다는 생각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다 보니 ‘내가 단점이 많지만 서툴러도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감 있게 하는 강점이 있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한마음 바꾸어 '내 인생의 주인'으로 당당히 살아갑니다.

33차 인도성지순례 조원들과 함께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애 님)
▲ 33차 인도성지순례 조원들과 함께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박영애 님)

소임에서도 처음에는 '전법 홍보를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에게 이 법이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정토회를 떠난 도반들에게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분들과 그 시간을 함께했던 것만으로 소중하다’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세상에 잘 쓰이고, 수행자로서 성심을 기울이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며 일하고 싶습니다. 정토회는 넓고 깊은 안목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가, 그 모자이크 조각 중의 하나라는 것이 행복합니다.

JTS 거리모금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박영애 님)
▲ JTS 거리모금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박영애 님)


박영애 님은 ‘서광주지회의 불사조’에 관하여 묻자,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며 웃었습니다. 책임감이 강하고 마음은 엄마처럼 따뜻한 분임을 느꼈습니다. ‘다 이 정도는 하면서 살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인가요’ 하는 듯한 표정은, 물결치는 강물 속에서 둥글둥글해진 큰 바위 같았습니다. 닮고 싶었습니다. 묵묵히 모자이크 붓다의 길을 걸어가시는 박영애 님, 오래오래 우리 곁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글_박언희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경주지회)
편집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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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옥남

깨장동기로 만나 좋은 기억 있습니다. 반갑고 박영애님의 얘기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2023-09-05 16:48:54

고경희

와~ 이 편안함은 무엇일까요?
그냥 찬찬히 글따라 오니~^^
고맙습니다 ~♡ 그곳에 계셔주셔서~
전주지회 이승준님도 반가운 맘입니다~^♡^

2023-09-03 16:09:09

손정현

박영애님 무심한듯 따뜻한 글 잘 보았습니다
성품이 온화하니 삶도 평탄한거 같습니다
많이 배우고갑니다~~

2023-09-02 13: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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