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
향실법사님 두 번째 이야기
무덤 앞 두 여자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마음은 아무 문제없는 남편까지 문제삼았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남편은 내 수행을 뒷바라지해준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마음은 저의 어린 시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앞에는 두 여인이 엎드려 울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제 전생에서 평생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내내 저를 괴롭힌 것입니다.

업식의 뿌리를 찾은 향실법사 님의 두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울던 두 여자

시댁을 떠나 남편 발령지에 단칸방을 마련하여 함께 살고부터는 또 다른 힘듦이 다가왔습니다. 친정아버지는 술을 못했기 때문에 농사일을 하는 일꾼들을 위해서 집에서 막걸리 만드는 건 보았어도 집안 누구도 술을 먹는 문화는 보질 못하고 성장했습니다. 남편은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러다보니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저녁에 그 비좁은 단칸방에 지인들을 데리고 와 밤 12시, 새벽 2시까지 술 파티를 벌이거나 술 마시느라 밖으로 돌았습니다.

나중에서야 남편은 견디기 힘든 자존심으로 제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상처를 받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끔은 남편이 시집 식구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저를 윽박지를 때 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은 시집 식구들 앞이면 숨통이 트였던 것 같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남편은 아무 문제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마음이 남편까지 문제삼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남편의 성향은 나이들어 생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자기 일 잘하고, 제가 수행할 수 있도록 30년간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제 업식의 뿌리는 제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겐 작은 소도시의 큰 술집 주인인 작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밤이면 작은 여자가 운영하는 술집 서방이 되고, 아침이면 우리 집에 잠깐 들르며 농사일은 머슴에게 맡겨놓았습니다. 작은 여자는 우리집 친척들에게 온갖 선물 공세로 예쁨을 받았고, 친척 어른들은 ‘누구 집은 작은 여자 잘 들였다.’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에서는 내 어머니와 작은 여자, 두 여자가 엎드려 울고 있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아버지의 애정을 작은 여자에게 빼앗긴 채, 시부모님 모시고 종손집안 제사도 챙기며 온 살림을 맡아 하느라 몸고생, 마음고생이 말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모님이 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어머니는 고생스러움이나 원망을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속에서 저는 어머니의 관심 밖이라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많이 징징댔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과 관심, 친정어머니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전이되어 작은 여자로 얹혀사는 시어머니의 삶에 원망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겉으로는 살림 잘하는 현모양처 인양 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저의 모든 말과 행동을 못 마땅해 했습니다. ‘내 딸들 모두 돈을 벌며 살고 있으니 너도 돈을 벌어라. 남편만 쳐다보고 사느냐.’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시어머니의 허물을 알았다는 것이 가장 큰 괘씸죄였나 봅니다. 며느리가 자신의 과거를 캐고 다녔다며 ‘네가 왜 내 인생을 망가뜨리느냐’고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전쟁 후라 모두 삶이 어려웠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 돈 있는 집에 작은 여자로라도 살아야 했던 아픈 시절입니다. 시대적으로 참 불쌍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성지순례(둘째줄 오른쪽 세 번째)
▲ 부석사 무량수전 성지순례(둘째줄 오른쪽 세 번째)

한 생각으로 달라지는 나의 몸

첫 아이의 출산 당시엔 신년 공휴일이 1월 1일부터 3일까지라 석탄공사 직원들을 위해 운영되는 유일한 큰 병원도 휴진이었습니다. 산부인과가 따로 없는 동네라 내과에서 출산하기도 한다 해서 내과로 갔습니다. 공휴일 밤에 나타난 산부를 의사는 반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병원에 들어가서야 연탄난로를 막 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병실에서 저는 추위와 긴장으로 덜덜 떨면서 산통을 꽤 오래 느꼈습니다. 입실해서 아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촉진제를 맞았습니다. 전문의가 아니었던 탓인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출산환경 탓인지 뒤처리를 제대로 받지 못해 훗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었고, 염증과 물혹이 자주 생겼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예민해지다 보니 몸에 이상이 왔습니다. 아이가 열 두 살 되었을 즈음, 하혈이 자주 있었고 허리가 아파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까맣게 덥혔습니다. 서울 큰 병원에 갔더니 난소에 혹이 너무 커졌고 유착도 심해서 지금 바로 입원하고 내일 수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수술실에 들어가 배를 열어보니 자궁을 들어내야 할 정도였나 봅니다. 이를 결정하기 위해 보호자를 찾았으나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아 수술이 늦어졌고 저는 8시간 만에 깨어났습니다. 간단한 수술이라 2시간 정도면 끝날 거라는 의사의 말에 보호자인 남편은 잠깐 볼 일을 보고 왔다고 합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아팠습니다. 병실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만 보아도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제가 다시 걸어 다닐 수만 있다면 힘든 어떤 것에도 시비를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 입원 후 퇴원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나서 다시 하혈을 시작했습니다. 병원을 찾으니 한 쪽 난소에 혹이 갑자기 커져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003년 봄, 천일결사 입재식 가는 길(아래 오른쪽 두 번째)
▲ 2003년 봄, 천일결사 입재식 가는 길(아래 오른쪽 두 번째)

난소에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퇴원하여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답답한 마음에 동창회에 나갔다가 친구의 권유로 법륜스님의 강연을 만났던 겁니다. 며칠 후 다시 하혈을 시작해 대학병원에 갔습니다. 한쪽에 조금 남겨놓은 난소에 용종이 커져서 세 번째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똑같은 수술이었지만 부처님 법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 마음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제 상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첫 번째 수술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나갔고, 보름 만에 하게 된 두 번째 수술 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 긴장하고 불안했습니다. 모든 수술실은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고 각 수술실 안으로 보이는 통속에는 피로 범벅된 거즈들이 쌓여 있는 모습은 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떨고 있는 저에게 의사가 ‘이 환자 안정시키라’고 간호사에게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던 두 번째 수술과 달리 세 번째 수술 때는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불법을 만난 이후라 수술이 두렵지 않았고, 그저 수술을 해야하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다르게 먹어서인지 회복도 빨랐습니다. 한 생각이 온 몸의 세포를 살게도 죽게도 만드는 경험은 제가 일반대중과 상담할 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대중법사님 특집기사 발행일정표
▲ 대중법사님 특집기사 발행일정표

다음 주 금요일에는 향실법사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발행됩니다.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인터뷰 진행_권영숙
인터뷰 지원(영상, 녹화)_김혜경
속기 및 녹취_강현아, 박문구, 백금록, 서지영, 이정선, 임명자, 장은미
편집_김난희
도움주신이_전은정

전체댓글 21

0/200

박윤정

감동입니다.

2022-04-16 11:28:20

김애자

감사합니다

2022-03-05 12:01:14

테홍

머릿속으로 상상만해도 수술하는게 참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 어려운 경험을 하고 불법을 만난 법사님의 마음이 전해지고. 그런 힘듬이 있어서 30년동안 꾸준히 가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감사합다.

2022-02-20 17: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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