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이혼하고 애 셋 키우며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말로는 행복하다 말했지만 아이 엄마에 대한 미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절을 하니 어느 순간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100일 동안 웃는 사진을 찍으니 인상이 변했다는 향존법사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기르는 자가 엄마라는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아이들 밥 챙겨주고, 저도 직장으로 출근해서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퇴근해서 아이들 밥 챙겨주고, 매일 법당으로 출근하며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인도 갈 때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낸 보시금으로 인도 몇천 명이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돈은 주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안 줬습니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마음이 없었고, 제가 사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해서 바르게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는 불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물어보면 간섭 안 해서 좋았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합니다.
목발로 다니는 큰애에게 “사람들이 너를 쳐다보면 어떤 생각이 드니?” 물어보니, “아무 생각 안 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눈이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게 된다. 모두 똑바로 서서 걸어가는데, 노인이 허리를 꾸부정하게 해서 걸어가면 눈이 저절로 간다. 네가 장애인이라 쳐다본다는 생각은 안 하면 좋겠다. 너도 노인, 몸이 불편한 사람, 뚱뚱한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눈이 가지? 그러니 사람들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장애를 가졌어도 그대로 봐주고,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이미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면 이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수행자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경험을 안 했다면, 장애아를 가진 도반이 괴로워할 때 공감하며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도 경험해봐서 그 심정을 이해하기에 할 말이 있습니다. 수행자이기에 경험을 자산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 마이크를 잡고 “이혼했습니다” 하면 자다가도 눈을 뜹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재미있어합니다. 여러 경험이 법사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3년 정도 매일 300배를 했습니다. 혼자 하기 힘들면, 도반과 같이 100일씩 했습니다. 이혼 후 행복하다 생각하면서도 아내를 향해서 ‘네가 잘되는가 보자’ 이런 밑 마음이 있었습니다. 미운 마음을 삭이기 위해 절을 했는데, 조금씩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짬 날 때마다 봉사할 마음도 내게 되었습니다.
절을 많이 한 편인데, 2년 차 만 배를 할 때는 인생의 굴곡처럼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3천 배쯤 하니 허리가 너무 아파 못할 것 같았습니다. 6천 배쯤 하니 발바닥이 아파 서 있기 힘들었습니다. 8천 배쯤 하니 손바닥을 바닥에 대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9천 배 정도 하니 미친 듯이 ‘내가 왜 이렇게 절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 배를 마치는 순간, 모든 고통이 어디로 가고, 그렇게 하기 싫던 마음은 어디 갔는지 싹 사라지고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때, 항상한 것이 없다는 말이 이런 것인 줄을 알았습니다.
임진각에서 만배 할 때, 가장 추울 때는 영하 30도였습니다. 방석 없이 신발 벗고 양말 두세 겹 껴 신고 절하는데, 손발이 붙었는지 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8.15광복 기념 만 배 때도 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추울 때보다 더울 때가 더 힘듭니다. 그런 고비들을 넘겨보니 일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힘든 일도 모두 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아 가볍게 툭 넘깁니다.
이혼 4년 후 아이 엄마가 잘못했다며 다시 결합하자 했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마음 한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그렇진 않지만 문득문득 그런 생각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9년이 지난 어느 날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만나자고 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만나고, 아이들이 엄마를 만나면 예전에는 ‘뭘 또 가나?’ 했는데, 엄마 안부도 물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만약에 기도와 절을 안 했으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은 저에게만 원칙을 적용하고 상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내가 하니까 너도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고, 일하면서 분별이 날 때도 있어 기준에 맞는 사람과 일하려 했습니다. 저는 늘 ‘그 사람은 이것 때문에 안되고, 저 사람은 저것 때문에 안돼’라며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한 한 선배 도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그거 하나만은 진짜 최고다’라고 말했습니다. 전국 회의 가서도 ’전병찬 거사는 항상 최고다’라고 했는데 저는 가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선배 도반과 갈등이 깊어진 것을 유수스님이 알아서, 그 도반에게는 ‘제발 전병찬 거사 이야기 좀 들어라’ 하고, 저한테는 ‘선배 도반 좀 잘 봐줘라’라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대구 담당 보수 법사님과 상담하니 300배를 100일 동안 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정도로는 안 되니 500배를 100일 동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3일마다 마음 나누기를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하루에 500배 하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십 며칠 째까지는 늘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46일째쯤 절을 하는데, ‘왜 나는 늘 선배 도반의 못 하는 것만 바라보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선배 도반 잘하는 것은 뭐지? 장점은 뭐지?’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싹 스쳐 지나갔습니다. 생각하니 제 단점이 그 선배의 장점이었습니다. 돌이키고 나니 진짜 수행자는 그 도반이었습니다. 제 관점이 정말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장점 중심으로 사람을 보니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대구정토회 대표가 되고, 결사행자, 법사까지 된 것이 그런 경험 덕분이라 지금은 그 도반이 제일 고맙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잘 안되는 것이나 자각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명심문으로 하여 100일씩 집중해서 수행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해나간 것이 이렇게 발전하는 데 많이 도움 됐습니다.
암에 걸려 얼굴이 어둡고 우울한 도반과는 매일 웃는 사진을 주고받았습니다. 웃는 사진 한 장을 보내기 위해 열 번 정도는 웃습니다. 그렇게 100일 정도 했더니 인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정토회나, 직장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웃는 인상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다음주 금요일 향존 법사님 세 번째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인터뷰 진행_김혜경
인터뷰 지원(영상, 녹화)_김혜경
글, 편집_최미영, 도경화, 권영숙
도움주신이_이정선, 백금록, 박우경, 김승희, 박정임, 전은정
전체댓글 53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