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5.8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 홍콩 불교신문 인터뷰, 일요 명상
"2600년 전 붓다의 깨달음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은 불기 2566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스님은 봉축 법요식이 열리는 문경 수련원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연등이 봄바람에 흔들거렸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한 후 6시 10분부터 문경 공동체 대중과 발우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대중은 스님에게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스승의 날인데 그날에는 스님이 문경 수련원에 안 계시기 때문에 앞당겨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대중은 스님에게 삼배를 정성껏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특별히 새로 백일출가를 한 행자님들이 많이 참석해서 어떤 관점을 갖고 수행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동체에 들어온 지 오래된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이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분들이네요. 초심자들끼리 사는데도 공동체가 이렇게 잘 유지되는 모습을 보니 다들 정말 대단하십니다. (웃음)

의식주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는 사람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를 하게 되면 의식주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먹는 것은 남이 버린 음식을 걸식해서 먹고, 입는 것은 남이 버린 옷을 주워서 입고, 자는 것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는 먹고 입고 자는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남이 버린 음식이 없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부처님과 제자들을 존경해서 식사 초대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것은 걸식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식사를 초대하는 사람이 아무런 사심 없이 초대한다면 응해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런 모습을 보면 버린 음식을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수행자는 먹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먹어도 괜찮지만 먹는 것을 가지고 마음을 졸이거나 불만을 갖는다면 수행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당번을 정해서 요리를 해 먹는 것은 남들이 버린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형편이 낫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나는 이걸 꼭 먹고 싶다’ 이런 이유로 마음이 껄떡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해서 불만을 갖는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어요.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분소의를 입어야 하는데 이 정도로 입는 것에 대해서는 늘 만족해야 합니다. 입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기를 돌아봐야 해요.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굴에서 자는 것보다는 방 안에서 자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도 더 편안한 잠자리를 갖고 싶어서 껄떡거린다면 ‘내가 지금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있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처님처럼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먹고 입고 자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번뇌가 없었는데, 우리는 훨씬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면서 의식주에 불만을 갖는다면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일부러 고생시키려고 돼지죽을 준다든지, 다 떨어진 옷을 준다든지, 길거리에 재운다든지 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주어지는 대로 불만 없이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걸식의 정신에서 비춰보면, 내가 아프다고 해서 ‘약 좀 주세요’ 하고 요청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옆 사람이 너무 아픈 것을 보고 ‘이 사람이 너무 아프니까 약을 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요청하는 것은 허용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잠자리가 불편한 것을 보고 개선을 요청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이 먹는 게 부실해 보여서 개선을 요청하는 것도 괜찮아요.

지식을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런 수행적 관점을 먼저 잡아야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렇게 먹고 입고 자는 데도 마음속에 아무런 번뇌가 없다면, 설령 밖에 나가 살게 된다 하더라도 괴롭지 않겠죠. 이런 관점이 안 잡힌 채 수행자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삶이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잠시 억누를 수는 있어요. 100일 동안은 먹는 것이 좀 불편해도 참을 수 있고, 입는 것이 좀 불편해도 참을 수 있고, 자는 것이 좀 불편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는 방식으로는 100일이 끝나자마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100일 출가를 했느냐는 거예요.

100일 출가를 했다면 최소한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 하나라도 터득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을 터득하면 100일 후에 밖에 나가서 산다 하더라도 삶이 얼마나 편안해지겠어요? 의식주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잖아요. 옛날에는 못 먹고 못 입고 집이 없어서 의식주에 전전긍긍해야 했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의식주가 다 보장되어 있는데도 단지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 더 큰 집에 집착해서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한평생을 보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더 갖기 위해 남을 속이고 괴롭히고 욕설을 하잖아요.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지위가 낮은 사람이든, 그렇게 한평생을 살다가 죽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진전이 없는 이유

수행자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이것이 먼저 잡혀야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워지고 얼굴이 확 펴지고 웃으면서 살 수 있어요. ‘방긋 웃으며 예 하고 합니다’ 이런 명심문을 아무리 입으로 외쳐 봐야 마음속에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으면 웃음이 안 나옵니다. 솥에 물이 끓을 때는 불을 확 빼야지 솥뚜껑 위에 계속 돌을 얹는다고 해서 해결이 안 되잖아요. 찬물을 붓는다고 해도 일시적인 해결밖에 안 됩니다. 근본을 꿰뚫어야 금방 인생이 자유로워지지 지엽적인 것만 계속 붙들고 있으면 시간만 낭비하게 돼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어요. 처음 발심할 때의 마음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마음속에 ‘실무자, 법사가 된 사람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신통치 않네. 혹시 나도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남을 쳐다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시비하는 그 사람이 처음에 어떠했는지 여러분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그 사람은 처음에 비해 엄청 좋아진 게 그 정도인 거예요. 사람마다 출발지가 다 다릅니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평가하면 안 돼요.

항상 처음 마음 낸 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수행은 학교 공부처럼 시간을 많이 낸다고 해서 금방 좋아지는 게 아니에요. 백일출가를 해보겠다고 처음으로 발심한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생활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에요. 초발심을 놓치면 변화가 안 생깁니다. 절에 들어와서 오래 살면 이 생활이 또 일상이 돼요. 출가하기 전에 집에서 살 때와 똑같아집니다. 아내와 싸우던 것이 도반과 싸우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에요. 부모를 시비하던 것이 법사를 시비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자꾸 긴장이 되는 이유는 참기 때문입니다. 관점이 딱 바뀌어야 얼굴이 밝아져요. 그래야 사는 게 편안해집니다. 일이 많아도 편안해야 하고, 일이 적어도 편안해야 해요. 그러니 수행적 관점을 딱 가지고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발우공양을 마쳤습니다. 행자님들은 스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각자 맡은 소임을 하기 위해 흩어졌습니다.

뇌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문경 수련원은 정토행자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문경 수련원의 전경을 비롯해 전국의 으뜸절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10시 정각에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모든 중생의 해탈을 염원하며 부처님 전에 향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깊은 지혜를 발원하며 도량을 밝히는 등을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며 부처님 전에 꽃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헌공 예불을 올렸습니다.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을 청하자 스님은 먼저 정토회의 고문이신 불심 도문 큰스님의 법어를 대독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봉축 기념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와 그 뜻을 기리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법문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 입멸기로 2566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해로부터 2646년이 되는 날입니다.

2600년 전 붓다의 깨달음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부처님께서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에 인도 대륙의 북쪽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바스투라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왕자 시절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장하는 동안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가장 좋은 스승을 모셔서 여러 학문과 무술을 공부하며 왕에게 필요한 자질을 갖췄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집안도 좋고 건강하고 똑똑하기도 해서 촉망받는 젊은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런 바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고, 아픈 사람은 약을 구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헐벗은 사람은 옷을 입는 것이,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얻는 것이, 지위가 없는 사람은 지위를 얻는 것이, 인기가 없는 사람은 인기를 가지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이해가 되고 또 그것은 해결이 가능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병든 사람은 약을, 헐벗은 사람은 옷을, 집 없는 사람은 집을, 지위가 없는 사람은 지위를, 인기가 없는 사람은 인기를 주면 괴로움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그런 것을 이미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싯다르타에게는 고뇌가 있었어요. 사람들은 싯다르타를 보고 ‘저런 사람이 뭐가 더 바랄 게 있겠냐? 나도 저 사람 정도만 되면 괴로울 일 없이 행복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을 갖춘 싯다르타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고뇌가 많았습니다. 이런 고뇌를 세상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어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죠.

오늘날 우리들이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수준은 천 년이 아니라 백 년 전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보더라도 옛날 왕보다도 더 잘 산다고 할 겁니다. 어쩌면 그들이 그리던 천당이나 극락 같은 생활일지도 몰라요. 그분들이 지금 우리를 본다면 ‘너희가 괴로울 일이 뭐가 있냐?’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런데 막상 우리들은 괴로워하고, 화와 짜증이 나고, 걱정과 두려움이 있고, 슬프고 외로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배가 고프다면 먹을 것을 얻으면 되고, 입을 옷이 없다면 옷을 구하면 되고, 집이 없다면 집을 구하면 되는데 그런 것을 다 갖추고도 괴로울 때는 무엇이 우리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이 더 맛있는 걸 먹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큰 집에 살고, 더 지위가 높아지고, 더 재산이 많아지면 해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온 길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1인당 GDP가 100달러였습니다. 지금은 1인당 GDP가 3만 5천 달러가 됐는데도 사람들의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죠. 이를 보면 앞으로 GDP가 35만 달러가 된다고 하더라도 괴로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경제, 경제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는 지나친 욕망의 충족과 과소비로 인한 결과입니다. 어쩌면 몇 세대가 지나면 후손들이 생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몰라요. 그런데 아직도 더 많은 성장과 소비가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술이나 마약을 많이 취할수록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런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2,600년 전 부처님에게 있습니다. 부처님은 오늘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고뇌를 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에게 구걸하고 신에게 빌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도 고뇌했어요. 그 고뇌를 ‘더 큰 나라의 왕이 되겠다, 더 큰 왕궁을 짓겠다’는 식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왜 괴로울까? 왜 화가 날까?’ 이렇게 마음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큰 집에서 살고, 더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더 많이 가져서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면 능력 있는 신에게 빌면 됩니다. 그러나 더 많이 갖는다고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에게 빌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싯다르타는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했고 세 가지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지나친 욕망입니다. 욕망은 멈출 줄 모르며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분노입니다.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화내고 짜증 내는 걸 말해요. 세 번째 원인은 시비 분별입니다. 사람은 각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해서 옳으니, 그르니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라난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도 자기는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하죠.

이 세 가지를 옛말로 탐심, 진심, 치심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욕심내고, 성질부리고, 시비하는 거예요. 이 세 가지로부터 벗어나면 어떤 괴로움도 없는 행복한 상태,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욕망의 노예, 성질의 노예, 시비의 노예가 되어 주인으로서 살지 못해요. 일체의 고뇌로부터 벗어난 사람, 붓다는 자기 인생의 주인입니다. 누구의 노예도, 누구의 종도 아니에요. 그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사회적 정의를 위한 등불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귀하고 천한 건 없다고 얘기하셨습니다. 피부 빛깔에 의한 인종차별도, 사회적 신분에 의한 신분차별도, 성별에 의한 남녀차별도, 신체장애에 의한 어떤 차별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차별은 인식 상의 오류로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귀한 존재라고 생각해 온 바라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천한 존재라고 생각해 온 천민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적어도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수행공동체 안에서는 그 어떤 신분차별과 인종차별, 성차별도 모두 부정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은 모두 붓다로 나아가는 같은 사람으로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먼저 본인 스스로 고뇌에서 벗어났고, 그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서 온갖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자유인이 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차별과 고통을 합리화하는 것에 세뇌가 되어서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사회적 부정의도 시정을 하셨어요. 개개인의 마음에 행복의 등불만 밝힌 게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위한 등불도 밝히셨습니다.

이런 방향이 2,600년 전에 이미 제시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막연히 부처님이 성인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존경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가 가진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훌륭한 지침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겁니다.

후대에 이런 부처님의 삶에 대해서 너무 감동한 사람들이 부처님에 대해서 신비스럽게 묘사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6년 간 수행 정진해서 깨달은 게 아니고 과거세로부터 무수히 많은 수행정진을 한 결과로 이 세상에 와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묘사를 했어요.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부처님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명을 갖고 왔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게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는 내용입니다.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은 존귀하다

하늘 위(천상)라는 말은 신들의 세계를 뜻하고, 하늘 아래(천하)라는 말은 인간 세상을 뜻해요.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통틀어서 이 분이 가장 존귀하다는 표현인데, 이 말은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은 존귀하다’ 하는 뜻입니다. 노예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 사람인 붓다가 가장 존귀하다는 의미예요. 신이 존귀한 게 아니라, 세상의 재물과 지위가 존귀한 게 아니라, 나의 삶이 가장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인권 선언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인권이 나에게만 머무는 게 아닙니다.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라는 구절이 이어서 나옵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어리석음에 빠져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인도해서 그들 또한 행복하게 살도록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이 표현이 문화가 되어서 한 손을 위로 한 손을 아래로 가리킨 아기 불상을 씻기는 욕불의식을 부처님오신날에 하게 된 겁니다. 부처님의 탄생을 신들마저도 축하해서 용들이 목욕을 시켰고, 브라만과 인드라 신들이 애기를 받고 축복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쓴 후대의 사람들이 이렇게 묘사를 한 거예요.

여기에 더해서 과거의 전생 이야기도 만들었습니다. 이번 생애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과거의 생애도 있다고 하는 건 당시 인도 사람들의 믿음이었어요. 그래서 전생 이야기가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문화와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는 분리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을 실천하는 방법

오늘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서 사람에게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차별을 용인하는 사회적 제도와 문화를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어요. 첫째, 생명존중 사상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람이 살려면 최소한의 생활용품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재산권을 보호해야 합니다.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도적 지원을 해서 생존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그들의 행복권도 보장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생존권이 보장되는 오늘날에도 행복권이 아직 보장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가 지나친 빈부격차입니다.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지다 보니까 먹고살 만한데도 고뇌합니다. 그래서 빈부격차를 좀 완화해서 인간의 행복권도 보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사회적인 등불을 밝히는 것도 부처님오신날에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셋째, 성적인 괴롭힘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까지도 마찬가지죠. 성적인 괴롭힘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를 알아서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적 도구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권 존중 사상입니다. 넷째, 말이 험악하면 엄청난 갈등을 유발하기 때문에 언어를 순화해서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비로운 언어, 사실을 알리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요즘 가짜 뉴스가 너무 많잖아요. 다섯째, 중독성 물질과 문화를 멀리해야 합니다. 건전한 문화생활을 해야 해요.

이런 문화를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모든 국민들과 전 인류가 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뇌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이 법을 우리가 널리 널리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을 기뻐하는 강생 찬탄 의식을 했습니다. 스님이 선혜 행자의 서원과 수기, 호명 보살의 서원, 부처님의 탄생이 기록된 경전을 읽고 선창하면 대중도 따라서 읽었습니다.

이어서 마야 부인이 입장하고, 마정 수기와 욕불 의식을 했습니다.

스님은 생방송을 시청하는 정토회 회원들에게도 온라인으로 마정 수기를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은 미래세에 부처가 될 것이오’ 이렇게 말하면서 수기를 주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부처를 이루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눈 딱 뜨고 이마를 화면 앞에 대세요.”

스님이 붓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행해 온 많은 인연 공덕으로 앞으로도 더욱 수행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미래세에 여러분도 모두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부처를 이루겠습니다.”

부처님의 탄생 선언을 함께 읽은 후 스님이 직접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본래부터 갖추어진 내 안의 지혜와 자비가 꽃처럼 피어나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기쁨과 그 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께 회향하며 모든 영가님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천도재를 마치고 국제불교연맹(IBC, International Buddhist Confederation)의 요청으로 일주일 후에 있는 남방불교의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상영할 기념법문을 녹화했습니다.

대웅전을 나온 스님은 초파일을 맞이해 문경 수련원을 찾은 대중들과 인사를 나눈 후 다음 일정을 하기 위해 공양간에서 먼저 공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명상원으로 내려가 홍콩 불교신문 크레이그(Craig)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홍콩 불교신문 인터뷰

명상원으로 내려가 홍콩 불교신문 기자 크레이그 씨와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크레이그 씨는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I'd like to bow three times first.” (먼저 삼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만 하세요.”

크레이그 씨는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3일간 동행한 소감을 말했습니다.

“I'd first like to say thank you, Sunim. This is the second time I've had the opportunity to talk with you. I would like to say I was very moved last 3 days by the welcome and the help I received from Jungto members. Everybody treated me like a very special guest, even though I am just ordinary person.”

(먼저 두 번이나 스님을 만나 뵐 수 있어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정토행자들이 지난 3일 동안 저를 반겨주시고 도와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이어서 준비한 질문을 차례로 물었습니다.

“This year is a landmark year for Jungto Society. The first 10,000-Day Practice began on 7 March 1993 with the aspiration to create Jungto-a society of peace, happiness, and sustainability founded on the Buddhadharma. Congratulations on reaching this remarkable milestone! What was the original inspiration for this ambitious undertaking?

(2022년은 정토회에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1993년 3월 7일 첫 번째 만일결사는 불법을 기초로 평화, 행복, 지속가능성이 있는 정토세계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갖고 시작되었죠. 이런 중대한 기점에 이르게 된 것에 축하드립니다! 어떠한 영감을 받아 이런 야심찬 과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스님은 정토회를 설립하기 전 사회적 상황과 설립하게 된 계기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기자님은 만일결사가 불교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전법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북한 인도적 지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크레이그 씨는 기사를 읽을 독자들을 위해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Could you offer any advice for practitioners reading this interview about how they might contribute to the momentum of this change?”

(이 인터뷰를 읽는 수행자들에게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조언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른 길이라면 성공과 실패를 너무 고려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른 길이라면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결과에 따라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 바른길을 최선을 다해가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이고 행복입니다.”

“Thank you very much. Are there any other points you'd like to add that we haven't already talked about?”
(고맙습니다. 이야기하지 않은 내용 중에 스님께서 더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잠깐 정적이 흐른 후 스님은 한 속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님은 영국인 기자에게 생소할 수 있는 속담이라 목에 건 염주를 풀어서 가리키며 다시 설명했습니다.

“이런 알이 아무리 많아도 줄로 꿰어야 쓸모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유용하게 사용되고 그 사람이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부처님 법이 위대한 겁니다. 위대하다는 말 뿐인 부처님 법은 그냥 박물관이나 금고에 보관될 뿐이지 쓸모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법을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실제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양약으로 계속 조제하고 제공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 대목에서 크레이그 씨는 박수를 쳤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부탁했습니다.

“그러니 기자님도 널리 알려주세요.”

“Okay. I'll try hard.” (노력하겠습니다.)

스님은 인터뷰를 마치고 짐을 싸서 3시에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부처님오신날에 이르기까지 연휴가 끝나는 날입니다. 길이 막혀 문경에서 서울까지 4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오늘은 지난달에 촬영했던 ‘KBS 이슈 Pick, 쌤과 함께-법륜스님 편’이 방영되는 날이었습니다. 차 안에서 본방송을 보는 사이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온라인 일요 명상

도착 후 8시 30분부터 일요 명상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여러분도 부처님처럼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 하는 욕심도 내 성질대로 다 하겠다고 하는 생각도 조금씩 내려놔야 합니다. 또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서로 다를 뿐이다!”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 세 가지 관점만 잘 잡아도 우리는 일상에서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하는 이런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명상은 ‘쉼’입니다. 몸도 마음도 다 쉬는 거예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해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욕망도, 의지도 다 놓아버린 상태입니다. 아무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움직일 일도 없고. 생각할 일도 없습니다. 생각할 일도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러나 졸거나 멍청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코 끝에 두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명상을 하는 방법을 정리하면 네 가지예요.

첫째, 편안한 마음으로 임한다.
둘째, 관심을 콧구멍 끝에 둔다.
셋째, 호흡을 분명히 알아차린다.
넷째, 놓치면 다시 한다.

이때 긴장하거나 애쓰지 말고, 안 된다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해 나갑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탁! 탁! 탁!

다시 죽비 소리와 함께 명상이 끝나자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해 보니 어땠는지 자신이 느낀 바와 의문을 채팅창에 올려 주세요.”

실시간 채팅창에 수많은 소감들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스님이 직접 한 줄 한 줄 읽어주며 소감을 함께 나눈 후 ‘모든 일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으로 명상을 마쳤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편안해지고, 그리고 집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보면 원래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본래 괴로울 일은 없어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듯이 세상은 변해갈 뿐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듯이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날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겨울은 싫고 봄은 좋다, 비 오는 것은 싫고 맑은 날은 좋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서 좋고 싫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잠시 눈을 감고 모든 동작을 멈추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집중해서 호흡을 알아차려 보면 이 천지간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 한 가지 빼고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짓고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내일은 오전과 저녁에 전법활동가 법회를 하고, 사이사이 손님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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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감사합니다

2022-11-15 13:01:50

나미타불

스님 법문 항상 감사드립니다. 존경합니다.

2022-05-18 06:47:19

순점

거룩하십니다
스님께선살아계신부처님이십니다

2022-05-12 16: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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