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3.26. 백일법문 38일째, 서암 큰스님 열반 22주기 추모 법회
“제가 지금까지 바른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분 덕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암 큰스님의 열반 22주기 추모 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5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추모 법회에 열리는 문경 봉암사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차로 2시간을 달려 7시에 문경 선유동 정토연수원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연수원에 상주하고 있는 법사님들이 오랜만에 연수원을 방문한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했습니다.

“잘 지냈어요?”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눈을 쓰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비가 온 다음에 눈이 와서 눈이 나무에 엉겨 붙어 나무도 많이 부러졌고요.”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 받은 후 9시 20분에 봉암사로 이동했습니다. 가장 먼저 서암 큰스님의 부도탑을 참배했습니다. 봉암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으로 난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자 한적한 곳에 부도탑과 탑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암 큰스님은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마음이 청정한 것이 불교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서 오늘날 정토회가 바른 불교를 실천할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 주신 분입니다. 스님은 서암 큰스님의 부도탑 앞에 삼배를 한 후 큰스님의 검소한 삶과 깨달음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가슴에 되새겼습니다.


부도탑 참배를 마치고 나서 봉암사의 수좌 스님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모두 경북 북부 지방을 휩쓸고 있는 대형 산불 피해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엊그제는 천년고찰인 고운사가 산불로 전소가 되어 버린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루 빨리 산불이 진화되어 모두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스님은 봉암사에 보시금을 전달한 후 10시 30분이 되어 수좌 스님들과 함께 추모법회가 열리는 대웅전으로 향했습니다.


문중을 대표해서 수좌 스님들이 먼저 잔을 올렸습니다. 스님도 함께 서암 큰스님의 영전에 삼배를 하고 큰스님의 뜻을 기렸습니다.

이어서 곳곳에서 참석한 스님들과 신도님들이 잔을 올렸습니다.


추모다례를 지낸 후 죽비 삼성으로 간결하게 추모 법회를 마쳤습니다.

대웅전을 나온 스님은 참석한 다른 스님들과 비빔밥으로 점심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봉암사를 나왔습니다.


11시 30분에 봉암사를 출발하여 원적사로 향했습니다. 원적사는 서암 큰스님과 인연이 아주 깊은 절입니다. 서암 큰스님은 50대의 이른 나이에 봉암사 조실로 추대가 됐을 때도, 총무원장을 2개월 만에 사퇴했을 때도 원적사로 돌아와 수행자의 모습을 결연히 지켰다고 합니다. 줄곧 “승려의 세계는 거울 속 같이 투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서암 큰스님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원적사를 만들었습니다.


상주와 문경을 가르는 청화산 자락에 놓인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자 원적사가 나타났습니다. 거의 산 정상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마치 구름 위에 있는 절 같았습니다.

법당을 참배하고 서암 큰스님의 영정 앞에서 잠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도 원적사에는 생전에 서암 큰스님을 모셨던 문도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열반 기일이 되면 모두가 모여서 따로 이곳에서 추모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스님은 요사채에서 문도 스님들과 차담을 나누며, 안부를 주고 받았습니다.

“법륜스님은 요즘 건강이 어떠세요?”

“얼마 전에 부탄에서 50일 동안 답사를 하고 왔더니 몸이 아직도 회복이 안 되고 있어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우리들은 가만히 앉아서 수행만 하고 있어도 힘든데, 그 험난한 지역을 그 연세에 다니시니까 보통 열정이 아니네요.”

차를 마시다가 서암 큰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생전에 서암 큰스님은 차 마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스님도 기억을 떠올리며 웃으며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제자들이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면 ‘이 놈들아, 왜 맑은 물을 안 마시고 썩은 물을 마시고 있느냐’ 하고 호통을 치시곤 하셨죠.”

참석한 모든 스님들에게 차비를 나눠드린 후 인사를 하고 원적사를 나왔습니다.

오후 1시에 원적사를 출발하여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백일법문을 매일 하느라 찾아뵙지 못한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정토회 초창기 시절부터 대전정토회를 일구어 온 향류 법사님이 작년부터 투병 생활을 하며 항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 향류 법사님이 입원해 있는 대전 성모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3시에 병원에 도착하여 향류 법사님을 병문안했습니다. 법사님은 요양원에 계시다가 최근에 병원으로 옮긴 이후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스님의 얼굴을 보고 환한 웃음을 내비쳤습니다. 스님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액자와 염주를 선물했습니다. 아들 두 명이 간병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격려를 한 후 병원을 나왔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 중인 실상화 보살님을 보기 위해 청주로 향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정토회 초기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후원을 해주신 분입니다. 올해 연세가 97세인데, 얼마 전 넘어져서 다리를 크게 다쳐 청주의료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보살님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잠에서 깨어나 스님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이고, 스님! 어떻게 오셨어요? 감사합니다.”

“얼굴을 보니까 저보다 더 오래 사시겠어요.”

보살님은 스님의 손을 꼭 잡은 채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보살님을 깨우자 스님이 보살님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요양 병원으로 다시 옮기면 그때 또 찾아올게요. 그때까지 치료 잘 받고 편안하게 계세요.”

스님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액자와 옥염주를 보살님에게 선물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드님이 나이 칠십이 넘었지만 보살님을 정성껏 간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드님을 격려한 후 병원을 나왔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 청주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에 올라탄 스님이 차창 밖을 보며 말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에요. 저도 곧 누워있는 신세가 될 겁니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면 그걸 누워서 계속 봐야 돼요.

옆에서 행자가 서글픈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상상도 하기 싫어요. 상상만 해도 서글퍼요.”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상상을 하기 싫어도 그게 현실인데 어쩔 수가 없죠. 당연히 일어날 일이에요. 그런 것을 불가항력이라고 그럽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면 마음이 슬프지만, 죽음을 면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슬퍼해도 소용이 없어요. 해가 지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슬퍼한다고 해서 해가 안 지도록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저녁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어제 수행법회 법문을 미리 녹화하면서 스님이 서암 큰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오늘은 정토회의 스승이자 고문이신 서암 대종사님이 열반하신 지 22주년 되는 날입니다. 서암 큰스님은 1917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님을 따라서 유랑하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16세에 예천의 서악사라는 절에서 3년간 행자 생활을 하고 사미계를 받으시고, 그로부터 2년 후인 20살에 비구계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한국 불교계에서는 종단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생을 보냈습니다. 큰스님은 그 시험에 합격해서 종비 유학생으로 일본 대학 종교학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셨는데 무리가 되었는지 결핵에 걸려 중도에 귀국하게 되셨습니다. 당시에는 결핵을 치료하는 약이 나오기 전이었으니까요.

큰스님은 ‘이럴 바에야 죽기 전에 용맹정진해서 깨달음을 얻겠다’ 하시며 토굴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정진하는 중에 결핵이 나았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큰스님은 ‘생사(生死)가 뜬구름과 같다’ 하는 사실을 크게 깨달으셨습니다. 그 후 평생 선사로서 정진하고 또한 중생을 위해 교화하며 사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전국 선방을 다니며 참선하시다가 6.25 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된 봉암사에서 대중의 추대를 받아 조실 스님이 되시어 봉암사를 중창하였습니다. 총무원이 어지러울 때 잠시 총무원장을 맡은 적도 있으시고요. 후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으셨고, ‘종단사태’가 일어나서 종정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선사로 살아가시면서 한편으로 우리나라 조계종의 중요한 직책을 다 수행하신 분이 서암 큰스님이십니다.

평생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사신 분

스님은 평생 수행자로 올곧게 사셨습니다. 얼마나 검소하게 사셨는지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시고, 기차는 꼭 최하급 열차인 통일호만 타셨습니다. 제자들이 새마을호 기차표를 끊어드리겠다고 해도 한사코 마다하시고 꼭 통일호만 타셨어요. 휴지를 사용하면 늘 말려놨다가 다시 사용하시고, 언제나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총무원장이나 종정, 그리고 원로의장이 되면 보통 옆에 한두 명의 시봉을 둡니다. 그러나 서암 큰스님은 평생을 시봉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먹는 것도 아주 소박하게 드시고, 입는 옷도 검소하게 입고 생활하셨습니다.

큰스님은 평생 참선을 하며 선정을 닦으셨고, 번다한 다른 일들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법문을 하시면, 녹음했다가 받아 적은 그대로 글이 될 정도로 중언부언이 없으셨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법문한 것을 녹음하면 조금 다듬어야 글이 되고, 또 말을 하다 보면 중언부언하게 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일체 중언부언이 없으셨어요. 이렇듯 서암 큰스님은 평생을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셨습니다.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 했구나!

제가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입니다. 한국에서 유학 온 스님 한 분이 공부하고 계신 절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그 절은 가정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응접실을 갖춘 작은 절이었습니다. 아마도 유학 생활을 하던 주지 스님이 교민들을 포교하려고 임시로 절이라는 간판을 붙여놓은 듯했습니다. 막상 찾아갔더니 주지 스님은 안 계시고 노(老)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바로 서암 큰스님이었습니다.

식사할 때가 되어 큰스님께서 ‘나도 객으로 왔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먼저 온 내가 주인으로 손님에게 대접하겠다’ 하시며 간단하게 식사 준비를 해주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큰스님께서는 침대가 불편하시다며 저에게 침대를 내주시고 본인은 바닥에 자리를 펴셨습니다. 침대에서는 허리가 아파 못 잔다는 핑계를 대시고 저에게 침대를 양보하신 거였죠. 이렇게 소박한 모습을 보고 저는 이분께 마음속 생각과 의견을 털어놓아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한국 불교계의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얘기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당시 한국 불교의 부정적인 모습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큰스님이 마치 기존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사람인 양, 그동안 마음에 쌓아두었던 한국 불교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큰스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계셨어요. 어느 정도 제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조용히 앉아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야. 그곳이 절이지. 그것이 바로 불교라네.’

이렇게 아주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마치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불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해야 한다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의 짧은 말씀 한마디에, 불법을 말하면서도 눈은 밖으로 향해 있는 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승복을 입었다고 승려가 아니고, 번듯한 기와집이 절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이 청정한 자가 승려이며, 비록 논두렁 밑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청정한 자가 머무는 곳이 절이라고 정의하신 거였어요. 다른 게 불교가 아니라 이게 불교라는 겁니다. 제가 주장한 내용에 대해 일침을 놓으신 거였어요. 물론 저도 이미 금강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일체 상에 집착하지 마라’,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본다’ 하는 얘기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은 사람이 스님이고, 그들이 사는 기와집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문제이고, 절이 문제이고, 불교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지금껏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불교 아닌 것을 불교라고 착각하고 개혁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 한 셈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해서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허공의 헛꽃은 환영으로 본 꽃입니다. 환영으로 본 꽃을 아무리 꺾으려고 해도 꺾을 수가 없겠죠. 그러니 제가 그토록 답답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모든 한계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

저는 그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제가 귀국한 후에 새로운 불교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암 큰스님을 뵙기 이전에는 스님들을 교육하고, 불교 재정을 투명하게 하고, 사회복지 시설을 많이 짓는 것이 불교의 개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을 뵙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청정한 자가 수행자이기 때문에 승(僧)이니, 속(俗)이니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누구든지 마음이 청정한 자가 수행자이고, 그들이 머무는 곳이 절이므로 따로 절을 지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곳이 가정집이든 식당이든 사무실이든 교회든, 어디라도 수행자가 머문다면 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일을 하며 장소가 마땅치 않거나 사람이 없을 때, 모든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토회가 출발하는 밑바탕이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정토회를 창립하고 나서 누구라도 구분 없이 몇 명이라도 모이면 어디서든 법회를 열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가지고 대화하는 그들이 곧 승려이고, 청정한 그들이 공부하는 그곳이 절이라는 관점을 늘 가졌습니다. 그래서 가정 법회를 시작으로 승려가 아닌 재가자가 중심이 되어 정토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재편하고 자신의 방을 법당으로 삼고, 자신의 집을 절로 삼는 새로운 불교적 대안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도 모두 서암 큰스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설 때쯤입니다. 저는 불교 활동을 하면서 무언가 바꿔야 할 것 같으면서도 한계가 느껴져서 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군인 출신이지만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당선되고 사회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노동자가 노동운동을 하고, 여성이 여성운동을 하고, 농민이 농민운동을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긴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토론의 결과 네 가지 당면 과제가 도출되었습니다.

첫 번째, 전 지구적으로 환경 문제가 가장 큰 과제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인류적 차원에서 절대 빈곤을 퇴치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먹고살 만해졌지만, 전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여전히 절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전쟁의 위험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항구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네 번째, 개인의 입장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수행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행복도가 높고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북유럽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살률도 제일 높았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아졌지만요. 그렇다면 환경이 좋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평화로운데 왜 자살률이 높았을까요? 그것은 주변 환경 조건만으로는 사람의 행복도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닦아야 했어요. 자기 마음을 닦는 것에 있어서는 불교가 가장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더 이상 불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교라고 하는 종교적인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 보편적으로 누구나 불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과제를 정했습니다. 이렇게 지구 환경 보존, 빈곤 퇴치, 평화 통일, 개인의 수행, 네 가지를 실천 과제로 정하고 정토회를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담아 만일결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바른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분 덕분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제 마음부터 정화하기 위해 1989년 하안거 기간에는 봉암사에 가서 부목을 한 철 살았습니다. 서암 큰스님께서는 이미 잘하고 있는데 왜 부목 생활을 하느냐고 물으셨고, 그간 사회 활동을 하면서 묻은 마음의 때를 정화하고자 대중들이 모르게 조용히 부목 생활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부목이란 절에서 일하는 머슴을 말합니다. 그때 저는 부목 일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습니다. 뭐든 열심히 하는 성향이고, 나중에 제가 누군지 알려졌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게을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지 못하고 그런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버린다는 마음으로 부목으로 들어가 놓고선 결국 나를 못 버린 셈이죠.

하루는 땀을 흘리며 장작을 패고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서암 큰스님께서 지팡이를 짚고는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계셨어요. 인사를 드렸더니 지나가듯 말씀하셨습니다.

‘자네 없어도 이제까지 봉암사는 잘 있었네.’
그때 저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집착을 놓기 위해서 다 버리고 부목 생활을 하러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또 부목 생활에 집착하고 있었던 거예요. 본분을 놓치고 일에만 집착하는 저를 그렇게 은근히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에 저는 심하게 몸살을 앓았습니다. 낮에는 부목으로 열심히 일하고, 또 마음속에는 ‘내가 중이다’ 하는 상이 있어서 새벽예불도 하고, 또 저녁예불까지 하다가 몸이 못 견딘 거예요. 그때 봉암사를 찾아온 거지를 설득해서 함께 부목 생활을 했는데, 그 사람이 제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놀렸어요. ‘너는 중도 아닌데 뭣 땜에 새벽에 일어나서 예불하고 또 저녁 예불도 하면서 중처럼 지내냐?’ 하면서요.

저는 봉암사에서 부목 생활을 하면서 큰스님으로부터 또 한 번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버렸다고 하지만 다른 것을 또 붙잡기가 쉽습니다. 그만큼 집착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잘 살펴야 바르게 정진할 수가 있습니다. 저 자신도 모르게 집착을 하고 있었는데, 큰스님께서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단 한마디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제가 이렇게 바른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서암 큰스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몸소 청빈한 삶을 사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큰스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으며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39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경전 강의 6강을 하고, 저녁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6강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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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진

부목 생활을 통해 나라고 하는 상을 짓고 집착하는 나를 보셨군요. 경전공부를 통해 알음알이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4-01 09:14:08

굴뚝연기

서암큰스님ᆢ뵙진못했지만 뭉클해서 눈물나구요ㅠㅠ월간정토실리는 서암스님말씀들이 넘좋아 방에오려붙여두고보는데ᆢ한줄만읽어도 깨달음이 정말크게다가오더라고요~서암스님책도 사서읽어야하는데ᆢㅜ
법륜스님께서도 좀더 있으시면,몸도약하시고,지병도있으시고ㅜ몸을 저렇게 혹사를하시니 아프시겠지만ᆢㅜ
스님께서 이제부터라도 일을줄여가시며 체력을 분배를 해나가신담ㆍ덜 아프시지않겠는지요ㅠ

2025-04-01 02:17:27

김현일

스님을 있게 한 큰 스님의 일화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2025-03-30 19: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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