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3.25. 백일법문 37일째, 정토불교대학 3강
“연기법을 알면 어떤 것도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37일째 날이고, 정토불교대학 3강 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오전반과 저녁반 2개 과정이 개설되었는데요. 오전 10시 15분에는 오전반 수업을 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는 180여 명의 입학생들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170여 명이 접속하고, 총 35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오전반 수업을 들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모두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부처님이 깨달음의 눈으로 본 이 세상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연기법과 삼법인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오늘은 이 세상의 실제 모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상의 실제 모습과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세상을 알아야 하는지가 오늘의 강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즉 거시 세계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작은 것, 즉 미시 세계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기계의 힘을 빌려왔습니다. 망원경으로 거시 세계를 보고, 현미경으로 미시 세계를 보게 된 거죠. 망원경의 성능이 좋을수록 더 먼 우주를 볼 수 있고, 현미경의 성능이 좋을수록 더 작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전자현미경으로 원자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기계를 이용해서 이 세계를 본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깨달음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셨습니다. 지혜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신 겁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지혜의 눈으로 보신 세계의 모습과 오늘날 과학으로 밝혀진 세계의 모습이 결과적으로 거의 일치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할 때는 바로 연기법을 깨달으신 겁니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말미암을 연(緣), 일어날 기(起)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하는 의미입니다.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나고, B로 말미암아 A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항상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이 세상의 모습을 이와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하나는 있고 없는 유무(有無)에 대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생기고 사라지는 생멸(生滅)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 문장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하는 것은 공간상에서 A와 B의 관계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거예요. 마치 가을 들녘에 볏단 가운데를 묶어서 벌려 세워 놓은 모습처럼요. 경전에는 ‘마치 볏단을 세워 놓듯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간상의 관계성을 말합니다. 어떤 존재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뒷 문장인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하는 것은 시간상의 관계입니다. 시간은 선과 후가 있으니,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공간적, 시간적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시공간을 통틀어서 관계 맺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고, 모든 존재가 관계 맺고 있는 게 실제 세계의 모습입니다. 당시 인도 철학에서는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불변하는 영구적인 실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아나트만(Anatman) 또는 아나타(Anatta), 즉 무아(無我)를 말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멸하므로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게 실제 세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당시 인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여 아니짜(Anicca), 즉 무상(無常)을 말한 것입니다. ‘연기법을 안다.’ 하는 말을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아와 무상을 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아와 무상을 깨달으면 괴로울 일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데, 이것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무지한 상태라면 하는 일마다 괴롭습니다. 잠시 즐겁더라도 곧 괴로움이 돌아옵니다. 이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일체가 다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교리로 정리한 것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리다.’ 하고 법의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여기에 일체개고를 넣으면 ‘중생의 삼법인(三法印)’이라 하고, 열반적정을 넣으면 ‘보살의 삼법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불교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가 연기법이고, 둘째가 중도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중도이고,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을 다른 말로 하면 무상과 무아이고, 무상과 무아를 깨달으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적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를 모르면 하는 일마다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일체개고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경전이든 성경이든 그게 무엇이든 읽었을 때 삼법인의 내용에 합치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처님이 말했다고 적혀있어도 삼법인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원칙을 잡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삼법인입니다.

어떠한 형식이나 교리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 정말 무상이고 무아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물질세계, 생명 세계, 정신세계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세상에 무상과 무아가 다 적용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이 연기법에 맞는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주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수업마다 수행 연습 과제가 주어집니다. 다음 주까지 수행 연습을 부지런히 한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달아 미팅을 했습니다.

12시 30분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 근무했던 분과 개성공단 개발 팀장을 했던 분이 찾아와서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오랜 기간 중단되고 있는 북한 인도적 지원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에는 6층 스튜디오로 이동하여 내일 수행법회에 내보낼 법문을 녹화했습니다. 서암 큰스님 열반 22주기를 맞이하여 스님이 서암 큰스님을 처음 만난 인연을 비롯하여 오늘의 정토회가 있기까지 중심 역할을 한 큰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법문을 하고 녹화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후 2시에는 사회 인사 한 분이 찾아와서 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에는 북한을 연구하는 분이 스님을 찾아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논문을 쓰고 졸업한 김윤희 박사는 북한에서 살다가 2000년대 중반에 남한에 온 분입니다. 당시 북한 식량난이 한창이던 1990년대 기아의 참상을 몸소 겪고, 그 사회가 붕괴되어 가는 현실을 매일 일지를 쓰며 기록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우연히 (사)좋은벗들에 발간한 자료들을 보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제가 북한 안에서 매일 기록하고 있을 때, 좋은벗들에서는 밖에서 우리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좋은벗들 자료 덕분에 이번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주 어려운 작업을 잘 해내셨어요.”

김윤희 선생은 스님께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드리며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굶주림 끝에 숨이 꺼져 가기 직전 남한 정부가 보내준 쌀 500그램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난 경험도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은 당시 매일 눈물을 흘리며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식량 지원을 호소하던 얘기, 북핵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통일 문제보다 평화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할지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연달아 미팅을 하고 나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3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직장을 마치고 달려온 190여 명의 입학생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340여 명이 접속하여 총 53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반 강연처럼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에 관해 설명한 후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연기법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물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물질적 개체들이 하나하나 다 따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겠죠.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을 만드는 근본 알갱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양동이에 담긴 물은 물 한 방울이 수없이 많이 모여 형성된 것입니다. 또 물 한 방울을 계속 쪼개서 물의 성질을 갖는 범위 안에서 가장 작은 단위가 분자이고, 이것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더 분해해 보니 수소와 산소 원자로 결합 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알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톰슨이 원자 안에 전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러더퍼드는 핵이 가운데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돈다는 원자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보어는 원자 모형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핵 속에 양성자, 중성자가 있고 바깥에 전자들이 태양계처럼 원형 궤도를 따라 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55년 전에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이 정도까지만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이제 전자현미경이 나오면서 전자들이 핵 주위에 안개나 구름처럼 포진해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단독자가 아닌 거예요. 그럼, 원자를 이루는 소립자들, 즉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는 단독자일까요? 아닙니다. 더 작은 쿼크라는 입자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쿼크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쿼크는 세 개 이상이 결합해야 입자로 존재하고, 결합이 해체되면 입자가 없어져 버립니다.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갖는 단독자란 없음이 과학적으로도 밝혀진 것입니다. 단독의 입자라고 할 실체는 없는 거예요.”

이어서 스님은 시간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의 측면에서 설명해 나갔습니다.

“물질의 상태는 고체, 액체, 기체로 나뉩니다. 물질에 열을 가하면 상태는 변하지만, 분자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학 변화가 일어나면 분자 구조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때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질량 보존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그러면 원자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핵 변화에서는 원자도 변합니다. 핵 변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라늄이 붕괴되어 2개의 다른 원자로 분열하는 핵분열이고, 다른 하나는 수소가 두 개 합해져서 헬륨이 되는 핵융합입니다. 이때 핵 변화에서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 성립되지 않고, 질량 감소가 일어납니다.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옵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유도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인 E=mc²은 바로 이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양을 나타내는 공식입니다. 이처럼 물질의 미시 세계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물질을 관찰할 때는 어떤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그다음 단계에서 다시 변화가 일어나고, 또 다음 단계에서도 계속 변화가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물질의 거시 세계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지구가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45억 4천만 년 전에 형성된 것입니다. 태양은 45억 7천만 년 전에, 달은 45억 3천만 년 전에 형성된 거예요. 태양의 질량이 우리 태양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9퍼센트입니다. 지구, 목성, 토성, 금성, 이런 행성들을 다 합해 봐야 1퍼센트도 안 돼요. 그래서 우리 태양계에서는 태양이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양이 은하계 우주에 1천억 개나 있습니다. 우주의 성간 물질이 모여서 태양, 즉 주계열성(主系列星)이 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크게 팽창해서 거성이 되었다가 폭발해서 백색 왜성(白色矮星)이나 블랙홀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별들의 생멸입니다. 우주도 이렇게 변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물질의 거시 세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합니다. 오늘날 과학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죠. 별의 생성과 소멸은 성주괴공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둘째, 생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합니다. 셋째, 생각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합니다. 생기고 머물고 흩어지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세계, 생명 세계, 정신세계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중중무진 연기되어 있는 세상

우주의 미세한 물질들이 모여서 입자가 되고, 원자가 됩니다.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간단한 분자로부터 더 무거운 분자가 만들어집니다. 무기질에서 유기질로 바뀌는 거죠. 그러다가 아미노산이 형성됩니다. 단백질이 형성되면서 차원이 다른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에요. 유전 정보에 의해 형성되는 세포가 나오고, 세포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다세포 생물이 됩니다. 인간의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가 모여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가 세 개 모여 다른 하나가 되고, 그런 것이 또 다섯 개 모여 또 다른 하나가 되고, 그것이 열 개 모여 또 다른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중중첩첩(重重疊疊) 결합된 상태입니다. 더 나아가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회가 되고, 인류가 됩니다. 지구 같은 행성들이 모여 태양계를 이루고, 태양계가 모여 은하계를, 은하계가 모여 대우주를 이룹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중중무진(重重無盡)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중중무진 연기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오히려 현대 과학에 의해 더 쉽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티끌 안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게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세포 안에 우리 몸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생명 세계도 서로 연기(緣起)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생물의 종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 종이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유전자를 바꿔버리면 다른 종이 나옵니다. 그래서 단독자로 존재하는 종의 실체는 없습니다. ‘작용’은 있으나 ‘실체’는 없는 거예요.

집합되어 있는 것 vs 연기되어 있는 것

연기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위해 자동차 부속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대의 자동차에는 2만 개의 부속이 들어갑니다. 2만 개의 부속을 두 세트 준비해서 하나는 그냥 바구니에 담아 놓고, 하나는 설계도를 따라 조립해 놓습니다. 양쪽의 무게를 재면 똑같이 나옵니다. 부속의 개수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2만 개의 부속이 ‘집합’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만 개가 ‘연기’되어 있는 거예요. 연기된 2만 개의 부속은 한 대의 자동차로서 작동합니다. 움직이고, 소리를 내고, 빛을 발합니다. 이것이 연기된 존재의 특징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연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봅니다. 우리는 다른 부속이 자기의 일부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동차에서는 부속 하나가 아무리 제 역할을 잘해도 다른 부속 하나가 고장 나 버리면 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전체로 보면 ‘존재’는 그냥 있는데, ‘작용’이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일부입니다. 어느 하나만 떼어서 ‘나’라고 할 것이 없어요. ‘작용’은 있으나 ‘실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를 단순히 없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단독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알면 어떤 것도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윤회한다고 하면 여기에는 단독적 성격이 있어야 합니다. 천당에 가고 영생을 얻는 데에도 단독자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세계는 영원한 것도 없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연기 사상이고, 오늘날의 과학적 사실이에요. 그러므로 꼭 불교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과학, 즉 미시 세계를 연구하는 양자 역학이나 거시 세계를 연구하는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을 공부하면 자연적으로 ‘사람이 별것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알았던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여러분이 고민하는 것들이 의미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좁은 세계 안에서 ‘잘났다.’, ‘못났다.’, ‘키가 크다.’, ‘키가 작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 말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관점을 바꿔 보면 어떤 것도 집착할 바가 못 되고, 분별을 일으킬 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가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인 거예요.

깨달음이란 어떤 특별한 것을 깨닫는 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연기법이란 모든 존재의 실제 모습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연기법에 기초해서 부처님은 여성 출가를 허용하고, 계급을 부정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연기법이라는 사실의 측면에서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부처님이 세상의 질서를 부정한다고 난리를 친 겁니다.”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준 후 사홍서원으로 3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다시 돌아와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정토회가 고문으로 모셨던 서암 큰스님 열반 22주기 추모제가 문경 봉암사에서 열립니다. 오전에는 서암 큰스님 열반 추모제에 참석한 후 상좌 스님들이 계신 원적사를 참배하고, 오후에는 투병 중인 향류 법사님과 실상화 보살님을 병문안하고 올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1

0/200

굴뚝연기

[ᆢ당시 북한 식량난이 한창이던 1990년대 기아의 참상을 몸소 겪고ᆢ좋은벗들에서는 밖에서 우리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ᆢ좋은벗들 자료 덕분에ᆢ][ᆢ오랜 굶주림 끝에 숨이 꺼져 가기 직전 남한 정부가 보내준 쌀 500그램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난 경험도ᆢ]
[이렇게 물질세계, 생명 세계, 정신세계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2025-03-31 03:50:20

김현일

연기법을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으로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03-30 20:01:01

장상

늘 감사합니다 _()_

2025-03-30 09:13:31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