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2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강의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스님은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금강경 제9분과 제10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수보리는 다시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수행 정진을 통해서 먼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고, 수행이 점점 깊어지면서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얻고, 그다음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고, 그리고 마침내 아라한(阿羅漢)에 이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얻을 바가 없다.’라고 하시니 ‘성문사과(聲聞四果)는 도대체 어떻게 성취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수보리의 이런 마음을 아시고 부처님이 다시 질문하는 것으로 금강경 제9분이 시작됩니다.
법을 얻은 바가 없는데, 수행의 네 단계는 어떻게 성취할까요?
그럼 성문사과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이치를 모르다가 처음으로 이치를 깨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이것은 마치 깜깜한 방에 불이 켜지는 것과 같고, 산에서 길을 헤매다가 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길을 알았다고 해서 꼭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다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으로 길을 발견한 상태를 일컬어 근본 불교(Theravada)에서는 수다원(須陀洹)이라고 합니다. 선(禪)에서는 초견성(初見性)이라 하고, 대승 불교에서는 견도(見道)라고 합니다.
수행을 시작했다면 적어도 이번 생애에 수다원까지는 성취해야 합니다. 수다원은 ‘성인(成人)이 되는 흐름에 들어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자로는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도 해요. 수다원부터는 성인이 되는 흐름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수행자가 수다원이 되었더라도 아직은 ‘찰나의 무지’가 남아 있습니다. ‘찰나의 무지’란 경계에 부딪혔을 때 무의식적으로 무지가 발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한 대 콱 때린다면 순간적으로 화를 벌컥 낼 수 있겠죠. 의식에서는 무지가 사라졌지만, 무의식에는 무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내가 놓쳤구나.’ 하고 돌이키는 참회(懺悔)입니다. 놓치면 돌아오고, 또 놓치면 돌아오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명상할 때도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놓치고, 다시 알아차리고 놓치는 것을 반복하잖아요. 이렇게 수많은 연습을 통해서 알아차림의 지속성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참회를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인 무지를 반복적으로 깨우치다 보면 경계에 부딪혀도 알아차림을 잘 놓치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열 번 중에 열 번을 다 놓치다가, 수행을 이어갈수록 놓치지 않는 순간이 늘어납니다. 예를 들어 경계에 부딪히는 순간이 열 번이라면, 그중에 일곱 번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경지를 성문사과 중에 수다원과(須陀洹果)라고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다함(斯陀含)입니다. 사다함은 열 번의 경계 중에서 적어도 여덟 번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경지입니다. 열 번 중에서 일곱 번까지 놓치지 않는 게 쉬울까요? 아니면 일곱 번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여덟 번까지 놓치지 않는 게 더 쉬울까요? 한 번이 일곱 번이 되는 것보다, 일곱 번에서 여덟 번이 되는 게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사다함(斯陀含)을 한자로는 일왕래(一往來)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도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나온 용어인데, 한 번만 더 인간 세상에 윤회하면 이후에 다시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 세상에 한 번, 천상계에 한 번, 이렇게 총 두 번의 윤회를 남겨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후에는 깨달음을 얻어서 인간 세상에도 천상계에도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해탈하게 됩니다. 농구로 비유하자면 공을 열 번 던지면 여덟 번은 공을 넣는 경지예요. 간혹 놓치기는 해도 거의 놓치지 않는 경지입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건드려서 화를 벌컥 내더라도 열 번 중에서 두 번 정도만 깨어 있지 못하고 놓칠 뿐 대부분은 깨어 있는 거죠. 그래서 윤회가 두 번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왕래(二往來)라고 하지 않고 일왕래(一往來)라고 했을까요? 마지막 윤회는 천상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윤회가 한 번 남은 것이어서 일왕래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아나함(阿那含)입니다. 아나함을 한자로는 ‘불환(不還)’이라고 합니다. 다시는 인간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나함은 천상계에 한 번 태어난 후에 해탈하게 됩니다. 수행적으로는 열 번 중 아홉 번은 놓치지 않고 한 번만 놓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아라한(阿羅漢)입니다. 아라한은 더 이상 어떤 세계에도 윤회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농구로 비유하자면 열 번 공을 던졌을 때 공이 안 들어가는 경우가 없는 경지입니다. 앞으로는 공을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간다는 거죠. 수행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놓치지 않는 아라한, 한 번은 놓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는 놓치지 않는 아나함, 한 번은 더 놓칠 수 있지만 그다음에는 놓치지 않는 사다함, 그리고 앞으로 여러 번 놓칠 수는 있지만 다시 범부중생으로 돌아가지는 않는 수다원, 이것이 성문사과입니다. 수보리는 이렇게 수행을 통해 성문사과를 차례로 얻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얻을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다.’고 하시니까 ‘수다원과를 얻었다’, ‘사다함과를 얻었다’, ‘아나함과를 얻었다’, ‘아라한을 얻었다’ 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의문이 드는 겁니다.
당시 소승 수행자들은 수행의 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하고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 이렇게 단계를 구분하고 그것에 집착했습니다. 이것을 세세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금강경의 제9분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입니다. 법에는 사실 아무런 단계가 없는데 수행의 단계라는 상을 지어 놓고 거기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방에 불을 끄면 컴컴하고, 불을 켜면 환한 것입니다. 촛불을 켰는지, 5촉짜리 전구를 켰는지, 10촉짜리 전구를 켰는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저 ‘불이 꺼졌다.’ 또는 ‘불이 켜졌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어떤 스님이 ‘나는 일체를 모두 깨달았다.’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깨달은 게 아닙니다.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이란 현실에서 필요에 의해 도의 단계를 4단계로 구분하고 있지만 사실은 도가 하나라는 의미예요. 일상(一相), 즉 ‘하나’라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상’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개념화하면 반드시 그에 반대되는 개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약’이라고 개념화하면, ‘독’이라고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 생깁니다. 무언가를 ‘부분’이라고 하면 그에 상대적인 기념인 ‘전체’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를 세우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또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가 되려면 하나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 ‘무상’일 때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서도 물질이 있으면 반드시 반물질이 있고,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듯이, ‘하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라고 할 것도 없는 ‘무상’입니다. 그래서 ‘일상’이 곧 ‘무상’이라는 것이 일상무상분의 의미입니다.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고 있는 지금이 정토
이어지는 금강경 제10분은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보통 우리는 어떤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이걸 해야지!’, ‘저걸 해보자!’ 하는 것처럼 목표나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면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기죠. 어떤 ‘집착할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은 ‘마음을 내되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것, 이 여섯 가지를 접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정토(淨土)를 장엄한다는 것은 단지 화단에 꽃을 심거나 어떤 사회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분별이 사라지면 그곳이 바로 정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어딘가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정토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 내용이며 나아가 대승 경전 전체의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이야말로 반야(般若)의 지혜를 바탕으로 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을 가장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제11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1층 식당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에서 온 소야(Soya) 비구니 스님과 점심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소야(Soya) 비구니 스님은 린첸다와 님과 인연이 되어 정토회와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는데요. 몽골에서 명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몽골에도 바른 불교를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점심 시간마다 공양을 준비해 주고 있는 봉사자들을 찾아가 격려한 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들 수고하시는데 사진이라도 같이 찍읍시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접견실로 이동하여 비구니 스님과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한 시간 동안 차담을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바쁘신데 많은 시간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야 비구님 스님은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며 저녁에 있을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6강 강의를 했습니다. 지난 다섯 번의 강의를 통해 불교의 세계관, 실천론, 우주론, 생명관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불교의 인생관’을 주제로 괴로움이 없는 삶에 대해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입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불교사회대학 입학생 20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는데요. 그 결과를 영상으로 함께 본 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 후 불교의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불교의 인생관에 대해 수행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인지,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주팔자,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옛날 사람들은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검증하는 방법은 한 개라도 예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됩니다. 부처님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갖는 모순점을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칼로 상대를 죽였다고 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넌 나쁜 놈이다!’ 하니까 ‘난 죄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어떤 이유로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것은 하나님이 시켰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 사람을 죽여라!’ 이렇게 하나님이 시켜서 죽인 것이지 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거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인 신이 주관하니까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 사주팔자에 의해 내가 그를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 시간에 내가 그를 죽이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 잘못이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나는 운명 지어진 대로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셋째, 전생에 그가 나를 죽인 적이 있어서 이생에서는 내가 그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미 전생에 살인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바꿀 수가 없다는 거죠.
이렇게 모든 것이 결정지어져 있다는 운명론으로 보면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해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신에 의해서든, 사주팔자에 의해서든, 전생에 의해서든, 이미 다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합당한 논리로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운명론이라면 인간이 사람을 죽이거나 해를 가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운명론은 옳지 않다고 부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도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천상에 태어나느냐, 안 태어나느냐를 신이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 계급인 사제들이 와서 ‘브라만 신이여! 천상에 태어나게 해 주세요!’ 하면서 제사를 지내주면 천상에 태어나고, 아무리 그가 착하게 살아도 이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천상에 못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젊은이는 그들의 얘기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을 부정하기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브라만 사제들이 와서 기도를 해주면 정말 천상에 태어납니까?’
부처님은 아주 자상하게 젊은이를 깨우쳐 줍니다. 그 젊은이를 데리고 연못가로 가서 돌멩이를 톡 던졌어요. 그러자 돌멩이가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부처님이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돌멩이가 어떻게 되었느냐?’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왜 가라앉았느냐?’
‘돌멩이가 무거우니까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건 자연의 이치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브라만 사제들이 와서 신에게 돌멩이가 물 위로 뜰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물 위로 뜨겠느냐?’
‘안 뜹니다.’
‘왜 안 뜨느냐?’
‘무거운 게 밑으로 내려가는 건 당연합니다. 그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너의 말과 같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하고, 남의 물건을 뺏고, 술을 먹고 취해서 행패를 부리며, 욕설을 하고, 성폭행을 하고 남을 죽이기까지 하면, 그 지은 업은 검고 무거워서 저 돌멩이처럼 저절로 밑으로 가라앉아서 지옥으로 가느니라!”
그러자 젊은이가 크게 깨우치고 말합니다.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부처님의 말을 듣고 이치를 확연히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거듭 찬탄하듯 대답을 한 것입니다. 젊은이는 의문이 싹 없어졌습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천당에 간다거나, 신의 힘으로 천당에 간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친 겁니다. 만약 천당이든 지옥이든 그런 곳이 있다면 자신이 지은 업대로 간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천당에 갈지 지옥에 갈지의 여부는 하나님이 정하는 게 아니고 누가 정합니까? 바로 자신이 정합니다. 즉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내 운명을 누가 좌우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다 되는 걸까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다 되는 건가?’ 또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한계가 지어져 있다고 말해도 안 되고, 아무 한계 없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질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생명 현상이 있고, 또 생명 현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정신 현상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신 현상이 뛰어나고 생명이 고도로 발달해도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물질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중력을 조금 거스를 수는 있습니다. 가령 토끼는 중력을 거슬러서 바닥에서 책상 위로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돌멩이는 바닥에서 책상 위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운명은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어떤 큰 테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1초마다 이쪽으로 갈 건지 저쪽으로 갈 건지, 이런 생각을 할 건지 저런 생각을 할 건지, 음식을 먹을 건지 안 먹을 건지, 이런 것까지 다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200년 안에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개척하고, 중도의 길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살 때는 환경에 순응하는 것과 개척하는 것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순응하라고 하면 인간의 자율성이 하나도 발현될 수가 없고, 뭐든지 다 개척하라고 하면 환경 파괴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는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신성을 너무 강조하면 인간의 마음을 억압하게 되고, 자유 의지를 너무 강조하면 환경 파괴와 전쟁 같은 온갖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자유 의지를 갖고 주어진 환경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순응하기도 하고, 개척하기도 하는,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성질 사이에서 중도적 관점을 가지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극단적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물론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유 의지보다는 운명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합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자는 자유 의지가 더 많이 작용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왜 괴로움이 발생할까요? 그 이유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이 컵의 크기를 논할 때, 마이크와 비교하면 작고, 컵 뚜껑과 비교하면 큽니다. 컵 그 자체로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의 인식 상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보고 작다고 생각하고, 큰 것을 보고 크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착각이에요. 다른 것과 비교해서 ‘크다’, ‘작다’ 하고 인식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새것도, 헌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인식 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색깔 자체가 노랗거나 빨갛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내 눈에 노랗게 보이는 것이고, 내 눈에 빨갛게 보이는 것입니다. 개한테도 노랗게 보일까요? 색맹인 사람에게는 무슨 색으로 보일까요? 다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색깔 자체는 뭐라고 정해져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눈에 빨갛게 보이고, 내 눈에 파랗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거나 혹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전도몽상(顚倒夢想)이고 무지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다 보면 ‘이건가? 저건가?’ 하고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은 ‘에이, 모르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해도 사실은 굉장한 일이에요.
왜 인식상의 오류가 일어나는 걸까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인식상의 오류는, 첫째,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이 가진 한계로 인해 일어납니다. 둘째,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시키는 데서 일어납니다. 셋째,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빨간 색깔의 렌즈를 통해서 흰 벽을 본다면 벽이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빨갛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흰 벽이죠. 이렇게 자기만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업식(業識)’이라고 합니다. 사물을 인식할 때, 지금까지 반복해 온 습관이나 살아온 경험의 스펙트럼이 렌즈의 색깔이 되는 것입니다. 그 렌즈가 사물을 인식하는 데 작용을 하는 것이 업식입니다. 사람은 각자 자라면서 경험한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합니다. 똑같은 법문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법문을 잘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업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는,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감각하는 여섯 가지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만나서 ‘안다.’ 라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12처'입 니다. 그리고 이 12처에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바탕이 된 여섯 가지 식(識)이 더해져서 인식 작용이 일어납니다. 12처에 여섯 가지 식을 합한 것이 ‘18계’입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이 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일체가 12처라고 하고, 일체가 18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식(識)입니다. 인식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식이라는 바탕에 의해서 우리는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느끼고, 같은 걸 들어도 다르게 듣고, 같은 현상에도 기분이 달라지고, 같은 상황에서 욕구가 달리 일어나고,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식(識)이 자신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업식을 갖고 태어났다거나, 그런 바탕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명론적 관점입니다. 반면에 부처님께서는 업식은 단지 형성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목줄을 채워서 개를 산책시킬 때, 개가 나보다 앞에 가기도 하고, 나란히 옆에서 가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합니다. 그럼 개는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산책을 했을까요? 짧은 순간에는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이리저리 갔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간 거예요. 그것처럼 여러분들은 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만, 결국 업식에 따라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운명이 따로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의 업식이 어떻게 형성돼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조사해서 그 정보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하면 그 사람에 대한 빅데이터가 됩니다. 이런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마음껏 조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운명을 바꾸는 방법
그런데 내가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떨까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누가 나한테 냄새나 맛이 나는 음식을 준다면 그냥 받아서 먹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쥐약이 들었다고 말한다면 순간 탁 멈추게 됩니다. 업식대로 행동한다면 죽게 되어 있는데, 알아차리면 탁 멈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운명을 바꾸려면 알아차려야 합니다. 반응을 할 때 딱 알아차리는 거예요. 깨어 있으면 습관대로 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습관대로 사는 것을 막는 것이 수행의 최고 목표입니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 측면에서는 나쁜 습관은 고치고, 좋은 습관은 기르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행은 좀 다릅니다. 나쁜 습관이든 좋은 습관이든 모두 자기가 주체가 되지 못하는 행위일 뿐이에요. 좋은 습관마저도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해가 되지 않을 뿐이죠. 좋은 습관에도 끌려 다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해탈이란 습관이 되어 있는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해탈이라는 목표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방법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다른 말로는 ‘깨어 있음’입니다. 어떤 남자가 돈도 많고, 잘생긴 데다 재능도 있다면, 그 남자하고 내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낮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자의 눈이 굉장히 높을 테니까요. 하지만 요행히 결혼을 했다면 고통이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돈 많은 사람은 돈값을 합니다. 인물 잘난 사람은 인물값을 합니다. 인물도 잘났고, 성질도 좋아 보이고, 돈도 많으면, 결혼한 남자라도 안 가리고 따르는 여자들이 많겠죠. 그래서 늘 내가 남편의 여성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헤어지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 가서 그만한 사람을 못 만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세속적인 표현으로 ‘빼도 박도 못 한다.’고 해요. 그래서 평생 괴로워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운명 지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궁합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다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이유
그렇다면 무지를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째, 욕심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둘째, 성질입니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그렇습니다. 셋째, 무지입니다. 인연과보(因緣果報)의 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탐진치(貪瞋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는 ‘무지’라고 해요. 그래서 12연기의 첫출발이 무명, 즉 무지라고 말하는 겁니다. 무지를 깨뜨리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합니다. 꿈에서 깨듯이 무지를 깨우친다고 해서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깨닫는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탐욕을 제거하는 방법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냄을 제거하는 방법은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방법은 지혜를 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으면 우리는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온갖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적절하게 수용하면서 때로는 적절한 선에서 개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도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잘됐다는 관점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일정한 변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인생관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주인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불교의 인생관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나침반’을 주제로 불교의 가치관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6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 나누기 속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40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굴뚝연기
정말 대단하세요!배울점이 너무나많고요ᆢ이렇게 법문을 논리정연하게,아무것도 보지않고 설하시는분은 법륜스님밖에 없어요ᆢ정말 대단하신거같아요!
[ᆢ그래서 습관대로 사는 것을 막는 것이 수행의 최고 목표입니다. ]
힘든줄도모르고 봉사하시는 좋은분들ᆢㅜ
많은인원 점심공양준비에ㅜ청소,촬영,안내등등ᆢ정토회는,아무조건없이 모든걸 희생하며 내어주시는 따뜻한 '엄마'같아요ㅠ
2025-04-01 04:41:06
임영현
카르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만난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꾸준히 알아차림하며 지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