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하루 종일 서울에서 여러 행사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모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전쟁과 지진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튀르키예-시리아 접경 지역에 지은 학교 준공식에 다녀왔습니다.
지진으로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희생되었는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도시에는 3천5백 명이 다녔던 학교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무너진 건물을 철거하고 4천 명이 다닐 수 있는 새로운 학교를 지었습니다. 건물 안에 112칸의 교실을 만들었는데, 수업에 사용하는 것은 52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실 칸수로는 4천 명이 학교를 다 다닐 수 없지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2부제 수업을 한다고 합니다. 교실 외에 왜 그렇게 공간이 많이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과학실, 실험실, 세미나실, 응접실, 긴급 대피실, 화장실 등 나름대로 필요한 용도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졌는데, 지하 1층은 내진 설계를 해서 폭격이나 지진이 일어날 때 대피소로 쓸 수 있도록 꾸며졌고, 옥상에는 64개의 태양열 전지판을 크게 설치해서 학교에서 필요한 전기를 다 공급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학교는 단순한 학교가 아닙니다. 부서진 건물이 새로 지어지듯이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시리아 국민들과 시리아 아이들에게 ‘우리도 일어설 수 있다’ 하는 희망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학교를 지었습니다. 이 학교를 짓기까지 JTS 박지나 대표님이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현지인들과 협의하고, 적은 돈으로 튼튼하고 아름답게 잘 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주셨습니다. 이번에 지원된 돈은 대부분 미국JTS에서 지원했습니다. 미국의 한 독지가로부터 많은 지원이 있었습니다.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학교 건물뿐만 아니라 도서관, 과학 기자재, 책걸상, 그 외에 아이들의 가방, 학용품, 교복, 신발 등 일체를 모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주변에 도로포장까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에서 제일 좋은 학교가 새로 생겼다며 시리아에 있는 모든 언론이 취재를 하러 와서 준공식 행사장이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학교를 지었다면 큰 사건이 아니었을 텐데 어려운 나라에서 이런 학교를 지으니까 그 파급 효과가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지원한 돈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리아 국민들의 문맹 퇴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학교 하나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전쟁으로 지난 10년간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00만 명의 난민 중 어린이가 60만 명인데 이 아이들이 학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기초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 수백 개의 부서진 학교를 어떻게 수리할 것인지, 많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일단 상징적으로 하나의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남은 과제들을 해결하려면 시리아 국민들의 많은 참여와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학교 준공식을 하고 온 모습을 보고 나서 대화를 이어가겠습니다.”
“정토회 회원 여러분들이 모두 조금씩 힘을 합쳐서 이렇게 세상에 보탬이 되는 많은 일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지진 피해를 입은 시리아 국민들을 위해 학교 건축을 하는 일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도 비누 600만 장을 지원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미얀마에는 홍수 피해가 크게 발생해서 무엇을 지원할 수 있는지 JTS 대표님이 지금 현장 답사를 하고 있습니다. 정토회 회원 여러분들은 국내에서는 전법을 열심히 해주고 있고, 해외에서는 JTS 활동가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즉석에서도 현장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11시 30분이 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 업무를 보다가 오후 3시부터는 JTS와 정토출판에서 "헬로 민다나오" 책 출판을 기념해서 마련한 북콘서트에 참석했습니다.
“헬로 민다나오”는 필리핀JTS 대표를 역임한 이원주 님이 민다나오에서 20년 넘게 구호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국제구호 활동가 후배들에게 전하는 조언, 필리핀JTS 사업을 하면서 경험하고 터득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북콘서트를 듣고자 정토사회문화회관 9층 강당에는 90여 명의 독자들이 모였습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래를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는 해금 공연으로 북콘서트를 시작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스님이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습니다. 민다나오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개척 시기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JTS가 민다나오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가 2002년도에 막사이사이상 평화와 국제 이해 부문 수상을 하면서였습니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러 갔을 때 저를 안내해 주신 파트너가 막사이사이상 수상위원회의 한 사람인 민다나오 가가얀데오르에 계신 토니 대주교님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손을 잡고 무대에도 올라가고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안내도 해주셨는데, 수상을 하고 난 후에 식사 자리에서 저에게 ‘스님께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도 하고 남북 간의 대화를 이끈 공로로 이 상을 받으셨으니까 그런 경험을 분쟁 지역인 우리 민다나오에도 좀 나누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민다나오 사정이 어떤지도 잘 몰랐고 분쟁이 있다는 정도만 알았습니다. 그 뒤에 민다나오가 어떤 상태인지를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 필리핀에 법회를 갔을 때 민다나오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활동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제가 어떻게 당장 평화를 이루어 내겠어요? ‘기독교, 가톨릭, 무슬림 다 모여라. 너희 싸우면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얘기한다고 제 말을 들을 사람들도 아니고요. 일단은 신뢰를 쌓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뢰를 쌓으려면 먼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결국은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고 그들이 저항해서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민다나오에는 무슬림 반군인 MILF와 공산 반군인 NPA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만나서 평화를 얘기해 봐야 자기들 생각이 있으니 안 듣잖아요. 그래도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니까 그들의 아이들에게 잘해주면 좀 신뢰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주 오지에 있는 원주민 지역과 무슬림 지역에 학교를 지어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 곳에 있는 오지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더니 외국에서 왔고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차가 다니는 지역에 있는 학교를 하나 소개해 주면서 ‘추가로 교실이 더 필요합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방문했으니까 지원해 주기로 하고 진짜 멀리 있는 오지를 소개해달라고 다시 요청했어요. 그러자 또 차를 타고 멀리 갔는데 거기에도 학교가 있는데 추가로 교실을 지어달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방문했으니까 이것도 지원해 주겠다고 하고 ‘몇 시간을 걸어가도 좋아요. 그러니 이런 곳 말고 진짜 오지를 소개해 주세요’ 이렇게 얘기했더니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세 번째는 걸어서 여섯 시간을 가야 하는 깊은 산속 마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답사를 하러 갔는데 그곳을 소개한 사람과 통역자는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고 중간에 낙오가 되고, 현지 활동가와 저만 그곳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기는 갔는데 말이 안 통해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마을이 ‘가가후만’이라는 마을입니다.
초기에는 이렇게 산악 부족에게 학교를 지어주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제가 민다나오에 학교를 지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이원주 님, 이규초 님, 노재국 님 등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시는 거사님들이 스님 혼자 못 보낸다며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분들도 마닐라와 루손섬에만 살았지 민다나오에는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준비해 가야 할지, 무엇을 먼저 지원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가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학교 준공식이 끝난 후에는 주민들의 접대가 좀 있었지만, 초기에는 산에서 과일을 구입해 먹는 식으로 배를 쫄쫄 굶고 다니면서 답사를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일일이 다니면서 답사를 했는데, 몇 번 답사를 함께 하고 나니까 사업하시는 거사님들이 일머리가 아주 좋아서 스님이 뭘 원하는지 금방 알아채고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개의 학교를 준공한 뒤부터는 주로 준공식에만 참석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민다나오에 평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 땅을 확보하고 곡식까지는 골랐는데, 씨앗을 실제로 심는 일은 사실 이원주 대표님을 중심으로 한 필리핀의 정토회 거사님들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이 직접 답사하여 학교 건축 과정을 전부 관리했고, 저는 어쩌다가 중간에 한 번 방문하거나 아니면 준공식에 참석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필리핀JTS의 20년 사업은 이원주 대표님을 중심으로 한 필리핀정토회 거사님들이 전부 일구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JTS에서는 실무자를 파견해서 큰 틀은 이원주 대표님이 중심이 되어서 하고 현장 관리는 JTS 실무자들이 중심이 돼서 했습니다. 그러나 파견된 실무자들이 주로 젊은 사람들이거나 대학생 자원봉사자이다 보니까 사업 점검을 제대로 못해서 이원주 대표님이 한 달에도 몇 번씩 답사를 갈 때도 있고, 거의 매달 답사를 가다시피 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이 50살에 대표를 맡아서 70살에 그만두었으니까 전성기 시절을 대부분 민다나오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업에 그 정도 집중을 했으면 아마 떼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사업보다 필리핀 민다나오 구호 사업에 더 집중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모으는 것보다도 정말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선택한 것이죠.
예전에는 가톨릭과 무슬림 지역이 완전히 휴전선처럼 그어져서 왕래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JTS가 학교를 지음으로써 선생님도 파견되고 양쪽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 소통이 되었습니다. 이쪽 원주민과 저쪽 원주민 사이에도 소통이 안 되다가 학교를 지으니까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학교가 없었으면 평생 안 볼 적대관계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가 되기 시작했고, 학부모들도 교류를 하게 되었고, 선생님들도 출입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원래의 목적이었던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평화 협상이 체결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지역적 평화는 상당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무슬림 반군 총사령관을 만나서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어른들끼리는 싸울 수 있다. 그런데 어른들이 싸운다고 아이들도 교육을 못 받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른들은 싸우더라도 아이들 교육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학교 짓는 일에 안전을 담보해 주고, 선생님 파견이 가능하도록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은 해야 하지 않느냐’
무슬림 반군 총사령관이 ‘좋다!’ 하고 찬성하면서 무슬림 지역에도 학교를 짓게 되면서 점점 평화의 영역이 넓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민다나오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원주 회장님의 회고록에 이런 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이원주 회장님에게 그 얘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어서 김제동 님의 사회로 저자인 이원주 전 필리핀JTS 대표님과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스님과 이원주 대표님이 만난 인연, 민다나오가 분쟁 지역이 된 이유, JTS가 민다나오에서 해 온 일,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어려웠던 점과 보람을 느낀 점, JTS의 활동 원칙, 국제구호활동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지난 20년의 활동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대담을 마치고 다시 스님이 무대로 올라와 북콘서트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중들로부터 질문도 받았습니다. 한 청중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의 자녀분들은 아버지의 봉사 활동에 대해 반대가 없었나요?”
“반대는 없었고, 아이들도 민다나오에 봉사를 하러 오고 했습니다. 배우 한지민 씨가 알라원 마을에 봉사를 하러 갔을 때 통역을 작은 아들이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이들은 이런 활동을 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김제동 씨도 궁금한 점이 있다며 이원주 대표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도 궁금한 점이 있어서 좀 여쭤보겠습니다. 자제분들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남자아이 둘입니다.”
“그래서 한지민 씨가 민다나오에 갔을 때 통역을 갔군요. 제가 두 번이나 민다나오에 갔을 때는 단 한 번도 통역이 온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민다나오에 1박 2일 정도가 아니고 일주일 이상 머물렀는데도 한 번도 통역이 온 적이 없었어요. 원주민 마을 아이들과 공놀이를 할 때도 통역 없이 저 혼자서 대화를 했고요.”
"이 집에는 딸이 없어요."
"네, 압니다. 스님도 딸 없는 거 알고요." (웃음)
“그러니까요. 죄송합니다.”
한바탕 크게 웃고 이제 이원주 대표님에게 마무리 인사를 청했습니다.
“사실 <헬로 민다나오> 책은 저 혼자만의 책이 아니라 법륜 스님과 JTS활동가들이 20년 동안 함께 활동한 내용을 저의 회고록에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활동하시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 책을 읽고 ‘저런 일도 했구나!’ 하면서 용기를 내어 활동에 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많이들 읽어 주십시오.”
스님도 지난 20년 동안 이원주 대표님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이 지난 20년 동안 정말 수고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또한 현재 필리핀JTS 대표를 맡고 있는 노재국 거사님, 부대표를 맡고 있는 이규초 거사님을 비롯하여 필리핀정토회에서 활동하는 많은 거사님들과 보살님들도 같이 답사하거나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신 덕분에 오늘날 JTS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또 JTS 실무자들도 민다나오에서 근무하면서 현장을 책임지고 활동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힘을 모아 함께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JTS 민다나오 사업은 이원주 대표님이 가장 크게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큰 박수로 축하합시다.”
큰 박수와 함께 북콘서트를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제동 씨가 민다나오의 평화가 한반도의 평화로 다시 이어지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민다나오에서 싹튼 평화의 씨앗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로 인해서 다시 전쟁의 위기가 치닫고 있는 한반도에도 뿌려지길 기원합니다. 씨앗이 뿌려진 그곳에, 꽃이 피고 난 그곳에, 평화라는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북콘서트를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출발하여 조계사로 향했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해가 저물었습니다.
불광 창간 50주년을 맞아 불광사에서는 불교계의 여러 화두를 주제로 불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는데요. 세 번째 강연자로 법륜스님을 초청했습니다. 강연이 열리는 곳은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입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불광사 전 회주인 지홍 스님을 비롯하여 관계자들이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잠시 차담을 나눈 후 함께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강연 주제는 ‘불교도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스님이 무대에 오르자 모두 큰 박수로 스님을 반겼습니다. 스님은 먼저 불광 창간 50주년을 축하했습니다.
“월간 불광 600호 창간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50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 온 것에 대해서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근대 불교를 처음 일으킨 분은 용성조사님입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불교를 쉽게 알리기 위해 ‘불일(佛日)’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아(無我)’라는 불교 잡지도 창간하셨고요. 이를 통해 불교가 복을 비는 무속 종교 같은 종교가 아니고 아주 합리적이고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수행 종교라는 점을 세상에 알리는 등 불교의 지성화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또 누구나 다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서셨고, 우리의 삶과 불교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하시며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운동에도 두려움 없이 참여하시면서 불교의 생활화를 주창하셨습니다.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 이것이 용성조사께서 주창하셨던 불교 혁신 운동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용성조사님께서 하시는 일을 탄압하기 위해 유사 종교를 철폐한다는 명목으로 대각사를 폐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은 숭고했지만 그분의 독립운동이나 불교 혁신 운동은 충분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 용성조사님의 손자 상좌가 되는 광덕 큰스님께서 대각사에서 불광회를 창립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불교를 전파하셨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잠실에 불광사를 창건 하셔서 현대불교의 새로운 깃발을 드셨는데, 그중 하나가 월간 불광의 발간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 뜻은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불광은 단순한 불교 잡지가 아니라 용성조사님의 불일 잡지를 계승하고 광덕 큰스님이 해오신 불교 전법의 정신을 계승한 불교 혁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오늘 우리는 높이 사야 합니다. 저도 용성조사님과 광덕 큰스님의 큰 뜻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제가 가진 작은 재능이나마 불광을 후원하는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다시 한번 불광 창간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님이 즉문즉설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첫 번째 질문자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사실 오늘 강의 주제가 불교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해서 기대를 하고 왔는데, 즉문즉설을 하신다고 하니 조금 실망입니다. 저는 불교도의 역할, 그중에서도 불교계에서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불교도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첫째, 기후 위기 시대에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 활동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검소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고 정말로 소비를 줄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적게 낳는 것도 공동체성 붕괴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불교계가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에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개인의 마음이 허전하고 자살을 많이 하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널리 보급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남을 탓하지 말고 수행적 관점을 갖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깨닫는다고 하면 수염이 허연 영감이 구름 타고 가는 걸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두운 밤에 불을 탁 켜면 밝아지듯이 나의 어리석음이 소멸되면 번뇌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중생을 고뇌로부터 구원하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대중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습니다. 저는 불교를 현대화할 필요 없이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를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맞게끔 조금만 변형하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즉문즉설이 심리상담보다 훨씬 효과적인 측면이 있는 겁니다. 심리상담을 6개월 받아야 해결되는 일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통해 잠깐의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리상담이란 대화를 계속해 가면서 이해시키는 반면 즉문즉설은 어떤 면에서 이해를 좀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교를 바탕으로 하지만 지금 시대에 맞게 종교를 넘어서서 대중들에게 이 좋은 법을 전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 작용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기독교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상관없어요. 자기 신앙은 알아서 믿도록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제가 종교로서의 불교를 주장한다면 종교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가 있는데, 저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종교를 따질 필요 없이 이 법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불교인들이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좀 더 좀 살려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종교로서의 불교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진짜로 천당에 가느냐 안 가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종교는 슬픔을 위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깨달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면 죽어서 어디 가느냐는 과제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죽으면 좋은 데 간다’ 하고 말해주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거짓말이라고 하면 위로가 안 되겠죠. 진짜라고 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옳으니 그르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과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때가 있으면서 동시에 부작용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특별한 부작용이 없습니다. 불교냐 기독교냐를 논하지 않고 종교는 각자 알아서 믿되 다만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기존 불교가 문제니, 조계종이 문제니,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의 논쟁을 한 단계 넘어서서 나와 생각이 다른 그들마저도 포용해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고 권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아니라 현정(顯正)을 함으로써 파사(破邪)가 이루어지는 길이 오늘날 우리가 시도해 볼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삿된 견해를 논파하여 올바름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올바름을 드러내어 삿된 견해를 논파하는 것이죠.”
모두 큰 박수로 스님의 말씀에 공감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두 시간 동안 다섯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직장에서 일을 많이 하고 퇴근하면 번 아웃이 되어 아이들에게 화를 많이 내게 된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저는 19년 차 간호사고요. 13년 차 주부입니다. 밖에서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번 아웃이 되어 집에 오면 아이들에게 자주 화를 내게 됩니다. 밖에서 너무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집안에서의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화를 많이 내게 되고, 예전의 순수함도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게 병인가 싶어서 한때는 ‘심리상담을 받아봐야 하나. 내가 왜 이러지’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마음의 화를 알아차리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계속 화를 냅니다. 어떻게 저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래요. 저도 밖에 나가면 좀 점잖은 척합니다. 혼자 방에 들어가면 옷도 벗고, 힘들면 눕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있는 데서는 아프다고 누울 수가 없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다 남들 앞에서는 어느 정도 가식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고 예의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화가 나도 좀 참고, 하기 싫어도 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면 그런 것으로부터 좀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지 특별히 위선적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 정도가 좀 지나치면 ‘위선적이다’, ‘가식적이다’ 이렇게 말하죠.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런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닙니다.
특히 질문자가 아기 엄마만 아니라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또 상대가 남편이라면, 남편한테 좋은 건 아니지만 성인이기 때문에 아내가 화 좀 낸다고 해서 남편이 그것 때문에 큰 상처를 입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전혀 다릅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화를 내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화를 내면 아이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예를 들어, 오줌을 작은 식물에 주면 다 말라 죽어 버리는데, 큰 나무에다 주면 거름이 되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는 연약해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고함을 치거나 때리거나 욕을 하면 연약한 뇌 구조에 전부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어른이 된 뒤에 전부 트라우마로 작용합니다. 아이의 성격 형성에 아주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질문자는 한 사람으로선 매우 괜찮지만, 아기 엄마로서는 부적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간호사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와서 화를 내게 된다면 간호사를 그만둬야 합니다. 둘째, 간호사를 그만둘 수 없다면 아기를 다른 데 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키우는 게 아이에게 더 좋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키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키우는 게 우리 아이에게 더 좋다면 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도 다른 데로 보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부모가 있는 것이지 부모를 위해서 아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혼을 할 때도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키워야 하고, 남편한테 보내는 게 아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내 가슴이 찢어져도 남편한테 보내야 합니다. 내 욕구에 집착해서 아이를 붙잡고 애완동물 키우듯이 아이를 키운다면 좋은 부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는 부모로서는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할래요?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보낼래요? 아니면 직장을 그만둘래요?”
“주위에서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고 합니다. 엄마도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고 하고, 신랑도 그렇고요.”
“그건 아이가 어떤 상처를 입는지를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들은 아이가 크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좀 편한 병원으로 옮길까 생각도 해봤는데, 월급도 더 적고, 제가 지금까지 쌓아 온 커리어에도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돈 조금 더 버는 것이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완전히 나쁜 사람이네요. 스님이 큰 소리를 낼 때가 딱 두 가지예요. 말 못 하는 아이를 이야기할 때와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이도 자기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고, 북한 주민들도 자기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그들을 대변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절대로 엄마는 아이에게 화를 내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부모에게 받은 상처도 많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무지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이에게도 큰 손실입니다. 밥 좀 덜 줘도 되고, 학교 안 보내도 괜찮지만, 화를 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나중에 큰 과보를 받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매일 아침마다 300배씩 절을 하세요. 절을 하면서 ‘저는 화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세요. ‘화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질문자는 앞으로도 계속 화를 낼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면 ‘난 아무것도 안 돼’ 하고 자기 학대를 하게 됩니다. 그러지 말고 ‘화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겠습니다’ 하는 말은 의도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실제로 화가 나더라도 ‘저는 화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뇌며 하루에 300배씩 절을 해서 고치든지 하세요. 아이들을 위한다면 ‘내일’ 이러면 안 됩니다. 당장 고쳐야 합니다. 남편은 어른이니까 화를 내도 괜찮습니다. 싸우고 헤어지면 끝이니까요.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게 안 됩니다, 여러분의 무지 때문에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어요. 부모는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 아니라 또 많이 사랑도 주잖아요? 이걸 애증이라고 합니다. 보면 상처 때문에 싸우고, 헤어지면 애증 때문에 그리워요. 이래서 부모 자식이 떨어지지도 못하고 붙지도 못하는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에게 화내고 짜증 내더라도 아이가 좀 크면 괜찮을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안 돼요. 엄마라도 눈이 어두운 건 어두운 거니까요. 그런 말을 절대로 들으면 안 돼요.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강연을 마치며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미래에도 늘 여러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은 늘 일어납니다. 누군가가 죽든지 사고가 나든지 뭐가 일어나도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안 일어나는 게 행복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능히 그것을 감당해 내는 것이 자유입니다. 세균이 없는 무균 상태의 병실이 진정한 자유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면역력이 있어서 어떤 세균이 있든 관계없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것처럼 자꾸 상황을 탓하지 마세요. 상황이 벌어지면 ‘그래,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떡하겠냐?’ 이런 자세를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새 차를 샀는데 어디에 긁혔어요. 안 긁히면 좋지만 이미 일어나 버렸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을 갖고 논하지 말고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떡하겠느냐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미성년자와 어린아이는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내 성질대로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생명이 어미가 새끼를 키울 때는 목숨을 걸고 새끼를 보호하잖아요? 그래야 종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로서는 마음껏 해도 되지만, 아이의 엄마로서는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자의 권리와 엄마의 의무가 조금 다릅니다. 두 가지가 겹칠 때는 엄마의 의무가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가 지속적으로 번창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관점을 갖고 나날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불광사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다시 한번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 밤 10시가 되어 서울 정토회관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정기 건강검진을 받은 후 서울을 출발하여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고, 저녁에는 1990년대 중반에 북한 난민 돕기 활동을 도와준 동포분들을 초청하여 그 노고에 감사함을 표하며 저녁 식사를 함께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