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0.15 애광원 가을 나들이, 『푸른배달말집』 책 잔치(울산)
“평소 말을 안 하던 친구들이 노래를 하니까 가슴이 찡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애광원 생활인들과 함께 가을 나들이를 하는 날입니다.

애광원과 스님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21년 전입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남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거제도에 있는 애광원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때, JTS가 애광원의 피해 복구를 도왔습니다. 피해 복구가 끝나고 스님이 김임순 원장님에게 앞으로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겠냐고 물으니 원장님은 '장애인들은 바깥나들이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나들이를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정토회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애광원 생활인들과 함께 나들이를 다녀오고 있습니다.

이번 나들이는 경주 일대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9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여 문무대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파란 조끼를 입은 경남지부 정토회 회원 40여 명이 애광원 생활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애광원 생활인들이 도착하기를 함께 기다렸습니다.

10시가 넘어 애광원 생활인들이 탄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경증 장애가 있는 32명의 생활인들을 비롯하여 대표이사님과 10명의 선생님이 함께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스님은 버스 문 앞에서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반가워요!”

“스님, 안녕!”

스님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린 애광원 생활인들은 다시 봉사자와 손을 잡았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함께 나들이할 짝지입니다. 몇몇 분들은 봉사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와락 껴안기도 했습니다.


생활인들과 봉사자들은 손을 잡고 먼저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스님은 문무대왕릉 안내도 앞에서 애광원 생활인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분이 다가와 스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손을 와락 잡았습니다.

“기, 기억나는데! 네 이름이 뭐야?”

“법륜이에요.”

옆에서 듣던 송우정 이사님이 말했습니다.

“반말을 하면 어떡해요.”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괜찮아요.”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기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곧 생활인들이 다 모이자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를 모르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봐요.”

몇몇 분들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안다고 손을 든 거죠?” (웃음)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스님이 문무대왕릉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도착한 곳은 경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문무대왕릉’입니다. ‘왕(王)’이 뭔지 알지요? 왕의 무덤을 땅에다가 쓰지 않고 바다에 썼습니다. 저기 앞에 조금 넓게 펴져 있는 바위가 하나 보이죠. 저 바위에 문무대왕의 무덤을 썼기 때문에 저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부릅니다.

바다 위에 무덤을 만들라고 유언을 남긴 왕

‘신라’라는 나라는 천 년간 지속이 되었는데 30번째 왕인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했어요. 고구려, 신라, 백제를 통일한 뒤에 죽으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적은 일본이라는 나라밖에 없었는데, 일본은 필시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올 것이기에 스스로가 바다의 용이 되어서 일본이 침공해 오면 막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맹세를 했기 때문에 죽으면 자신을 화장해서 유골을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을 바다에 썼어요. 그런 연유로 여기 동해 바다 바위 아래 유골이 묻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사진을 한 번 보세요. 이렇게 하늘 위에서 바위를 내려다보면 가운데가 자연스럽게 십자가 모양으로 찢겨 있습니다. 가운데를 기준으로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졌어요. 한쪽은 완전히 갈라지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갈라지지는 않았어요. 온전한 십자가까지 되지는 않았던 거죠. 그래서 파도가 칠 때마다 골이 파인 곳에 물이 들어오고 나가고 합니다. 십자가 모양의 중간에 납작한 돌이 하나 보이죠. 이건 작은 바위인데요. 이 바위 밑에 유골함을 넣고 바위로 눌려 놓았습니다.

이 바위의 골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인공적으로 약간 깎아 놓은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전설로만 전해 오던 이야기를 고고학자가 실물로 발견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바위가 왕의 유골을 묻은 무덤이기 때문에 ‘문무대왕릉’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며 바닷가에서 노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닷가로 가서 연도 날리고 잘 놀다 갑시다.”

원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애광원 송우정 이사님이 인사 말씀을 했습니다.

“정토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법륜스님,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는 약간 추운 듯합니다. 이상한 것은 애광원이 나들이를 나오면 항상 날이 개이는 현상이 있습니다. 오늘도 비가 멈춰져서 좋은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 귀한 시간 내어 주셨는데요. 모두가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스님께서 바쁘신 가운데도 짬을 내어 우리 친구들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시고, 항상 시간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날씨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잠시 해가 들어간 이런 날씨가 좋은 겁니다. 햇빛이 나면 얼굴이며 머리가 따가울 수 있죠. 저 같은 사람은 머리가 없으니까 햇빛이 더 뜨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런 날씨가 더 좋을 때가 많습니다. 오후에는 구름 속에서 해가 나와 날씨가 화창해질 겁니다. 그러면 바닷가를 거닐어 봅시다.”

봉사자들은 생활인들의 손을 잡고 나란히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생활인들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바다와 바람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했습니다.

한 생활인은 스님과 어깨동무를 했습니다. 스님을 보면 항상 친구를 만난 듯 가장 반가워하는 분입니다.

대왕암을 뒤로하고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조별로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은 바닷가 바람을 이용하여 평소 생활인들이 해보기 어려운 연날리기를 해보았습니다. 스님은 생활인들이 연줄을 잡고 달리면 뒤에서 연을 띄워주었습니다. 단번에 오르는 연은 없었습니다. 연이 떠오르지 않아도 연줄을 잡고 쌩쌩 달리는 생활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바람을 타고 연이 하늘 위로 숭숭 날아올랐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감은사지로 향했습니다. 감은사지는 계단이 있어서 생활인들이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번에 나들이를 온 분들은 모두 경증이어서 충분히 가능해 보였습니다.

3층 석탑으로 올라가기 전에 스님이 감은사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감은사입니다. 한번 따라 해봐요. 감은사.”

“감은사.”

“은혜에 감사한다고 해서 감은사에요. 삼국을 통일하여 신라가 그 중심이 되도록 한 문무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를 지었습니다. 아까 바다에 무덤을 만든 사람이 문무대왕이라고 했지요? 문무대왕은 자기가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원을 세운 분입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은 문무대왕이 용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이 된 왕이 아까 본 바위 속에 있다가 파도가 칠 때 나와서 물길을 따라 이 법당 밑에 와서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별로 안 믿어지나 봐요.” (웃음)

생활인들은 스님의 설명을 듣고도 긴가민가하는 눈치였습니다.

“저 축대 밑에 보면 배를 타고 와서 밧줄을 맬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일종의 부두예요. 이 계단을 따라서 절로 올라가는 거예요. 한번 올라가 볼까요?”

“네!”

모두가 조심조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계단에 선 김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자, 뒤로 돌아요!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다시 뒤로 돌아 계단을 올랐습니다. 우뚝 솟은 동탑과 서탑이 나타났습니다. 탑을 지나자 정말로 스님이 설명한 대로 용이 된 왕이 물길을 따라 도착했다는 법당의 바닥이 보였습니다.

“천천히 올라오세요. 보통 법당 바닥은 나무가 깔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는 법당 바닥을 물로 채웠어요. 왜 그랬을까요? 용이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 물을 채웠어요. 물 위에 돌을 깔아 징검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돌로 바닥을 만들면 용이 이 밑에서 법문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렇게 만든 법당은 감은사 한 곳밖에 없습니다. 물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해놨어요. 그리고 돌 위에 다시 주춧돌을 세운 후 법당을 지었습니다.

저 뒤로는 강당이 있습니다. 항상 절에 들어오면 먼저 탑이 있고, 그다음에 법당이 있고, 그다음에 강당이 있는 구조입니다. 자, 이쪽으로 돌아서 나가겠습니다.”

동탑과 서탑이 모두 보이는 위치에서 다시 한번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음은 경주시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기림사로 향했습니다. 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주차장에 내린 후 일주문을 지나가 완만하게 경사진 길이 나타났습니다. 한 생활인이 다가와 스님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아이고, 나보다 잘 걷네요. 내가 끌려가는 수준이에요.”(웃음)

짝지와 함께 한발 한발 천천히 걷자 곧 사천왕문이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사천왕문 앞에서 기림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절의 이름은 기림사입니다. 뭐라고요?”

“기림사.”

“기림사의 한자는 인도에 있는 절인 기원정사의 기(祇) 자와 수풀 림(林) 자를 씁니다. 이곳은 신라 시대 선덕여왕 때 지은 절입니다. 일제 시대에는 이 절이 본사였는데, 지금은 불국사가 본사가 되고 기림사는 말사가 되었습니다. 본래 기림사는 굉장히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승군이 주둔했습니다. 기림사에 있는 진남루는 이 지역 승군의 본부 건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기세에 밀려 우리나라의 관군으로는 힘이 부족해지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때 스님들까지 나서서 싸웠습니다. 원래 스님들은 싸우면 안 되는데 나라가 위태로우니까 승군을 조직해서 나라를 지켰던 거예요. 이 절에는 보물이 많습니다. 보물이 다섯 개나 있어요. 가을이라고 국화꽃도 진열을 잘 해놓았다고 해요. 국화꽃 앞에서 사진도 찍고, 한 시간쯤 기림사를 둘러보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구경하고 가겠습니다.

절에 들어갈 때 항상 제일 먼저 들어가는 문이 일주문(一柱門)입니다. 우리가 주차장에 내려서 제일 먼저 지나갔던 문이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이쪽은 부처님의 나라, 저쪽은 중생의 나라로 나눠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쪽과 저쪽이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의미로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 들어오면 절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사천왕문이 있습니다. 여기가 사천왕문 앞입니다. 인도 이야기에는 인간 세계에서 하늘로 올라가면 첫 번째 하늘이 나오는데 그곳에 하늘의 신들이 있어요. 사천왕은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하늘의 신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천왕의 조각이 있습니다. 사천왕을 보니까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사천왕은 나쁜 사람을 잡아가지 좋은 사람은 보호합니다. 이제 사천왕문을 지나면 절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한번 들어가 봅시다.”

설명을 마치고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생활인들과 발맞추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왜적을 막기 위해 세운 진남루를 지나자 대적광전, 약사전, 응진전이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고즈넉한 고찰에 형형색색의 국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생활인들 사이에서 기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와!”

“좋다!”


스님은 대적광전 앞에서 비로자나불의 손 모양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손 모양을 보시면 왼손 검지 끝과 오른손 엄지 끝이 서로 닿도록 한 다음에 왼손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는 모양을 하고 있어요. 이것을 ‘지권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손 모양을 하면 비로자나불입니다."

생활인들은 스님을 따라서 비로나자불의 손 모양을 흉내내어 보았습니다.

곳곳에 노랑, 빨강, 분홍, 다양한 색깔의 국화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생활인들은 국화 앞에서 짝지와 손을 잡고 사진을 한 장씩 찍었습니다. 몇몇 분들은 스님이 직접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자, 여기 보세요.”


돌계단을 올라 삼천불이 모셔진 삼천불전으로 갔습니다. 삼천불전 앞에서 스님은 다시 한번 조별로 사진을 찍고, 애광원 선생님들과도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기림사는 물맛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다들 우물가에서 물을 한 모금씩 맛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모두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봉사자들이 일대일로 밥상에 마주 앉아 밥과 반찬을 떠먹여 주었습니다.


생활인들은 오랜만에 나온 나들이에 기분이 좋은지 봉사자들에게 하트를 날리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며 즐겁게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경주 천년숲정원으로 향했습니다. 숲에 들어서자 초입부터 푸르른 녹음이 펼쳐졌습니다. 맑고 청량한 공기가 머리를 개운하게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생활인들과 함께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이팝나무와 참느릅나무가 아주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우거진 실개천에는 외나무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개천에 거울처럼 비쳤습니다.

경주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숲인데도 꽤 규모가 크고 넓었습니다. 조별로 자유롭게 산책로를 거닐며 고운 순간들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정원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월정교로 향했습니다. 월정교에 도착해서 다시 스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점심 잘 먹었어요?”

“네.”

“숲에서 산책하는 것은 좋았어요?”

“네.”

“지금 이 앞에 좋은 건물이 있죠? 이게 다리예요. 다리를 이렇게 예쁘게 지었습니다. 신라 시대 때 이런 다리가 여러 개 있었는데, 이 다리가 제일 유명합니다. 다리의 이름은 월정교예요. 이 다리에는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신라 시대 때 제일 유명한 스님이 원효 대사인데 그 스님에 대한 이야기예요. 원효 대사가 경주 남산에 갔다가 이 다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도 달이 좋아서 달구경을 하다가 그만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빠졌어요.”

“아이고, 어떡하노!”

한 생활인이 스님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대답을 하자 모두 함께 웃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원효 대사가 물에 빠져 옷이 다 젖어버리니까 마침 월정교 옆에 혼자 살던 요석 공주라는 분이 ‘스님, 옷이 다 젖었으니 저희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으세요’라고 했어요. 원효 대사는 요석 공주를 따라 옷 갈아입으러 갔다가 연애를 해버렸네요. 그래서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분이 신라 시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인 설총이랍니다. 그 후로 원효 대사는 스님을 그만두고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저 앞에 교동 최부잣집이 있어요. 최씨 성을 가진 집안이 12대를 이어 만석꾼을 유지해서 최부잣집이라고 합니다. 최부잣집이 긴 시간 동안 집안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대대로 지켜온 원칙이 있었습니다. 집안의 재산은 1만 석 이상은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흉년에는 땅을 사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흉년에는 땅값이 너무 떨어지니까 그때 땅을 판 사람들이 억울해지잖아요. 그래서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집안의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손님이 오면 언제든지 후하게 대접을 했고,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오면 삼 년은 무조건 무명 삼베옷을 입도록 했습니다. 앞으로 집안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검소하게 살도록 규칙을 정한 겁니다. 그다음으로 과거에 급제해도 절대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명예직인 진사까지만 했어요. 그렇게 한 이유는 권력과 돈을 같이 쥐면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경제만 관여하지 정치는 안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안의 부를 400여 년을 이어오다가 그 돈을 독립운동 하는 데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지금의 영남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지원하고 끝이 났어요. 현재는 교동 최부잣집에 그 집안의 사상을 전하는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곳으로 갈 거예요.”

설명을 마치고 함께 월정교를 건넜습니다.

전통 가옥이 가득한 골목을 지나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에 도착해 툇마루에 앉아 함께 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노래자랑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여기 좋아요?”

“네!”

“몇 년 전에 여기에 한 번 왔었는데, 기억나는 사람 있습니까?”

“저요!”

“여기 온 게 진짜 기억나요?”

“네. 작년에 왔었어요.”

“작년에 왔었어요?”

“네, 작년에 왔어요!”

“그래요. 오늘도 여기에서 마음껏 노래도 부르고 놀 거예요.”

“네.”

특별히 정토회원이자 경주문화유산해설사인 이수진 님이 사회를 맡았습니다. 본격적으로 노래 자랑 시간을 시작하자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생활인들이 줄을 지었습니다.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어눌하지만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때도 있었고,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노래였습니다. 그 어떤 가수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생활인들은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한 분은 이 구절을 부르며 스님이 있는 쪽으로 계속 손을 뻗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리고 노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스님에게 가서 악수를 했습니다. 스님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습니다.

오늘은 노래뿐만 아니라 생활인들이 춤 실력도 뽐냈습니다. 신나는 노래에 맞춰 한 분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여러 분이 나와 함께 춤을 췄습니다.

아쉽지만 해가 저물 듯, 나들이를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스님은 애광원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애광원 선생님들이 수고하시니까 여러분 모두 선생님들 말을 잘 듣기 바랍니다. 항상 건강하고요. 오늘 노래할 때처럼 기분 좋게 지내야 합니다. 알았죠?”

“네!”

“내년 봄에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애광원 송우정 이사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평소 말을 안 하던 친구들이 노래를 하니까 가슴이 찡했습니다

“하루를 몽땅 우리 친구들을 위해 좋은 짝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밥도 같이 먹고, 사진도 같이 찍고, 아름다운 풍경도 같이 보면서 우리 친구들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저도 마음이 아주 행복했습니다. 평소에는 말을 안 하는 친구들이 노래도 하고, 짝지와 입을 벌리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제 가슴이 찡했어요. 다른 일을 하는 데에 쓸 수도 있는 여러분의 값진 하루를 우리 친구들을 위해 온전히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믿는 종교는 다르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법륜스님과 정토회 회원들이 우리 친구들을 위해 항상 마음 써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사장님이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멘!”

다시 이사장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이 감사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저희들도 선생님들과 함께 열심히 애광원 식구들을 돌보면서 여러분이 주신 은혜를 갚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스님께서 정말 바쁘신 와중에도 우리 애광원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늘 도움을 주시고, 코로나 시기에는 몇 번씩 직접 수확한 농산물을 싣고 찾아와 주셨던 그 사랑을 저희들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을 나들이를 마치면서 애광원에서 직접 만든 구름빵을 생활인들이 짝지에게 한 박스씩 선물을 했습니다.

생활인들의 정성이 담긴 박스를 받고 봉사자들도 무척 기뻐했습니다.

애광원 식구들과 봉사자들은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고, 스님은 울산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푸른배달말집』 책 펴냄 잔치가 지난 3일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열린 것에 이어서 오늘은 울산교육청 외솔 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그 사이 『푸른배달말집』 에 이어서 『우리말사랑』 이라는 책도 새로 나왔습니다.

6시 30분이 되어 울산교육청에 도착했습니다. 최한실 선생님이 책에 이름을 써주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입구에서 참석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전창수 울산시 교육감님도 책잔치에 참가하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말을 가꾸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전국교직원노조 울산지부 노래패 ‘한판’에서 마음을 울리는 멋진 노래로 책 잔치 무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에게 여는 말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이 말집은 잃어버린 우리말을 되찾기 위해 오래 애써 펴낸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찾아낸 우리말을 널리 쓰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오늘 최한실 선생님의 <푸른배달말집> 펴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우리말 사랑> 펴냄도 함께 축하드립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절에 들어갔기 때문에 현대 교육을 비교적 덜 받은 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스님은 얘기를 참 쉽게 한다’라고 하는데, 제가 얘기를 쉽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가방끈이 짧다 보니 말이 저절로 쉬워진 것입니다. (웃음)

우리는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의 언어로도 얼마든지 우리의 진심과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오래 살거나 대학 교육을 받게 되면 자꾸 어려운 용어를 쓰게 됩니다. 어려운 말을 써야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은연중에 우리의 문화가 된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제가 중고등학교 교육도 안 받고, 초등학교 교육마저도 받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푸른배달말집>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어나서 자란 동네에서 쓰던 언어로 저의 생각과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제가 요즘 구호 활동이나 개발 지원을 위해 전 세계를 많이 다니고 있는데,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디를 가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도 ‘굿모닝’, ‘땡큐’는 하던 것처럼요. 우리 문화가 그렇게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우리나라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귀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 문화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는 외국어가 주를 이루고 있을까요? 우리 언어가 원래 조금 부족했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 학교를 운영하면서 그곳 학생들에게 한국 동요를 인도어로 번역해서 가르쳐주는데 ‘살랑살랑’처럼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나 ‘꼬끼오’ 같은 동물의 울음소리는 다른 나라 말에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노래를 번역하더라도 의태어, 의성어는 그냥 한국말을 씁니다. 그것은 한국말인 동시에 동물의 울음소리이고, 몸의 동작 그 자체이니까요. 그런 표현을 쓰면 아이들이 금방 이해합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말이 겪은 어려움

제가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말에 왜 외국어가 주를 이룰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첫 번째 위기는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글로 쓸 수 없었던 데서 발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옛날 역사에 따르면 가림토 문자라는 우리 글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신라 시대에는 그것을 일부 가져다가 이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 글을 살리지 못하고 중국의 글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글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꾸로 글이 말을 만드는 상황이 되면서 우리 고유의 말이 사라지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전 국민 중에 유학을 배운 학자가 인구의 5퍼센트도 되지 않았습니다. 후대에 와도 중국의 글을 아는 사람이 국민의 10퍼센트를 넘지 않았습니다. 상류층들만 쓰던 글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우리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글을 모른다고 무시당했지만, 그 대신 우리말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어요.

우리말의 두 번째 위기는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되었습니다. 일제는 소학교, 즉 지금의 초등학교 교육을 우리 국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시행하면서 일본말로 된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해방 이후에 우리는 일본 교과서를 그대로 한글로 옮겨서 우리의 교과서를 만들었어요. 일본어 발음만 한국어 발음으로 바꿨지 단어는 일본이 만들어놓은 말을 똑같이 썼습니다. 예를 들어, ‘분배’와 ‘배분’처럼 두 글자 한문으로 만들어진 일본말로 기본적인 단어가 전부 바뀌어 버린 거예요. 초등학교와 중학교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일본에서 만든 한문 용어를 배워서 쓰게 된 겁니다.

우리말의 세 번째 위기는 서양 문화, 특히 미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들면서 무분별하게 영어나 외래어를 쓰게 된 것입니다.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입에서 툭하면 영어가 튀어나오고, 중고등학교만 다녀도 외래어 사용이 늘면서 우리말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가 새로운 창조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

특히 일본에서 만든 단어를 쓰면서도 그것이 우리말로 발음되니까 우리는 우리말이 아닌지도 모르고 사용합니다. ‘감사’, ‘안녕’ 같은 말이 다 우리말인 줄 알고 우리가 특별한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설날을 없애고 신정을 쇠도록 했습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도 설날 대신 신정만 공휴일로 지정했는데,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다수의 농민이 계속 설날을 지켜왔습니다. 결국은 우리나라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설날이 명절로 인정받아서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은 국수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정체성을 갖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 때문에 세계 각 나라에 가서 구호 활동을 해도 물질적인 지원만 하는 게 아니라 교육을 통해 그 지역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일에도 많은 지원을 합니다. 지구 생물 다양성을 위해 우리가 종의 소멸을 막아야 되듯이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소수 문화를 지켜야 합니다. 학교 문화가 점점 세계화되면서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 방언, 소수 민족 언어가 없어지고, 전 세계적으로는 작은 민족, 작은 나라의 언어가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문화가 세계적으로 한류를 일으키는 현상은 단순히 우리가 서양을 모방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과 외래 문물의 도입 속에서 창조된 새로운 문명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자기 정체성만 고집하게 되면 폐쇄적으로 고립되고, 모방만 하면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의 중심을 잡고 외부 문화를 받아들일 때 거기에서 창조가 일어납니다. 문명사를 보면 항상 주류 문명의 변방에서 자기 문명의 독특함을 갖고 있던 민족들이 선진 문명을 받아 창조를 통해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집트 문명의 변두리에서 에게 문명이, 에게 문명의 변두리에서 그리스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변방에서 로마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단순히 우리 것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의 발달에 기여함에 있어서 새로운 창조의 원천이 우리 문화의 독특함을 지켜낼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말이니까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우리가 우리말의 본래 뜻을 좀 더 살려서 쓰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강연 제목도 ‘우리말 살려 쓰기’입니다. 우리말에 아직 그런 용어가 없고, 우리말보다 외래어의 표현이 더 정확하다면, 그것을 가져와서 써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말이 있는데도, 그리고 외래어가 오히려 부정확한데도, 다만 그것을 쓰면 더 고급스럽고 깊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책을 펴낸 최한실 선생님은 원래 이 분야의 전문인도 아닌 분인데 지난 10여 년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고의 노력과 사비를 들여서 <푸른배달말집>을 펴냈습니다. 그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곳이 고향 땅이다 보니 대부분 고향 선후배들이 많이 오셨는데, 우리 모두 최한실 선생님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이 책이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질 수 있게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책 『푸른배달말집』이 태어나기까지의 영상을 본 후 미리내 님이 푸른누리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참석한 내빈들의 기림말(축사)을 들은 후 최한실 님이 ‘우리말 살려 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최한실 님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조용히 회의실을 나와 서울로 향했습니다.


저녁 8시 30분에 울산을 출발하여 고속도로 위를 4시간 30분 달린 후 새벽 1시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정토회 회원들을 위해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JTS에서 주관하는 ‘헬로 민다나오’ 책 펴냄 잔치에 참석하여 대화를 나누고, 저녁에는 불광 창립 50주년 기념 특별 법문이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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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화

감사합니다

2024-10-22 06:11:13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4-10-21 08:40:20

다빈

법륜스님과 봉사하는 모든분들
끝없이 한없이 고맙고 고맙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2024-10-20 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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