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8.5 (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 1일째
“백암산성에 올라 느껴본 고구려의 기상”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전국에서 모인 통일의병 150명과 함께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동북아 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첫날인 오늘은 현재 가장 웅장한 규모로 남아있는 고구려의 백암산성을 둘러본 후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환인에 도착해 ‘한민족의 시원’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새벽 6시 인천공항에 집결한 대중들의 얼굴에는 설레임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수하물을 부치고 티켓 발권이 끝나자 몇몇 조들은 기념사진을 찍으며 한껏 웃음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 인천공항 출국 전

 

8시 1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현지 시간으로 9시에 심양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자 8박 9일 동안 기행단과 동고동락할 버스 3대와 운전기사, 현지 스텝들이 반갑게 기행단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 심양 도착

 

기행단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요양시의 동쪽에 위치한 백암산성입니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2시간 남짓 달렸을까요? 졸고 있는 대중들의 귓속에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 백암산성

 

“왼쪽을 보세요. 저기 산 주위에 성벽이 주욱 쌓아져 있는 것이 보여요? 저것이 백암산성입니다.”

 

잠을 깬 대중들의 입에서 “우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버스는 산성의 서문 입구 가까이에서 멈춰 섰습니다. 

 

스님은 “망대에 올라가서 설명하면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여러분들이 힘들어 할 것 같다”며 산성의 남문 입구에 넓게 자리한 나무 그늘에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중국에 온 느낌을 대중들에게 가볍게 물어보았습니다. 

 


 

“여기 오니까 중국에 온 것 같아요?” 

 

“아니요. 그냥 우리나라 같은데요.”

 

“옛날에는 여기가 우리나라 땅이었어요. 하하하(모두 웃음). 산천도 다 똑같은 산천이고, 식생도 다 똑같은데, 국경이 갈라져서 지금은 다른 나라가 된 거예요.”

 

스님의 웃음에 기행단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백암산성의 역사, 규모, 역할, 지형지세, 특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백암산성입니다.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 바로 그 백암산성입니다. 바위가 희다고 해서 백암산성인데, 여기 푯말에는 연주산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연나라 산성이라고 오해가 생겼는지 현재 동네에서는 연주산성이라고 불러요. 

 

이곳에서 남쪽으로 20~30km 정도 더 가면 ‘요양’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가 바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성입니다. 수도는 국내성이지만, 고구려가 만주벌에 세운 가장 번영했던 도시는 요동성입니다. 백암산성은 바로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이었어요. 평지에 있는 큰 성을 보호하기도 하고, 평지에 있는 큰 성이 함락되면 도망가서 피신하기도 하는 곳을 산성이라고 해요. 

 

백암산성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태자하’라고 합니다. 망대에 올라가서 보면 태자하가 흘러가는 모습이 환히 보입니다. 동쪽은 태자하가 자연 성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쪽, 서쪽, 남쪽만 성벽을 쌓았어요. 서쪽은 경사가 완만해서 서쪽 성벽은 굉장히 높고 두텁습니다. 우리는 서쪽 성벽으로 올라가서 북쪽 성벽 위를 걸어서 망대로 올라가게 됩니다. 남북 길이가 480m, 동서 길이가 440m 정도 되는 원형입니다. 

 

이 성을 언제 쌓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다만 고구려의 24대 왕인 양원왕 3년(서기 547년)에 이 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1500년 이상 된 성입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구려의 성 중에서 가장 웅장한 규모로 남아있는 성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국내성은 기초만 남아있지 이렇게 웅장하게 남아있지 않아요. 지금은 성벽의 높이가 9m 정도인데, 원래 성벽의 높이는 12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아파트 높이로 치면 4~5층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죠. 

 

▲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법

 

돌을 쌓을 때도 벽돌 쌓듯이 그냥 나란히 쌓은 것이 아니라 뾰족한 면이 서로 맞물리게 쌓아서 아주 견고합니다. 이것을 개이빨식 축성법이라고 부릅니다. 고구려 성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만약 큰 돌을 맞아서 성벽의 일부분이 부서져도 그 부분만 부서지지 함께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맞물리게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치성을 쌓았어요. 고구려 성에는 반드시 치성이 있어요. 치성은 성벽 밖으로 툭 튀어나오게 쌓은 것을 말해요. 성벽 위에서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려면 얼굴이 노출되잖아요. 그런데 치성 위에서는 적의 등 뒤로 공격을 할 수 있죠. 치성과 치성의 거리는 대략 60m 정도 되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맞추기 위한 화살의 사정 거리가 30m 정도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양쪽에서 공격하려면 그 간격이 60m 정도가 되어야 했던 것이죠. 치성은 밖에 뿐만 아니라 안에도 쌓았는데 그 이유는 아군이 성벽 위에 설 수 있는 면적을 더 넓게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성은 전쟁으로 점령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 태종이 침입했을 때 요동성이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요동성이 함락되었다고 하니까 이 성의 성주가 바로 항복을 해버렸어요. 그러니 아무리 성을 잘 쌓아놓았다 하더라도 그 성을 지키는 사람이 신통치 않으면 결국 함락될 수가 있는 겁니다. 반면 안시성의 경우에는 양만춘 장군이 끝까지 막아내어서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죠. 이처럼 적이 아무리 강해도 아군이 강하면 막아낼 수가 있는데, 고구려 말기에는 내분이 일어나 자중지란으로 분열이 되면서 결국 고구려도 망하게 됩니다.”  

 

성을 튼튼하게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의지도 중요하다는 말씀에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 

 

이어서 남문을 지나 서쪽 성벽 위를 걸어올라 가면서 계속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한달 동안 단식을 했기 때문인지 스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습니다. 

 


 

스님은 성벽이 가장 크고 웅장해 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 서서 대중들과 기념사진을 같이 찍었습니다. 1500여 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저렇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니 선조들의 지혜와 노고에 절로 감탄이 되었습니다. 

 


 

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탁 트인 전경에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대중들은 망대에 서 보고 나서야 ‘아하. 그래서 여기에 성을 쌓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습니다. 

 


▲ 망대에 올라

 

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바위를 넓게 파서 빗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산성을 쌓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우물이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 빗물을 저장했다고 하는 바위

 

무너진 성벽 곳곳에는 정말로 개이빨식으로 돌을 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정들이 땀을 흘렸을까요. 1500년 전 선조들의 노고를 상상하니 지금 무더위 때문에 흘러내리는 땀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암산성을 뒤로 하고 기행단은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환인’으로 향했습니다. 환인으로 가는 도중 오후 3시 무렵에는 본계현에 도착해 이른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도중 스님은 이번 역사기행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특히 해외에서 오신 분들을 특별히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개중에 제주도에서 온 분들도 벌떡 일어나서 모두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 자기 소개를 하고 있는 방송인 김병조씨

 

즐겁게 식사를 마친 후 다시 환인을 향해 부지런히 버스를 타고 달렸습니다. 스님은 기행단이 가고 있는 이 길이 고구려 시대에는 어떤 역할을 했었던 길인지 알려주었습니다. 

 

 

▲ 광개토대왕이 말을 타고 지나다녔을 바로 그 길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고구려인들이 만주벌판으로 나갈 때 말을 타고 달려갔던 바로 그 길입니다. 또 적이 침입할 때는 이 길로 다시 도망을 오면서 방어를 했습니다. 중원에 있는 민족들은 대부분 평지에서 말을 타고 싸우는 것에 익숙한데, 여기는 보시듯이 산골짜기이잖아요. 그래서 고구려의 본거지를 점령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겁니다. 국내성은 425년 동안 총 세 번 밖에 침략을 안 당했어요. 그 이유는 공격해 들어오다가 이 산골짜기에서 다 차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고구려는 자신의 본거지를 산 속 깊숙이 숨겨놓았습니다. 즉 밖으로 나가서는 대륙을 경영하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산 속으로 숨고 하는 전략을 썼던 겁니다. 

 

지금 우리는 버스를 타고 잘 뚫린 길을 가고 있지만, 이 길은 광개토대왕이 말을 타고 만주벌판으로 달려나갔던 통로였고, 관구검이나 모용왕이 고구려를 침입하기 위해서 들어왔던 통로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광활한 평지에서 깊은 골짜기를 향해 계속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골짜기들의 발원지는 어디일까요? 모두 백두산입니다. 모두 백두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산맥의 줄기들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도로가 갑자기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형지세를 잘 활용한 고구려인들의 지혜도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기행단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 겨우 환인에 도착했습니다. 얼마 전 중국 곳곳에 큰 폭우가 내렸는데, 그로 인해 도로가 유실되거나 산사태가 난 곳이 있었나 봅니다. 보수 공사 때문인지 늘 다니던 길을 막아버려서 길을 우회해서 돌아가다 보니 2시간 걸리는 길을 6시간이 걸려 도착했습니다. 세 배나 시간이 더 걸린 셈입니다. 

 


▲ 길이 막혀 다시 돌아가고 있는 버스

 

스님은 버스 안에서 한국 역사와 중국 역사의 큰 줄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특히 중국 역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을 짚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대중들은 버스 안에서 스님의 설명도 듣고, 푹 쉬기도 하면서 아주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저녁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민족의 시원’입니다. 스님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고 볼 수 있는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에 대해 약 2시간 동안 강연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환인시대의 한나라, 환웅시대의 배달나라, 단군시대의 조선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유물 또한 최근 요하 상류 지역에서 많이 출토가 되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살았던 본거지였기 때문입니다. 또 환인, 환웅, 단군 시대의 역사는 설화 형식으로나마 자세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비록 기록은 소실되었지만 ‘배달유기’라는 책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요. 또 거기에 해당되는 유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성과가 최근 요하 상류 지역에서 무덤, 신전과 함께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벌써 그때부터 신전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신은 남자가 아닌 여신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 여신의 손 모양은 곰의 발모양을 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앞으로 우리가 더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4천 년 이전에 만들어진 신전에서 발굴된 것들이거든요. 그리고 5세기와 6세기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 중에는 신단수 아래 동굴이 있고, 동굴 속에 곰이 있고, 동굴 밖에 호랑이가 있고, 사람이 화살로 호랑이를 쏘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습니다. 없던 역사를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에요. 있었던 역사를 정립하자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한국에서도 설명할 수가 있는데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에서 설명하면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무덤 양식은 어디서 왔을까’, ‘고구려의 성벽 쌓는 방식은 어디서 왔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요하 상류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적들과 많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또 그곳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4천년, 5천년, 6천년 전의 것들이니까 이것은 고구려의 뿌리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고요. 고구려는 부여에서 왔고, 부여는 조선에서 왔고, 조선은 배달 나라에서 왔고, 이렇게 하나씩 찾아 들어가면 100%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뿌리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은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랄알타이어족이라고 해서 차이나티벳어족인 중국과는 문명의 뿌리부터 완전히 다른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북방 민족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환인의 한나라는 우리 민족의 뿌리라고는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민족만의 역사라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 무리로부터 3천여 명이 빠져 나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가 한나라라는 뜻이지 한나라를 우리 나라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영국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와서 미국을 새로 만든 것과 같습니다. 

 

3천여 명이 동북아 대륙으로 이주해 와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도 이곳 동북아 지역에는 원래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수준이 낙후했죠. 그래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했습니다. 대부분은 선진 문명이 후진 문명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우리는 후진 문명의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런 건국사상은 그 어떤 종교가 가진 포용 정신보다 크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미국의 경우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하면서 인디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원주민을 착취하는 경우가 더 많았잖아요. 그러니 비록 그것이 신화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얼마나 거룩하냐는 겁니다.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건국이념은 어떤 종교의 사상보다도 깊이가 있습니다.

 


 

6천년 전에도 그렇게 백성을 위하는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한국 정치는 어떻습니까. 선조들은 다른 민족인 토착 세력을 위해서도 그런 좋은 마음을 내어서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정치는 제 민족도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잖아요. 국민을 이익되게 하고 정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하는 노력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을 제대로 안다면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제세이화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대중들도 이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밤 10시에 시작된 강연은 12시가 다 되어 끝났습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대중들도 일부 보였습니다. 스님은 “푹 쉬세요. 못 다한 설명은 내일 또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해 고구려의 유적들을 집중적으로 찾아갑니다. 오전에는 주몽이 처음으로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는 홀본산성에 올라가고요. 오후에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단군 조선과 부여’에 대한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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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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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onica0527

한국사...쉽게 설명해주시니 머릿속에 쏙쏙 박힙니다. 스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16-08-15 17:38:11

허정원

스님~~~존경합니다.^^
역사특강 참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마치 그곳에 같이 있는 듯 생생합니다
사진 찍고 글 써 주시는 분들께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여긴 폭염에 더운데 그곳은 어떠신지...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2016-08-09 18:00:35

정체성

다아도로님 역사의중요성을 다시생각해 보세요. 잘모르는것은 그대의 무식함이니 탓하기싫지만 , 무식을 진리인냥 왜곡은 말아야죠! 독일인이 이스라엘땅에 가서 역사앞에 사죄하듯 일본인도 한국에 와서 사죄하는게 진실이고 정직한 지식입니다.

2016-08-08 04: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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