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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엄마~ 우리 반야심경1 강좌 들으러 다닐래?"
"반야심경이 뭐예요?"
1993년 가을, 아이들이 같은 유치원을 다니기에 가끔 둘째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던, 지금까지 함께하는 도반 류현복 님을 따라 정토회를 만났습니다. 반야심경 강의 마지막 날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을 듣고 스님께서 “누가 고쳐야 돼요?” 라고 반문을 하셨습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당연히 남편이 고쳐야지요! ” 라는 저의 대답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 대학을 다니 던 중 남편의 외도를 알았고, 동시에 집에 차압이 들어왔습니다. 삶이 그대로 발가벗겨진 것 같았고, 마음은 냄비 속 다 타버린 콩조림처럼 까맣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렇게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가슴을 부여잡고 법당에 나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법륜스님께서 직접 강의를 오시는 날은 수업을 마치고 개인 상담도 했습니다. 법륜스님과의 몇 차례 상담을 통해 괴로움 없는 삶이 나를 스스로 세우는 자존감이라 믿고 당당하게 이혼을 선택했습니다.
무일푼으로 아이들만 데리고 친정으로 와 얹혀 살았습니다. 불안하거나 초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내 손으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각오와 결심으로 직장을 구했습니다. 일을 마친 저녁이면 테이프로 법문을 듣고, 수업 있는 날은 법당에 나갔습니다. 도반들과 나누기를 하다보면 '때로는 나도 위로를 받고, 내 나누기가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될수 있구나! 나도 내손으로 행복의 문을 열 수 있구나!' 하며 두레박으로 행복을 퍼 올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성남법당이 문을 닫고 새로이 불사한 서초법당으로 옮겼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현실의 장벽에 정해진 소임은 하지 못했고, 틈틈이 필요할 때 할 수 있는 일일봉사를 주로 했습니다. 법당에 나가지 못하는 날엔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제 인연이 지중합니다. 참회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기도문으로 고요와 평정의 집을 지으며 정진을 했습니다.
이혼한 지 10여년 후, 여수에 사는 사람과 재혼해 여수법당을 다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8차년도 부총무 소임을 맡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간에 시간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얼떨결에 맡긴 맡았는데, 능력도 안되고 남편 눈치도 봐야하는 어려운 상황으로 여겨졌습니다. 제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까마득했습니다.
먼저 빼먹 던 새벽 정진부터 시작했습니다. 부총무는 매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반 수업까지 챙겨야하는 일상이라 때론 밤에 퇴근했습니다. 남편은 가정 주부가 돈버는 직장도 아닌 곳을 매일 나간다며 못마땅해 했고, 딱 한 번이지만 주먹질도 했습니다. 또 어떤 날은 문을 잠가 놓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문밖에서 날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어려움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매일 아침 독송하는 「보왕삼매론」 마지막 구절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룰지로다.' 이 말씀을 되뇌이니 마음 속 촛불이 탁 켜지는 듯 밝아지며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역경도 받아들여야만 무엇이 되던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딱 막대자 한 눈금 만큼만 더 하자!' 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도반들이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부총무 소임을 맡아, 다른 도반들의 뜻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대나무가 마디로 인해 더 단단해지듯 조금씩 성장하며 그렇게 무사히 8차년도를 마쳤습니다.
9차년도에 법당 밖으로 나와 행복학교2를 진행했습니다. 직접 참가자를 모집하고 진행 장소도 구해야해서 솔밭에서 바늘을 찾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를 만나 모든 일정들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덕을 보고 있습니다. 노트북만 있으면 진행할 장소를 구할 필요도 없고 어디에서든 활동할 수 있어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확장 불사하고 난 법당이 생각만큼 잘 쓰이지 않는 것 같아서 도반들의 보시를 허투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였는데 이 역시 자연스레 해결되어 홀가분해졌습니다.
여전히 능력이 부족하고, 활동을 흔쾌히 여기지 않는 남편의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어떤 조건도 저의 행복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정토회는 제게 평생 교육을 시켜주는 곳이고 제가 어떤 경우에도 행복 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이제 제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고자 합니다. 가끔 말합니다. 저는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어도 즐겁게 살았을 수 있겠지만, 보람있게 살지는 못했을 거라고... 지금 여기서 제가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건 제 삶에서 정토회가 태양처럼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살아있어 고맙습니다.
남도의 동백섬, 여수에 사는 반청 님과는 일주일에 두 번 화상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반백의 단발머리를 한 깔끔한 얼굴을 보면 그 속에 솔직함과 검소함이 당당히 배어 나오는 듯해서 그 모습을 닮고 싶어집니다. '정토행자로서 앞으로 남은 과제가 뭘까요?' 라는 질문에 반청 님은 환한 미소로 답합니다. “한때는 즐거움을 쫒아 다녔지만 지금은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삶이고자 합니다.” 웃음으로 행복을 보시하는 연꽃같은 미소 도반과의 긴 시간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더불어 저도 이 행복 꾸준히 이어가겠습니다.
글_최서연 희망리포터 (광주전라지부 동광주지회)
편집_박문구 (서울제주지부 마포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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