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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법당 삼아 3년 넘게 가정법회를 열고, 수라간 무수리처럼 매주 김치 담고, 국수 삶던 분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전 법당에서 큰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면, 이백 여명의 활동가들 손에 샌드위치 한 쪽씩이라도 꼭 들려 보내곤 하십니다. 큰 손보다 마음이 더 큰 묘광법사님의 뭉클한 이야기 전합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쌀을 머리에 이고 절에 가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사찰을 참 좋아했습니다. 결혼해서는 쌍둥이를 데리고 집 근처 가까운 절에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절에 와서 불공 드릴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 무렵 제겐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중에 천수경2만 읽으려고 하면 해우소에 가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예불 중에 해우소에 가면 큰일나는 줄 알아, 갈 엄두도 못 내고 참느라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어느 날 천수경 독송을 막 시작하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었습니다. 평소처럼 참다가 문득 ‘어, 내가 뭐 하고 있지?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데 왜 이러고 있나?’ 싶어서 벌떡 일어나 해우소에 갔습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는 순간, 온 세상이 환해졌습니다. 먹으면 내보내는 게 이치이듯, 물도 막아두면 썩으니 흘러야 하고, 재물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 길로 법당에 들어가 책을 덮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자고있던 남편에게 이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밥을 먹고 나면 똥을 싸는 게 이치지. 그게 자랑이라고 말하냐?" 그런 일로 자고 있는 사람 잠도 못 자게 깨우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주었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이 때의 경험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으로 연기법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1992년 무렵, 다니던 절의 스님이 읽어보라며 《월간정토》 한 부를 주셨습니다. 《월간정토》에 실린 법회 안내 기사를 보고 친구와 함께 찾아간 곳은 한 아파트 가정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실에 모여 법문을 듣고 있었는데, 그곳에 법륜스님이 계셨습니다. 당시 법성게 강의를 하셨는데, “불수자성수연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나툰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것을 중심에 두지 마라. 여기에 구애 받게 되면 업대로 일어난다." 스님께서 그렇게 법문을 하시는데, '여기다!' 싶었습니다. 그 길로 다니던 절을 “안녕” 했습니다.
그 집에서 3년 정도 가정 법회를 하다가, 사정이 생겨 계속할 수 없게 됐습니다. 너무 아쉽고 놓칠 수 없어서 고민 끝에, 남편과 상의하여 우리 집에서 가정 법회를 열었습니다. 화요일은 불교대학 수업을 하고, 목요일은 법륜스님이 오셔서 법회를 했습니다. 법회에는 대략 70여 명의 사람이 왔습니다. 그분들에게 점심 공양으로 국수를 드렸기 때문에, 월요일이면 국수 준비와 김치 담그기, 과일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어느 날, 앞집 사는 교인 부부가 “쌍둥이 엄마. 집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와?”라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법문하시니 와서 들어보라 권했지만 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법회 날은 부부가 등산을 가니, 자신들 집을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집에서 국수 공양과 설거지를 하며 그렇게 법회를 이어 나갔습니다.
서울정토회관 불사 때에는 도반들과 함께 김치 100포기를 아파트 지하실에서 담갔습니다. 밑반찬과 김치를 매주 두 번씩 고속버스 편으로 보내고, 집에서는 70여 명의 사람이 모여서 법회를 했는데, 참 신났습니다. 수라간 무수리라도 된 것처럼 국수를 삶으며, 대가족을 꾸리고 싶었던 어릴 적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스님이 오시고 사람들이 몰려오다 보니, 저를 무당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 6개월의 법회가 이어졌고, 1999년에 여러 도반의 도움으로 드디어 지금의 부사법당을 개원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두 번째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낭독_고정석
글,사진_대전충청지부 희망리포터
편집_온라인.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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