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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저도 북한에 동포가 죽는다. 모금한다 할 때 '이런 것은 대학생이나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지. 왜 내가 하나? 나는 가정주부라 못한다.'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래 자식을 안 낳고 어떻게 자식이 굶어죽는 아픔을 알겠나, 부자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알겠나, 그럼 이건 내 일이다’로 바뀌고 '북한의 아이들이 굶어죽는 일은 엄마인 내가 할 일이다.'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일을 내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복이 많아서 복을 지을 수 있는 인연이 왔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제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남북문제가 아니었으면 저는 게을러서 법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마산 사람이 뭐하러 광화문에 올라오겠습니까?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도 제게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아니었으면 절할 일이 어디 있었겠어요? 절할 일이 있으니 기도도 하고 법사도 빨리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돕는 게 나를 돕는 거고. 남을 돕다보면 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공부 못하는 건 굶어죽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집안 일은 아무 걱정거리도 안되는 겁니다. 걱정도 다 돈이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마산여고를 졸업했는데, 당시에는 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갔습니다. 시험 당일엔 문 앞에서 부모님들이 기다렸지요. 저희 친정 어머니도 교문 앞에 서계시는데, 그때 지게를 진 할아버지가 “저년이 떨어져야 할 건데...저년이 떨어져야 할 건데...” 하는 걸 보셨답니다. 돈은 못 벌고 집은 가난한데, 아이가 붙으면 또 학비를 대줘야 하니 “저년이 떨어져야 할 건데”를 염불하신 것이죠. 우리가 아이 공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건 돈이 있어서 걱정하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공부 못하는 게 오히려 효자가 됩니다.
2002년부터 저는 직장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 친지 그리고 거리의 시민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남편이 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저보고 ‘미쳤다. 돌았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했었습니다. 거리모금 시작했을 때는 제발 길거리에 모금하러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혼하자고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이혼하자고 하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또 거리모금하러 나가고, 못살겠다고 하면 또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법회 다니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은 서울에 철야정진 기도하러 가려는데, 남편이 나가지 말라고 아파트 현관문을 철삿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근데 우리 남편 입장에서는 그럴 만 했습니다. 주말에도 나가고 주중에도 나가고 한 번을 집에 없으니, 남편도 하다하다 현관문을 굵은 철삿줄로 묶었던 겁니다. 제가 그걸 펜치 찾아서 풀고 나와서 길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네 엄마랑 이혼할 거라고 이야기 했었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엄마가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남편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니 한번은 제가 막 울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남을 돕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힘들어 하니 이게 맞나 싶어서 설거지하면서 펑펑 울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놀라서 ‘왜 우냐고, 왜 우냐고’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남편비위 잘 맞추고 잘 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 내지 않겠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제 가슴에 남지 않겠습니다."
정토회 고문 각해보살님께서 제게 주신 기도문입니다.
지금은 남편이 “제발 당신이 남한테 욕 얻어먹는 거 싫으니까 집안에 결혼식, 명절 이런 때만이라도 좀 나타나 주라.”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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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이 시간에 월광법사님 네 번째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낭독_고정석
글,사진_경남지부 희망리포터
편집_온라인.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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