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부탄 답사 14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젬강을 떠나 팀푸로 이동하는 날입니다. 가는 길에 트롱사에 들러 트롱사 주지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팀푸에 도착해 내각 장관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아침 일찍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원고를 교정한 후, 새벽 5시에 젬강을 출발해 트롱사로 향했습니다. 출발할 때는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동이 트면서 점차 주변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산을 감싸며 물결치듯 이어진 다랑이 논과 깎아지듯 펼쳐진 절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특히, 설산은 떠오르는 해를 받아 붉게 빛나며 산과 산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나 감동을 더했습니다.
스님이 탄 차는 그림 같은 산세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달려 트롱사에 도착했습니다.
트롱사 호텔에 도착하자 주지사님이 반갑게 일행을 맞았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잘 지냈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먼저 식사를 하시지요.”
일행은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품졸 마을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영상을 함께 시청하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지사는 젬강 답사 일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번 젬강 답사는 어떠셨습니까 고단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답사로 젬강의 40개 치옥을 모두 둘러봤습니다. 막상 현장을 다녀보니 예상보다 지원 규모를 더 확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은 답사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젬강 전역에 새로 집을 지을 가구를 100채, 집을 수리할 가구를 200 가구 정도로 예상했지만, 현장을 돌아본 결과 각각 200 가구, 400~500 가구로 늘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현재 시범지구보다 새로 답사한 지역의 생활환경이 더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이어, 부탄이 도로, 전기, 식수 등 인프라를 비교적 잘 갖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현장에서는 식수 부족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밝혔습니다. 사람들의 물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수원지와 물탱크로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어서 젬강 답사 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논의했습니다.
“정부의 행정력과 인력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첫째, 각 가구의 생활수준을 면밀히 조사해야 하고, 둘째, 도로나 수로를 수리하거나 새로 놓기 위해 엔지니어가 현장을 방문해 정확한 견적을 내야 합니다. 셋째, 각 치옥과 게옥에서 제안서를 제출하고, 검토 후 승인이 나면 자재를 공급하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넷째, 현장 모니터링도 빠질 수 없습니다.”
스님은 이를 진행하기 위해 행정 요원의 증원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엔지니어와 주민들이 협력하는 방식도 논의했습니다. 주민들에게 기술 교육을 제공해 스스로 간단한 수리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JTS는 인건비 지출을 할 수 없으므로 전문 인력에 대한 예산은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주지사님은 특별히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라며 빨간 고춧가루로 버무린 양배추 김치를 내놓았습니다. 스님은 활짝 웃으며 접시에 김치를 담았습니다. 맛도 있었지만, 주지사님의 정성 어린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식사 후 대화는 2월 예정된 트롱사 답사로 이어졌습니다. 스님이 주지사님에게 물었습니다.
“2월에 트롱사를 답사할 때 가난한 치옥만 방문하는 게 좋을까요, 전체를 방문하는 게 좋을까요?”
“스님께서 와주시는 김에 전체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트롱사에는 모두 25개의 치옥이 있습니다. 도로는 전부 연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2월에 답사할 때는 린첸 님이 동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탄어를 영어로, 다시 영어를 한국어로 두 번 번역을 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트롱사 지역 언어와 영어에 능수능란한 사람으로 통역을 배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답사 시간도 더 길게 잡아야 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회의는 2월 답사 준비사항을 점검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1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9시에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스님은 젬강 답사 일정을 총괄한 JTS 부탄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트롱사를 떠났습니다.
“스님, 팀푸 일정도 무탈하게 마치시고 성지순례 잘 다녀오세요.”
“수고 많았습니다. 2월에 다시 봅시다.”
차 안에서 한참 단잠을 자고 나니 어느덧 차량은 도출라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도출라에서 잠시 화장실에 들른 후 다시 팀푸를 향했습니다. 스님이 일행에게 물었습니다.
“이번에 답사하면서 어땠어요? 마음 나누기를 한 번도 못했네요.”
먼저 중앙정부 소속 이시 님이 답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는 이번 일정이 길고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다는 게 신기해요. 처음에는 저도 안 가본 지역이라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순수하고 착한 마을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이 지날수록 답사하는 것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린첸 님도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저도 이시 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특히, 가난한 마을일수록 사람들이 더 소박하고 순수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더 자발적으로 ‘우리가 하겠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반면, 잘 사는 마을 사람들은 ‘JTS가 어떤 것을 해 주는 곳인가’라는 태도로 계산하고 도움을 받으려는 모습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잘 살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겸손하고 베푸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행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스님이 말했습니다.
“한국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어요. 자연에서는 벼가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죠. 하지만 사람은 지위가 높아지거나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나도 모르게 뻣뻣해지고 고개가 올라가기 쉽습니다. 내가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런 태도로 변해버리곤 해요.
그래서 이렇게 오지마을을 다니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고생이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가진 일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됩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주의를 기울이도록 돕습니다.”
스님의 말은 일행 모두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 같았습니다.
팀푸 시내에 도착한 후, 스님은 간단히 만두로 점심식사를 하고 산마루 식당으로 이동해 업무를 보았습니다. 4시가 되어 내각 장관의 회의실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내각 장관님에게 젬강 전체 지역 답사 결과를 공유하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들을 논의했습니다. 스님은 정부의 행정적인 지원과 인력 지원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며, 특히 현장 조사와 계획 수립, 기술적 지원을 위한 체계적인 협력이 중요하다고 당부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내각 장관실을 나와 BNF 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습니다. 스님은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원고를 교정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성도재일 법회 생방송을 하고 왕립공무원위원회 의장과 GNH(국민총행복지수) 위원장을 역임한 까르마 치팀 님을 만나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저는 저를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고집할수록 번뇌가 많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일이 필연인지 우연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100년 전의 사람들과 현대인을 비교해 봅시다.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대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이 옛날 사람들이 더 많았을까요, 아니면 요즘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만약 옛날 사람들이 우연이라 여기는 일이 더 많았다면, 왜 그럴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면 필연이라고 부르고, 원인을 모르면 우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을 안다면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원인을 모른다면 모든 것이 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연한 사건도 생기고 필연적인 사건도 생기는 것입니다. 우연이나 필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을 모르면 우연이 되고, 원인을 알면 필연이 됩니다.
인생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면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짧게 보고 범위를 좁히면 대부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범위를 넓히고 시간을 길게 보면 내가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봐야 결국 이렇게 오도록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지나 놓고 보면 인생은 모두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닥치는 미래는 어떨까요? 전부 내가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을 길게 보느냐 짧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인 것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일어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좁게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다 전체를 보면 어떨까요?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질까요? 아니면 그냥 물이 출렁거릴 뿐일까요? 바다 전체를 보면 단지 물이 출렁거릴 뿐입니다. 그와 같이 크게 보면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그냥 출렁일 뿐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인식을 너무 움켜쥐면 번뇌가 자꾸 생깁니다. ‘자기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질문은 질문자가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여 자기라는 것을 자꾸 움켜쥐기 때문에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자기라는 인식을 갖게 되니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모르게 구분을 짓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없다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남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는 생각이 줄어들게 됩니다.
요즘 빅데이터가 등장하면서 개인의 자유 의지가 개인의 인생에 어느 정도 작용하는지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선택, 믿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것을 보고 반응하는 느낌과 감정도 핸드폰에 설치된 어플처럼, 이미 형성된 카르마에 따라 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핸드폰에 어떤 어플이 깔려 있는지를 미리 알게 되면, 즉 어떤 사람의 카르마가 무엇인지 미리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좋아하는 업식을 가진 사람을 유혹하려면 뇌물을 쓰면 됩니다.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력 있는 이성을 앞세워 매혹하면 됩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칭찬을 해주고 치켜세워 주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옛날에는 이런 것을 독심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미리 알아내어 조정을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부하를 조정할 때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를 협박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도 사기를 당했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기를 친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가 던진 미끼를 보고 나 자신도 유혹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익을 많이 얻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기꾼은 이익을 많이 준다고 할까요, 적게 준다고 할까요? 당연히 많이 준다고 하겠죠. 하지만 이익이 높으면 그만큼 사기를 당할 확률도 높아지는 법입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결국 나에게도 원인이 있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사기를 쳤다면, 사기를 치는 사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기꾼은 말을 잘할까요, 못할까요? 말을 아주 잘합니다. 인물이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까요? 인물이 훤칠합니다. 옷도 잘 입을까요, 못 입을까요? 옷을 아주 잘 입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사무실도 잘 꾸며 놓고, 서비스도 굉장히 좋습니다. 낚시를 할 때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쓰겠습니까, 싫어하는 것을 쓰겠습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삼겠죠.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의 성질이 더러워 보인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할 일은 없습니다. 성질이 더러운 사람에게는 사기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어떤 사람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수록 여러분들은 조정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옛날에는 물건을 구입할 때, 호미가 필요하면 호미를 사러 가고, 선풍기가 필요하면 선풍기를 사러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광고가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을 사고 싶도록 만듭니다. 그중에는 내가 필요한 것도 있지만, 광고가 그 물건을 사고 싶어 지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일단 구입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구입한 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이는 실제 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광고를 보고 ‘저 물건 괜찮다’ 하고 생각해서 사놓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상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사기를 당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필요에 의해서 구입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어릴 때 형성된 카르마의 반응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개가 목줄에 끌려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두 물질 사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어서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내 인생에서도 누가 목줄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데도 어딘가에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운명론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는 형성된 카르마에 의해 여러분이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이렇게 끌려다니는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옛 선사들은 ‘우리는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뜻합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굴린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한다고 하면, 이혼의 주체는 누가 됩니까? 남편이 됩니다. 내가 이혼을 선택한 것이 아닌 게 되는 거죠. 이렇게 책임을 남편에게 전가하면 나의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그러면 나는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르게 행동했다고 하지만, 상황은 늘 변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돌릴 일이 아닙니다. ‘변화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종속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된 상황에서 내가 선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자기중심을 잡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자꾸 고집하면 계속 외부 경계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한탄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주어진 환경을 그저 관찰하면서 ‘내가 상대의 행동에 이렇게 반응하고 있구나’ 하고 내가 지금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가 화를 내면 나도 따라 화내는 것이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자동적인 반응을 멈추려면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가 화를 낼 때, 나는 화를 낼 수도 있고,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상대가 화내는 것을 보고 ‘너 왜 화내니?’ 하고 반응합니다. 상대방이 화내는 것을 보고 내가 벌컥 화를 내고, 그러고 나서 상대가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물으면 ‘네가 화를 내니까 내가 화를 내지!’ 하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화내는 것은 정당하고, 상대방이 화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 자신의 반응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처럼 의도를 가지려 하지 말고,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내가 화가 나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내가 기분이 좋네’ 이렇게 알아차리면 상대의 말에 내가 덜 휘둘릴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카르마가 그 말에 희로애락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나라는 사람의 업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업식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상대가 그렇게 말하면 화가 자동으로 일어났지만, 나 자신의 반응을 먼저 알아차리게 되면 상대가 같은 말을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느냐 안 내느냐가 핵심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신을 사랑한다’ 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거나, 타인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은 본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눈을 밖으로만 돌리지 말고, 자기를 살피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
“감사합니다.”
전체댓글 45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