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평화재단 송년 워크숍 2일째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평화재단 연구위원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차담을 나누며 송년 워크숍 2일째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평화재단의 내년 사업 계획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을 말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 동용승 박사님이 무엇이 국가의 위기인지 모르는 것이 진정한 위기라고 강조하며 국가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기조 발제를 했습니다. 오늘은 국가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평화재단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자유롭게 토론을 했습니다. 연구위원들은 열정적으로 의견들을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싱크탱크들이 죽어 있어요. 정부가 돈을 주고 요청하는 것만 연구하는 수준이지 일관성을 갖고 꾸준히 연구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화재단이 싱크탱크의 생태계를 살리는 작업들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책 연구기관들조차 현재 대한민국의 중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해 나가는 기능을 거의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정부의 정책 홍보 기능만 하고 있는 상태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평화재단이 국가 전략을 수립하여 담론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미국은 다음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전 정부에서 큰 전략을 미리 짜놓고, 그것을 다음 정부가 인수인계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도 박정희의 근대화 전략, 노태우의 북방 정책, 이런 것처럼 큰 국가 전략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재단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평화재단이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하는 노력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어제 스님께서 기후위기, 외교안보, 인공지능,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 이런 주제들을 많이 제시해 주셨는데, 이것을 심화시키는 전문가 모임을 활성화시키고, 다시 이것을 국가 전략으로 수렴하는 사업계획을 한 번 세워보면 좋겠습니다.”
스님은 연구위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렴했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다 함께 차를 타고 경주 남산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경주 남산 올렛길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낙엽이 진 산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의 산행 후에 감실 불상 앞에 도착했습니다. 공식 명칭은 ‘불곡마애여래좌상’입니다. 스님은 이 불상의 소박하고 친근한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 불상은 자연 암벽에 감실을 파내고, 그 안에 부처님을 조각한 독특한 형태입니다. 경주 사람들은 이 불상을 ‘할매부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표정이 온화하고, 마치 친근한 이웃 어르신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겨울에는 눈이 와도 금세 녹아서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입니다.”
불곡마애여래좌상 앞에서 연구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산 아래에는 평화재단 실무자가 갓 구운 황남빵을 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황남빵을 먹고 다시 삼불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경주 남산에는 겨울 초입에도 여전히 울긋불긋한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삼불사에는 삼존석불입상이 유명한데요. 불상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참 특이했습니다.
삼릉을 지나 경애왕릉까지 산책을 한 후 다시 차를 타고 봉계로 향했습니다. 봉계에서 칼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나서 연구위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다들 조심히 돌아가세요. 저는 저녁에 서울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내년에도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해나갈 것을 다짐하며 평화재단 송년 워크숍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후 1시 40분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5시간 동안 달려 저녁 6시 40분에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상무대에서 군인 전법을 하고 있는 여일 스님이 찾아와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상무대에서는 초임 장교들을 위한 법회를 열고 있는데, 요즘 초임 장교들이 일반 병사들과 급여 차이도 별로 없는 반면, 책임지는 일은 많아서 자존감이 매우 낮아지고 있다며, 이들을 위해 어떤 법문을 해주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상무대에 와서 즉문즉설 강연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스님은 내년 상반기 일정이 꽉 찼지만 그래도 6월 중에 시간이 되는지 한 번 살펴보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습니다.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어 차담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하는 날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장 접수를 한 후 번호표를 한 장씩 추첨함에 넣은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유튜브에서 5300여 명이 접속하고 현장에서 4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주에 스님이 필리핀 민다나오를 방문하여 10개 학교 준공식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 영상 보기
영상이 끝나고 큰 박수를 받으며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청중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영상 잘 보셨나요? 저는 3월에 필리핀 민다나오 10개 지역의 학교 부지를 답사했고, 지난주에는 1년 만에 10개의 학교를 지어서 준공식을 하고 왔습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본인이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여자로 태어났거나,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있으면 손을 한 번 들어보세요. (웃음)
모든 아이들은 제때에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주위 환경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태어난 곳이나 성별, 지위, 신체장애의 유무로 차별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차별을 다 없앨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린아이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산간오지에 태어나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분쟁 지역에 태어나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은 불평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JTS에서는 고등 교육은 몰라도 초등 교육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오지나 분쟁 지역에 사는 아이들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도 교육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해서 아직 산간오지나 장애 아동을 위한 교육 시설에는 투자가 거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JTS가 앞장서서 원주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파견하는 일은 교육부가 담당하도록 하고, 학교 짓는 일은 JTS와 지방 정부가 담당하는 것으로 협의를 해서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민다나오에서는 아직 장애 아동을 위한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JTS가 민다나오에서 처음으로 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수의 일반 학생 교육을 위한 선생님도 부족하고 교실도 부족하다 보니 장애 아동을 위한 교육에 투자할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장애 아동들도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모두 똑같이 하는 것만이 평등이 아닙니다. 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30명을 한 반으로 편성한다면,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3명을 한 반으로 편성하는 게 평등입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그에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이 평등이라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JTS에서는 학교만 지어주는 게 아니라 교육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알리고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지역 공무원들도, 교육부도, 모두 교육의 중심이 항상 학생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건물만 지어줘도 되지만 준공식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육에 대해 이런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곧 연말이 다가오고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연말연시에는 나만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었으면 좋겠다는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서 질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먼저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현장에서도 세 명이 추가로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버지가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해서 셋째 아이를 낳으라고 하고, 아내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며,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버지는 빨리 손자를 낳으라 하고, 아내는 싫다고 합니다. 어떡하죠?
“저에게는 현재 두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로 아들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결혼할 때부터 부모님의 의견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여자친구를 두세 번 부모님께 소개했을 때, 부모님께서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 저는 대부분 그 의견에 따랐습니다. 그렇게 부모님 의견을 따르는 삶을 살다 보니 혼자서 분노를 삭이거나 풀기도 하며 50년을 살아왔습니다. 저도 아들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아버님께서 특히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셔서 아들을 낳기를 바라십니다. 아내는 반대하는 상황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셋째를 가져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아내도 배려하고, 아버님 말씀도 따르려다 보니 둘 사이에서 많이 힘들어요. 그런데 아내는 셋째를 가지려면 이혼하자고 합니다. 아버님은 와이프가 아들을 안 낳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남자를 낳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번뇌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답답한 마음입니다.”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산에 가서 혼자 사는 것을 보여주는 ‘나는 자연인이다’ 하는 프로그램이 있죠. 그것처럼 둘 다 버리고 산에 가서 혼자 사세요.”
“그런데 저는 혼자서 살지는 못하거든요. 저는 자연인이 아니어서 도시에서 살고 싶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니까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산에 가서 한 3년만 자연인으로 살면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아내가 나이가 좀 있어서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또 임신이 안 될 수도 있어서요.”
“3년만 지나면 저절로 해결이 된다고 하잖아요. 질문자가 산에 가서 3년을 살면, 아버지가 ‘이러다가는 우리 아들을 잃어버리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 역시 ‘남편을 잃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 양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손자를 포기하겠다고 한다면, 질문자는 산에서 내려오면 됩니다. 아내가 셋째를 낳겠다고 해도 산에서 내려와 함께 살면 됩니다. 양쪽 모두 버티는 상황에서 3년이 지나 아내의 나이가 40세를 넘기게 되면 상황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됩니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낳기 어려워지니까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서라도 아이를 낳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군대에서도 법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상사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아니면 불법인 경우에도 명령이니까 따라야 합니까?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명령을 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아무리 자식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말을 무조건 듣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 요구가 법의 테두리 안에 있고, 상식적인 윤리와 도덕의 범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원한다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을 짓을 하는 것은 효(孝)가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말씀 안 드린 부분이 있는데요. 지금 어머님이 파킨슨병과 치매를 앓고 계신 데다 욕창까지 생겨서 저와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간호를 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꼭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질문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질문자는 정신과에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부모님에 대한 효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치매가 있든 파킨슨병이 있든 지금 질문자의 고민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병이 있으면 치료를 받으면 되는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손주를 원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위해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굳이 아버지에게 ‘아내가 안 낳겠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이렇게 말하고 그냥 넘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문제는 가장 먼저 아내와 의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는 것은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아내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아버지와 의논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이 문제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질문자는 지금 이 문제에 대해 당사자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을 동등하게 두고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는 핵심 당사자와 제3자를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문제에서 핵심 당사자는 아내입니다. 아버지는 당사자가 아니라 단지 요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질문자는 아내와 먼저 의논해서 ‘이러이러한 제안들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만약 아내가 못하겠다고 말하면, 그 의견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내와 이야기해 봤는데, 나이도 있고 직장도 다녀야 해서 더 이상은 어렵다고 합니다 .아버님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이 문제는 내려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됩니다. 아니면 ‘알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피곤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애가 잘 안 생깁니다’ 하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도 되고요.
질문자가 어머니의 병환과 연결 지어서 아버지의 요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효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질문자가 심신미약이 아닌가 하고 물어본 겁니다. 만약 질문자가 정신적으로 미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든지, 아니면 관점을 바꿔 정신을 차리든지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아버지의 요구와 아내의 반대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봐서는 안 됩니다. 질문자의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질문자는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 사람이고, 특히 아이를 낳는 문제라면 핵심 당사자는 배우자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당사자인 아내와 제3자인 아버지를 동일한 비중으로 놓고 ‘둘 중에 누구 말을 들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제가 심신이 미약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사실은 스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할까 말까 고민할 때 후회가 남을 것 같으면 해라.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 이런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한테도 ‘일단 아이를 낳고 봐라. 딸이든 아들이든 낳은 다음에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된다’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스님 말씀이 그게 아니라서 솔직히 더 혼란스럽습니다.”
“일단 아내가 아이를 낳는 데 동의하고, 아버지도 아들을 낳으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낳아보겠습니다’ 하고 동의한다면, 그때는 ‘그러면 일단 낳아보자. 딸이든 아들이든 그건 미리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고 답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내가 아들이냐 딸이냐를 고민하는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아내가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하는데도 ‘일단 낳아보자’ 하는 소리는 말이 안 됩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는 것에 동의했다면 나중에 아버지에게 ‘낳아봤는데 또 딸이네요’ 하고 이야기하면 그만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일단 낳아봐라’ 하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내가 낳지 않겠다고 분명히 이야기한 상황입니다. 스님이 이런 상황에서 ‘일단 낳아보세요’ 하고 말할 리가 없잖아요? 질문자는 지금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웃음)
아내의 의견과 아버지의 의견을 같은 비중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낳아야 할 사람은 질문자가 아니라 아내입니다. 아이를 낳는 문제에 있어서는 질문자와 아내도 동등한 비중이 아닙니다. 아내의 의견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남편인 질문자의 의견도 아내에 비하면 미미한데, 하물며 아버지의 의견은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을 만큼 비중이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아버지와 아내를 동등한 위치에 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자에게 약간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냐고 말하는 겁니다. 질문자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있고, 가능하면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맞추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각 문제에는 그에 맞는 비중이 있습니다. 부부가 아이를 낳는 문제를 두고 아버지와 아내의 의견을 동등하게 여기면서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고민하는 것은 모자란 사람이 할 법한 고민이라는 겁니다.”
“스님의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5년 전에 아파트를 한 채 팔았습니다. 현재 시세가 2억 5천 정도 더 올라 마음이 괴롭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는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저는 오빠의 이유 없는 학대 속에서 부모님께 보호받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처를 치료하고 결혼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제왕절개 수술 중 아기가 메스에 얼굴이 다쳐 네 바늘을 꿰매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었습니다. 의사협회에서는 의료 과실이 없다고 판결합니다. 너무 억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약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바다에 가서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어떻습니까? 수없이 많은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죠? 즉 생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전체로 보면 파도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물결이 일렁거릴 뿐입니다. 그것처럼 관점을 어떻게 가지냐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거나 좁게 보고, 또 찰나로 보면 모든 것은 생멸이 있습니다. 그러나 길고 보고 넓게 보면 세상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출렁임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하나 모두 자기가 선택해서 살아온 것 같지만 나중에 좀 지나서 보면 마치 어떤 선을 따라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때그때 선택한 것들이 크게 의미 없어 보여요. 고등학교 때는 기말시험에서 몇 점을 받는지가 엄청나게 중요하죠. 그런데 나중에 커서 보면 그때 90점을 받든 70점을 받든 그게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까요?
주인의 목줄에 매달려서 다니는 강아지와 같은 인생
크게 보면 우리는 부모님께 받은 까르마의 반응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운명이라는 말이 왜 생겼을까요? 아무리 날고뛰어봐야 일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아!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운명대로만 사는 게 아닙니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각자의 까르마대로 살아갑니다. 변하려면 ‘자각’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제게 고집이 세다며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는 잠시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까지 고칠 수는 없습니다. 잠시 멈출 뿐이지 나중에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 내가 고집이 좀 세네!’ 이렇게 자각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자각하고 변화를 선택하면 변화가 가능합니다. ‘고집이 좀 세면 어때? 그냥 살아도 돼!’ 이러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문즉설은 제가 여러분께 어떤 답을 드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저와 대화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자각이 일어나도록 계기를 마련해 드리는 겁니다. 저와 대화하면서 ‘어! 별일 아니었네!’, ‘내가 고집이 좀 세네!’ 이렇게 자각하게 되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문제를 제가 해결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각을 할 수 있도록 이렇게도 얘기하고 저렇게도 얘기하는 겁니다. 먼저 자각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그런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무심결에 나를 고집하며 살아왔지만 ‘어! 내가 고집이 좀 세네’ 하고 자각이 일어나면 무의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내가 주장하던 것들이 저절로 조금씩 약해져 갑니다. 우리는 보통 각오나 결심으로 어떤 변화를 주려고 하는데 그건 순간적일 뿐입니다. 참는 것은 나중에 긴장이 풀리면 원래대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수행은 긴장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뭔가 고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먼저 내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이대로 살겠다면 그러면 되고, 좀 바꾸겠다면 계속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변화가 옵니다. 수행은 이런 관점을 갖고 해나가야 합니다.
또한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그럴 수 있겠네!’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면 내 선택의 자유가 커집니다. ‘바람을 피운 건 당신이야. 그러니 이 이혼은 당신 때문이야!’ 이렇게 원망하면서 헤어지면 이혼을 내가 결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 때문에 한 것이지 스스로의 선택으로 볼 수 없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그런 남편과 계속 살건지는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남편을 원망하면 내가 그의 노예가 됩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원망하지 않고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남편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좋다고 하는구나! 그러면 이혼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미움이나 원망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타인이나 외부 조건에 의해 강요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결혼을 약속하고 살아왔지만 남편이 외도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택할까?’ 이것이 주인 된 자세입니다. ‘우리 결혼해서 같이 살기로 했잖아. 그런데 당신이 약속을 어겼어. 그러니 나는 당신과 더 이상 살 수 없어!’ 이러면 남편을 탓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지킬 수도 있고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은 변했지만 그런 가운데 스스로 선택해야 주인 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때그때 잘해온 것 같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결국 주인의 목줄에 매달려서 산책하고 온 강아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는 머리를 굴려 가며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결국 자기 까르마의 반응대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 지켜보고 알아차리며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적습니다. ‘이렇게 하니 저렇게 되네!’, ‘저렇게 하니 이렇게 되네!’ 이렇게 수많은 경험 속에서 원인을 규명하는 힘과 결과를 예측하는 힘을 키워나가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를 받더라도 나중에 후회가 적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리 알 수 있으니까요. 만약 결혼해서 산다면 상대와 같이 사는 재미도 있겠지만 맞추며 살아야 하는 어려움도 예정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그때 자기 좋은 것만 보고 결혼하지 이런 점은 예상하지 못하고 결혼합니다.
인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했어도 다 살고 있죠? 모두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겁니다. 누구나 다 괴롭게 살기 때문에 괴롭게 산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괴롭게 살면 되지 뭐’ 이렇게 받아들여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왕 사는 거 좀 덜 괴롭게 살겠다면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살핌’입니다. 한문으로 하면 ‘자각’입니다. ‘아! 내가 이렇구나!’ 이렇게 자기 상태를 스스로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일들이 없어집니다.”
강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는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서 스님의 사인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 강연 듣고 제가 정말 행복해졌습니다!”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봉사자들이 모두 무대 위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은 정토회 인천경기서부 지부 회원들이 힘을 모아 강연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인천경기서부 지부, 화이팅!”
스님은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조찬을 한 후 오전에는 동지 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생방송을 한 다음 이어서 손님들과 연달아 미팅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