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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부터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너무 더워서 아침 일찍 두 시간만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법사님들과 논둑 예초를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농막 주변을 예초한 후 아랫논으로 올라갔습니다. 논둑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논과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벼가 다치지 않도록 아주 집중을 해서 예초기를 움직였습니다. 스님이 예초기로 논둑을 훑고 지나가자 벼가 반듯하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랫논 논둑 예초를 끝내고 윗논으로 올라갔습니다.
윗논에도 논둑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예초기를 메고 논둑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논 주위가 이발을 한 듯 반듯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윗논으로 올라가는 길도 풀을 말끔히 깎았습니다.
예초기를 벗자 스님의 작업복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농사일을 마치고 스님은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기 위해 두북 수련원 방송실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어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제 정토회는 하안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하반기 일정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며칠 전 6차 백일기도를 시작했으니 매일매일 정진을 잘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는 경전대학 졸업식을 했고, 이번 주에는 불교대학 졸업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반기에는 많은 신규 회원들이 정토회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기존의 회원들은 신규 회원들을 잘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교대학을 다닐 때는 진행자와 돕는 이가 있어서 알뜰하게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졸업한 후에 수행법회에 나오게 되면 좀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이 아니어서 아는 사람도 없고, 법회 의식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 나오다가 잘 나오지 않게 된다고 해요. 이런 부분을 감안하셔서 모둠장과 그룹장뿐만 아니라 기존 회원분들도 우리 모둠에 새로 들어오는 신규 회원들을 잘 챙겨 주시기 바랍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잘 보살펴 주시지만 사회에 나가면 아무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신규 회원이 되신 분들도 누가 꼭 보살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정토회 회원으로서 당당하게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정토회 활동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세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생활비도 주지 않고 친정에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리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편이 사업을 하는데 6개월 정도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않아서 힘들었습니다. 제가 친정에 돈을 빌려서 겨우 버텼는데, 요즘 다시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편이 직접 저의 친정에 손을 벌리고, 친정엄마의 노후 자금과 남동생의 결혼자금까지 끌어다 썼습니다. 이제 돈을 더 빌릴 곳도 없어서, 남편에게 생활비 얘기를 했더니 오히려 저에게 화를 냅니다. 남편은 저더러 그동안 모아둔 돈도 없냐며 오히려 제 탓을 합니다. 남편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염주를 내던지지 않고 괴로움 없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될 수도 있고, 사업이 잘 안될 수도 있고, 또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주식을 하면 주식이 오를 수도 있고, 정체될 수도 있고, 주가가 떨어져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받을 수도 있고, 이자를 못 받을 수도 있고, 어쩌면 원금까지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다 보면 늘 변수가 생깁니다. 변수가 있는 게 인생인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애걸복걸하면 인생살이가 늘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할 때는 자신이 가진 자금 안에서 하거나, 은행 융자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될 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의 재산만 손해 보는 선에서 끝납니다. 은행은 빌려 간 돈을 안 갚으면 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만, 돈을 빌려 간 사람이 정말 돈이 없어서 못 갚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서 안 갚으면 잘못이지만 돈이 없어서 못 갚으면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개인의 돈을 빌릴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업을 할 때는 절대로 개인의 돈을 빌려서는 안 됩니다. 사업을 할 때는 그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지켜야 합니다.
사업이 잘되면 돈을 빌릴 일이 없을 것이고, 사업이 조금 어려워졌을 때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준다면 그 사업은 회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하면 그 사업은 이미 회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채를 쓰거나, 아는 사람한테 돈을 빌리거나, 친척한테 돈을 빌린다면, 그 돈은 갚을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그래서 친구나 친척, 형제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안타까우면 돈을 빌려주지 말고 숫제 그냥 주는 게 낫습니다. 1,00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100만 원이든 500만 원이든 그냥 줘버려야지, 빌려주게 되면 돈도 못 받을 뿐 아니라 서로 원수지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이 이미 친정의 돈을 끌어다 썼으니 나중에 갚으면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안 갚아서 독촉하면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내 돈 내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지만, 빌린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어려워 죽겠는데 독촉한다고 오히려 악심이 생기기가 쉽습니다. 나중에 돈 문제가 해결되어도 원한이 사무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겁니다. 만약에 빌려줬다면 포기해야 합니다. 돈을 안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돌려주면 받지만 내놓으라고 너무 압박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돈은 돈대로 못 받고 원한까지 살 수 있으니까 마음으로는 포기를 하라는 겁니다. 상대방이 돈을 더 빌려달라고 할 때는 돈이 있으면 그냥 주되 더 이상 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안 빌려주면 큰 문제가 없는데, 빌려주다가 안 빌려주게 되면 원수가 되기 쉽습니다. 처음부터 안 빌려주면 섭섭하긴 하지만 원수까지는 안 됩니다.
첫째, 질문자는 일체 돈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말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질문자가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편에게 뭐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하든지 말든지 무관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간섭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안타까워도 마음으로는 딱 포기하고 일체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이 돈을 더 빌려오라고 하면 ‘더 이상 빌릴 곳이 없다’ 하고 말하고, 욕을 하면 ‘미안하지만 더 빌릴 곳이 없다’ 하고 재차 말해야 합니다. ‘사업은 당신이 벌려놓고 왜 나한테 돈을 빌려오라고 하느냐’ 하고 대꾸하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문을 닫는 게 훨씬 손해를 적게 보는 일인데도, 사업을 하다 보면 집착이 생겨서 그렇게 안 됩니다. 대부분은 있는 돈 없는 돈, 일가친척 돈까지 다 말아먹고서야 문을 닫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질문자는 여기서 포기하셔야 하고, 일체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남편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돈을 빌려오라고 행패를 부려도 ‘저 사람은 돈이 없어서 저렇구나’ 하고 남편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업이 망해가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누라까지 잔소리한다 싶으면 화가 더 치밀어서, 결국 돈도 잃고 가족 간에 불화까지 생깁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마음으로 딱 포기하고, 해결 방법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려준 사람이 뭐라고 하면 ‘죄송합니다. 형편이 되는대로 갚겠습니다’ 하고 넘어가고, 남편에게는 일체 언급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미 가족 돈까지 빌려 가서 회생이 안 됐다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 100%라는 건 없습니다. 어쩌다가 경기가 좋아지거나, 어떤 연줄이 닿아서 회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남편의 사업이 회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제일 답답한 사람은 바로 남편입니다. 사업이 안 될 때 제일 답답한 사람은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업하는 본인입니다. 거기다 대고 자꾸 잔소리하면, 화나고, 짜증 나고, 싸울 일밖에 안 생깁니다. 안타깝지만 남편이 하는 데까지 하도록 놔두되, 질문자는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꾸 상황에 같이 끌려들어 가면 안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제 생각에 사로잡혀서 남편을 원망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마음을 비우고 남편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11시가 되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은 모둠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와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11시부터는 울산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과 농민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신 故(고) 최영준 선생님의 추모식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스님의 속가 형님이기도 합니다. 스님이 지난 한 달 동안 동남아 10개국을 순방하는 중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스님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9재 중 5재를 지내는 오늘, 울산 시민단체 관계자들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추모식에 앞서 헌공예불과 청혼을 한 후 분향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울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이사장님이 내빈을 대표하여 분향을 했습니다.
이어서 상주가 영가전에 차를 올리고 상주분들이 함께 삼배를 했습니다.
다음은 전 울산대 교수인 이노형 교수님이 故(고) 최영준 선생님의 연혁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울산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과 농민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신 故(고) 최영준 선생님의 발자취가 하나씩 낭독이 되자, 참석한 내빈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습니다.
“고인은 16세에 가출하여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4·19혁명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운동에 눈을 뜨셨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시다가 이 지역 가톨릭 농민회 창립을 추동하여 농민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이끄셨습니다. 이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울산본부 농민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여 직선제 개헌과 6월 항쟁에도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셨고, 울산공해추방 운동연합을 비롯하여 울산환경운동연합 창립도 주도하셨습니다. 활동 내용이 전방위적이었고, 한 번도 초심을 잃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사회 실천을 하신 어르신입니다. 저도 선생님의 일대기를 기록하면서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고인의 일생을 짧게 되새긴 후 추도사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울산민주화운동기념계승사업회 최민식 위원장님의 추도사가 이어졌습니다.
“연혁을 듣다 보니까 생각이 났는데요. 지으라는 농사는 안 짓고 쓸데없는 일만 많이 한다고 하면서 부인이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업적을 계승하고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추모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생애에는 당신도 좀 챙기면서 사는 그런 분으로 다시 오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울산환경운동연합 이현숙 공동의장님이 고인의 넋을 기리는 추도사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통해 농민이 농민운동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울산 지역에서 환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많은 역할을 해주셨지만 저희는 늘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것으로 고마움에 보답하곤 했습니다. 집회를 할 때마다 금방 논에서 일하다 온 듯 운동화에 흙을 묻혀서 오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청년처럼 일생을 살아오셨습니다. 그 기운을 계승해서 저희들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추도사를 들으니 생전 최영준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고인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고운님 잘 가소서’를 함께 부르고, 해탈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고인을 위해 영가 천도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상주분들은 고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법상 앞자리에 자리했습니다.
내빈들 중에는 기독교, 천주교를 믿는 분들도 많이 있었는데요. 스님은 왜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이 생겼는지 그 취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천도라는 말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인도말로는 ‘우란분’이라고 합니다. 왜 거꾸로 됐다고 말할까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잘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돈 좀 벌어서 가족을 위하며 잘 살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행위의 결과가 다 손해날 짓을 했다는 거예요. 본인은 천당에 가려고 한 행위가 결국 지옥 갈 행위가 되었을 때 이것을 거꾸로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을 ‘천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세우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베푸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천도재’에서 ‘재’자는 ‘제사 지낸다’ 할 때 ‘제’자가 아닌 ‘베풀 재(齋)’를 씁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베풀 때 그 공덕으로 거꾸로 된 사람이 바로 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천도를 하기 위해서는 베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손실을 입히고, 내가 화가 나서 화풀이한 것이 누군가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해를 끼치기도 하고,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지 모를 그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베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배고픈 자와 가장 가난한 자에게 베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 그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베풀 때는 가장 배고픈 사람 또는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천도재를 지내면 반드시 음식을 많이 만들어서 그날 전부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재를 지낼 때 음식을 많이 차리는 이유가 귀신이 먹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백 명분이나 천 명분의 음식을 만들어서 배고픈 사람에게 많이 나눠주기 위해서입니다.
천도재와 연관된 재미있는 옛날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한 부잣집에서 부모님의 천도재를 지내달라고 절에 쌀 100석을 시주하면서 재를 잘 지내달라고 했어요. 그 당시에 쌀 100석이면 매우 큰 돈인데, 큰스님은 그 돈을 받아서 재를 지낼 준비는 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러한 큰스님의 행동에 주지 스님은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재를 지낼 돈을 받았으면 시장을 봐서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돈을 자꾸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니까요. 그렇게 49재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큰스님이 재를 지낼 준비하라는 말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지 스님이 큰스님에게 재를 지낼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니 큰스님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다’ 하시는 거예요. 아무 준비도 안 하고 말이죠.
드디어 천도재 하루 전날이 되자 큰스님이 시장에 가서 콩나물 한 움큼과 채소 몇 가지를 사서 부엌에서 직접 데치고 볶고 해서 반찬을 만들었어요. 천도재 지내는 날 아침이 되자 큰스님이 전날 만들어 놓은 반찬 세 가지를 영가단에 딱 얹어놓고 죽비 3번을 치고는 ‘재 끝났다’ 하시는 거예요. 조금 후 10시가 되자 많은 수의 일가 친척들이 재를 지내겠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으니까 주지 스님한테 막 항의를 했어요. 주지 스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큰스님께 여쭤보라고 했습니다. 큰스님한테 가서 막 항의를 하니까 큰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49재는 제가 잘 지냈습니다. 남은 음식은 저기 부엌에 가면 있으니까 먹고 가시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난리를 피우는데, 그 집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 주지 스님에게 큰스님이 쌀 100석으로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큰스님이 재 지낼 돈을 49일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줘 버렸습니다.’
주지 스님의 대답을 들은 그 집 아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천도재는 잘 지내졌다. 집으로 가자’라고 해서 무마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재(齋)의 정신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재를 지내면,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네다섯 시간씩 의식을 했어요. 밖에는 동네 사람들과 거지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배고파 죽겠는데 재가 끝나지를 않는 거예요. 그때 조실스님이 재를 지내려고 법당에 차려놓은 음식을 다 꺼내서 사람들에게 나눠줘 버렸어요, 그래서 재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지금 재를 지내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항의를 하니까 큰스님이 ‘배고픈 사람이 먹는 게 재(齋)인데, 지금 배고픈 사람 놔 놓고 뭐 하고 있느냐?’ 하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지금 저도 배고픈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요? (웃음)
이것이 원래 재(齋)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풀 재(齋) 자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를 계승한다면 요즘은 재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지금 시대에는 음식을 많이 해놓아도 먹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천도재 지내줄 테니까 얼마를 내라’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얼마를 보시하면 그 돈을 모두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이나 북한의 가난한 아이들 또는 제3세계 어린이 구호 활동에 사용합니다. 재비를 절 운영에 쓰지 않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를 가장 잘 지내는 방식이며, 그렇게 해야 재주들에게 실제로 큰 공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를 잘 지내려면 베풀어야 합니다. 그럼 왜 이런 재 지내는 문화가 생겨났을까요? 저는 이게 다 우리 인간 생활의 한 모습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을 때려서 감옥에 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은 가족 중 부모나 형제가 맞은 사람한테 돈을 물어 주고 합의를 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고인을 위해 남은 가족들이 베풀어야 하는 겁니다. 둘째, 배상을 했는데도 본인이 잘했다고 계속 우기면 돈만 갖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잘못했다고 뉘우쳐야 해요. 즉, 재를 통해서 본인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법문을 듣고 깨우쳐서 자신이 뭐가 문제였는지 자각하여 어리석은 자신을 참회해야 합니다. 본인은 반성하지 않고 돈으로만 때우려고 하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참회가 필요하고 법문이 있게 되는 겁니다. 영가가 법문을 듣고 깨우쳐서 참회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영가 천도 법문을 하는 겁니다.
법주가 요령을 흔들며 재를 지내는 이유는, 본인이 깨우쳤고 배상을 했다 하더라도 재판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맛을 좀 보고 와야 합니다. 지장경(地藏經)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옵니다. 지옥 중생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원을 세운 분이 지장보살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픈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지장보살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지장보살을 불러서 우선 지옥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연유로 49재 기간 동안 지장보살님께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재를 지낼 때는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 법문을 듣고 깨우쳐야 해요. 즉 반성을 해야 합니다. 둘째, 베풀어서 배상을 해야 됩니다. 셋째, 큰 원을 가진 사람의 공덕으로 고통을 잠시 면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뜨거우면 1초도 못 참잖아요. 이렇게 세 가지 이유에 의해서 천도재가 만들어졌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런 취지는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겁니다. 특히 돈만 밝히는 천도재 문화가 남게 된 거죠. 이런 이유로 재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천도재를 지내는 본래의 취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종교의식으로 행한다 하더라도 그 취지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고인이 남긴 재산의 일부를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고, 훌륭한 목사님이든 신부님, 또는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을 초청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법문을 들어서 다시 한번 깨우치고, 각자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든 지장보살이든 그런 분들의 힘에 의지해서 잠시 고통을 면해 달라고 기원을 하고, 이런 것은 고인을 위해서도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도 매우 유의미한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음에 대해 어떤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은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두려움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두려움 자체가 없으면 이러한 의식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두려움에서 생겨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의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서로 종교가 같든 다르든 또는 종교가 있든 없든,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49재에 참가할 때가 종종 있으니까 그 취지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렸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영가의 천도를 발원하며 장엄 염불을 독송했습니다. 상주분들이 먼저 영단에 차를 올리고, 이어서 내빈들이 차례대로 나와 차를 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빛으로 돌아오소서’ 노래를 함께 부른 후 천도 의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어서 참석한 내빈들의 소회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고인의 둘째 동생이자 생태공동체 ‘푸른누리’의 원장인 최한실 선생님이 소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형님은 정말 티 없이 맑은 분입니다. 그래서 사회 실천을 많이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번 품은 뜻을 끝까지 지켜내려면 마음이 맑지 않으면 어렵거든요.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한결같이 살 수 있었던 힘은 맑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고인과 함께 울산 환경운동을 이끌었던 울산기후위기비상행동 대표인 한기양 목사님도 소회를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울산에서 개척교회를 열고 노동자의 집을 운영할 때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 시절에 선생님이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와서 현관문 앞에 내려놓고 가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선생님의 정을 듬뿍 받은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니까 저는 고향을 잃어버린 기분입니다. 선생님,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쉬십시오.”
이어서 20여 년 전 두북 정토수련원의 시작부터 故(고) 최영준 선생님과 함께 해온 화광 법사님이 소회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농사 경험이 없는 제가 이곳에 내려와서 헤매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시는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울주군 13개 마을에서 독거노인분들을 돕는 활동을 2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하겠습니다.”
다음은 민주화 운동과 농민 운동의 새 희망과 빛이 되어준 선생님을 잊지 않고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셨던 ‘상록수’ 노래를 함께 손잡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참석한 내빈들을 위해 인사 말씀을 했습니다.
“형님께서는 평생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품은 뜻이 올곧아서 가족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를 볼 때는 꼭 필요한 일을 해주셨고, 앞서가는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형님을 보내면서 형님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신 형수님과 가족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큰 박수와 함께 추모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두북 수련원에서 준비한 점심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내빈들이 식사를 시작하자 스님은 테이블마다 찾아가서 내빈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준비한 음식이 열 가지 채소를 갖고 만든 암 환자를 위한 건강식입니다. 맛은 좀 없을 수 있는데 건강에는 아주 좋아요.”
“최상의 건강식이네요. 감사합니다.”
가족들, 시민단체 활동가들, 학교 동기동창들, 모두 각각 따로 장소를 마련하여 식사를 접대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분들에게는 스님의 책과 떡, 두북 수련원에서 농사지은 찹쌀 한 봉지씩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내빈들이 모두 돌아가고, 스님은 오후 내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옛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를 보고 나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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