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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직 무덥기는 하지만 가을이 다가오는 듯 밤송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스님은 6시부터 법사님들과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어느 곳에 풀을 베면 좋을지 논과 밭, 비닐하우스를 둘러보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도 벌써 논과 밭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 오랜만입니다.”
“예, 잘 지내셨어요?”
“네. 스님도 건강하시지요?”
“네. 며칠 전에 이장님이 풀이 너무 많이 자랐다며 연락이 왔다고 해요. 저희 공동체 성원 전체가 다 2주 동안 여름 안거 수련을 해서 농사일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길가와 논둑의 풀을 베려고 나왔어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예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참깨가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 3동으로 갔습니다. 참깨와 참깨 사이에 풀이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입구에 무성한 풀을 베던 스님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초기 줄이 길어서 풀을 베다 작물을 상하게 할 수 있겠어요. 일단 바깥쪽부터 풀을 베야겠어요.”
스님은 농막과 비닐하우스 주변부터 꼼꼼히 풀을 벴습니다.
줄이 어느 정도 짧아지자 다시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햇살이 강해지자 비닐하우스 안도 빠르게 뜨거워졌습니다.
하우스 뒤쪽에도 풀이 무성했습니다.
예초기 날을 높이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풀을 베는 스님에게 행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스님, 몸은 괜찮으세요?”
“일을 할 때는 아픈 줄도 몰라요.”
비닐하우스 안에 난 풀을 다 베고 바깥으로 갔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먼 곳부터 풀을 깎고 돌아 나오며 비닐하우스 가까이에 난 풀도 벴습니다. 비닐하우스에 바짝 붙어 자란 풀은 뒤에서 행자님이 낫으로 벴습니다.
법사님들 일부는 텃밭에 상추를 심고, 두둑을 만들고, 주변을 정비해 두었습니다.
발우공양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8시가 넘어 울력을 마쳤습니다. 예초기를 내려놓자 등허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이젠 예초기로 풀을 베는 것도 많이 힘드네요.”
뜨거운 낮에는 잠시 휴식을 했다가 오후 1시부터는 인도 성지순례 실무 준비 회의를 했습니다. 전체 참가자 현황, 항공편 예약, 인솔 법사, 버스 운행, 오리엔테이션과 입재식 일정을 논의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내일 있을 故(고) 최영준 선생 추모식을 어떻게 진행할지 점검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스님의 속가 형님이며 울산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과 농민 운동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고인과 인연이 있는 손님들이 두북 수련원을 많이 방문하기 때문에 식사를 어떻게 준비할지, 추모식은 어떻게 진행할지 확인하고 실무자들과 의논을 했습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오후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본 후 해가 저물 무렵 저녁 6시부터 다시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공동체에서 법사님들 몇 분과 수행팀 행자들도 함께 농사일을 하기 위해 밭으로 향했습니다.
산 앞밭 울타리 주변에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동네 이장님이 농사팀한테 전화를 해서 잡초가 너무 많다고 이야기를 해준 터라 잡초부터 먼저 뽑기로 했습니다.
“저녁 6시가 넘었는데 아직 해가 뜨겁네요.”
아직 뜨거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했습니다.
울타리에는 돼지감자가 뿌리를 내리고 그물망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뿌리를 먼저 낫으로 친 후 그물망에 엉킨 줄기를 손으로 훑어 내었습니다.
땅에 엉켜 있는 비닐을 모두 걷어내고, 길가로 나온 흙은 삽으로 삭삭 긁어서 밭 안으로 넣었습니다.
땀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어느덧 해가 저물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울타리의 한쪽 면을 마무리하고, 옆 면으로 자리를 옮겨 잡초를 계속 제거했습니다.
뽑아 놓은 잡초는 수레에 담아서 퇴비장으로 모두 옮긴 후 마지막으로 빗자루로 길을 깨끗하게 쓸었습니다.
울타리의 지주대가 넘어져서 스님이 망치로 다시 지주대를 박았습니다.
여닫을 수 있게 입구 문으로 사용하던 지주대는 잡초에 휘감기어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잡초를 훑어 내고 나니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이런 밭을 보고 ‘주인 없는 밭’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보면 그렇게 말하기 좋은 모습이에요.”
주변을 모두 정리하자 울타리만 깔끔하게 서 있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인이 있는 밭 같네요.”
울타리 정리를 마치고 스님은 농사팀이 너무 바빠서 미처 신경을 못 쓰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살폈습니다. 비닐하우스 주변에도 아직 예초기를 돌리지 못한 구역이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묘당 법사님이 예초기를 돌리는 동안 스님은 낫으로 비닐하우스 바로 옆면에 난 풀을 베었습니다.
낫으로 풀을 베는 동안 곧 해가 완전히 저물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내일은 예초기로 논둑에 풀을 전부 벱시다. 예초기를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행자님에게 내일 울력 준비를 부탁한 후 농사일을 마쳤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스님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을 본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주 금요 즉문즉설에서 질문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는 사귀던 남자친구가 결혼을 부담스러워해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 돌아보니 저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 단지 결혼 자체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저와의 관계에서 부담을 느꼈던 사람이기에 그 부담을 덜어주고 다시 만나보자고 말하고 싶지만, 타인의 마음에 이미 생긴 짐을 어떻게 내려놓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이런 고민조차도 그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까 봐 걱정입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보통 내가 원하는 쪽으로 상대를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합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사실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원하는 게 있지만, 그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루어지면 다행이지만, 그것도 나중에 나쁜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약간 섭섭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더 잘된 일일 때도 있고요.
내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움이 생겨요. 괴로움은 바로 집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질문자는 지금 그 남자를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이룰까’ 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이루고 싶은 것을 어떻게 이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을 도와주려면 제가 수수료를 받아야겠죠. (웃음)
그래서 종교 단체 같은 곳에서는 다 수수료를 요구하는 거예요. 하느님께 기도하거나 부처님께 빌면 너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며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전에 돈을 좀 내야 된다고 합니다. 복채를 내야 효과가 있다는 거죠. 이처럼 어떤 이익을 추구할 때는 네가 추구하는 이익의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제가 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익을 가지고 논하는 문제는 여러분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만,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문제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그 남자에게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는 '그건 알아서 하세요' 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 친구와 잘 지냈고 관계가 좋아서 결혼도 하고 싶지만 남자 친구가 결혼까지는 부담스러워한다면 질문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결혼을 꼭 하고 싶다면 그 남자를 포기하고 결혼을 원하는 다른 남자를 만나야 할 것이고,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래,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하고 말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친구로 지내는 것도 싫어한다면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그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치 어떤 음식을 아무리 먹고 싶어도 그 음식에 독이 들었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상대가 싫다고 하면 상대의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상대가 싫다고 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언젠가 나의 진심이 통할 거야’하고 믿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하는 말도 그런 의미죠. 그러나 요즘은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편지를 쓰고, 매일 전화를 하고, 집 앞에 꽃을 들고 서 있는 것을 간절한 사랑이라 여겼지만, 요즘은 그것을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로 보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도 금지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를 넘어 법적으로 금지된다는 것은 그것이 나쁜 행위로 간주된다는 뜻입니다. 즉,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상대를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동의 없이 껴안으면 성추행이 되듯이,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계속 좋아한다고 말하면 정신적 괴롭힘이 되어 범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사랑하더라도 상대가 싫다면 그것은 괴롭힘에 해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질문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지금 세상에서는 범죄에 해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가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이를 고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가 때리는 것을 교육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아동 학대로 여겨집니다. 부모가 아이를 때리는 것도 이제는 폭행이 되어 범죄가 됩니다. 학교 선생님이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매를 들었던 것도 이제는 아동 학대로 간주됩니다. 심지어 고함을 지르는 것도 정신적인 괴롭힘으로 여겨져 아동 학대에 포함됩니다. 이처럼 문화와 가치관이 변했는데, 이를 옛날 방식으로 고수하면 안 됩니다.
보통은 문화가 바뀌면 법률이 뒤따라오는데, 어떤 경우는 법률이 문화보다 앞서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일상적이었던 행동이 이제는 범죄 행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 사람들이 이런 문제로 많이 고생했습니다. 아이를 때리거나 훈육하려다 아동 학대죄로 아이를 빼앗기는 일이 많았던 거죠. 이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전통 가치관이 무시된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젊은 세대나 아이들은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이 문제가 딱 정리가 됩니다. 안 그러면 자꾸 미련이 남습니다. 서로 좋아해서 친구까지 됐지만 결혼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멈춰야 해요. 욕심을 내면 헤어지는 과보가 따라옵니다. 상대의 뜻을 존중해서 그저 친구로만 지내자는 데에 동의를 했으면 관계가 계속 유지가 되었을 텐데, 상대의 생각을 무시하고 갔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친구로만 지내겠다고 결심이 서면 다시 연락을 하면 돼요. 강요가 아니고 내 뜻을 전달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에요.
둘의 관계에서 질문자가 상대를 더 좋아하니까 질문자가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자친구가 먼저 전화해서 ‘우리 친구로만 지내는 건 어떠니?’ 이렇게 물어온다면 ‘그래, 친구로만 지내자’ 하면 되는데 상대가 연락이 없단 말이에요. 내가 더 좋아하면 내가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데 저 물건이 꼭 필요하면 가게 주인한테 내가 을이 되는 거예요. 주인이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어요. 반대로 주인이 이 물건을 빨리 팔아야 한다면 손님이 주겠다는 만큼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내가 보고 싶다면 전화해서 ‘친구로서 만났으면 좋겠다’ 하는 의사를 밝히면 됩니다. 상대가 친구로 지내는 것도 싫다고 할 수도 있고, 친구로 지내는 것까지는 좋기는 한데 또 결혼하자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질문자가 분명한 의사를 밝혀야 해요.
‘우리 관계가 회복되더라도 네가 청혼하면 몰라도 나는 청혼을 안 할게. 내가 정말 결혼하고 싶으면 그때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
이렇게 상대에게 말했는데도 상대가 친구 관계조차 부담스럽다고 하면 질문자도 바삭하게 나와야지요. ‘그동안 나하고 좋은 사이로 지내줘서 고마웠어. 잘 살아’ 이렇게 말하고 지나온 시간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한 후 관계를 딱 끊어야 합니다. ‘잘 사는지 두고 보자’ 이렇게 원망심으로 끝을 내면 안 돼요. 사람 관계는 1년 있다가 상대에게서 전화가 올 수도 있고, 내가 또 전화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분 나쁘다고 순간에 집착해서 막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이처럼 자기 의사를 적극적으로 끝까지 말해봐야 헤어지더라도 미련이 안 남습니다. ‘그때 전화할걸’, ‘그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했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자꾸 미련이 남으면 이게 또 나한테 괴로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말해보고 받아주지 않으면 정리하고 끝내 버려야 나한테 좋습니다. 내가 상대를 차면 약간 죄의식이 드는데, 내가 상대에게 차이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좀 나쁠 뿐이지 알고 보면 굉장히 좋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번 정리를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듣고 제가 생각을 너무 얕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할지 저를 돌아보게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농사일을 한 후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고(故) 최영준 선생 추모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추모식에 참석한 가족 친지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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