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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탄을 답사하는 3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5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젬강에서 랑덜비로 가는 길에 산사태가 나서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젬강-발도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발도 치옥을 먼저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매일매일 비가 오는 우기에 모처럼 해가 났습니다.
이 도로에도 산사태가 나서 차가 돌을 피해 간신히 지나가야 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도로가 움푹 파인 곳도 많았습니다.
덜컹 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차로 4시간 30분 달려 오전 10시에 발도 치옥에 도착했습니다. 트롱사 지역은 대부분 모내기가 끝났는데, 젬강 지역은 따뜻한 남쪽이어서 아직도 모내기를 하고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주민들과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해서 스님이 논으로 가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논과 논 사이에 길이 없어서 몇 개의 논을 지나 겨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논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은 이앙기로 모를 심은지 오래되었지만, 부탄은 아직도 사람의 손으로 모를 심고 있었습니다.
“잘들 지내셨어요?”
“네!”
스님도 바지를 걷고 논으로 들어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도왔습니다.
모의 크기가 한국보다 훨씬 컸습니다. 한국은 모를 한 번에 여러 개를 심는데 부탄은 모를 하나씩 심었습니다. 산등성이를 계단처럼 깎아 만든 다랑논이다 보니 줄을 맞추어서 심기도 어려웠습니다. 논에 물을 대자마자 바로 모를 심는 것도 한국과 달랐습니다. 스님이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은 써레질을 하고 나서 3일 후 흙탕물이 가라앉은 다음에 모를 심거든요. 여기는 왜 써레질을 하고 바로 모를 심어요?”
주민들이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모래땅이어서 물을 대고 나면 땅이 딱딱해져서 모를 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써레질을 하고 나서 바로 모를 심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모를 심으니 금방 논 하나를 끝마쳤습니다.
“이렇게 모를 심으면 1ac(1200평)에 쌀이 얼마나 생산되어요?”
“잘 모릅니다.”
“일당을 받고 일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품앗이를 해주는 겁니다. 오늘은 친구 논에 모내기하고, 내일은 우리 논에 모내기합니다.”
“수고하세요.”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차를 타고 발도 게옥 마을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산길을 차로 50분을 더 이동했습니다. 마을회관에 도착하자 콤샤르 치옥에 살고 있는 주민들 70여 명이 모여서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먼저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지난 답사 때 농수로 공사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는데 진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습니다.
“잘 지냈어요? 지난번에 우리가 농수로 만드는 공사를 하기로 약속했었잖아요. 부탄 정부에서 은행 계좌를 새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지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공사를 못했지만 추수 후 가을에 농수로를 만듭시다. 그리고 제2수원지에서 내려오는 농수로가 중간에 부서졌었는데 고쳤나요?”
“물이 흘러갈 수 있는 정도로는 고쳤습니다.”
“올해 농사짓는 데는 큰 문제가 없나요?”
“올해는 비가 잘 내려서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올해 가을에 추수하고 나서 겨울에 농수로 공사를 시작하는 것으로 합시다. 스님이 맨날 오기만 하고 일은 시작도 안 해서 여러분의 실망이 크죠?”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통역의 한계 때문에 충분히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은 콤샤르 마을 출신에 한국말을 잘하는 린첸다와 님이 있어서 콤샤르 지역말로 곧바로 통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JTS의 사업 원칙에 대하여 충분히 얘기하려고 통역을 한국에서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지난번에 영어로 통역을 했더니 여러분과 대화가 잘 안 통했어요. 제가 한참을 실컷 얘기했는데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뭐든지 주면 받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한 말이 이해가 잘 안 되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잘하는 부탄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콤샤르 출신이었습니다. 저기 계신 도루지 스님도 콤샤르 출신이에요. 처음에 인도네시아에서 만났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콤샤르 출신이었어요. 제가 콤샤르 마을과 인연이 깊나 봐요.” (웃음)
스님은 JTS의 사업 원칙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JTS가 하는 일은 정부가 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정부에서 미처 하지 못하는 작은 일들을 같이 해나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저 멀리 수원지에서 논까지 파이프로 물을 끌어오는 것은 정부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물을 각자의 논으로 갈 수 있도록 시멘트로 농수로를 만드는 것은 여러분이 JTS의 지원을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정부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해야 합니다. 정부가 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일은 우리가 직접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JTS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지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하고 건설회사에 맡겨서 해야 하는 일은 정부에게 요청하면 됩니다. 구분이 되나요?”
“네!”
“나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이거 해주세요’ 이런 요청은 JTS에서 지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걸 하려는 데 이게 좀 부족합니다’ 하는 요청에 대해서는 지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랑덜비 치옥으로 가는 길에 산사태가 나서 길이 막혔습니다. ‘누가 좀 치워주세요’ 하는 요청은 정부에 가서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삽을 들고 가서 ‘우리가 치우겠습니다’ 하면 거기에 필요한 건 JTS에서 뭐든지 지원할 예정입니다. ‘삽으로만 하니까 너무 힘들어요. 포클레인을 이틀만 빌려주세요’ 하고 요청하면 JTS에서 지원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지원하지만, 여러분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다 해주세요’ 하는 요청은 JTS에서 지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길이 너무 가팔라서 차가 막 미끄러진다고 합시다. 이 도로 전체를 포장하는 것은 정부의 개발 계획 안에 들어 있어서 정부가 해줄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나 ‘언제 될지 모르겠다. 너무 불편하다. 100미터만 포장하면 차가 다닐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해서 여러분들이 직접 노동을 해서 포장하겠다고 하면 시멘트와 자갈은 JTS에서 지원하겠다는 겁니다. 이해했어요?”
“네!”
“JTS의 지원 방침은 자발성에 기준을 둡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하겠다는 것은 뭐든지 지원할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을에 집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저 집을 좀 지어주세요’ 하는 요청에 대해서는 JTS에서 지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돈만 있으면 나라도 지원하겠다. 그런데 나는 돈이 없으니까 며칠 가서 일이라도 해주겠다’ 이렇게 뜻이 모아진다면 그 집을 짓는 재료비는 JTS에서 모두 지원할 것입니다. 만약 짐승 때문에 밭에 울타리를 친다고 합시다. 나무를 베어와서 ‘말뚝은 제가 만들었는데 철조망을 살 돈이 없어요’ 하고 요청하면 JTS에서 지원해 줄 계획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울타리를 쳐주세요’ 하는 요청은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지원이 가능합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도 정말 어려운 사람일 경우에는 지원이 가능합니다. 부엌을 개선하고 싶다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먹고살기도 힘들어서 나무조차 살 형편이 안 된다고 하면 촉바가 현장을 점검해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누구보고 대신해 달라는 것은 JTS가 아니라 정부에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부족합니다’ 하는 것은 뭐든지 검토해서 지원하겠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나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습니다’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면 됩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밖에 못 나가요’ 그러면 지원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쁜 옷을 입고 싶은 건 여러분이 알아서 하면 됩니다. 농수로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해주세요’라고 할 것이라면 정부에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는 이렇게 농수로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하는 것은 JTS가 지원하겠습니다.
마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은 우리가 같이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부인들이 좀 편리하도록 부엌도 고치고, 농수로도 놓고, 마을에 필요한 도로도 닦고,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을을 우리가 더 잘 살게 만들어 봅시다.”
이어서 마을 주민들이 건의하고 싶은 내용을 편안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현재 우리 마을에는 물이 내려오는 농수로가 두 개 있는데, 여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지역에도 농수로 만드는 것을 JTS에서 지원해 주실 수 있나요?”
“몇 가구가 사용하는 농수로인가요?”
“아홉 가구입니다.”
“JTS에서 시멘트를 제공해 주면 아홉 가구가 힘을 합해서 농수로를 만들 수 있나요?”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멘트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흙길 위로 물이 지나가기 때문에 물의 유실이 많고, 흙이 젖어서 둑이 무너집니다. 시멘트로 만들면 좁게 만들 수 있고, 그 위로 사람이 다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자기 논을 조금씩 양보해서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수레라도 지나갈 수 있게 하면 운반이 편리해집니다. 논과 논 사이에 길을 만드는 것도 JTS에서 지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논농사를 지을 때 기계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길이 필요합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지, 주민들이 모두 동의하는지 확인이 되면 JTS에서 지원을 하겠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땅이 여유가 있어 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도로포장, 주거 개선, 부엌 개선, 수원지 보수 등 계속해서 제안들이 쏟아졌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다양한 제안과 의견들을 수렴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주민들에게 다시 한번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꾸 팀푸나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데, 콤샤르 마을에 살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한번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콤샤르 마을은 공기도 좋고, 물도 맑고, 경치도 얼마나 좋습니까. 가끔 산사태가 나서 길이 막히긴 하지만 홍수가 날 염려는 없잖아요. 지금 인도 아쌈 지역에는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죽고 난리인데, 여기는 산이라서 홍수가 날 염려가 없습니다. 물론 생활 조건이 너무 열악하면 살기 힘듭니다. 그래서 농사짓기 편리하도록 하거나 여성들이 부엌을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일들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동물들이 농작물을 해치지 않도록 울타리도 쳐야 합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좀 개선하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마을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크게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도루지 스님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스님이 주민들에게 비누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을 회관을 나와 폴라비 마을 촉바의 집으로 이동했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 마을리더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발도 게옥에는 발도 치옥, 콤샤르 치옥, 풀라비 치옥, 3개의 마을이 있습니다. 각 마을을 대표하는 촉바들과 멍미, 겁이 모두 함께 자리한 가운데 주민들이 요청한 내용들을 어떻게 수렴할 것인지 논의를 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지금 해야 할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발도 게옥에서 시범사업을 하나라도 진행해 봤으면 여러 가지 얘기할 게 많을 텐데, 아직 하나도 진행을 안 해서 얘기할 게 많지는 않네요. 지금까지 한 일은 랑덜비 치옥에서 가난한 집 한 채를 수리한 것과 학교를 보수한 것, 이렇게 두 개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우기라서 공사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시범사업은 우기가 끝나면 진행합시다. 도로포장도 우기가 끝난 후에 하도록 합시다. 지금 공사하면 우기 때 또 무너질 겁니다. 농수로 공사는 올해 농사가 끝난 후에 시작합시다.
요즘같이 우기여서 비가 매일 올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로 곳곳을 다녀보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계속 체크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농수로 위로 돌이 굴러와서 농수로를 막으면 그 위로 물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물이 넘쳐서 둑의 흙을 쓸어가 버리면 농수로 전체가 통째로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면 공사가 커지게 돼요. 장마철이 되면 문제가 될 만한 곳을 미리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은 올 가을에 할 사업에 대해 계획을 잘 세워야 합니다. 수원지, 농수로, 집수리,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집짓기, 울타리 세우기 등 계획을 미리 세워서 올려주세요. 특히 여성들은 집수리에 신경을 많이 써주면 좋겠습니다. 주민들에게는 집수리와 부엌 수리를 잘해주는 게 제일 만족도가 높을 겁니다.”
제2수원지 개발, 농수로 건설, 도로포장, 주거 개선 등 다양한 주제로 한 시간 동안 논의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장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공사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은 구매를 할 수도 있고, 대여를 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운전기사를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를 데려올 수 있으면 중장비를 구입하고, 그게 어렵다면 대여를 하도록 합시다. JTS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촉바들은 한결 같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JTS에서 이렇게 지원해 주시니까 저희들은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느 개인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일을 안 한다는 것뿐이지 공공의 일이라면 뭐든지 JTS가 돕겠습니다. 여러분이 내 일처럼 한다면 저는 언제나 지원해 줄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물건 사듯이 아끼고, 내 집 고치듯이 열심히 한다면 모든 지원을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보니 다 잘할 것 같습니다. (웃음)
우선 발도 게옥부터 시작해 봅시다. 5년 후에는 발도 게옥에 생활 문제로 괴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만듭시다. 그래서 모든 주민들이 발도 게옥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곧 비가 내린다고 하는 데다 어두워지면 운전하기 더 위험하기 때문에 한 시간 만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다 함께 “발도, 잘하겠습니다!”를 외치며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식사를 준비해 준 촉바와 집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콤샤르를 떠나기 전에 겁에게 부탁했습니다.
“랑덜비 치옥 주민들에게 학교 보수를 마쳐서 축하도 하고 선물도 주려고 했는데, 산사태로 길이 막혀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길이 한 군데만 막혔으면 다른 길을 돌아서 가려고 했는데 양쪽이 다 막혀서 결국 못 가게 되었습니다.”
오후 3시 10분에 콤샤르 치옥을 출발해 젬강으로 이동했습니다.
다시 차로 5시간을 달렸습니다. 곳곳에 산사태가 나서 바위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젬강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한 후 9시부터 부탄 중앙정부 공무원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시 님과 께상 님, 두 명의 공무원이 스님과 답사를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모레는 파로 탁상 사원을 방문할 예정인데요. 무엇을 주안점으로 답사해야 하는지 설명한 후 앞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을 해나갈 때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스님이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정부 공무원들이니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부탄이 어떻게 달라지느냐가 정해집니다.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임하면 안 돼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있어도 실천하기가 힘듭니다.”
“여러분이 낸 제안이 위에서 잘 안 받아들여져서 한계를 느끼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것은 윗사람들이 과거에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불평불만을 하다가 사표 내고 나가 버리면 개선을 못 합니다. 시간을 두고 계속 문제 제기를 해야 돼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줄도 알아야 하지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집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면 실제로 집행을 할 수도 있어야 해요. 여러분이 잘한다면 JTS에서도 계속 지원을 하겠습니다. 저는 돈 빼고는 다 지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돈만 달라고 하지요.”
“지금 부탄 청년들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가 모두 돈 때문입니다.”
“그런 점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막상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면 돈만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부탄 젊은이들이 호주나 한국에 가서 산다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집을 짓고 살 수는 있어도 거기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을 바꿀 수 있겠어요? 외국인이 호주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외국에 나가서는 자기가 가진 이상을 실현하기는 힘들어요. 그저 자기가 먹고사는 일을 할 뿐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곳 부탄에 있으면 부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30대 젊은 시절에 한국을 떠나 미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 사회는 군부 독재 체제였습니다. 저는 그것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갔다 오기도 하면서 한국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뉴욕에 가서 살았는데, 하루는 조지워싱턴 브리지에서 맨해튼 시내를 바라봤습니다. 빌딩들이 대나무 숲처럼 솟아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살면서 최대로 성공한다고 해봐야 저 수많은 빌딩 중에 하나 갖는 게 전부일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그것을 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든 싫든 내 나라에 돌아가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부탄의 젊은이들이 부탄에 남아서 부탄의 변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탁상 사원 앞에 공원 하나만 예쁘게 만들어 놓아도 스스로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우리가 젬강을 개발해서 콤샤르 치옥 하나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어 놓는다면 얼마나 뿌듯한 일이에요. 그런데 외국에 나가 살면 이런 일을 하기 힘듭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친척이나 친구가 있지도 않은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뭘 잘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한국에 가서 잘 산다고 해도 한국에서 누가 알아주나요? 콤샤르 출신이라면 콤샤르에 와야 알아주지요.
한국에서는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이라고 합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는 말이에요. 옛날 한국에서는 잘 사는 사람들이 비단옷을 입었거든요. 그래서 비단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또 ‘아무리 비단옷을 입어도 밤에 입고 다니면 누가 알아주겠나’ 이런 말도 있어요. 그것처럼 외국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 수 있어도 정신적인 뿌듯함은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이시 님과 께상 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 호주에 가셔서 부탄 청년들과 대화를 해주셔야겠어요.”
“부탄 청년들에게 ‘나와 함께 부탄으로 돌아가자’ 이 말을 하라는 건가요?” (웃음)
“스님께서 부탄에 오실 때마다 부탄의 대학생, 청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고 싶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트롱사로 이동하여 주지사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오후에는 팀푸로 이동하여 부탄 중앙정부의 내각장관님을 만나 이번 답사 내용을 공유하고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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