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2.7 인도성지순례 10일째, 쉬라바스티(Sravasti) 기원정사
“금강경에 나오는 것처럼 1250명이 탁발을 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이 가장 오랜 기간 머무신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에서 하루 종일 순례를 했습니다.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친 후 천축선원을 출발해 천불화현탑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탑 아래까지 조용히 걸어온 순례단에게 천불화현탑이 생긴 연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설명이 끝나고 스님을 따라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 위로 향했습니다. 천불화현탑을 한 바퀴 돌고 곧바로 동원정사로 향했습니다.




동원정사는 사위성의 동문 밖에 있습니다. 논두렁을 따라 걷다가 시골 마을을 지나자 동네 아이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동원정사에 도착한 후 스님이 이 절을 지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은 동원정사(東園精舍)입니다. 이곳 말로는 뿌르바람(Purvaram)인데, ‘뿌르’라는 말은 동쪽이라는 뜻이고, ‘아라마’(arama)라는 말은 정사라는 뜻입니다. 즉, ‘제타바나’가 ‘제타의 숲’인 것처럼 ‘뿌르바람’은 ‘동쪽에 있는 정사’라는 뜻이죠. 우리말로는 동원정사라고 번역합니다.

이 동원정사는 베사카(Vesakha) 부인이 지은 절입니다. 베사카 부인의 할아버지가 아주 부자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재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사카 부인의 할아버지도 원래는 마가다국의 사람이 아닌데 국가가 통합되면서 마가다국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죽림정사에 계셨으니까 베사카 부인의 집안도 일찍부터 불법(佛法)에 귀의했습니다. 그리고 손녀인 베사카를 코살라국의 한 사업가와 결혼시켰습니다.

동원정사가 지어진 배경

베사카 부인의 집안이 원래 큰 부자이니까 비구들에게 공양을 많이 올렸어요. 경전 기록에는 어느 날 베사카 부인이 부처님 법문을 들으러 기원정사에 갔다가 깜빡하고 갖가지 보석과 화려한 장식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아주 비싼 외투를 두고 왔어요. 하인을 시켜서 옷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만약 아난 존자가 외투를 챙겨뒀으면 외투를 보시하고 오고, 챙겨놓지 않았으면 그냥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하인이 법문한 장소로 다시 가보니까 아난 존자가 부인의 외투를 챙겨놓았습니다. 그래서 하인은 외투를 보시하겠다고 했는데, 아난 존자가 그 외투는 보시를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보시물을 주는 대로 다 받지만 당시에는 수행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보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베사카 부인의 입장에서는 자기는 보시를 했고, 아난존자는 보시를 받지 않겠다고 하니까 방법은 그 물건을 팔아서 수행에 필요한 물건으로 보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사카 부인이 외투를 팔기 위해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 외투가 너무 비싸니까 이 도시에서 그걸 살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베사카 부인 본인이 자기 돈을 주고 다시 그 외투를 사게 되었고, 그 돈으로 이 동원정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대중이 박수로 환호를 하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좀 본받으세요.” (웃음)

이어서 스님은 베사카 부인과 부처님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기원정사도 성문에 아주 가까이 있지만 그래도 성문에서 6~700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데, 동원정사는 동쪽 성문을 열고 나오면 약 200미터도 되지 않은 곳에 바로 있습니다. 아마도 베사카 부인이 부자니까 성문에 더 가까이 터를 얻지 않았을까 싶어요.

동원정사는 처음에는 비구들의 절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비구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여성들이 출가할 수 있게 되면서 대부분 비구니들의 절이 된 것 같아요.

출가수행자 중에는 제1제자가 사리푸트라(Sariputra, 사리불 舍利佛), 제2제자가 목갈라나(Moggallana, 목건련 目犍連), 제3제자가 마하가섭이라면, 재가수행자 중에는 제1수행자가 수닷타 장자, 제2수행자가 베사카 부인, 제3수행자가 의사 지바카로 꼽힙니다. 이 세 분은 거의 아라한과를 증득할 정도로 도가 높았고, 교단을 사회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외호를 많이 하셨습니다. 승단에 대해 사회적인 비판이 있을 때 그걸 막아내는 데도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 특히 베사카 부인이 잘 알려져 있죠.

손자가 죽어서 너무 슬픕니다, 어떡하죠?

부처님의 제자로서 베사카 부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베사카 부인이 나이가 들어서 생긴 일화입니다. 베사카 부인에게는 아들과 딸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손자, 손녀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손자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어요. 할머니였던 베사카 부인은 아주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베사카 부인은 우산도 쓰지 않고 눈물과 빗물이 범벅이 돼서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 어쩐 일이오?’
‘저는 너무 슬픕니다.’
‘왜 그러시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손자가 죽어서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대화법이 늘 중간에 화제를 바꿉니다. 상대방의 질문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요지 파악만 되면 질문에 바로 답은 안 하시고, 화제를 바꾸어 다른 문답으로 이어집니다.

‘부인이 생각할 때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게 좋소, 두 명 있는 게 좋소?’
‘그야 한 명보다는 두 명 있는 게 더 좋죠.’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두 명 있는 게 좋소, 세 명 있는 게 좋소?’
‘세 명 있는 게 좋죠.’

경전을 보면 이렇게 세 명, 네 명, 다섯 명, 계속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열 명이 넘어서면 화제가 조금 바뀝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수가 이곳 쉬라바스티 시민의 수만큼 많은 건 어떻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쉬라바스티에서는 하루에 몇 명 정도가 죽을 것 같소?’
‘하루에 아마도 10명은 죽겠지요. 아니, 적어도 다섯 명은 죽지 않을까요? 아니, 아무리 적다고 해도 하루에 한 명은 죽을 겁니다.’

쉬라바스티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베사카 부인이 그렇게 대답을 한 거예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날이 슬퍼서 울겠구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 정작 그렇게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중 누가 죽어도 하루에 한 사람은 죽을 거잖아요. 부처님은 베사카 부인이 처음에 한 말에 대해 모순을 지적한 겁니다. 베사카 부인은 사랑하는 손자가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고 말했는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슬픈 것이라면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가장 슬픈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모순이 생기는 거죠.

베사카 부인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그 모순을 깨달았습니다. 눈물이 아직 흐르고 있지만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어떤 신비한 것이 아니에요. 마음 작용의 모순을 자각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어서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해 보았습니다.

동원정사 바깥에는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매년 스님이 사탕을 주는 것을 알아서 온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줄을 서게 한 후 사탕을 한 움큼씩 나눠주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공양을 올린 거예요.”


그리고 걸어서 사위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화려하던 사위성이 풀이 무성한 정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느끼며 순례단은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성 중심에 이르니 멀리 큰 탑 두 개가 한눈에 보였습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에는 3그룹이 먼저 도착해 경전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먼저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돌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기념탑입니다. 여기에도 기념탑이 하나가 있고, 저 맞은편에 또 기념탑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기념탑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해서 세운 탑이라고 알려져 있고, 건너편에 있는 탑은 수닷타장자를 기념해서 세운 기념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 뒤편이 왕궁입니다. 궁궐 바로 옆에 이렇게 큰 탑이 있는데, 궁궐이 바로 옆에 있다는 건 이곳이 성 전체로 보면 중심부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 중심부에 큰 기념탑 두 개를 세웠다는 건 그만큼 두 분이 후대에게 남겨준 교훈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반대의 인생을 보여주는 두 개의 기념탑

특히 앙굴리말라는 악인인데 불법(佛法)을 만나서 완전히 성인(聖人)이 되었고, 수닷타장자는 원래도 선인이었지만 불법(佛法)을 만나서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불법을 만나서 성인이 되었지만, 불법을 만나기 이전을 기준으로 보면 앙굴리말라와 수닷타장자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수닷타장자는 불쌍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었고, 앙굴리말라는 사람을 해친 사람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은 주로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부모가 없는 자식, 자식이 없는 늙은 부모, 독거노인 그리고 아내가 없는 남편이나 남편이 없는 아내입니다. 이렇게 고아, 독거노인, 홀아비, 과부를 한자로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고 합니다.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죠. 수닷타장자는 큰 사업가였는데, 늘 이렇게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수닷타장자의 별명이 아난드핀디카(Anathapindika)였습니다. 이는 ‘외로운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아난드핀디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급고독(給孤獨)입니다. 그래서 수닷타장자를 ‘급고독장자’라고도 부릅니다. 원래 이름은 ‘수닷타(Sudatta)’입니다.

불법을 만나기 전 앙굴리말라는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당대 최고의 흉악범이었고, 수닷타장자는 최고의 자선행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불법을 만나기 전 세상에서는 이 두 사람의 인생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러나 불법을 만난 다음에는 두 사람 모두 성인의 반열에 이르게 되는데, 앙굴리말라는 출가 후 아라한과를 증득했고, 수닷타장자는 재가수행자로 있으면서 불법을 외호 했습니다.

수닷타장자의 삶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은 반면 앙굴리말라의 삶은 급반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두 분의 기념탑이 이곳 사위성 한가운데에 서로 마주 보게끔 세워져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했는지 당시의 모습을 영화 보듯이 실감 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경전독송을 한 후 수닷타장자의 탑은 조별로 자유롭게 참배하고 기원정사로 출발했습니다.

기원정사로 출발하는 데 실무자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원래 기원정사에 모두 모여 예불을 하고 법문을 들은 후 탁발을 하고 다시 기원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원정사에 허락을 다 받았는데 오늘 나갔다 들어오면 1250명이 다시 표를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계획을 변경하여 탁발을 하고 기원정사로 입장해 법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일찍 기원정사에 입장할 계획이 변경되어 스님은 사위성 안을 둘러보는 먼 길을 택해 걸어갔습니다.

“사위성 안에 있던 호수예요. 덕분에 좋은 구경 하네요.”

오늘 탁발에 필요한 음식은 천축선원에서 준비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오후 4시로 예정되었던 공양이 1시로 당겨져 천축선원에서도 무척 바빠졌습니다. 공양이 준비되는 대로 탁발을 하기로 하고 스님은 실무자들과 공양물을 배식할 곳과 탁발하는 동선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기원정사 입구에 도착하니 순례단 일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스님은 계획이 변경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입구나 저기 안이나 같은 기원정사에요.(웃음) 예불을 하고 공양을 해야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렇게 된 마당에 공양 먼저 합시다. 좋지요?”

“네!”(모두 웃음)

곧 천축선원에서 공양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탁발을 하기에 앞서 사위성 기원정사에서 설해진 경전인 금강경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을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가지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서 차례로 밥을 빌었다. 그리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사이 B팀도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스님이 송수신기로 대중에게 공지를 했습니다.

“B팀이 곧 도착한다고 하니까 지금부터 탁발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처럼 기원정사에서 사위성까지 1250명의 대중이 탁발을 나가보겠습니다. 천천히 자기 동작에 깨어있어 보세요. 염불 대신 묵언을 합니다. 눈은 한 발이나 두 발 앞을 응시하고 왼발이 나갈 때는 왼발이 나가는 줄 알고, 오른발이 나갈 때는 오른발이 나가는 줄 알아차려 보세요. 탁발을 한 후에는 환지본처,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옵니다.”

기원정사를 출발하여 사위성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걸었을 바로 그 길입니다. 사위성의 서문을 지날 무렵 1250명이 만든 노란 가사 물결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스태프가 나눠주는 한 끼의 식사를 발우에 담는 방식으로 탁발을 했습니다. 스님이 먼저 탁발을 하고, 이어서 1250명이 차례대로 탁발을 마쳤습니다.



탁발을 한 후 다시 처음 출발한 장소인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가는 행렬과 오는 행렬이 좌우에 양립하며 길고 긴 줄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기원정사 안으로 들어와서 부처님이 머문 처소인 ‘간다 쿠티’를 한 바퀴 돌아 맞은편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대중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소심경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소심경은 부처님의 삶을 돌아보고 나를 돌아보며 수행에 필요한 만큼 적절히 공양을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소심경이 끝나고 순례자들은 말없이 탁발해 온 음식을 먹고 물로 깨끗이 닦아 먹었습니다.

공양이 끝난 후 잠시 휴식한 스님은 먼저 기원정사, 즉 기수급고독원이 생긴 연유부터 시작하여 기원정사를 창건한 수닷타 장자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실감 나는 옛이야기에 벽돌 더미의 유적지 위에 부처님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습니다.

“이곳이 금강경에 나오는 기원정사(祇園精舍)입니다. 경전에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죠. 기수는 ‘기타(祈陀) 태자의 숲’이라는 뜻이고, 기수급고독원은 ‘기타 태자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지은 절’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어로는 사찰 이름이 제타바나(Jetavana)입니다. 제타(Jeta)는 기타 태자의 인도어식 이름이고, 바나(vana)는 인도어로 숲이라는 뜻입니다. 즉, 제타바나(Jetavana)는 ‘기타 태자의 숲’이라는 뜻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에서 45안거 중에 19안거를 보내며 수많은 사람들은 교화했습니다. 스님은 그중 대표적인 교화 사례들을 주욱 들려주었습니다.

“사위성(舍衛城)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쉬라바스티(Sravasti)는 당시 일종의 신흥 도시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잘 사는 동네라기보다는 갑자기 부를 쌓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도시였는데, 그러다 보니 사술도 흥행하는 곳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신흥 부자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기도 했는데, 정법(正法)을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등장과 함께 사술이 설 자리를 잃고 그들의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명성에 흠을 내려는 음모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부처님이 이끄는 승단을 의식하며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어떻게든 부처님을 흠집내기 위해 여러 가지 술수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은 어떤 여자를 시켜서 배를 불룩하게 보이게 해서 부처님 법문하는 자리에 와서 부처님을 향해 다른 사람한테 유창한 법문만 하지 말고 아기를 낳을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랑 놀기만 하고 책임은 안 지냐는 식으로 모함을 한 거죠. 그리고 수닷타 장자나 프라세나짓왕에게 부처님이 직접 부탁하면 해산할 자리를 얼마든지 마련해주지 않겠냐며 모함을 이어갔는데, 바람이 불면서 뱃속에 넣었던 박이 떨어지는 바람에 사람들한테 끌려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뿐만 아니라 어느 이교도는 신자의 아름다운 딸을 시켜서 밤에는 주로 정사 쪽으로 가도록 하고, 아침에는 정사에서 나오도록 하다가 어느 날 그 여성이 실종되는 사건을 만듭니다. 사람이 실종되었으니까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조사하다가 누가 제타바나를 주로 오갔다고 말하고, 그러다가 근처에서 시신이 발견되니까 제타바나의 누군가가 여자를 성폭행하고 죽였다 이렇게 소문을 냈습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이걸 사실이라고 믿고, 출가수행자들이 밥을 얻어먹으러 가도 아무것도 못 얻고 오히려 욕만 얻어먹고 왔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부처님께 하소연을 하니까 부처님은 일주일만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다리는 동안 살해를 청부받은 사람이 어디서 술을 먹고 술김에 돈을 받은 걸 자랑하다가 붙잡히게 되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오히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기다린 부처님의 명성만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장소

부처님은 성도 후 45년째 되던 해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러니 안거를 총 마흔다섯 번을 하셨어요. 그중 사위성에서 24번의 안거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절반이 넘는 안거를 이곳에서 보내신 거예요. 또, 사위성에서 보낸 24번의 안거 중 19번을 기원정사에서 머무셨으니 기원정사가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신 장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보면 ‘여시아문 일시불재 사위국 기수급고독원 (如是我聞 一時佛在 舍衛國 祇樹給孤獨園)’ 이렇게 시작하는 글귀가 많은데, 경전의 40% 가까이 될 만큼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이 기원정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도, 앙굴리말라와 관련된 이야기도 이곳 사위성과 관련된 일화입니다. 이처럼 기원정사에서 살펴볼 경전이 아주 많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실제 경전 속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함경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 사위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니 오늘 독송한 내용 말고도 어마어마한 사례들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 앞에 있는 유적은 ‘간다꾸띠’입니다. '꾸띠(kuti)'라는 말은 풀과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초막이나 토굴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처소를 ‘간다꾸띠’라고 불렀는데, 바로 부처님이 계셨던 자리입니다. 후대에 기념으로 짓다 보니 이렇게 크게 지었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초막을 치고 사셨습니다.

평소 금강경을 독송할 때 ‘천이백오십인 비구’, ‘사위대성’, ‘기원정사’라는 글귀를 자주 접했는데, 오늘 우리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방금 성문으로 들어가 본 곳이 사위성이고, 이곳이 기원정사입니다. 지금까지 설명도 듣고, 탁발도 해봤으니, 이곳을 배경으로 한 경전의 일부를 읽고 당시의 일을 생각하며 조용히 명상을 하겠습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부처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1250명의 대중이 고요히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이 머무셨던 곳을 향해 엎드려 예불을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셨던 이 거룩한 곳에서 우리도 정성을 기울여 부처님을 찬탄하는 예불을 올리겠습니다.

순례단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셨던 그 자리였습니다. 어느 때보다 목소리가 우렁찼습니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예불을 마치고 스님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발원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늘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저희들이 늘 독송하는 사위성 기수급고독원 1,250 대비구라고 하는 그 문구처럼 쉬라바스티 제타바나에 1,250명의 수행자가 모여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했습니다.

저희들은 멀리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기 위해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여행자 숙소에서 자고, 직접 밥을 해서 먹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참으로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버스도 불편하고, 길도 멀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바쁘기도 했지만, 저희들은 이러한 불편이 다만 불편할 뿐이지 불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수행정진을 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오늘 여기까지 와서 무사히 법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수행적 관점에서 우리를 돌아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생활하는 것도 불편한데, 과거의 선지식과 수행자들은 이곳 숲 속에서 나무 밑에서 잠자며, 길거리에서 음식을 얻어 드시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안개 낀 추운 날 이곳에 머물렀으며, 가족도 없고, 친척도 떠나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자유롭고 행복했으며 어디에도 비굴하게 굴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과거의 선지식 수행자님들을 생각하며 저희들이 생활한 것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직 수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교도가 많고 불자가 한 명도 없는 이곳 쉬라바스티에 혼자 오셔서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질 수 있도록 하신 부처님의 큰 원력을 본받고자 이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해 봅니다.

저희들이 사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 법을 알지 못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좋은 법을 전하겠습니다. 그들 또한 저희처럼 이 법을 만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해지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함께 보호할 수 있는, 이 좋은 법을 받아 지닐 수 있게 저희들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발원한 이 공덕을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회향하오니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길 발원합니다. 이와 같이 발원한 인연 공덕을 저희들이 사는 한반도에 회항하오니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발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 동포들이 하루속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합니다.”

1250명의 순례단도 합장하고 함께 발원을 했습니다.

스님은 사홍서원으로 기원정사 법회를 마치고 곧바로 천축선원으로 향했습니다. 대중은 기원정사에 남아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난존자가 물을 떠서 부처님께 드렸다는 우물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했던 자리,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기 위해 심은 보리수, 부처님께서 손님을 맞이했던 곳, 여러 개의 승방 등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기원정사에서 정진하고 있는 스님들에게 보시를 하고 기원정사를 나왔습니다.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님은 인도인 스님이 운영하는 절을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불교 인구가 거의 없는 인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 절에 매년 보시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고 나서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기원정사 순례를 마치고 온 1250명의 대중이 모두 천축선원 앞마당에 자리하자 6시부터 저녁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천축선원을 운영하고 있는 대인 스님을 소개했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있는 곳은 사위성 기원정사 앞에 있는 한국절 천축선원입니다. 앞에 계신 분이 이 절의 주지인 대인 스님이십니다. 스님께서 원을 세우고 큰 불사를 하신 덕분에 정토회 회원들이 이곳에 올 때마다 편안하게 이틀씩 머물고 갑니다. 오늘 탁발 공양도 준비해 주셨고, 저녁 공양도 따뜻한 국으로 준비해 주셨어요. 감사드립니다. (모두 박수)

대인 스님께서는 주로 선방에서 수행을 하셨고, 주로 금강경을 많이 공부하셨습니다. 이곳에 처음 법당을 세우셨을 때 제가 와서 보니까 금강경만 딱 모시고 공부를 하고 계셨어요. 그럴 정도로 상을 내지 않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수행정진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모두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 주십시오.”

대중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소개를 받고 앞에 나온 대인 스님도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이곳 쉬라바스티에 전법을 하러 온 지 올해로 24년째입니다. 또한 지난 24년의 시간은 정토행자님들과 인연을 맺고 온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맨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허허벌판에 아무런 건물도 없었는데, 법륜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이 항상 이곳을 방문하셔서 가르침을 주시고 격려와 응원을 해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도량이 정토행자님들의 도량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경의 정신이 현실이 되어서 나와 남의 분별이 사라지고 존재의 이치를 깨달아서 모든 생명들을 잘 시봉 하는 그런 정토행자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도량을 통해 눈 밝은 수행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저는 스마트폰도 잘 볼 줄 모릅니다. 그런데 지인 한 분이 ‘스님의 하루’를 구독할 수 있는 앱을 깔아주어서 여러분들이 순례하는 여정에 대해 매일 아침마다 알림을 받아보고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순례 행렬을 보면서 제 마음도 흐뭇하고 기뻤습니다.”

대인 스님은 인사말을 한 후 국을 끓이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무대 앞으로 나왔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8명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궁금한 점을 해소하고 기쁜 마음으로 쉬라바스티의 한국절 천축선원의 발전을 위해 보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곧이어 천축선원에서 준비해 준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도시락을 싸서 먹느라 뜨거운 국물을 먹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뜨거운 뭇국을 한 그릇씩 먹고, 깍두기 김치도 함께 먹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밥을 퍼주는 배식을 담당했습니다. 질서 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각자 숙소로 돌아가 전기밥솥으로 내일 먹을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싼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스님은 법사단, 해외참가자, 실무자들과 차례로 미팅을 했습니다. 밤 12시가 되어 모든 일정이 끝이 났습니다.

오늘은 쉬라바스티에서 어느 성지보다도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새 내일 가려고 하는 상카시아가 10대 성지 순례의 마지막 순례 장소입니다.

내일은 새벽 4시에 기상하여 4시 30분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전체댓글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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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감사합니다

2024-01-17 02:33:11

정명화

마음 작용의 모순을 자각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라는 말씀 명심합니다.
그곳으로 다시간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3-02 15:44:58

박경자

감사합니다

2023-02-27 1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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