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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젯밤에 두북 수련원에서 경전대학 강의를 한 후 오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아침 7시에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조찬 모임을 했습니다. 조찬 모임을 마친 후 곧바로 국회로 향했습니다.
국회 안에 불교를 종교로 갖고 있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정각회에서 스님에게 법문을 요청했습니다. 스님이 국회 본청에 도착하자 국민의힘 원내 대표이면서 현재 국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주호영 의원이 스님을 마중했습니다.
“스님,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무소속일 때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때 스님께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살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별말씀을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국회에서 여야가 예산안 합의를 해야 하는데 의견을 좁히기가 정말 어렵네요. 방금 전에도 예산 협상을 하다가 왔습니다.”
“중간에 끼어서 많이 힘드시겠어요.”
여러 가지 국정 현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법회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국회 본청 안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법당인 정각선원에서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주호영 의원 외에도 이원욱 의원, 이명수 의원, 송언석 의원, 조명희 의원, 권인숙 의원, 민병덕 의원 등 여러 국회의원들과 국회 임직원들이 좁은 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을 한 후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에게 요청한 법문 주제는 ‘윤회와 해탈’입니다. 스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윤회와 해탈’이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며 하나씩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법문의 주제는 ‘윤회와 해탈’입니다. 이 주제는 설명하기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윤회와 해탈이라는 용어는 종교적으로 쓰일 때와 진리로 쓰일 때의 의미가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믿음이 중심입니다. 진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탐구해서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해요. 오늘은 종교와 진리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윤회와 해탈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실은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그중 제일 먼저 나온 발상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추구하는 흐름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발상은 ‘죽기는 죽지만, 죽어서 좋은 데 간다’라는 것이었어요. 죽어서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 간다니까 두려움이 많이 줄어들죠. 헤어짐은 아쉽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간다면 떠나는 사람도 덜 아쉽고, 보내는 사람도 덜 아쉽잖아요. 그래서 죽은 뒤에 저 세상, 좋은 세상에 간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천당이나 지옥 같은 개념이 나온 겁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믿는 사람은 덜 불안하겠죠. 이러한 내생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발상은 인도 사람들이 냈습니다. 죽어서 아무리 좋은 데 간다고 해도, 다시는 못 만나잖아요.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라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지금 헤어져도 환생해서 금방 다시 만난다는 얘기죠. 좋은 데 가기는 해도 먼 데 가버리는 것보다 이게 더 좋은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누가 죽었을 때 많이 울지 않아요. 그리고 장례를 일찍 치릅니다. 죽은 시신을 오래 두면 다시 태어나는 데 지장이 있잖아요.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이번 생에서 사용한 육신은 불에 태워버려야 해요. 그래야 집착이 끊어지니까요. 그래서 장례도 오늘 죽으면 바로 그 당일에 치릅니다. 바로 가서 태워 버리기 때문에 인도 장례 문화에는 관 같은 게 따로 없어요.
인도 역사에서 윤회라는 개념은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후 드라비다족을 침입해서 현재는 인도의 주류가 된 아리안족도 윤회 사상을 받아들여서 인도의 전통 사상이자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불교도 인도에서 시작했으니까 윤회 사상을 받아들인 거예요. 사람들은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안 믿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회가 마치 불교의 독특한 사상인 줄 알지만, 인도에 가보면 윤회 사상은 인도의 전통 종교인 힌두교 사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윤회가 불교의 정체성은 아닙니다. 윤회에 대한 믿음은 부처님에게서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진 전통 신앙입니다.
그럼 부처님도 이러한 윤회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셨어요. 두려움이 왜 생길까요? 죽음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우리는 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두려움을 느낄까요? 왜 낯선 곳에 가면 두려움을 느낄까요? 왜 사람은 죽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부처님은 이런 두려움을 탐구하고 나아가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하고 탐구했습니다. 결국 무지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 무지(無智) 또는 무명(無明)이 타파돼 버리면 두려울 일이 없어져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무명은 타파되었다.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 하노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 버리니까 죽은 뒤 어떻게 되느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거예요.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목표는 무명을 타파해서 해탈하는 거예요. 종교로서 불교는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진리에 대한 원리는 약간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두려움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에 대한 답을 찾으면 내생, 전생 ,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예 두려움의 존재 자체가 없어져 버리면 그런 걸 얘기할 필요가 없어져요. 윤회하지 않는다든지 천국이 없다든지 내생이 없다든지 이렇게 단정 짓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일으킨 뿌리가 아예 사라져 버린 거예요. 이것이 탐구를 통해서 진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두고 서로 우열이나 진위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어요. 이건 헌법에 보장된 우리의 권리인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도 ‘윤회’라는 용어를 썼지만,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윤회라는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용어는 같지만 개념이 좀 달라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란 무슨 뜻일까요? 내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은 것을 행(幸)이라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질 때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불행(不幸)이 생겨요. 원하는 바가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다면 그것이 안 이루질 때 기분 나쁨이 필연적으로 생기니까 우리의 삶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을 때 불행이 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기뻤다면 그 사람과 헤어질 때는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두 가지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즐거움을 추구하니까 고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돼요. 그러니 고만 괴로움인 것이 아니라 락의 본질도 괴로움입니다. 이걸 꿰뚫어 알아야 사성제(四聖諦)의 첫째 내용인 ‘일체는 고다’라는 진리를 증득(證得)할 수 있습니다. 고락 중에서 고를 아는 게 아니라 락이 곧 고임을 알아야 ‘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게 고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도 그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죠. 이처럼 고와 락이 반복되는 윤회의 뿌리는 바로 욕망입니다. 욕망에 끌려가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욕망을 욕망으로 다만 알아차린다면 그게 바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도 락도 발생하지 않아요. 고요 적정합니다. 이것이 열반이고 해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이 좀 더 수행하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비중을 두고 넓혀 나가자는 뜻이에요. 담마, 즉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통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고뇌 없이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수행을 안 하니까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고, 자기가 낳아서 기른 자식을 원망하고, 자기와 같이 사는 아내나 남편을 원망합니다. 이건 좀 모순 아닐까요? 길 가는 사람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면서 날 낳아준 부모는 원망하고,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선택한 게 아내와 남편인데 정작 그 사람은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길 가는 사람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는 왜 이런 모순을 일으킬까요? 바로 욕망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좋은 것인 줄 알고, 그게 안 되면 원망합니다.
부모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만큼은 안 해주는 거예요. 자식이 문제가 있는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도의 자식이 안 돼 주는 거예요. 아내나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도의 사람이 안 돼 주는 거예요. 여기에서 미움과 원망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왜 길 가는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에게는 내가 원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서로 상처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어리석어요.
여러분이 담마를 터득하고 불법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면 우선 내가 행복하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발견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면 우리는 종교를 한 차원 넘어서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세계에 불법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겁니다.
국회에 계시는 여러분이 이런 좋은 법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수행정진에 더욱 매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큰 박수와 함께 법회를 마쳤습니다. 진리로서의 불교만 주장하거나 종교로서의 믿음만을 강조해서 진리를 배척하거나 하지 않고 두 가지 모두 포용하는 관점을 일러주어서 모두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스님, 강연료를 준비했습니다. 받아 주세요.”
“아니에요. 저는 강연료를 일절 받지 않습니다.”
스님은 참석한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법당을 나왔습니다. 참석한 국회의원분들과 점심 식사를 한 후 국회를 나왔습니다.
다시 평화재단으로 돌아와서 2시 30분부터 손님들과 미팅을 이어나갔습니다. 연달아 미팅을 하고 손님들을 배웅한 후 4시부터는 인도 성지순례 실무 준비팀과 회의를 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에서는 1250명이 참가하는 인도 성지순례 준비 사항 중에 여러 가지 쟁점들을 준비하여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회의를 하다가 점검할 내용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수행법회 후에 다시 회의를 이어나가기로 하고 스님은 수행법회를 하기 위해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회향 기간 동안 정토회 운영 방안에 대해 상임 천일준비위원장의 안내를 듣고, 정토회 대표 김은숙 님과 대표를 대행하게 된 무변심 법사님의 인사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만일결사 회향식 소식을 전하면서 회원들에게 행사에 참가한 소감이 어떠했는지 질문했습니다.
“지난 12월 4일 일요일에 정토회는 제10차 천일결사를 회향했고 동시에 1차 만일결사를 회향했습니다. 회향식에 참석하신 분들은 지난 1만 일 동안 정토회가 어떻게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의 소감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즉석에서 여러 명이 손을 들고 ‘수행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며 소감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어서 지난 회향식에서 환경상을 수상한 안산다문화센터의 활동 영상을 보고 공동체가 김장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고 나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공양게송할 때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이들의 공덕을 생각하며’라고 하잖아요. 영상을 보니 그 정성이 느껴지죠? 김치를 담그거나 농사를 지어 보면 밥 한 톨, 김치 한 조각, 고춧가루 한 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길이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세 명과 현장에서 손을 들고 한 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상사에게 호의를 베풀었더니 당연한 줄 안다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가 호구 취급을 받고 있는데 거절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업무 분장이 다른데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일을 넘기고는 결과물을 요구합니다. 불편한 관계도 싫고, 일을 배워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서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2년 가까이 그렇게 하다 보니 습관이 들었나 봐요. 이제는 저도 업무가 과다하여 바쁜 걸 알면서도 자기가 더 바쁘다 하면서 자기 일을 제 일인 양 떠넘기고 지시를 합니다.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게 일을 시켜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 일을 해주느라 정작 제가 맡은 업무의 정확성은 떨어질 정도여서 자책하는 마음이 큽니다. 상사의 수법은 일을 시키기 며칠 전부터 저의 동태와 상황을 파악해 두었다가 제가 거절하지 못하게끔 타이밍을 봐서 시킵니다. 제가 꼼짝 못 하고 속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얍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휴가며 개인 일정도 다 누리고 사용합니다. 한 달에 휴가도 두세 번 사용할 정도입니다. (웃음) 어떻게 해야 저를 지키고 적당한 거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네요. 이상입니다.”(웃음)
“네, 맞습니다.”
“아무렇게나 일을 맡기지 않고 사전 조사를 다 해서 상대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방책을 세워놓고 일을 주는 사람은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죠. 그게 뭐가 나빠요? 그런 사람을 세상에서는 ‘현명하다’, ‘요령이 있다’라고 합니다. 질문자만 그걸 나쁘게 보지, 아무도 나쁘게 안 봐요.
본인이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일을 해줘 놓고 이제 와서 불평을 하는 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 불평을 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건 누구 잘못이라기보다는 질문자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해서 생긴 문제예요. 처음에 해줄 때는 상대도 감사해하고 좋은 소리를 하지만 그게 한 번 지나고 두 번 지나면 감사한 줄 모르거든요. 어떤 사람이 나한테 처음 백만 원을 주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만, 그렇게 매달 백만 원을 주는 게 1년이 되고 10년이 되면 상대의 고마움을 모르게 돼요. 그게 일상이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부부지간이며 부모 자식 간에 고맙다는 소리를 잘 안 하는 거예요. 그런 사이에서는 상대에게 받는 게 그냥 일상이니까요. 질문자가 상사의 업무를 처리해 주는 게 그 상사의 입장에서는 그냥 일상이 돼 버린 거예요. 당연한 게 되어버렸으니 매번 고맙다고 말할 수가 없죠.
이런 인간 심리의 특성이 없으면 자식이 왜 부모를 원망하겠어요? 부모는 자식을 늘 돌봐줬는데도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만큼 안 해준다고요. 그런 것처럼, 상사가 질문자를 원망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 왜 좀 더 안 해주느냐고 원망 안 하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관계를 끊으려면 당연히 저항을 좀 받겠죠. 담배를 피우다 끊으려면 저항을 받듯이, 관계를 끊으려면 저항을 감수해야 합니다. 비난을 받든, 불이익을 겪든,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둘 다 각자의 길로 다시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의 관계가 이미 습관화되어 있기에 바꾸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그런 불이익이나 저항을 받기 싫기 때문에 이걸 유지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본인의 문제예요. 남이 담배 피우는 게 좋아 보여서 나도 따라 피웠는데 이제는 몸이 안 좋아서 끊어야지 하면서도 못 끊겠다면 그건 본인의 문제잖아요. 처음에 담배를 배울 때 피우라고 권했던 사람이 문제인 게 아니에요. 좋아 보여서 본인이 결정해서 시작해 놓고, 나중에 건강이 나빠지니까 상대를 원망하는 거예요. 질문자도 이런 경우와 똑같습니다.
질문자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첫째, 나쁜 소리 안 듣고, 불이익도 안 겪으려면 조금 힘들어도 그냥 일을 해주는 겁니다. 둘째, ‘관계를 단절하는 게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상사에게 ‘저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딱 거절을 해야 해요. 관계를 끊으면 불이익이 좀 따르게 마련입니다. 비난도 따르고요. 그걸 감수해야 해요. 그걸 두고 상대를 욕할 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불이익을 몇 개월쯤 겪으면서 감수하면 상대도 이제 거기에 맞게끔 인생살이를 정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불이익이나 비난을 받기 싫으면 그냥 현재 굳어진 관계대로 계속 살고, 그 관계를 끊고 싶다면 불이익을 감수하세요. 그건 자기 선택이에요.”
“저는 저를 지키고 싶기에 불이익을 당하고 비난을 받더라도 후자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돼요.”
“그런데 용기가 부족합니다.” (웃음)
“아이고, 거기에 무슨 용기가 필요해요? (웃음) 손해를 보겠다는데 왜 용기가 필요하겠어요? 그냥 내일부터 딱 거절을 하면 됩니다. 비난이 두려우니까 용기라는 게 필요하지, 비난을 받겠다는데 용기가 왜 필요해요? ‘마음대로 비난하십시오’ 이런 마음에는 용기가 필요 없어요. ‘죄송합니다. 욕 좀 하세요. 그래도 저는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왕따를 시키면 왕따를 당하면 되고, 욕 좀 하면 욕 좀 들으면 되고, 어떤 반응이 돌아오든 그냥 받으면 돼요. 이렇게 해야 이 관계를 끊을 수 있어요. 사소한 생활 습관을 바꾸려고 해도 저항이 셉니다. 하물며 2년 동안 굳어진 관계를 바꾸려면 어떻게 저항이 없겠어요?”
“...제가 욕 얻어먹는 것을 좀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욕 얻어먹기 싫으면 그냥 일을 해주면 됩니다. 욕 얻어먹기 싫으면 몸이 조금 피곤하면 되고, 몸이 피곤한 게 싫으면 욕 좀 얻어먹으면 돼요. 그건 상대의 잘못도 아니고 질문자의 잘못도 아니에요. 담배 피우다 끊는 것과 똑같아요.”
“네, 욕 많이 얻어먹고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웃음)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네 명과 대화를 한 후 방송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다시 평화재단 사무실로 가서 인도성지순레 회의를 했습니다.
9시에 시작한 회의는 11시 30분이 되어 끝이 났습니다.
내일은 평화재단에서 하루 종일 회의와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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