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2.6 겨울 준비, 정토경전대학 법화경 1강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일까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에 접어든 것 같네요. 운동장 한 귀퉁이에 서 있는 팽나무는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겨울을 날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국화 화분을 모두 정리하고, 실외에 있던 화분을 모두 실내로 옮겼습니다. 삽으로 땅을 파서 화분의 국화 뿌리를 모두 모아 땅 속에 묻었습니다.

“땅 속은 덜 춥거든요. 내년 봄에 꺼내 보고 살았으면 다시 심고, 죽었으면 어쩔 수 없고요.”

화단에 있는 나무들은 새순이 자라기 전에 모두 가지치기를 해주었습니다. 나무 깊숙이 햇빛이 들어갈 수 있게 전정해주고, 죽은 가지와 늘어진 가지, 불필요한 가지는 모두 잘라 주었습니다.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해 두었던 호스도 정리하고, 수도는 동파가 되지 않도록 부직포로 감싸준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수업 시간까지 반야심경 수업을 마쳤습니다. 경전대학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 금강경, 반야심경 공부를 마치고 어느덧 경전대학 과정도 절반이 지났습니다. 오늘부터는 법화경을 배우고 그다음에 화엄경을 지나서 선불교에 대한 공부를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화경 1강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먼저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불교 학자가 되기 위함도 아니고, 불교 교리를 많이 알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잘못 살아온 과거를 어떻게 정화시키고, 어떻게 현재를 두려움 없이 살 것이며, 미래에는 어떻게 하면 덜 잘못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경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화경과 화엄경이 등장한 배경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열반 후에 200년 정도 지나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서로 견해가 달라서 승가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서로 자기 파가 옳다고 주장하며 수많은 논장(論藏)이 출현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5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논쟁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법화경과 화엄경이 등장한 배경

기존 불교계의 주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을 비주류로 부르지만,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우리야 말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기존의 주류는 세력만 있을 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 하고 비판했습니다. 두 세력은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경쟁 아닌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이때 새로 시작한 불교가 기존의 불교에 대해 비판하면서 대두된 것이 대승 불교의 반야 사상입니다. 대승 불교는 처음에 비주류로 무시를 받았으나 점점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하나의 큰 세력으로 커집니다.

이때 대승 불교는 기존 불교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확산세를 이어가기 어려워서 기존의 불교를 포용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경전이 바로 법화경과 화엄경입니다. 기존 불교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것도 일리가 있고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껴안고 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현재는 선불교가 주류지만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화엄사상과 천태사상이 주류였습니다. 신라는 화엄 10찰을 비롯하여 5교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화엄이 주류를 형성합니다. 고려시대에도 화엄종과 선종이 있었지만 천태종이 주류였습니다. 이런 기반 위에 선종이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도 예전에는 천태사상이나 화엄사상은 제외하고, 단순히 금강경과 반야심경 그리고 선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육조단경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 화엄종과 천태종을 꼽을 수 있으므로, 이번 경전대학에서는 법화경과 화엄경을 조금 다뤄보려고 합니다.”

두 경전은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다 배우지는 못하고, 일부를 발췌해서 공부해 보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법화경이 어떤 경전인지 강의를 이어나갔습니다.

“법화경의 설법 장소는 영축산입니다. 영축산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의 성 밖에 있는 곳입니다. 반야심경도 여기서 설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포함한 보살들 그리고 범천, 인드라천, 사천왕천, 팔부신중 등 수많은 신들도 참가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 뜻이 한량이 없다는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하시고,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여섯 가지로 대지가 진동을 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매우 상서롭게 여기자 다음 생에 부처가 된다고 알려진 미륵보살이 도대체 이게 무슨 징조인지를 지혜가 큰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어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과거의 부처님들도 이런 징조가 나타날 때 법화경을 설하셨으니 아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려고 하는 것 같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법화경의 서품(序品), 도입부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방편품(方便品)입니다.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에서 깨어나자 사리불이 법을 설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문들은 이 법을 설해도 못 알아듣는다’ 하며 세 번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어요. 그러자 거기에 참여했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중에 성문승인 5천여 명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고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못 알아듣는다니 말이 됩니까?’ 하면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나가버립니다.

우리가 아는 붓다의 인격과는 매우 다르죠? 이것은 법화경이 나올 당시에 주류 불교가 깨달았다며 교만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바도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교만하게 잘난 체하는 사람을 ‘증상만인(增上慢人)’이라고 합니다. 5천여 명의 증상만 비구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를 떠난 그들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제 법을 설하겠다’

이것이 법화경을 설한 배경입니다. 부처님이 성도 하시기 전에 다섯 비구가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비난하고 바라나시로 떠날 때도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잡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고행을 그만두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견해에 사로잡힌 다섯 비구와 대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고집하는 소승 불교에 대한 비판을 5천여 명의 비구들이 부처님이 법문을 설하는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묘사를 한 거예요. 법을 설한 배경부터 소승 불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법이 설해지기 시작합니다.

‘보는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보고 들어라, 눈이 없고 귀를 막은 사람은 아무리 설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의 병 중에 ‘안다병’이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절에 오래 다닌 사람, 동국대 불교학과 나온 사람, 스님들 대부분이 ‘나는 다 알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다’ 하고 생각하는 안다병을 갖고 있어요. 이런 병을 갖게 되면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거나 틀렸다고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사람

안다병의 본질은 ‘듣기 싫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다 알기 때문에 안 들어도 된다는 거죠. 안다병에 걸리면 부처님이 와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뜨지 않고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상만인은 붓다의 말씀도 안 듣고 자리를 뜨는 자들로 묘사된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병이 있습니다. 나는 전혀 모른다고 하는 ‘모른다병’ 이에요.

일상에서 예를 들어볼까요? 남편이나 시어머니나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알았다니까요!’ 하고 말하잖아요. ‘알았다니까요!’ 할 때 정말 알고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듣기 싫어서일까요? 듣기 싫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로 듣기 싫을 때 ‘알았다니까요!’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듣기 싫을 때 하는 표현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모른다니까요!’ 이렇게 말하죠.

절에 오래 다닌 사람들, 불교학자, 스님들은 법문을 듣거나 불교 공부를 할 때 대부분 ‘안다병’에 걸려서 수행에 큰 장애를 겪게 됩니다. 반대로 교회에 다니다 왔거나 절에 처음 온 사람들은 ‘모른다병’에 걸리기가 쉬워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면 ‘모른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해’ 이러잖아요. 이런 사람은 ‘모른다병’에 걸린 거예요. ‘안다병’과 ‘모른다병’은 정반대의 표현인데 내용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둘 다 듣기 싫다는 거예요. ‘안다병’과 ‘모른다병’에 걸리면 부처님이 와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나름대로 ‘안다병’과 ‘모른다병’에 다 걸려 있어요.

그것처럼 법화경이 나온 당시에도 기존 불교인들이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탐구하는 자세를 놓아버리고 ‘나는 다 알아’, ‘나는 깨달았어’, ‘나는 경을 수십 번 읽었어’ 하는 ‘안다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외면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는 까닭

이제 그들이 떠나자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는데,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하는 첫 문장이 핵심이듯이 법화경에서도 핵심은 ‘일대사인연’이라는 문장이 핵심이에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한 까닭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4가지입니다.

첫째,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청정하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며, 둘째,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고(示)하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며, 셋째,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悟) 하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며, 넷째,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의 도에 들어오게(入) 하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합니다.

열고, 보이게 하고, 깨닫게 하고, 들어오게 한다고 해서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법에는 부처되는 길만 있다. 성문의 길을 가서 아라한이 되고, 연각의 길을 가서 독각승이 되고, 보살의 길을 가서 보살승이 되는 게 아니다. 이승(二乘), 삼승(三乘)이 없고, 오직 부처되는 길 하나밖에 없다.’

이것을 일불승(一佛乘)이라고 합니다. 즉, 부처되는 길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여래의 가르침에는 오직 부처되는 길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 법화경의 전체 요지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회삼귀일의 가르침을 온갖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저도 즉문즉설을 할 때 여러분이 온갖 질문을 합니다. 남편이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돈을 빌려줬는데 못 받아서 힘들고, 몸이 아파서 괴롭고, 이런 질문들을 하면 스님이 부부가 화합하는 방법이나 자식을 잘 키우는 방법이나 이런 대답을 해준다고 생각해서 스님은 인생을 상담해주는 사람이라고 그러죠. 그러나 부부가 화합을 한다고 해서 인생의 고뇌가 해결이 됩니까? 자식이 잘 된다고 해서 인생의 고뇌가 해결이 됩니까? 그런 얘기들은 모두 꿈속에서 ‘호랑이 만났어요’, ‘뱀 만났어요’, ‘강도를 만났어요’ 하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자식이든 직장동료이든 그 대상이 다를 뿐 즉문즉설은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줄 뿐입니다. 모든 즉문즉설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지 다른 목표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모든 내용들은 단지 법문의 소재에 불과한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이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당장 중요하겠지만, 불법의 차원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혼을 해도 괴롭지 않고, 이혼을 안 해도 괴롭지 않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즉문즉설입니다. 꿈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든, 뱀을 만나든, 강도를 만나든, 각각에 해결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모든 설법의 목표는 오직 그가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 가지 즉문즉설에 만 가지 해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이 한 가지 해법밖에 없습니다.

법화경 역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요. 기존의 불교가 이런 수행을 하면 아라한이 되고, 이런 수행을 하면 독각승이 되고, 이런 수행을 하면 보살승이 된다고 하면서 서로 다투니까 대승 불교에서 ‘그 모든 길은 오직 부처가 되는 길 한 가지다’ 하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서로 다를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서울로 가는 길을 향해 있는데, 인천에 사니까 동쪽으로 가라고 대답하고, 수원에 사니가 북쪽으로 가라고 대답하고, 강릉에 사니까 서쪽으로 가라고 설했을 뿐이라는 거죠. 결국 부처님께서는 서울 가는 길 하나밖에 설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교파를 이렇게 정리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갔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곧바로 차에 올라타서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네 시간을 달려 새벽 1시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조찬을 하고, 오전에는 국회 정각회 초청으로 국회에서 법회를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에서 손님들과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86

0/200

김정이

감사합니다
법문 듣고 공부하면서 어제보다 오늘 괴로움이 적어지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2023-12-10 22:03:40

노민숙

항상. 글을 읽을때 마다. 나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슴에. 감사합니다

2023-12-08 20:02:02

월광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잘못 살아온 과거를 어떻게 정화시키고, 어떻게 현재를 두려움 없이 살 것이며, 미래에는 어떻게 하면 덜 잘못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경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하루팀님 삼보님 일체중님께 고마움의 절을 올립니다.

2022-12-21 08:39:50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