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7.14 정토불교대학 인간붓다 13강
“너는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이니라”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일찍 병원으로 이동해 정기 검진을 받았습니다.

검진을 마치고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한 후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차로 3시간 30분을 달려 오후 늦게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인간붓다 제13강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번 시간까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강의가 거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죽음을 향한 마지막 여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지난 강의에서 부처님께서 45년 간 교화하고 설법한 것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봤습니다. 첫째, 교만한 자를 지혜의 칼로 허구를 깨트리고 겸손하게 만든 교화 사례가 있었고요. 둘째, 비굴한 자를 자비로 섭수하고 깨우쳐서 당당하게 만든 교화 사례가 있었습니다. 셋째, 수많은 비난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며 자신의 할 일을 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넷째, 당시 교단 안팎과 세상사에 늘 생겼던 분쟁과 전쟁, 학문적인 여러 논쟁에 대해 부처님께서 어떻게 대처하셨는지도 살펴봤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속에 있는 자기 고집이나 욕심 등 탐진치 삼독의 뿌리에 대해 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논쟁적인 대화는 불필요하고,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어리석은 짓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와 화해, 화합을 강조하셨고, 그냥 막연하게 ‘화합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화합이 되는지 육화합을 설하시고 그런 조건을 갖추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향한 마지막 여로

부처님은 나이 팔십이 되어서 마지막 유행의 길을 가셨는데, 이것을 일정별로 기록한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의 첫 출발지는 라즈길, 왕사성입니다. 왕사성 밖 영축산(그리드라쿠타, 독수리봉)에 아자타삿투 대왕이 보낸 사신이 찾아와서 부처님께 묻습니다.

‘밧지족을 침공하려는데 전쟁에 승산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밧지족이 민주적이고 전통을 잘 지키며 어른을 공경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는 등 일곱 가지를 잘 지키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아자타삿투 대왕의 무력 침공을 멈추도록 했습니다. 열반경은 이런 얘기로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영축산을 떠나 파트나, 바이샬리, 파바마을 등을 거쳐서 쿠시나가라에 이르러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1년 정도 걸렸고, 그 사이 병도 얻으시고, 많은 설법도 하셨습니다.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가서 죽는다고 하는데, 학자들이 추정하기로는 이 여정이 카필라성으로 가는 길이니까 부처님도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생을 마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디에도 집착이 없기 때문에, ‘고향에 간다’ 이런 생각이 없다고 봐야 됩니다. 부처님을 타타가타, 오고 감이 없는 자, 그래서 여래라고 하잖아요.

2600년 전 부처님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는 수행한다고 어렵게 살았더라도, 부처를 이루고 난 뒤에는 수많은 재벌들과 각 나라의 왕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먹고사는 생활이 훨씬 더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고생을 하는 이유도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고생한 뒤에 좀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음식은 길거리에서 얻어먹고, 옷은 분소의를 입으셨고, 잠은 대부분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주무셨습니다. 가끔 신심 있는 재가 신자로부터 공양 접대를 받은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발우를 들고 걸식을 해서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얻어 드셨습니다. 분소의는 시신을 덮었다 버린 천이어서 누구도 입지 않는데 그걸로 몸을 가리셨습니다. 목숨을 마치는 날까지 이렇게 아주 검소하게 사셨고, 복을 구하는 행동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것을 요청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왕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존경하니까, 어지간하면 왕에게 절을 지어달라거나 마차를 한 대 달라거나 온갖 요청을 할 수 있잖아요. 요즘 민주 사회에서도 종교 지도자가 대통령을 만나면 절을 지어달라거나 병원을 지어달라거나 이런 요청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으셨고, 준다고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진 것 없이 사시면서도 오히려 왕들의 번뇌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재밌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고 행복하고, 온갖 것을 가진 사람은 두려워하고 번뇌가 많잖아요. 왕은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들 때마다 부처님께 와서 하소연을 했고, 부처님은 그를 어여삐 여겨서 그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여러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꼭 가져야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입니다. 지위나 명예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결혼을 못 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이혼을 못 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관점을 잘못 잡고 있는 겁니다. 법을 아는 자는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좋고, 둘이 살면 둘이 사는 대로 좋고, 있으면 있는 대로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좋습니다. 이것이 걸림 없는 자유를 뜻하는 해탈입니다. 비난을 받을 때도 있고,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칭찬을 받는다고 들뜨지 않고, 비난을 받는다고 위축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죽림촌에서 마지막 안거를 보냈습니다. 그 해 흉년이 심했습니다. 걸식을 해도 음식을 얻지 못해 밀기울이라는 말먹이를 얻어 드신 적도 있을 정도였어요.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이 안거 중에 크게 병이 나셔서 심하게 편찮으셨고, 그래서 아난다가 ‘부처님이 돌아가실지 모르겠다’ 하고 걱정하면서 혼자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거 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중들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아난다는 안거 중에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다가 다시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셨으니까 돌아가시지는 않겠다’

부처님께서는 정말 몸이 많이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이르렀는데, 안거 중에 열반에 들면 대중들이 굉장히 번다할 것을 생각하셔서 3개월 정도 유수행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수행은 마음을 딱 집중해서 명을 조금 연장하는 수행입니다.

부처님이 안 계실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안거를 끝내고 주변 사람들을 바이샬리로 모이게 해서 자등명 법등명을 설하셨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남을 등불로 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지 사람이나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마라.’

한문으로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 또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으로 표현되는 이 가르침은 여래가 열반한 뒤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의지하잖아요. 남편이나 아내, 돈, 이런 것에 의지하죠.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서라는 얘기이고, 진리에 의지하지 진리가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여러분들도 법륜스님이라는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되고, 법륜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 진실에 의지해야 됩니다. 또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늘 자기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검증하는 방법

열반경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후에 생길 수 있는 일을 대비하는 4대 교법에 대한 말씀도 나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면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나한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해도 증명할 길이 없잖아요.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네 가지 경우를 얘기하셨어요.

‘첫째, 내가 부처님께 직접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얘기를 무조건 배척하지도 말고 무조건 믿지도 마라. 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보고, 지금까지 내가 설한 가르침과 견주어서 내용이 같으면 수용하고 내용이 다르면 수용하지 마라.’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經)과 율(律)입니다. 그 핵심 사상은 연기법, 중도,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오계와 팔계입니다. 이런 핵심적인 내용이 그가 말하는 내용에 들어있으면 수용해도 좋지만, 어긋나는 내용이 들어있다면 부처님이 말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둘째, 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걸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배척하지 마라. 지금까지 내가 설한 실천 지침인 계(戒)와 이치인 경(經)의 가르침에 견주어 보고, 내용이 같은가 다른가에 따라서 결정해라.’

‘셋째, 경과 율에 정통한 다수의 장로비구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무조건 수용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경과 율에 견주어서 비교해 바라.’

‘넷째, 혹은 그러한 한 명의 장로비구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무조건 배척하거나 수용하지 마라. 지금까지 내가 말한 내용에 견주어서 살펴라.’

‘부처님이 말했다’, ‘부처님이 설했다’라는 의미로 제목이 ‘불설’로 시작하는 경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했다고 해서 무조건 불경이라고 믿으면 안 됩니다. 위경도 제목을 그렇게 붙이는 경우가 있거든요.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이라고 해도 내용을 살펴보고 중도사상에 입각해 있느냐, 연기 사상에 입각해 있느냐, 무상과 무아에 입각해 있느냐, 사성제적 관점에 있느냐, 팔정도의 관점에 있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내용이 어긋난다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해요. 비록 예수님이나 공자가 설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이라면 배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형식적 이름이나 상에 집착하지 말고 내용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지침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되지 않는다. 항상 사실은 어떠한가를 살펴보라.’

사람들은 ‘어느 큰스님이 얘기했다’, ‘경전에 이렇게 써놨다’, ‘법륜스님이 얘기했다’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진실인가입니다.

인도는 신비의 나라, 신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지금도 그렇죠. 부처님은 그런 환경 속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가르침을 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지 않았고 자비로웠습니다. 자비롭다고 해서 정에 끄달리지는 않으셨어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경을 기록하는 과정에 세속적인 이야기, 비합리적이거나 신비적인 이야기가 유입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늘날 불교라고 하는 종교로 변질된 거예요. 정토불교대학에서 인간붓다를 공부하는 취지는, 불교라는 종교는 종교대로 인정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가능하면 고타마 붓다라고 하는 그 인격에 걸맞는 가르침의 내용에 집중해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하니까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이 교단은 누가 지도해야 합니까?’

‘교단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지도되지 않는다. 각자 수행정진해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대중이 민주적으로 의논해서 운영하면 되지, 어떤 사람이 제2의 지도자가 되어서 지도하는 것은 필요 없다.’

너는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이니라

부처님은 칸다키강을 건너 여러 마을들을 지나서 파바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망고나무 밑에서 쉬고 있으니까, 망고나무의 주인인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수공업을 하는 사람의 계급이 천민이었으니까 춘다도 천민이었습니다. 춘다는 부처님께 인사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너무 감동해서 부처님과 대중 일행을 내일 아침 공양에 초대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승낙하셨습니다. 춘다가 간 뒤에 아난다 존자가 걱정스럽게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춘다는 가난한 사람이어서 이 많은 대중에게 공양을 준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승낙하셨습니까?’

‘그는 능히 공양을 준비할 거다.’

이튿날 아침에 춘다는 부처님께 와서 말씀드렸습니다.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때를 아소서’

부처님과 대중이 춘다의 집에 도착하니 부드럽고 딱딱한 여러 가지 음식이 나름대로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대중이 다 놀랐습니다. 춘다가 ‘스카라맛다바’라는 음식을 부처님 발우에 담으니까 부처님께서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춘다여. 이 음식은 여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소화하기 어렵다. 이 음식은 대중들에게 주지 말고 땅에 묻어라.’

이렇게 공양이 끝나고 부처님은 춘다를 위해서 또 설법을 해줬습니다. 춘다는 설법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아난다여, 길을 떠나자. 내가 배가 몹시 아프구나.’

부처님은 조금 가다가 피가 섞인 설사를 하셨습니다. 급성 식중독을 앓았다고 볼 수 있겠죠. 설사를 하면 힘이 빠지니까 조금 가다가 쉬었다 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잠시 누우셨습니다.

한편 춘다는 자기가 정성 들여서 준비한 음식을 부처님께서 드시고 곧 돌아가시게 될지 모르니까 얼마나 죄스럽겠어요. 그래서 기가 죽어서 대중들 뒤에 서서 걱정을 하면서 계속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대중들은 ‘춘다는 아무 공덕이 없다’ 하며 쑥덕거렸어요. 이건 점잖게 표현한 거겠죠. ‘춘다, 너는 나쁜 놈이야. 네가 공양한 음식을 드시고 부처님이 오늘 돌아가시면 너는 큰 죄를 짓는 거야’ 이렇게 얘기했겠죠. 부처님께서 누워서 아난다에게 묻습니다.

‘춘다는 어떠냐?’

‘춘다가 기가 죽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춘다를 이리 오라고 해라.’

부처님은 춘다를 옆에 앉혀놓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제일 공덕이 큰 공양이 어떤 것이냐?’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입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 중에도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정각을 얻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공양이다. 그와 버금가는 두 번째 공양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최후의 공양이다.’

춘다의 공양을 먹고 부처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 춘다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인 배신자 가롯 유다처럼 되잖아요. 독약을 드려서 먹고 죽게 했다고 하면, 그게 마지막 공양이 되죠. 그런데 ‘먹고 죽은 공양이다’가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 먹은 공양이다’ 이렇게 관점을 바꿔버리니까 춘다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공덕을 지은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이 수자타의 공양인데, 춘다의 공양이 그에 버금가는 공덕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춘다여 걱정하지 마라. 너는 여래에게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이란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음식에 독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안 먹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독이 든 음식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고, 먹고 토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죽으면서, 다른 사람이 그를 비난할까 걱정하여 그를 최고의 공양을 올린 자로 칭송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이게 바로 신통력을 쓰는 사람과 붓다의 인격이 갖는 차이예요. 인도에 가면 춘다의 공양을 기념하는 큰 탑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춘다가 준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거기에 가서 춘다가 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렸다고 참배를 합니다. 이런 부처님의 인격은 우리로서는 생각도 못할 그런 인격입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그 음식을 안 드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드셨을까요? 걸식의 원칙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것을 달라고 해도 안 되고, 주는 것을 거절해도 안 돼요. 그리고 음식을 분별심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 하지만, 남을 위해서는 주라고 할 수도 있고, 주지 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자신은 음식을 주는 대로 받으셨고, 다른 사람에게는 못 주게 하신 겁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한 후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처님이 최후의 유언을 남기시고 열반하시는 마지막 여정에 대한 강의가 이어집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하고, 오전과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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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부처님의 열반무렵 마지막 공양.대장장아들 천민 춘다의 공양으로 식중독을 앓으시면서 열반에 드셨어도
이미여래께선 상대를 배려하는 그인격이 감히 우리는 상상도 할수앖는 일이기에
마음깊이 새기면서 여래의길을 따라가보자

2022-09-16 02:50:47

고경희

자등명 법등명

2022-07-19 16:51:42

장미라

왜? 보다는 어떻게? 에 집중하며 살아 가겠습니다ㆍ
지금이라도 바른 지식에 의지를 더해 내 인생 만큼은 내가 주인이 되어 조금이나마 남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겠습니다ㆍ과거는 흘려보내고 현재 순간 순간에 무엇이 옳은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우려 미래엔 좋은 과보 받고자 합니다ㆍ이제라도 우선순위와 때를 알아 시행착오를 줄여나갑니다.

2022-07-18 08: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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