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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텃밭에 아직 어린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뽑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계속 내리고 나니 오히려 작물이 짓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잎을 갉아먹는 벌레도 많아져서 예정보다 일찍 싹 다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수확한 열무와 얼갈이배추는 바로 다듬고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갔습니다.
비가 내리는 사이 텃밭 이곳저곳에 빽빽이 자란 상추도 수확했습니다.
“일요일에 봉사자들이 오면 좀 나눠주면 좋겠어요. 그런데 상추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서 걱정이네요.”
아주 어린 새잎만 남겨두고 상추를 싹 땄습니다.
“비가 내려서 상추 잎에 흙이 튀었어요. 안 씻고 보관하면 좋은데 흙만 씻어냅시다.”
상추를 씻고 물기를 탁탁 털어낸 다음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습니다.
무성히 자란 들깨도 순을 쳐주었습니다. 순을 쳐서 깻잎 사이에 통풍이 되도록 해야 병충해도 적고, 꽃대가 늦게 올라와서 오랫동안 깻잎을 계속 먹을 수 있고, 잎도 풍성히 자라기 때문입니다.
텃밭에서 수확을 끝내고 산밑밭으로 갔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열매가 자라고 있습니다. 때를 맞춰 따야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수확을 합니다. 스님이 밭을 한 바퀴 돌고 나자 가지, 호박, 오이, 토마토, 고추가 두 바구니 나왔습니다.
오늘은 수확만으로 오전 울력이 끝났습니다. 뜨거운 낮에는 원고 교정을 보고 온라인 회의를 했습니다. 오후 2시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개원식 기획 회의를 했습니다.
스님이 회의를 하는 사이 문경에서 무변심, 선주, 자광 법사님과 천룡사에서 묘향 법사님이 울력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스님이 산윗밭에 무성히 자란 풀을 매기 위해 특별히 요청했습니다. 두북에 묘덕, 묘당 법사님까지 함께 산윗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봄에 도라지를 심은 아랫단에는 들깨와 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햇살이 너무 강하네요. 오늘은 해거름이 지는 윗단부터 풀을 뽑읍시다.”
오후 4시 30분이었지만, 햇살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습니다. 그나마 그늘이 있는 윗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밭에 도라지꽃이 활짝 피어 반겨주었습니다.
“자, 그늘에서부터 일합시다.”
스님과 법사님들은 모란 밭 그늘진 자리부터 풀을 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한 달 전에 풀을 맨 거 맞죠?”(웃음)
언제 풀을 뽑았냐 싶게 풀이 또 모란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풀이 자꾸 자라서 힘들어도 나는 게 좋은 일이에요. 이게 곧 자연의 복원력을 보여주는 거니까요. 일본에 원자폭탄 떨어진 곳에도 쇠뜨기풀이 가장 먼저 낫다고 해요.”
각자 자리에서 동작에 집중하며 풀을 뽑았습니다. 풀을 맨 자리가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1년생 모란은 아직 어려서 주변에 풀을 뽑기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2년생 모란은 한 해 더 자랐다고 늠름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느새 모란 밭에 풀을 다 맸습니다.
“몇 시예요?”
“6시 30분입니다.”
“그럼 밭 한 골을 더 맵시다.”
도라지밭 건너 올봄에 모란 씨앗을 심어놓은 두둑에도 풀이 자라 있었습니다. 모란 씨앗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내민 풀들을 쏙쏙 뽑았습니다.
7시가 넘자 해가 점점 떨어졌습니다.
“스님, 이제 내려가셔서 불교대학 강의 준비를 하셔야겠는데요.”
스님은 법사님들만 두고 가기가 미안하셨는지 낫을 들고 고랑에 난 풀을 쓱쓱 벴습니다.
“스님,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이제 정말 가야겠네요. 풀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때까지 풀을 뽑고 오세요.”(웃음)
“네.”(웃음)
법사님들을 뒤로하고 스님은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법사님들은 불교대학 수업 직전까지 풀을 다 매고 왔습니다.
저녁 8시부터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모두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토불교대학 과목 중 인간 붓다 수업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내용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입니다.
8300여 명이 생방송에 모두 접속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여러분이 공부하면서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들을 푸는 시간입니다. 물론 반별로 법사님께 질문을 해서 의문을 많이 해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해소가 안 된 문제가 있다면 대화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오늘날 우리는 긴 시간을 공부해도 깨닫기가 어려운데 부처님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는지 질문했습니다.
“최근 인간 붓다에 대한 수업을 듣고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부처님 당시에는 법문을 듣고 하루나 이삼일 만에 깨달음을 얻어 출가할 수 있었나요? 우리는 그보다 긴 시간을 공부했는데도 아직 나 자신조차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몸의 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을 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셨다고 하셨는데, 당시 출가수행자들은 어떻게 단박에 깨달은 것인지요?
또 과거에 인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신적인 존재로 보았고, 경전도 그런 시각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래도 저는 인간인 싯다르타가 너무 신화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600년 전 부처님이 직접 쓴 기록이나 그때 찍은 영상이 있다면 ‘아, 부처님은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니구나’ 이렇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객관적 증거가 없잖아요. 현재는 부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기록만 남아있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대부분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500여 년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500년 동안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부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사실을 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둘째,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00년에서 1천 년 사이 당시 인도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브라만 문명이 붕괴되어서 사상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운 백가쟁명의 사회였는데, 부처님 이후 500년에서 1천 년 사이에는 브라만교가 힌두교라는 이름으로 재정비되면서 인도의 종교성이 다시 강화되었고 성차별도 심해지고 계급 제도도 더 강고해졌습니다. 이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경전과 논장의 대부분이 집대성되었고, 초기 불교의 교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인도에 부처님의 유적이라고 남아 있는 보드가야 대탑 등 모든 종교적인 불교 건축물도 다 이 시대에 만들어졌거나 그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건 다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잖아요. 카스트 제도나 성차별이 가장 견고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감성이나 믿음 위에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하니까, 부처님이 좀 신비주의적으로 묘사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본 부처님도 훌륭하신 분이긴 했지만, 힌두교는 신을 숭상한 반면 부처님은 신이 아닌 것이 분명했잖아요. 그럼 종교적인 세력 경쟁에서 우위를 갖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부처님은 인간이지만 신보다 높은 존재라고 해야 경쟁력이 있잖아요. 그래서 붓다는 신이 아니지만 신보다 높은 존재로 기록되는 거예요. 부처님은 ‘천인사(天人師)’라고 해서 신들과 사람의 스승이라고 표현했고,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신 후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종교를 넘어서 있습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닌 것이 아니고 종교를 넘어서 있고, 철학이 아닌 것이 아니고 철학을 넘어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다시 종교화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신을 믿는 종교보다 더 위에 있는 종교라고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는 종교의 영역 밖에 있는 건데, 종교의 영역 안으로 가져올 때는 다른 종교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 점이 기록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기록이 그대로 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인류문화사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가 혼자 애를 낳았다’라는 기록이 있다면,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의 인류문화를 연구해보는 거예요. 비슷한 설화가 굉장히 많은데 이것이 뭘 상징하는지, 어떤 경우에 이런 설화가 생기는지 연구하는 거죠. 고주몽처럼 알에서 낳았다는 난생 설화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것을 유물, 유적, 전 세계의 사례 등을 갖고 해석해 나가는 것을 인류문화사라고 합니다.
이런 인류문화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기록이 사실이다, 아니다’ 둘 중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논쟁하게 됩니다. ‘신이 있다, 없다’를 갖고 논쟁하듯이요. 그러나 이 문제를 인류문화사적으로 접근하면, 인류의 문명에서 왜 신의 역할이 나왔고, 이것이 어떤 긍정적 역할과 부정적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옛날에는 다 허구로 받아들였지만, 역사가 신화로 바뀐 것이거든요. 그래서 신화의 내용을 갖고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해서 트로이 목마 같은 것을 발굴해내는 일이 생기잖아요.
불교 경전이나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기록도 무조건 ‘부처님은 그런 분이다’ 라거나 ‘이건 엉터리다.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접근하지 말고 인류문화사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 기록이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는 거예요. 여성을 차별하는 시대였으니까 ‘어떻게 부처님 같은 성인이 여자의 사타구니에서 태어날 수 있느냐’ 하는 당시 인식이 있었겠죠. 또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면, 인도의 전통인 브라만 신화에는 신의 입김으로 브라만을 창조하고, 신의 옆구리로 크샤트리아 왕족을 창조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는 것은 부처님의 출생 계급이 왕족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도 ‘애가 어떻게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느냐’ 하고 부정할 필요가 없어요. 여섯 발자국은 육도 윤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여섯 발자국을 넘어서 일곱 발자국을 갔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나 해탈하실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도의 전통에는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좋은 곳과 나쁜 곳 여섯 군데를 돌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세계가 육도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을 했다는 거죠. 이렇게 분석하면 그 기록이 갖는 상징성을 해석해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문화사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수많은 인류문화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왜 경전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왜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했는지, 왜 이렇게 과장했는지 이해하는 거죠. 역사적 문헌을 볼 때도 지금의 관점에서 보고 ‘사실이다, 아니다’ 하고 논하기보다, 그 당시에 기록을 남길 때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어땠는지, 그때 시대적 배경은 어땠는지 접근해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으로 역사책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대 역사 기록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 사람들이 기록한 역사책에 ‘동쪽 오랑캐들이 이런 풍속이 있다더라’ 하는 내용을 찾아서 우리 역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우리 역사 자체가 중국의 변방사가 되어버렸어요. 그 결과 사대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 기록이 우리 기록이 아니고 남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역사적 기록만을 지나치게 고집하면 사대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 이런 것에 의해서 검증될 수가 없다.’
이런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도 다시 한번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항상 ‘정말 어떤가’ 이런 관점에서 살펴야 돼요.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는 가르침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데다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경전을 결집할 때도 어떤 제자 혼자 한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아라한 500명이 모여서 확정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한 것은 500년 내지 1000년 뒤에 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에 일부 그 시대의 요구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는 시대적 상황의 영향도 받았음을 감안해서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경전에 있는 신화적인 내용을 다 빼자고 말하지도 않고,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사실로 받아들이되, 왜 이런 기록이 남았느냐 하는 것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제가 강의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뒤에 나오는 신화적 얘기하고 잘 안 맞잖아요. 이런 것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이미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기록이 없다고 무조건 부정하거나, 부처님한테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인정하지 마라. 지금까지 알려진 가르침의 원칙과 비교해서 판단해라.’
후대에 가서 ‘내가 부처님하고 둘이만 있을 때 이렇게 들었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신 거죠.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중도 사상에서 어긋나느냐 아니냐, 연기법에 어긋나느냐 아니냐, 삼법인의 가치가 담겨 있느냐, 이런 기준으로 판단을 하면 됩니다. ‘이건 비록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해도 신뢰하기 어렵다’ 하거나 ‘이건 비록 기존 경전에 없는 얘기지만 비교적 진실에 가깝다’ 하거나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부처님께서 이미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역사적 유물과 문화사 등을 감안해서 불경이나 부처님의 일생을 다시 재구성하는 길을 부처님 자신이 열어놓은 겁니다. 경전의 기록도 나중에 혹시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무조건 부정하지 말고, 지금까지 내가 설한 가르침과 인격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서 정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저도 근거 없이 혼자 얘기하지 않고, 그렇다고 경전에 있는 기록만 갖고 주장하지도 않는 거예요.
선불교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위대한 스승을 찾아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수천리 길을 왔어요. 스승님께 질문을 하려고 방문을 열고 문턱 안으로 한 발을 딱 디뎠는데, 스승이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쉽게 얘기하면 ‘너 누구냐?’ 이런 뜻이에요. 오기는 분명히 왔는데, 무엇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법륜이 왔습니다.’
‘법륜은 니 이름이잖아.’
‘몸이 왔습니다.’
‘그건 네 육신이잖아.’
‘영혼이 왔습니다.’
‘그건 네 혼백이잖아.’
나의 육신, 직업, 감정, 생각이 아닌 네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말문이 꽉 막혀버렸어요. 늘 ‘나’라고 주장을 했는데, 나라는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서 무엇을 묻겠어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 나와야 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입도 뻥긋 못 하고 가슴이 꽉 막혔는데 7년 만에 탁 깨쳤어요. 그래서 스승을 찾아와서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이 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탐구해서 자기 마음에 걸린 의문이 풀어져버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록에는 ‘7년 후에 왔다’ 이런 기록이 없고,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7년이라는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깨닫기 전에는 7년이 긴 시간이지만, 깨닫고 보면 5년이면 어떻고 7년이면 어때요. 그게 10초면 어떻고, 7년이면 어떻고, 70년이면 어때요. 기록할 때는 ‘못 깨달아서 오랜 시간을 방황하고’ 이런 것까지 다 쓰기는 어렵잖아요. 못 깨달은 사람은 대부분 기록에서 빼버리겠죠. 깨달은 사람만 기록해도 양이 많은데, 못 깨달은 긴 과정을 어떻게 다 기록으로 남기겠어요. 그때는 글자로 쓰는 것도 아니고 암송을 했잖아요. 그래서 기록에 남길 때는 ‘이런 문답이 있고, 곧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빨리 깨달을 수 있는 요소도 갖고 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요즘보다 생각이 복잡하지 않았으니까 본질을 얘기하면 딱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측면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머리를 덜 굴렸잖아요.
또 ‘설법을 듣고 깨달았다’ 하는 말은 완전히 깨달았다는 뜻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치를 알았다는 뜻이에요.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이치를 알고 집착을 탁 놓아버린 겁니다. ‘나의 신분이 브라만이다’ 이런 생각은 허구잖아요. ‘이 재산은 내 것이다’ 하는 것도 허구입니다. 내 것이 본래 없으니까요. 이런 이치를 탁 깨치고 욕망을 놓아버렸지만, 습관은 남아있어서 찰나찰나에 무지가 일어납니다. 부처님도 출가하고 나서 더러운 음식을 먹고 토하려고 했잖아요. 자기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법이 설해졌도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수행은 평생 동안 꾸준히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덕분에 제 좁은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앞으로 좀 더 눈을 넓혀서 인류문화사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9시 30분이 다 되었습니다. 질문자 한 명이 더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다음에 또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손님을 만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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