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4.26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7강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가치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밤새 장대비가 쏟아지고 아침에도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풀도 나무도 꽃도 흠뻑 비를 맞은 모양이 시원해 보였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마음을 졸였던 시골 사람들도 비를 보며 기뻐했습니다.

스님은 기도를 마치고 5시 30분부터 비옷을 입고 상추를 땄습니다. 오늘 저녁 불교대학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때문에 미리 상추를 수확해두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나누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손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2시간 넘게 상추를 땄습니다.

상추 수확을 마치고 농사팀이 직접 키운 아삭이고추, 고추, 토마토 모종과 연장을 가지고 밑밭으로 갔습니다.

어젯밤에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밑밭 두둑 3줄에 구멍을 뚫어두었습니다. 밤새 구멍 속으로 비가 스며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촉촉해진 땅에 파종기로 바로 모종을 심었습니다. 순식간에 세 줄에 고추와 토마토를 다 심었습니다.



“비가 와서 땅이 정말 부드럽네요.”

스님은 경쾌하게 걸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대부분 돌이 많거나 딱딱한 밭에서 일을 하다 비가 내려 촉촉해진 흙을 밟는 느낌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번에는 고랑에서 북삽으로 흙을 퍼서 모종에 덮어주었습니다.


“이야, 흙이 정말 좋아요. 비가 오니 일하기가 참 좋네요.”

스님은 부슬부슬한 흙을 만지며 감탄했습니다. 비가 온 후라 해가 나오지 않으니 날씨가 선선해 일하기도 좋았습니다.


모종을 다 덮어 준 후 이번에는 산아랫밭으로 갔습니다. 어제 이 밭에 생강을 심고 빗물을 흠뻑 맞으라고 흙을 덮어주지 않았습니다. 촉촉해진 땅 위로 흙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아랫밭은 진흙이라 물을 먹은 흙이 단단해졌습니다. 흙을 덮다가 행자들이 걱정을 하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생강 위에 덮은 흙이 마르면 너무 딱딱해져서 생강이 싹을 못 틔우면 어떡하죠?”

스님이 웃으며 답했습니다.

“괜찮아요. 생명은 직접 해치지만 않으면, 알아서 다 살 수 있어요. 뚫고 올라올 거예요.”

두둑이 길고, 구멍이 많고, 흙이 단단해서 생강을 덮는 시간은 한참 걸렸습니다. 어느 정도 생강밭에 흙을 다 덮자 스님은 울타리 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2년 전에 여기 취나물을 심어뒀는데... 와, 여기 많이 있네요.”

스님의 손끝은 따라가 보니 취나물이 곳곳에 자라 있었습니다.

취나물도 뜯고 방풍나물도 뜯었습니다.

“한끼 먹겠네요.”


나물까지 수확하고 밭을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말라있던 마을 냇가에도 비가 내려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용한 연장과 장화를 깨끗이 씻었습니다.

이번엔 텃밭으로 가서 부추를 싹 벴습니다. 그 위로 영양분을 주기 위해 오줌 액비와 재를 뿌리고 물을 주었습니다. 부추는 이렇게 자르고 나서 또 자라기 때문입니다.


삐죽삐죽 자란 소나무도 가지 치기를 했습니다.

나물을 다듬고 오후 1시가 넘어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농사일을 마치자 비가 갑자기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강의 준비와 여러 가지 업무들을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 정각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 중 실천적 불교사상 7강을 할 차례입니다. 학생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스님이 지난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요약하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올바른 가치관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주제로 계율에 대해 하나씩 배워나갈 예정입니다.

스님은 가치관은 환경에 의해 형성되므로 절대적 가치관이란 없음을 강조하면서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평가합니다. 이렇게 평가를 할 때는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과연 옳고 그름의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요?

옳고 그름의 기준, 가치관의 형성

우리는 보통 각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평가를 합니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도 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해집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인생의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내린 계시다’, ‘부처님께서 정한 계율이다’, ‘알라신이 말씀하신 것이다’ 하면서 삶의 기준을 절대화시켜 놓았습니다. 종교에서는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는 기준이 딱 정해져 있고, 그것은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 부합하면 선(善)이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악(惡)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가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이 의문에 대해 오랜 시간 탐구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 믿음과 주장이 있을 뿐이지 절대적 가치라고 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에 근거해서 진리의 여부를 검증할 수가 없다.’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태양이 지구를 돈다든지 하는 인식상의 오류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지식의 축적과 기술의 발달로 많은 인식 상의 오류가 시정되었어요.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아직도 어떤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믿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치관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일부일처제가 진리라고 정해진 건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여러 조건 속에서 현재는 일부일처제가 합당하다고 정한 거예요. 역사 속에서는 일부다처제인 사회도 있었고, 일처다부제인 사회도 있었습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하는데, 어떤 종교에서는 사람이 다른 생물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날에는 여성이 재혼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약이 없는데 100년 전에는 여성의 재혼을 굉장히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혼인하기 전에 연애를 해도 부도덕하다고 하지 않는 데 반해, 아직도 연애를 부도덕한 행위로 치부하는 사회와 종교도 있어요. 이렇게 가치관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도 자기 시대, 자기 지역의 문화와 가치관을 절대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시대, 다른 문화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두고 악인이니 미개인이니 야만인이니 하면서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시대와 지역에서는 미개인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살인과 착취를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는 없습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고, 서로 다를 뿐이에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절대화하기 때문에 온갖 갈등이 일어나고, 고통과 비극이 생겨나는 거예요. 나의 문화, 나의 가치관, 나의 믿음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문화, 가치관, 믿음도 존중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나의 신앙이 옳고, 남의 신앙은 틀리다고 단정 지어 말하면 안 됩니다. 내 사상은 옳고, 상대 사상은 틀리다고 해서도 안 되고, 자기 집단의 윤리와 도덕은 옳고, 상대 집단의 윤리와 도덕은 틀리다고 단정지어도 안 됩니다.

원시 사회의 윤리 vs 계급 사회의 윤리

가치관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가치관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인류 문화사적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인류 문명은 어떻게 발생하고 전파되었을까요? 예를 들어 원시 사회에 30명이 집단을 이루어 산다고 합시다. 원시 사회에는 사생활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모든 게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었어요. 원시 사회에서는 부부관계도 공개된 장소에서 행해졌습니다. 마치 동물들이 교미하듯이 말이에요. 투명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원시 사회에 형성된 윤리와 도덕은 평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이렇게 공개된 생활을 하니까 어떤 효율적인 기술을 새로 발견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본받고 그것은 곧 다음 세대에게도 그대로 계승이 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발견된 방법이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공익적이지 못하면 그 집단 안에서는 그 방법은 전승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산에 가서 채집을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지만 다른 사람도 그것을 따라 배우면 집단 내에 갈등이 생기니까 그 방법은 전승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문명이 발달하고 집단과 집단 사이에 차이가 생기면서 평등성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문명이 앞선 A라는 집단이 있고, 조금 뒤처진 B라는 집단이 있다고 합시다. A라는 집단에 있는 한 사람이 B라는 집단에 가서 물건을 훔쳐 왔어요. 이럴 때 A집단 안에서는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러면 A집단의 다른 사람도 그걸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B집단에 가서 또 물건을 훔쳐옵니다. 이렇게 해서 A집단의 사람들이 B집단에 가서 물건을 훔쳐오는 일이 늘어나자 A, B 집단 간에는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는 싸우다가 죽이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같은 집단 안에 사는 사람을 죽이거나 서로의 물건을 훔치면 손해가 생기지만, 다른 집단에 가서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기 집단에 아무런 손해가 없잖아요. 그래서 다른 집단의 물건을 훔치고, 다른 집단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 집단 안에서는 하나의 좋은 가치로 정착하게 됩니다.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다가 나중에는 동물을 길들여서 가축으로 키우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듯이, 이제 A집단에서는 아예 B집단 사람들을 통째로 잡아와서 가축처럼 노예로 부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수렵채취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정착하는 과정과 노예제의 발생이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두 개의 집단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게 되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같은 윤리와 가치관이 적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지배 집단에 적용되는 윤리와 피지배 집단에 적용되는 윤리가 같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계급과 지배 윤리가 형성되면서 온갖 차별이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양 사회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전생의 이름으로, 사주팔자의 이름으로 지배를 정당화하고 절대화시켰습니다.

‘너는 신의 벌을 받아 노예로 태어났다’
‘너는 전생에 죄가 많아 여자로 태어났다’
‘너는 사주팔자가 그렇게 태어났다’

이렇게 인간은 지배 윤리에 의해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노예로 길들여졌습니다. 가치관은 길들여지고 형성이 된 겁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노예로 길들여지면 노예가 되고, 왕자로 길들여지면 왕자가 됩니다. 마치 로열젤리를 먹은 꿀벌은 여왕벌이 되고, 로열젤리를 못 먹은 꿀벌은 일벌이 되는 것과 같아요. 형성된 것일 뿐인데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었다고 절대화시켜서 이 세상에 많은 차별과 불평등, 고통을 야기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왕궁에 살 때 12살에 농경제에 참석해 힘겹게 일하는 농부의 고통, 그 농부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쟁기질을 하는 소의 눈물과 땀, 소가 쟁기질할 때 흙이 뒤집히면서 나온 벌레를 새가 쪼아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어요.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하고, 하나가 편리하려면 하나가 불편해야 하고, 하나가 행복하면 하나가 불행해야 할까?’

자신이 그 모순을 처음 발견하고 갖게 된 의문이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믿고 있던 신앙이나 철학, 사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탐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왕위를 버리고 진실을 찾아 길을 나섰던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차별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이구나. 계급 차별과 남녀 차별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이구나.’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럼 그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차별에서 평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쉽게 말해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의란 차별에서 평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차별이 있다면 성 평등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과정, 계급 차별이 있다면 계급 평등으로 나아가는 과정, 빈부 차별이 있다면 경제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평등 쪽으로 조금이라도 한 발 나아갈 때 우리는 ‘정의롭다’ 하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민주사회라는 것도 점점 평등해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등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흰 개, 검은 개가 털 색깔이 다른 것처럼 그냥 피부색과 인종이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이 정의로 가는 출발이라 할 수 있어요.

새로운 가치관, 자연생명까지 고려한 인간 윤리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의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지 하는 인간 윤리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문명사회가 그 외곽을 야만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을 합리화했듯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해왔던 거예요.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사람과 사람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이듯이 인간과 자연도 연기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했는데, 이제는 과도한 개발로 인해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 등 많은 재난이 일어나서 인류 문명이 큰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예수님, 공자님, 노자님, 소크라테스와 같은 과거의 성인들은 생태윤리를 감안하지 않고 인간 윤리만을 강조했습니다. 당시에는 생태윤리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미 2600여 년 전에 생태윤리를 기본 바탕으로 두고 인간 윤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마라’가 아닌 ‘살생하지 말라’ 하는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누구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가치, 오계

부처님은 다섯 가지 윤리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
둘째, 손해 끼치지 마라
셋째, 성적으로 남을 괴롭히지 마라
넷째, 말로 남을 괴롭히지 마라
다섯째, 술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히지 마라

부처님께서 만든 이 다섯 가지 윤리 기준은 지배를 위한 윤리 기준도 아니고, 신을 위한 윤리기준도 아니었어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떤 관점과 가치 기준을 가져야 할까?’ 하는 것이 윤리 기준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나를 손해 끼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나를 성추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욕설하고 거짓말해서 말로도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술 먹고 취해서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과 단둘이 밤에 만나서 외진 곳에 있더라도 이런 확신이 있다면 두려워할 일이 없잖아요. 이런 관점 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남편이나 부모나 형제라 하더라도 그가 나를 때리거나, 내 물건을 가져가거나, 성추행하거나, 욕설하거나, 술에 취해 행패를 피우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수많은 법률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다섯 가지만 딱 지킨다면 인간 사회는 훨씬 평화롭고 평등해집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은 기꺼이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멈춰야 한다고 규정해 놓은 것이 ‘계(戒)’입니다. 이 계를 지키기 위한 소소한 규칙들을 ‘율(律)’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합해서 ‘계율(戒律)’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라면 계율을 받아 지녀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행위를 보면 수행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고 수행자가 아니에요. 산속 절에 산다고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인 오계에 대해 하나씩 자세하게 배워보기로 하고, 이번 주 수행연습 과제를 안내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화상회의 방에 모여 오늘 강의를 듣고 난 소감을 서로 나눈 후 지난주 수행연습 과제를 실천해 본 경험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방송실을 나와 곧바로 차에 올라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밤새 차를 타고 달려 새벽 1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한 후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달아 차담을 나누고, 오후에는 ‘인공지능(AI)’을 주제로 한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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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숙

사람과 사람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 이듯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갈등과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법문 감사합니다

2022-10-11 18:50:44

정인자

말씀감사합니다.계율을 지키고 수행하는 자 쉽지만 참 어려운 과제지만 조금씩 마음에 세기고 실천하겠습니다.

2022-05-06 09:45:14

평등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2022-05-03 06: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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