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4.27 종교인 모임, 평화 연구 세미나, 수행법회
“남편과 딸이 서로 싸우고 말을 안 해요,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평화재단에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령님, 교무님이 차례대로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종교인 모임을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 밖에 없는 우리들을 아직까지 살려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종교인들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마음과 뜻을 모아 좋은 대화를 나누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어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오늘 대화 나눌 주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올해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순국 100주년입니다. 평화재단에서 이를 기념하는 세미나를 5월 18일에 개최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천도교 박남수 전 교령님이 의암 손병희 선생에 대해서 좀 소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남수 전 교령님이 의암 손병희 선생의 전 생애를 요약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스님은 그중 손병희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업적 세 가지

“손병희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이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동학혁명의 최고 사령관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동학의 창시자는 최제우 선생이었고, 동학혁명의 교주는 최시형 선생이었다면, 당시 동학혁명의 군사적인 책임자는 손병희 선생이었습니다. 일부 지역인 남부 지방의 대표가 전봉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동학혁명 전체를 책임진 사람은 손병희 선생이었어요.

둘째,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한 시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갑오경장이 일어난 후 손병희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가보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문명적으로 시대가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도 근대국가를 건설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천도교 신자 수 만 명에게 단발령을 시행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전환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이 큰 업적 중에 하나입니다. 일본은 우리의 적인 동시에 우리는 문명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도 일찍 내다보신 분이 손병희 선생이었습니다. 근대화에 가장 앞장선 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새로운 나라가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니라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근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점은 일부 학자들이 친일 행적으로 비판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죠. 단발령을 내리고 근대국가로 전환할 때 여기에 참여했던 천도교도 일부가 한일합방에 동조를 해버림으로 해서 많은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손병희 선생은 이들을 모두 천도교에서 출교 시킵니다.

셋째,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과정에서 민이 주인이 되는 3.1독립운동을 이끈 리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업적은 중국의 국부인 손문과 일본 근대화의 영웅인 후쿠자와 유키치에 버금갈 정도의 혁명적인 업적이 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이번 평화재단 세미나의 주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손병희 선생이라고 하면 3.1운동의 대표 서명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혁명가로서의 손병희 선생을 재조명해 보기로 했어요.

특히 손병희 선생의 중도회통사상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동학의 지도자였지만 서학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했고, 천도교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지만 불교인들과 함께 했어요. 민족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극단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서양 문화를 배워서만이 대한민국 근대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고, 민(民)이 주인이 되는 동학 혁명 사상이 우리나라 안에 이미 있었고, 이것이 서양문명과 결합하면서 대한민국이 근대화된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 종교인들이 3.1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모임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3.1운동의 가장 골간이 되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을 맞이해서 종교를 넘어서서 그 업적을 한번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스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종교인 분들은 손병희 선생의 업적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국민통합을 위한 시민종교사회 원로들이 어떤 역할을 해나가면 좋을지 대화를 한 후 종교인 모임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평화재단에는 손님들이 연이어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손님들과 차담을 나누고 한국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 ‘AI와 첨단기술시대의 윤리’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AI 머신 러닝 분야 국내 최고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는 서울대학교 AI 연구원장 장병탁 교수님에게 ‘AI와 첨단기술시대의 윤리’를 주제로 강의를 듣고 토론했습니다.

“먼저 전반적으로 AI의 역사와 연구 동향, 산업의 흐름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AI가 인간의 삶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회적 영향까지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AI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1956년에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기계에 사람 같은 지능을 구현하겠다는 거죠.”

장 교수님은 AI의 역사와 현재, AI의 기술 원리, 발전 동향과 한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AI는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오류를 교정하며 학습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AI는 사람이 입력하는 데이터에 따라 학습을 잘하는 것일 뿐 어떤 데이터를 줘야 할지는 사람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람이 할 일이 전혀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으로 바뀔 세상을 대비해 적극적으로 계획을 하는 국가는 선진국이 될 것이고, 도외시하는 국가는 뒤쳐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어서 교수님은 ‘AI의 위험성과 새로운 도덕윤리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왜 인간이 만든 AI가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지,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게 되는 특이점이 언제쯤 일지, 초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지능의 장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할 것인가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님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인공지능이 바꿀 미래,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가 있을까

“저는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인공지능의 미래를 그렇게 우려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옛날에 노예가 해방될 때도 ‘지배자들은 노예에게 자유를 주면 우리를 해코지하지 않겠나, 노예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걱정했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줄 때도 ‘여자들이 제대로 결정을 하겠나?’라고 걱정했죠. 그 시대의 어떤 관습에 젖은 가치 기준으로 볼 때는 새로운 변화를 우려하는데, 변화가 보편화되면 그 우려가 불식이 되기도 하고 가치 기준 자체도 변합니다.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분야에서 비윤리적 문제를 많이 우려하는데 부작용이 있으면 인류는 그 부작용을 불식하기 위해 새로운 윤리와 법을 만들어나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우려는 변화와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요. 일단 도전해가면서 조정을 해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가치 기준이 영원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과거 시대 기준으로 지금 시대를 보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많잖아요.”

이어서 교수님은 ‘AI 시대 인간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AI의 혜택과 위협, 앞으로 AI와 인간의 관계, AI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미래에는 AI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런 일은 없거나, 알 수 없을 것 같아요.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자유의지가 없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라고 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고 있죠.”

스님도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불교적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맞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거죠. 인간은 프로그램에 의해서 움직일 뿐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까르마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데 자기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비유를 들면 개에게 목줄을 채워 산책을 가는 것과 같아요. 개는 주인과 같이 가면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옆으로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가 자유롭게 다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이미 주인에 의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의 반응은 다 조건에 대한 반응일 뿐이에요. 사람은 그게 자유의지라고 착각하는 거죠.”

스님의 설명을 듣고 다른 참가자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희망이 없잖아요.”

스님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핵심이 바로 거기 있어요. 우리는 프로그램 즉 업식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각하면 선택의 기회가 오기 때문이에요. 모를 때는 업식대로 살 수밖에 없는데 인지하면 멈출 수 있거든요. 불교 용어로 말하면 ‘알아차림’입니다. ‘자각’은 정신작용 중에 최고 고도의 작용입니다. 인공지능도 언젠가 알아차림을 할 수 있을까요?”

교수님이 미소로 대답하자 다른 참가자가 말했습니다.

“스님 보통 사람 중에도 자각하고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요.” (모두 웃음)

설명을 듣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AI의 최대 발전 지점은 어디까지인지, 온라인으로 촉각과 후각도 구현 가능할지, 인간의 모호한 언어를 인공지능이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인공지능의 법적, 윤리적 책임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현재 국가 간 AI 개발 격차는 어떠한 지, 변화하는 미래에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아쉽지만 세미나를 마쳐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교수님, 바쁘신 와중에 직접 와주시고 설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인류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로 진취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공지능이나 가상현실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굉장히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교의 수행 원리’를 이해시키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수행의 원리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 하던 사람도 인공지능이나 가상현실을 비유해서 이야기하면 훨씬 빨리 알아듣는 측면이 있거든요. 저희도 계속 더 관심을 가질 테니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을 배웅하고 4시부터는 평화재단 기획위원들과 정기회의를 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정토회관 앞마당에는 형형색색의 연등불이 켜졌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모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며칠간 무덥더니 어제 비가 오고부터 다시 좀 시원해졌습니다. 이상 기후 때문인지 4월 중순에 30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덥더니 조금 괜찮아졌다가 지난주에 또 많이 더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일주일을 보내셨나요?”

지난 한 주 동안 스님이 농사일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과 딸이 서로 다투고 나면 두 달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며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남편과 딸의 갈등이 심해요, 어떡하죠?

“남편과 딸아이가 갈등이 심합니다. 남편은 아이를 문제 삼고, 딸은 아빠가 문제라고 하면서 다툽니다. 다투고 나면 두 달가량 서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 아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 교육을 자기가 하지 않고 저한테 맡긴 것을 자책하며 힘들어 합니다. 아이가 그렇게 문제로 보이면 가족 상담을 통해 해결해 보자고 해도 자기 말이 옳다고만 할 뿐 상담은 받지 않으려 합니다. 둘 사이가 원만해졌으면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남편과 아이가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딸이 몇 살이에요?”

“16살이에요. 중학교 3학년입니다.”

“중학교 3학년이면 사춘기잖아요. 사람의 특성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사춘기 때는 자기 나름대로 뭘 해보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자립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13살 즈음부터 19살에 이르는 5년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전환해가는 때입니다. 이 시기를 ‘사춘기’라 부르는데, 사춘기는 인생살이에서 특별히 나쁜 시기가 아니에요. 어린아이는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따라 배우는 데 반해 어른은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사춘기에는 따라 배우는 시기와 자기가 알아서 하는 시기가 같이 겹치게 돼요. 부모 입장에서는 시키는 대로 안 하는 것이 불만이 되고,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이 불만이 되죠. 그래서 이때 어른과 아이 사이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말만 안 들으면 아이더러 사춘기라고 해요. 말 안 듣는 시기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오면 ‘사춘기가 빨리 왔다’라고 하고, 말 안 듣는 모습을 고등학생이 되어서 보이기 시작하면 ‘사춘기가 늦게 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부모 말을 전적으로 듣는다면 그 아이는 부모의 노예지, 어떻게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또 제 부모 말마저 아예 안 듣는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부모와의 관계에서 말을 듣는 것도 사람이 되는 하나의 길이고, 말을 안 듣고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도 사람이 되는 하나의 길입니다. 자립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두 가지 특징이 다 필요한 거예요. 하나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남편은 아무래도 남자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가 있어서 ‘말을 들어라’ 하는 쪽에 비중을 더 많이 두다 보니 딸이 문제처럼 보이는 거예요. 딸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는 측면을 더 많이 갖고 있다 보니까 아버지가 자기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갈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갈등이 안 생기고 딸이 아버지한테 계속 순종하기만 하면 아버지가 계속 ‘내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라는 생각만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컸다는 사실을 잘 못 느낍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꾸 저항을 하면 처음에는 힘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적응하게 됩니다. 비록 아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애착을 내려놓게 되는 거예요. 저는 이걸 ‘정이 떨어진다’라고 표현합니다.

또 아이도 어릴 때부터 자기 마음대로만 하면 나중에는 그것이 도리어 자신의 인생에 큰 장애가 돼요. 엄마는 제 맘대로 하도록 놔둘지언정 아빠라도 제재를 가해줘야 ‘아,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우칩니다. 제 마음대로 하려는 걸 누군가가 이렇게 억제해 줘야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런데 본인이 하려는 대로 다 하고만 살면 훗날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됩니다.

아이를 너무 억압해버리면 심리적 위축을 가져오고, 반대로 너무 오냐오냐하고 내버려 두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부모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면 심리적 억압이 일어나기 때문에 짜증과 화는 가능하면 줄이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아이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막아줘야 아이가 원만히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지금 아이도 아빠도 이런 두 가지 문제를 갖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그 갈등은 나쁜 게 아닙니다. 아빠도 젊은 세대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고, 딸도 기성세대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갈등이 없도록 하는 게 좋다’ 하는 질문자의 생각이 잘못된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웃음)

“두 달 동안 서로 얘기를 안 하는 데도요?”

“얘기 안 해도 괜찮아요. 딸의 그런 저항을 받아야 아빠도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 딸을 대할 때 조금 조심하게 되고, 딸도 그렇게 불편을 느껴야 아빠에 대해서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눈도 안 마주치고 거실에서 왔다 갔다 할 때도 서로를 그림자 취급하면서 지내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불편해요.”

“방금 전에는 별로 안 불편하다면서요? 이제 본심이 나오네요. (웃음) 질문자가 불편한 것은 딸 문제도 아니고 남편 문제도 아니에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내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내가 불편한 거예요.”

“아...”

“그런 모습도 편안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면 생각을 이렇게 바꿔보세요.

‘우리 딸이 커가는구나. 남편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구나.’

남편도 딸에게 부정적인 역할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딸을 좋게 봐주는 나만 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딸이 제 마음대로만 하려 들 때 제재를 가해주는 남편도 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을 모두 좋게 보면 됩니다.”

“영영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이 돼서요.”

“그렇게 될 가능성은 아주 낮아요. 딸도 앞으로 고등학교며 대학까지 다니려면 아빠의 지원을 받아야 하니까 마냥 자기 고집대로는 못 해요. 그리고 아빠도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렇게 미워하면 어떻게 살겠어요? 부부도 결혼하면 처음에는 찌그럭찌그럭 많이 싸우잖아요. 이걸 두고 ‘사랑싸움’이라고 하죠. 남이 볼 때는 싸우는 것 같지만 사랑싸움이에요. 사랑싸움에 대해서는 옆에서 일일이 끼어들면 안 돼요. 당사자들끼리 싸우도록 좀 놔두는 게 낫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 적응하고 관계를 조율하게 돼요. 옆에서 억지로 끼어들면 관계만 나빠지기 십상입니다. 이 정도는 그냥 성장하는 과정이자 적응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봐주면 돼요. 나와는 관계없는 아빠와 딸의 일상생활이라고 생각하고 구경꾼이 돼서 그냥 지켜보면 됩니다. 그걸 두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남편 하고도 잘 지내고 있고, 딸아이하고도 잘 지내고 있거든요.”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질문자가 두 사람에게 ‘잘해라’ 이러면, 질문자는 양쪽 모두와 싸우게 됩니다. ‘너희 둘이 관계를 잘 풀어라’ 이렇게 말하면, 우선은 딸이 내 말을 안 들으니까 나와 딸의 사이가 나빠져요. 그리고 남편과도 딸 문제를 갖고 싸우면 나와 남편의 사이도 나빠지겠죠. 그래서 딸과 남편의 관계가 나쁜 걸로 인해 나와 딸의 관계도 나빠지고, 나와 남편의 관계도 나빠지고, 결국 나와 남편과 딸의 관계가 모두 나빠지게 됩니다.

세 사람의 관계를 삼각형에 비유한다면 삼각형의 세 변이 다 관계가 나빠지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지금처럼 딸과 남편만 관계가 나빠지고, 나와 남편은 관계가 괜찮고, 나와 딸은 관계가 괜찮은 편이 더 나을까요?”

“...”

“그러니 이런 문제는 옆에서 뭐라고 말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당사자들끼리 좀 싸우는 과정을 거쳐야 적응이 되는 거예요.”

“남편과 딸이 1년에 네다섯 번은 싸우는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자주 싸우는 것도 아니에요. 1년에 스물다섯 번쯤 싸운다면 또 모르겠지만, 네다섯 번이면 별 일 아닙니다. 그 정도면 드문 편에 속해요.”

“싸울 때마다 두 달씩 얘기를 안 하니까 1년 중 6개월은 서로 얘기를 안 하고 사는 셈이에요.”

“얘기 안 하면 어때요? 둘이 얘기 안 하면 집도 조용하고 좋죠. 나하고 딸하고 얘기하고, 나하고 남편하고 얘기하면 되잖아요. 질문자가 ‘내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개선시키겠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딸은 버릇이 안 고쳐져요. 왜냐하면 딸은 아빠와의 관계를 엄마를 통해서 풀려고 하고, 남편도 딸과의 관계를 본인이 직접 풀지 않고 아내를 시켜서 풀려고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질문자만 중간에 끼어서 처지가 어려워져요.

그러니 남편이 아이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그래, 당신 힘들지?’ 이렇게 토닥여 주고, 또 아이가 아빠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그래, 아빠 때문에 힘들지?’ 이렇게 마음을 받아 주세요. 절대로 딸 편을 들어도 안 되고, 남편 편을 들어도 안 돼요. 반대로, 남편 말을 듣고 딸을 비판하거나, 딸 말을 듣고 남편을 비판해도 안 돼요. 누구의 편도 들지 말고, 누구의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얘기하면 그냥 ‘아이고, 그렇구나’ 이렇게 받아주기만 해야 합니다. 남편이 얘기하면 ‘우리 딸이 사춘기라 그런가 봐’라고 말해주고, 딸이 얘기하면 ‘아빠가 널 사랑해서 그래’라고 말해주세요. 그냥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스님이 즉문즉설에서 비슷한 말씀을 예전에 하셨던 영상을 보고, 제가 똑같은 얘기를 남편한테 말하니까 굉장히 언짢아하더라고요.”

“똑같은 얘기라고 해도 그때 질문한 당사자한테 한 얘기이지, 지금 질문자에게 얘기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자꾸 스님의 말을 빌려 자기 얘기를 하면 안 돼요. 질문자가 자기 얘기를 하다가 안 되니까 스님 말을 빌려서 남편을 설득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남편은 당연히 ‘왜 우리 일에 스님이 끼어드나’ 이렇게 느끼게 되어서 기분이 나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 함부로 적용해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법문은 나에게만 적용해서 들어야지, 남한테 적용하면 비수가 돼요.”

“알겠습니다. 스님.”

“자기 편하려고 스님의 말을 이용하니까 스님까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항상 법문은 나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남에게 ‘스님이 이래라 그랬다, 저래라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말하는 즉시 그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비수가 돼요. 누구든지 본인을 나무라면 싫어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법문을 빌려서 남편을 나무라니까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듣기 싫을 수밖에 없어요. 아이의 입장에서도 싫을 수밖에 없고요. 질문자가 아이한테 ‘스님이 아이는 아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라고 말하면 아이는 스님까지 싫어져요. 또 질문자가 남편한테 ‘스님이 아이들을 잘 감싸 안으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스님이 미워지는 거예요. 이런 건 옳지 않습니다.

항상 법문은 나에게만 적용해야 해요. 이것이 수행의 원칙이에요. ‘겸손하라’라고 하면 내가 겸손하면 되지, 다른 사람더러 ‘겸손하게 굴어라’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보시하라’라고 하면 내가 그 말을 듣고 보시하면 되지, 다른 사람더러 ‘보시하라고 하더라’ 이러면 안 됩니다.

어떤 말이든 객관적으로 그 말이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말을 절대화하는 거예요. ‘겸손하라’ 하는 말을 절대화하면 안 돼요. 그 말을 나에게 적용할 때는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만, 그걸 남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될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관점을 잘못 잡고 있어요.”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 작년에 제가 암투병을 했고, 시어머님도 치매에 걸리시는 등 큰일을 치렀는데도 시동생 부부가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게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이 듭니다. 어떡하죠?
  • 학교에서 토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교수님께서 저를 비난하고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서 본인에게 찍히면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요?
  • 아이들에게 정갈하고 부지런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현실은 너저분한 집을 정리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저를 닮을 생각을 하니 또 힘이 빠집니다. 어떡하죠?
  • 스님께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승자독식 선거제도에 대해 비판한 기억이 있는데, 정토회에서는 이에 대해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할 계획이 있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질문자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남편과 딸의 갈등 때문에 힘들다는 질문자도 한층 밝아진 얼굴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남편이 어른으로서 아이를 이해해 줘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했는데, 남편의 행동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인 줄 알게 되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를 편안하게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스님 말씀과 부처님 말씀을 저한테만 적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밤 9시가 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하고,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 후, 오후에는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고, 저녁에는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3

0/200

땅띠루

손병희선생님의 업적 잘 배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 스님의 말씀은 저에게만 적용된다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5-03 19:20:07

법문을 빌려서 나무란 적이 있는데 명심하겠습니다^^

2022-05-03 15:52:03

조수림

우리집을 보는 것 같네요~ㅎ
울 남편이 오늘 내용을 링크해준거보니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뜻이었군요 저두 둘사이에 개입해서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놔야겠어요

2022-05-03 09:15:23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