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2.18 천일결사 기도, 경전대학 즉문즉설, 통일의병 정기총회
“예의 없는 말을 들었을 때 불쾌해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죠?”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새벽 4시 30분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예불,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한 후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두북 공동체 대중과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나서 공동체 생활을 회향하는 두 행자님이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두 행자님이 밖에 나가서 어떻게 살면 좋을지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잘 사시기 바랍니다. 공동체 안에서 살다가 밖에 나가면 오히려 안에 살 때보다 수행이나 활동을 더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마치 전통적인 절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속퇴하면 일반 사람들보다 더욱더 절에 안 다니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몇 년이라도 공동체 안에서 산 공덕이 있으니까 공동체 안에서 살 때만큼은 못하더라도 일반 대중보다는 더욱더 수행과 전법을 열심히 하면서 사회생활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생활이 정리되면 언제든지 다시 공동체에 들어오셔서 활동하시고요.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들어오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웃음)

오전 10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특강을 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경전대학 학생들이 모두 자리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한 후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경전대학 학생 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전대학생 여러분, 공부할 만합니까?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남부지방이라 따뜻한 편인데도 영하 9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전국이 냉동고가 된 상황이네요. 예전 같으면 손을 호호 불며 법당에 와서 수업을 들었을 텐데 따뜻한 방에 앉아서 강의 들으니까 좋죠? 이렇게 우리가 사는 환경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산, 사막, 바다나 먼 거리가 관계를 맺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면 지금 가장 큰 장애는 마음의 거리감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문을 여느냐, 닫느냐가 가장 큰 장애이지 이제 거리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경을 배웠고, 앞으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한, 엑기스만 모은 반야심경을 배우게 됩니다. 수업에서 마음공부의 원리에 대해 배워도 현실 속에서는 실천이 잘 안 되는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첫째,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치를 몰라서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둘째, 이치를 알아도 찰나 무지, 순간 사로잡혀서 배웠던 것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살아온 습관대로 행해버립니다. 지난 뒤에 놓쳤다는 것을 돌이켜서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 둘째 이치를 알아도 현실에서는 안 되니까 자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이 곧 수행입니다. 그러니 수행은 늘 시행착오가 있고,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안 되더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다섯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예의 없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질문했습니다.

예의 없는 말을 들었을 때 불쾌해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죠?

“수행문을 읽으면서 ‘모든 괴로움은 내 마음이 일으킨다’는 걸 새기고, 평소 화가 어디서 일어나는지 관찰하고 참회하면서 가족 및 주변 지인들과의 관계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 달 전 이름만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예의 없는 말을 들었는데,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불쾌함이 어디서 오는지 제 마음을 들여다봤고, 제가 ‘예의’라는 상(相)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상대방이 예의가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무지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제대로 된 결론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도 하는데 그래야 하는 것인지, 그냥 상대방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계속 저렇게 행동하면 그만한 과보를 받겠지’하고 침묵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다’는 삼귀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고통받는 중생이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중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하는데, 질문은 길었지만 핵심이 없네요. 그냥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는데 그때 제가 기분이 나빴습니다’ 하고 질문을 하면 대화가 쉽게 이어질 텐데, 2분 가까이 질문을 했는데도 뭘 말하고자 하는지 불분명해요.”

“제가 기분이 나빴거든요.”

“기분이 나빴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했을 때 기분이 나빴는지 그 정황을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있겠죠. 그냥 기분이 나빴다고만 하면 질문자의 기분 문제니까 남을 탓할 일이 아니잖아요. 길을 가다가 기분이 나쁘면 길을 탓하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기분이 나쁘면 하늘을 탓하고, 나무를 쳐다보다가 기분이 나쁘면 나무를 탓하는데, 내 기분이 나쁜 건 내 문제이지 다른 걸 탓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하늘에 구름이 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하면, ‘하늘에 구름이 꼈는데 네가 왜 기분이 나쁘지?’하고 물어볼 수 있어요. 질문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빴어요?”

“당시 제가 디스크에 걸려서 몸이 안 좋았는데, 그분이 아이를 낳으면 뼈가 벌어졌다가 다시 붙는 과정이 있으니 아이를 낳으면 조금 좋아지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기분이 나빴어요?”

“제가 미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기분이 나빴어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몸에 무리가 가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좋아지는 경우도 있어요. 신체 장기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아서 병이 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그 사람은 출산 경험이 없어서 생기는 일일 수도 있다고 자기 생각을 말한 거잖아요.”

“그런데 만약 제가 아이를 낳고 싶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저한테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면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 아닐까요?”

“그 사람이 질문자의 상황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사람에게 예의를 찾아요? 그 사람은 질문자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인지 낳을 수 없는 몸인지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은 질문자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한 거예요. 그러면 ‘그게 좋은 처방일 순 있는데,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렇게 하기는 힘든 상태입니다’라고 설명을 해주면 되죠.”

“그런데 저는 사람이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말은 없어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정함이 없어요. 경전대학 수업 시간에도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배웠잖아요. 정해진 게 없다는 게 곧 ‘무유정법’이에요.”

“저도 이 괴로움이 제가 어떤 상을 짓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인지 생각을 해봤어요.”

“이 일은 ‘내가 상을 짓는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어요. 지금 상황은 상대방이 어떤 말을 했는데, 그게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라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 질문자가 그 사람한테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냐?’하고 따지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자기 생각을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질문자한테 욕설을 뱉은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식견대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나아질 텐데’ 이렇게 말을 한 것뿐이에요. 게다가 그 사람은 질문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서요?”

“네.”

“질문자를 잘 모르니까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 저 사람은 저런 견해를 가지고 있구나’ 하면 되죠. 또, 내가 듣기에 조금 이상한 이야기 같다 싶으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고 물어보면 됩니다. 그 사람이 근거를 이야기하면 들어보고 의학 상식에 맞지 않으면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비과학적인 것 같네요’ 이렇게 말을 하면 됩니다.”

“그 당시에 제가 당황을 해서 그렇게 말하는 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 일 자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덜하게 되었지만, 이와 관련하여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보살행에 들어가는 것인지 궁금해요.”

“이 문제랑 고통을 주는 중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질문자가 생각으로 또 일을 벌이는 것 같네요.”

“네.(웃음) 그런데 고통을 주는 중생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너무 수동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왜 수동적이에요? 질문자가 볼 때 법륜스님이 수동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 같아요?”

“아니요.”

“그런데 그걸 왜 수동적이라고 봐요?”

“만약 지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때릴 때, 그걸 보는 사람은 ‘저들 사이에는 저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과거의 과보로 일어나는 일일 거야’하고 그냥 지나쳐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질문자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는 내 자유예요.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관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냥 가던 길을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때린 것도 아니니까 그건 질문자 자유입니다. 만약 맞고 있는 사람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가서 싸움을 말리면 됩니다. 말리는 과정에서 내가 대신 맞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죠. 그럴 때 맞는 사람을 피신시키고 내가 대신 맞는 것도 싸움을 말리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때리는 사람에게 ‘당신이 많이 화가 난 것 같은데, 저 사람 대신 나를 때리십시오’ 이런 자세를 취하면 관세음보살의 길, 예수님의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게 곧 자기를 희생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자세입니다. 누가 맞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보통 사람이고, 맞는 사람을 대신해서 맞아주면 보살, 성인이 되는 거죠.”

“제가 이 부분이 궁금했어요. 맞는 사람을 대신해서 맞는 것이 보살행이라는 건 이해가 가는데, 만약 제가 때리는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면 그것도 그 사람에게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을 막는 행동 아닐까요?”

“그것도 한 방법이죠.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적이 없잖아요.”

“네.(웃음) 그러면 이때 누가 고통을 주는 사람이고, 누가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는 건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신고를 한 다음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해보면 정황을 자세히 알 수가 있겠죠. 지금 당장 내 눈에는 때리는 사람이 가해자 같고, 맞고 있는 사람이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막상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해보면 실제로 맞고 있는 사람이 때린 사람에게 그보다 더한 큰 피해를 줬거나 평소에 많이 괴롭혀서 맞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맞는 사람이라고 해서 지켜줬는데 실제로는 그 행동이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는 속사정이 어떠한지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질문자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리고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때리고 맞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싸움을 말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약 힘으로 말릴 수 없어서 대신 맞는 일까지 생길 수도 있죠. 또는 폭행을 목격한 그 자리에서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싸움을 말리거나 신고를 하는 건 적극적인 삶의 행위입니다. 계율을 배울 때는 적극적인 행동을 권장하기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일, 즉 금지사항을 배웁니다. 적어도 남을 때리거나 괴롭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남을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으면 적어도 나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대신 선한 사람도 아니겠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경우입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거나 대신 맞는 일을 하면 보통 사람을 넘어서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훌륭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이때 보통 사람이 될 거냐 훌륭한 사람이 될 거냐는 자기 선택입니다.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악은 멈추어야 하지만, 선은 행하면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은 하면 좋다고 권할 수 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어요. 질문자는 지금 좋은 행동을 하지 않은 걸 나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은 행동에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네요.”

“네, 배우면서 수동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질문자가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언가 할 용기가 없으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동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여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 수동적으로 가르친다’며 부처님 핑계를 대고 있네요. 어떻게 보디사트바가 수동적일 수가 있어요? 그러나 능동적이지 않다고 해서 비난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니까 또 질문이 생기는데 지금 시간이… (웃음)”

“궁금한 게 있으면 계속 질문을 하세요.”

“누군가 때리거나 욕설을 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게 명확하게 구분이 가지만, 은연중에 다른 사람을 비꼬거나 상처를 주는 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궁금해요. 가령, 직장생활에서 욕을 하는 건 아니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처럼 겉으로 보기에 애매한 잘못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질문하는 걸 보니까 질문자는 아직 남 탓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이렇게 남 탓하는 이야기라면 굳이 금강경, 반야심경을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하 사람이 다 남 탓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금강경, 반야심경에서는 남의 탓을 하면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으니 남의 탓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계속 남의 탓을 하고 있네요.

이 사람은 이래서 내가 기분이 나쁘고, 저 사람을 저래서 내가 기분이 나쁘고, 이렇게 계속 남 탓을 하고 살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살면 돼요. 이 사람한테 가서는 ‘너 왜 옷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입었냐’고 따지고, 저 사람한테 가서는 ‘너 왜 걸음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걷냐’고 따지고, 또 다른 사람한테 가서는 ‘너 왜 말을 기분 나쁘게 하냐’고 따지는데, 이렇게 내가 기분 나쁘다고 그 사람한테 가서 따지는 게 말이 되나요?”

“안 돼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고, 자기가 걷고 싶은 대로 걸음을 걷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안 좋은 영향을 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말을 하면 됩니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데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제 기분이 안 좋네요’하고 말을 하거나, ‘그렇게 말을 하니까 제가 듣기에 조금 불편하네요’ 이렇게 말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상대방이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같이 안 살면 돼요. 상대방이 옷이 문제가 되면 좋은 옷을 사 입으라고 돈을 주거나, 관청에 고발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면 관청에 민원을 넣거나, 이렇게 필요한 행동을 하면 되지 그 사람 때문이라고 탓을 해봐야 나만 괴롭지 개선되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 아무 행동은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잘못됐다는 말만 하면 어떡해요?”

“모든 괴로움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아서요.”

“지금 그게 괴로움을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아무런 행동은 하지 않고, 이 사람은 이게 문제고, 저 사람을 저게 문제라고만 하고 있으니까 자기만 괴롭죠. 이렇게 하는 건 결국 자기 문제예요. 누가 때리면 그게 부당한 일이라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돼요. 행동을 해야지 가만히 앉아서 ‘이럴 때는 맞고 있는 게 불교인가, 경찰에 신고하는 게 불교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네, 잘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남이 나를 때리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람을 때리는 건 ‘정당방위’로 인정을 받고 형사적인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남이 나를 때리니까 나도 너를 때린다는 건 성인의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당방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당방위는 학교에서 이미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정당방위에 대한 문제라면 질문자가 직접 실천을 하면 됩니다.

정당방위라는 명목 하에 싸운다면 이 세상의 싸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우리가 경전을 통해 배우는 건 그걸 넘어서는 도리가 있다는 걸 배우는 겁니다. 이 도리는 성인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닙니다.

욕심을 내는 건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과보가 따를 뿐입니다. 그러니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과보를 받고 싶지 않다면 욕망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욕망을 따랐다면 기꺼이 과보를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돈을 빌렸으면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합니다. 이자까지 갚는 게 힘들면 다음부터는 돈을 안 빌리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종아리가 만지고 싶은 사람은 만지고 성추행범으로 감옥에 가면 됩니다. 그런데 순간적인 욕망에 휘둘려서 감옥에 가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설령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만집니까?’ 이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욕망을 멈추지 못하면, 만지고 감옥에 가면 됩니다. 이건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만약 누가 내 다리를 만졌다면 그건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나를 좋아해서 만졌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도 되고, 나는 괜찮지만 이대로 두면 다른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신고를 하면 됩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워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행동은 그다음 단계입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고를 하면 됩니다. 신고를 할 때도 더 큰 피해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신고를 하면 되지 괴로워하면서 신고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이 발생하면 대개 화를 냅니다. 이때 화의 감정은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화가 나지 않으면 신고도 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디사트바는 괴로움 없이 사회적 실천을 해나갑니다. 어떤 문제도 평화롭게 풀어나갑니다. 정토회에서도 민주화에 동참하기도 하고, 전쟁 반대 운동에 나서기도 하고, 환경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괴로워하면서 한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닙니다. 수행의 관점에서는 내가 이런 활동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 괴로움이 있는가 여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 자기 수행부터 해야 합니다. 자기 수행이 어느 정도 되어서 자기가 괴롭지 않은 단계가 되면, 타인의 괴로움을 해소하는 유의미한 활동으로 넘어가도록 권합니다. 이것이 보살행이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입니다. 이런 길을 나아갈 때 결국 나도 좋고, 남도 좋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지 말고 꿈과 같으니 잊으라고 배웠습니다. ‘꿈이다’라는 가르침이 정말 꿈처럼 느껴진다는 말씀인지 꿈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 달마대사께서 혜가대사께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대목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고 한 구절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 불법은 자기를 향해야 한다 하시고, 부처님께서는 구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으셨다고 배웠는데, 전법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 어떤 스님들은 경전의 뜻을 알지 못해도 무조건 외우면 공덕이라고 하는데 그냥 외워도 공덕이 되나요?

마지막으로 질문자들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대화 중에 야단을 맞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모를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웃음)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조금 부끄러워해야 해요. (웃음)”

“네. (웃음)”

“그래야 발전이 있어요, 아시겠죠? (웃음)”

“네. (웃음)”

대화를 다 마치고 나니 12시가 넘었습니다. 스님은 다음을 기약하며 즉문즉설 강의를 마쳤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병이라고 합니다. 예정된 시간이 지났으니 아쉽지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시고 다음 달에 또 뵙겠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고, 곧바로 오후 1시부터 2차 만일결사준비위원회(만준위)와 함께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만준위에서는 ‘미래 연구’를 주제로 각 분야별로 학습하고 토론한 내용을 발표하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질의응답을 마친 후 스님이 닫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2차 만일결사는 여러분들이 살아갈 30년이니까 여러분이 잘 설계해 보세요. 자기가 살 집은 자기가 설계해야지 남이 지어준 집에 들어가서 살려면 불편해요. 자기 집은 자기가 지어야 살기가 편합니다. 설령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살아도 불편할 수 있는데, 그래도 남이 지어준 집보다는 덜 불편해요. 물론 남이 집을 지어주면 건물은 잘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서 살아보면 내 생활 패턴과 안 맞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지은 집은 건물은 좀 부족해도 내가 살기에는 편합니다.

그러나 남이 지어준 집은 보완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머리를 맞대고 집을 잘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어서 3시부터는 평화재단 통일의병 온라인 정기총회에 참석했습니다. 통일의병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한반도 평화와 2022년 정세 전망’을 주제로 스님에게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통일의병의 역할에 대해 40분 동안 강연을 한 후 궁금한 점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질의응답을 마친 후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정기총회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오르고, 영하의 날씨에 찬바람이 매섭게 불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생방송한 후 오후에는 농사일과 결사행자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에는 일요 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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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정토

괴로울 때 그 원인을 밖으로 돌리는지 아닌지 늘 점검하겠습니다.

2022-01-08 22:09:53

실상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습이 필요하구나 배웁니다.
남탓을 하면 내가 괴롭습니다.
어렵지만 여전히 저도 이러고 사는데
한생각 돌이키네요. 스님,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2022-01-02 18:40:07

권해순

남탓하지 않는것이 정말 어렵네요..
금강경, 반야심경 공부하며 깨달음을 조금 얻었나 했는데..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또다시 중생이 되어 남탓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말씀 읽으며 반성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2021-12-31 18: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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