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2.17 금요 즉문즉설, IBC(국제불교협회) 초청 강연
“엄마의 재산을 가져간 언니가 괘씸해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정토불교대학 교과개편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내년에는 만일결사 회향 기념으로 정토불교대학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게 하고자 많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은 지난 회의 때 결정된 사항을 조금 더 보완해 와서 발표했습니다. 전 국민에게 어떤 방식으로 홍보할지, 쉽게 공부할 수 있게 하려면 학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교과 내용을 어떻게 편성해야 하는지, 많은 논의를 했습니다.

토론을 마치고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토론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실천적 불교사상의 내용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좀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해서 강의를 해보면 좋겠다는 의견으로 모아진 것 같아요. 그 속에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불교 교리 과목을 별도로 배정할 게 아니라 연기법과 중도에 대해 좀 더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조정하고, 불교변천사는 과목을 빼고 경전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조정하고, 대략 이런 정도로 논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정토불교대학을 쉽고 바르게, 실천할 수 있게 개편을 해보자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준비를 잘해서 30년 전에 정토회가 세웠던 만일결사를 유의미하게 마무리하고, 이 좋은 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많은 국민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해봅시다.”

내년 3월 20일에 만일결사 회향기념 정토불교대학을 개강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 후 11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12시에는 두북 공동체 대중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한 해를 보내는 송년 모임을 조촐하게 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유통 사업하느라 수고했고, 난방 공사하느라 수고했고, 농사짓느라 수고했고, 선물 포장하느라 수고했고, 방송 업무 하느라 수고했고, 스님의 하루 쓰느라 수고했고, 대중 생활 챙기느라 수고했어요.”

스님은 두북 공동체 성원들 한 명 한 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두북 공동체 대중들도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스님이야말로 한 해 동안 가장 수고가 많으셨어요.”

오후가 되자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습니다. 겨울의 한 복판으로 성큼 들어선 느낌이었습니다.

영하의 날씨 속에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시도별 밴드를 통해 24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날씨가 굉장히 추워지고 있습니다. 서울이나 북쪽은 오늘 아침부터 추웠을 것 같고요. 제가 있는 이곳 남부 지방도 오후부터 찬바람이 폭풍처럼 불어오면서 영하로 떨어졌어요. 내일 아침에는 영하 9도까지 떨어진다고 하니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되겠습니다. 내일은 아침뿐만 아니라 낮 기온도 영하에 머물 정도로 춥다고 하네요. 이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집에서 여러분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강연이 좋기는 한 것 같아요.” (웃음)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세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엄마의 돈을 가져간 두 자매가 괘씸하다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엄마의 돈을 가져간 두 자매가 괘씸해요

“저는 여섯 자매 중에 둘째입니다. 다섯째 동생은 이혼을 하면서 살 집이 없다고 부모님께 7천만 원을 빌려갔습니다. 첫째 언니는 이혼 후 직장 근처에 집을 얻어 홀로 사시는 엄마를 본인이 보살피겠다며 엄마가 살던 전세금 1억 1천만 원을 가지고 가서는 본인 명의로 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재활을 핑계로 요양병원에 모셔두고는 2년간 방치했습니다. 엄마의 노령연금과 기초연금이 들어오는 통장까지 가져가서 돈이 없는 엄마는 간식도 못 사드시고 담배도 꽁초를 주워서 피웠습니다. 엄마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을 때 병원에서는 보호자로 되어 있는 언니에게 수차례 전화를 하였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결국 저와 동생이 큰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간병을 했었습니다.

엄마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있게 되었고 병원비가 감당이 되지 않아 큰 언니에게 병원비 좀 달라고 집을 찾아갔더니 우리 자매 4명을 주거 침입죄로 신고를 하였습니다. 저희 넷은 엄마 병원비로 3천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고,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돈을 가지고 간 두 자매는 어떠한 뉘우침도 없습니다. 저희 넷은 엄마의 병원비를 한 푼도 보태지 않은 두 자매가 괘씸해서 소송을 했지만 1심에서 기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언니와 동생이 엄마가 요양병원에 있을 때 돈에 대한 민사적·형사적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엄마의 서명을 받아 놓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항소 중인데 2심에서 승소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들었습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며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요양병원의 벽을 긁으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우울증 때문에 농약을 마시고 20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셨는데, 그때도 첫째 언니는 슬퍼하기는커녕 농약병을 보고 저렇게 적은 농약을 먹고 죽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엄마가 아플 때도 ‘엄마가 아프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너희들이 엄마 모신다고 데리고 갔으니 병원비도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든데, 제가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할까요?”

“질문 내용을 들어보니까 질문자가 나이는 어른인데 마음 씀씀이가 어린아이예요. 나이와 심리 상태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금 질문자가 괴로운 겁니다.

첫째,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인 ‘범죄’가 있습니다. 남을 때리거나 죽이는 행위는 범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형사적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형사적인 처벌이란 국가 권력이 그 사람에게 죄를 묻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남의 재산을 강제로 뺏거나 몰래 훔치는 행위 역시 범죄에 속합니다. 셋째, 그 어떤 사랑의 표현도 상대가 거부할 때 하면 성폭행이 됩니다. 그것도 역시 국가 권력이 관여해서 처벌을 합니다. 넷째,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쳐서 상대에게 손실을 끼치거나, 욕설을 해서 굉장한 모욕감을 느끼게 만들면, 즉 행동이 아니라 말로라도 상대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것 역시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어요. 다섯째, 술을 먹어도 괜찮지만 취해서 행패를 피우고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면 그것도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두 자매의 행위는 이 다섯 가지 중에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형제간의 우애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굉장히 나쁘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는 누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사적인 처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민사 소송, 즉 개인과 개인 사이에 약속을 어겼느냐 안 어겼느냐 이런 문제로 시비를 가릴 수는 있어요. 이 경우는 검찰과 같은 공권력이 처벌하는 게 아니고, 쌍방의 변호사들이 변호하는 것을 듣고 판사가 판결해주는 겁니다.

딸이 이혼을 하고 나서 힘들어하니까 엄마가 딸에게 돈을 주어서 딸이 어머니의 재산을 가지고 간 겁니다. 딸이 엄마의 돈을 받아가서 엄마를 모셨고, 엄마가 병이 나니까 혼자 못 모시겠다 싶어서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보낸 거예요. 이런 일은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소송을 해도 질 수밖에 없어요.

나머지 네 자매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하고, 또 형제간의 우애라는 관점에서는 우애를 어겼다고 볼 수 있죠. 이런 경우는 형제간에 왕래를 안 하면 되지, 법적으로 따질 수 있는 조건은 안 된다는 겁니다. 동생들이 찾아와서 막 성질내고 따지니까 남의 집에 허락도 안 받고 왔다는 이유로 언니가 주거침입죄로 신고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자매지간에 서로가 우애를 발휘하여 부모님을 잘 보살피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아주 칭찬받을 만 하고 훌륭한 일이지만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는 그게 죄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모시는 것이 자녀의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결혼한 남녀가 바람을 피우면 간통죄라고 해서 죄가 됐습니다. 지금은 상호 강제성이 없었다면 그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남편이나 아내가 결혼 약속을 어긴 문제에 대해서는 정신적 피해를 이유로 민사소송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언니한테 소송한 것은 민사소송이라고 해도 이기기가 어려워요. 심정적으로는 언니가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기적이라고 해서 무슨 처벌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게 판사가 하는 일이면 왜 스님한테 물었겠어요?’ 하고 질문자는 반문할 수 있겠죠.

이것이 현실이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언니가 어떻게 엄마한테 그럴 수가 있냐? 우리 자매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하는 생각은 어릴 때에는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서 결혼까지 했다면 자매라고 하더라도 이웃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의 돈을 뺏은 게 아니라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돈을 얻어가는 것은 자녀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돈을 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네 명의 자매가 부모님을 모실 수 있을 만큼 모시면 되지 그걸 언니한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겁니다. 언니에게 요청을 했을 때 언니가 거기에 응하면 다행이고, 응하지 않으면 그만인 거예요. 자매 6명이 똑같이 부모를 모시라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남겨진 유산이라면 법적으로 똑같이 나눠야 하지만, 살아계실 때 이미 받은 것은 증여를 받은 것과 같아요. 증여를 받은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언니를 괘씸해하면 본인의 가슴만 아프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언니가 엄마한테 받은 돈 중 일부를 병원비로 내겠다고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언니의 권리이고 자유니까요. 질문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니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언니와 관계를 안 맺으면 돼요. 두 사람 사이에 거래를 하다가 자꾸 손해가 나면 거래를 끊으면 되는 것처럼요. 왕래를 끊으면 되지 언니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언니를 탓하면 언니가 괴로워지는 게 아니라 질문자가 괴로워지는 겁니다. 부모를 봉양하느라 돈은 돈대로 쓰고, 또 언니를 미워하니까 내 가슴은 내 가슴대로 답답하고, 또 자매끼리 우애는 우애대로 나빠지게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질문자는 착할지는 몰라도 어리석어 보여요. 자신을 보살필 줄 모른다는 점에서 어리석다는 겁니다. 자신이 옳고 언니는 나쁜 사람이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자가 괴로운 거예요.

어머니의 돈을 가져갔던 빌려갔든 어쨌든 언니가 지금 알거지가 되어서 질문자가 도와줘야 될 정도로 어렵게 사는 게 좋아요? 그래도 밥 먹고 사는 게 좋아요?”

“언니가 정말 알거지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제가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있는 수행자로서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거지가 되기보다는 언니가 엄마 돈이라도 가져가서 잘 사는 게 낫습니다.”

“그건 수행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언니가 알거지로 산다면 질문자를 찾아올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질문자가 언니에게 돈을 줘야 할 가능성도 있어요. 언니에게 돈을 주면 아깝고 그렇다고 안 주면 가슴이 아프겠지요. 언니가 알거지로 사는 것보다 손 안 벌리고 사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에요. 감정적으로 기분 나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언니가 거지가 되어 버리면 질문자에게 손해가 나잖아요. 그러니 ‘언니가 안 죽고 손 안 벌리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라고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언니가 질문자가 원하는 만큼의 언니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무슨 몹쓸 짓을 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손가락질받는 사람도 많잖아요. 가령 국가 재정을 축내거나 사기를 치거나 남을 폭행하거나 성폭행하거나 절도하는 사람도 있는데 언니가 그런 사람에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질문자가 원하듯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부모를 봉양하는 그런 수준의 언니는 아니죠. 질문자의 언니는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만큼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언니를 미워하면 질문자만 괴로워집니다. 여섯 자매 중에 네 명은 평균보다 조금 괜찮은 사람이고, 두 명은 훌륭하지 못한 사람에 속하는 겁니다. 질문자가 그 두 명을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여섯 자매 중에 두 명은 나쁘고 네 명은 착하다고 보는 게 나아요? 네 명은 착하고 두 명은 보통 사람이라고 보는 게 나아요?”

“후자가 낫습니다.”

“부모님이 볼 때도 그게 낫겠죠. ‘용서해 준다, 수행자니까 좋은 마음을 가져야 된다’ 이런 생각하지 말고 ‘언니가 현실적으로 사회에서 지탄받을 만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감정적으로는 아예 거지가 되면 좋겠지만 그래도 손 벌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겁니다. 언니를 만나기 싫으면 안 만나도 돼요.”

“그런데 언니가 엄마 돈을 가지고 갈 때 엄마가 직접적으로 준 게 아니고 엄마를 자기가 보살피겠다면서 엄마의 전 재산을 가져간 거거든요. 본인이 한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는데 엄마 병원비도 내지 않으니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원하는 수준의 언니는 아니라는 거예요. 질문자가 언니를 너무 높은 수준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러니까 질문자는 ‘우리 언니라면 적어도 이 정도 돼야 되지 않느냐’ 하는데, 그 수준에는 못 미치는 건 맞아요. 그런데 부모 돈을 가져가서 탕진하고 부모한테 안 돌려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부모 돈을 가져가서 써버리고 부모한테 빚진 사람, 그리고 빚진 줄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은 될 거예요. 질문자가 어릴 때 함께 자란 아름다운 기억에서 볼 때 언니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결혼해서 살다가 남편하고 안 맞아서 이혼하고 혼자 살다가 악만 남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크게 잘못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리고 병원에 있는 엄마를 아무도 안 돌봤으면 나중에 자식들이 비난받을 수 있어요. 자녀가 돼서 부모를 돌보지 않았다고 말이죠. 그런데 언니는 부모만 잘 만난 게 아니라 형제도 잘 만난 거예요. 돈 안 가져간 동생들이 답답해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고 하니까 동생 찬스를 쓴 거예요. 집 얻는 건 엄마 찬스를 썼고, 엄마 보살피는 건 동생 찬스를 쓴 것뿐이에요. 질문자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괜히 나선 거예요. 착하다는 소리 들으려고 나서서 해놓고 뭘 그래요?” (웃음)

“잘 알겠습니다. 마지막에 말씀하신 ‘찬스’라는 그 말이 정말로 귀에 딱 들어오네요. 이제 이해가 돼요.” (웃음)

“착한 부모 있으면 부모덕 보고, 착한 동생들 있으면 동생 덕 보고 다 이렇게 사는 게 인생 아니에요? 질문자가 원하는 언니만큼은 안 되지만, 언니가 볼 때는 괜찮은 동생들 두었네요. 괜찮은 동생 된 건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이 일이 이미 지나갔어요? 안 지나갔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죠.”

“어머니도 돌아가셨는데요. 어머니가 살아계신데 언니가 어머니의 노령연금을 가져갔다면 중지시킬 수가 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질문자에게는 ‘언니에 대한 미움을 유지할까? 버릴까?’ 이것만이 현재의 과제죠. 다른 건 이미 다 지나가 버린 일이에요. ‘미워하는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게 유리한가? 버리는 게 유리한가’를 생각해봐야죠. 버리는 게 유리한 줄 알아도 못 버리는 바보 같은 사람들도 많아요. 질문자는 ‘우리 언니가 동생 찬스를 썼구나’ 하고 그냥 웃고 넘어가면 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할 때에도 괘씸한 딸을 나머지 네 명의 동생들이 막 미워하는 게 좋을까요? 그래도 엄마 입장에서 볼 때 여섯 명이 그래도 화목하게 사는 걸 엄마가 좋아할까요?”

“화목하게 사는 걸 좋아하실 겁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왜 엄마가 싫어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어요? 질문자 본인에게도 안 좋고 엄마한테도 안 좋은 일인데요. 민사소송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변호사한테 물어보고 승소할 수 있다면 소송을 해보는 것은 괜찮아요. 그건 질문자의 권리에 속하는 문제니까요. 자매니까 재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이런 일은 형제자매가 나이가 들면 집집마다 허다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히려 안 생기는 집이 간혹 있어요. 부모가 유산을 하나도 안 남기면 이런 일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부모가 재산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거의 필연적으로 생기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화목하게 살길 바란다면 죽기 전에 돈을 다 써야 돼요. 자녀들이 싸우는 게 싫으면 재산을 남기지 말고 사회에 환원해야 해요. 아니면 그걸 서로 가지려고 하는 자녀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저는 남자 친구와 6년째 연애를 하고 있고, 서로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지 않고 싶은데, 남자 친구는 절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해요. 제가 아이를 낳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보려 해도 마음속에서는 거부감이 듭니다.
  • 저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미국으로 건너와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느 정도 신분적, 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도 사람의 욕망에는 끝이 없고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안락하고 싶고, 청결하고 싶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등 감각적 쾌락은 잘 놓아지지 않는데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요?

질문자들의 소감까지 듣고 방송을 마치니 아홉 시가 넘었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후 스님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곧바로 9시 30분부터, 인도 현지 시간으로는 저녁 6시부터 IBC(국제불교협회) 주관으로 온라인 초청 강연이 열렸습니다. IBC에서는 스님에게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라는 주제로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국제불교협회 관계자들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요청한 주제에 대해 스님이 먼저 기조 강연을 했습니다.

“영어로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통역을 통해 얘기를 나누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온라인 기술을 이용해서 한국에 있는 저와 세계 각국에 있는 여러분들, 또 워싱턴 DC에서 통역해 주시는 분이 서로 연결되어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의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가르침

부처님께서는 이 세계가 단독자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연기적 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들이 있어서 제가 있고, 또한 제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있기에 이렇게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은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는 과학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분석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모순이 없다’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로 인해서 인간은 많은 혜택을 보고 있지만, 또한 과학 기술의 부작용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그런 부작용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치유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지금부터 2600년 전, BC 6세기 무렵 인도 대륙에서 태어나 진리를 탐구하셨고, 그 결과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라’ 하는 중도(中道, Middle Path)를 발견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불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붓다의 도움을 통해 얻고자 하는, 즉 복을 비는 종교적인 전통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복을 비는 행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비는 종교가 문명을 이끌어 갈 중심이 되지는 못합니다.

붓다는 청년 시절에 이미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왕자라는 높은 지위도 있었고, 재물도 많았고, 인기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했습니다. ‘저런 사람에게 무슨 고뇌가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고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의 고뇌는 어디서부터 올까? 저들이 볼 때 나는 고뇌가 없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갖고 있는데, 왜 나의 고뇌는 더 클까?’

그래서 그는 고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했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왕자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전반적으로 그런 생존의 문제에 걱정이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였습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3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저는 이 양 극단을 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사람들이 60년 전 사람들보다 300배 더 행복한가요? 아니면 3배라도 더 행복한가요? 답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도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져야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인당 GDP가 3만 달러에서 30만 달러로 늘어난들 과연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이런 과정에서 지구 환경은 계속 파괴되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하던 문제는 해결되었을지 몰라도, 빈부 격차는 더욱더 벌어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자랄 때는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더 생활이 넉넉해졌지만,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은 본인이 자랄 때보다 미래에 더 좋은 조건이 된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저희 세대가 어릴 때는 아무리 가난해도 결혼해서 자녀를 얻고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은 결혼도 못 하고 있고, 결혼한다 해도 자녀를 갖기 어렵고, 키우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부유하지만 직장이 없기에 부모님 집에서 기생해서 살아야 합니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한국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한국에 사는 젊은이들은 한국을 ‘지옥(hell)’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고뇌는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가 고뇌한 것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푸는 데 가장 가슴에 다가오는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의 조건은 붓다의 젊은 시절과 같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되기 어려웠고, 복을 빌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교는 사회적인 요구를 받아들여서 계급을 합리화했고, 여성을 차별하고,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은 것을 숭상하는 가르침으로 전락했습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된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야 왕이 된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야 부자가 된다.’

이런 논리를 통해 세속적 삶을 합리화했습니다. 정말로 전생에 잘못 살아서 여자가 됐습니까? 전생에 잘못 살아서 가난한 사람이 됐습니까? 전생에 잘못 살아서 노동자가 됐습니까? 전생에 잘못 살아서 장애를 갖게 됐습니까? 이것은 붓다의 원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은 물론이고 인권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봉건적인 사고방식으로 현대 문명의 과제를 해결하는 게 가능할까요?

오늘날 한국의 상가는 바깥의 일반 사회보다 훨씬 더 봉건적이고 성차별적입니다. 민주적이고 성평등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봉건적인 집단에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젊은이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승려의 수는 급격하게 줄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가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종교가 봉건적인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굳어진 틀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이런 많은 고뇌를 해결하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붓다는 성차별과 계급 차별이 심했던 2600년 전에 이미 성차별과 계급 차별의 모순을 지적하고, 상가에서 일부나마 그 개혁을 실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전통 불교를 보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하는 테라밧다에서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통(culturally traditional) 불교일지는 몰라도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 즉 정통(original) 불교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통은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통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린포체(Rinpoche)가 죽었다 환생해서 린포체가 된다는 것은 왕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 전통을 존중하는 것과 그것이 담마인지 규명하는 문제는 조금 달리 봐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 전통, 종교, 종파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적 전통을 존중하는 것과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붓다의 가르침은 조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가 미래에도 리더십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불교가 갖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존중하는 것과 미래의 리더십을 갖는 것 사이에는 이런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전통은 존중해야 하지만, 너무 전통에 묶이면 미래에 리더십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더 비중을 둬야 할 것은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과제에 대해 불교가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의 충족을 미화하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어떻게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부자가 되는 게 복이라고 믿는 사상으로 어떻게 빈부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개개인들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리석음, 즉 무지를 깨우치는 수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밖으로부터 복을 구할 것이 아니라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으로 생겨나는 괴로움도 직시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라면 그것이 계급제도이고 성차별이었습니다.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오늘도 그 문제는 아직도 계속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도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후 위기입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빈곤 퇴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볼 때 그들의 빈곤은 우리의 풍요와 별개가 아니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나의 생각은 옳은 것일까요? 나와 너는 다른 것일까요? 생각이 다르고, 믿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제도가 다르듯이, 이렇게 ‘다르다’ 하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까요? 그르다고 보면 상대를 고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다르다고 보면 우리는 공존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문제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은 대안의 실마리를 마련해 줍니다. 연기적 세계관에 기초한 붓다의 가르침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불교인이라면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어떤 자세인가?

물론 문제의식만 갖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실천을 통해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났는가?’
‘자녀가 죽었는데 그 슬픔에서 벗어났는가?’
‘부부가 갈등하는데 그 번뇌로부터 벗어났는가?’
‘갑자기 재산을 잃었는데 그 괴로움에서 벗어났는가?’

붓다 담마(Buddha Dhamma, 佛法)를 통해서 자기 삶의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변화가 일어났는가가 중요합니다. 또 자기가 사는 사회 또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정말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상가의 운영 원칙을 현실에서도 우리가 과연 적용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환경 실천을 정말로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해결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들을 때 나는 대화를 통해서 설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과연 나는 어떤 자세인가?’ 이렇게 살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계급 차별, 성차별과 같은 당대의 문제들을 상가 안에서는 어느 정도 해결을 하셨습니다. 즉 모델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불교인들은 작든 크든 모델을 정말 만들고 있을까요? 미래에 사회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본받고 따라올 만한 어떤 모델을 만들고 있습니까?

‘지금 많이 어렵지? 여기에 이런 모델이 있다. 이렇게 한 번 해봐라. 우리는 그대로 실천해서 효과를 보고 있다.’

이렇게 보여줄 게 있느냐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정토회 대중들과 함께 이런 실험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시행착오도 수없이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부처님의 6년 고행에 비하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나갔듯이 우리도 오늘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끝없는 실험과 탐구의 과정입니다. 그런 탐구와 실험을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2600년 전에 붓다가 보여주신 것처럼 인류가 안고 있는 과제를 해결하는 리더십을 우리들이 다시 한번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후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러 명이 즉석에서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는 테라바다 불교의 전통 속에서 비구니가 되는 단계를 밟고 있는데, 이 속에서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비구니 제도를 부정하는 환경에서 여성 수행자는 어떡해야 할까요?

“저는 테라바다(Theravada, 상좌부 불교) 비구니가 되고자 발원하여 지금 그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라바다라는 전통 자체가 저의 성장과 리더십 발휘에 하나의 장애가 된다면 이런 전통을 얼마나 존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의 성장을 위해서 어떻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운동을 하더라도 전통을 존중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심각한 갈등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시의 주류였던 브라만교의 가르침과는 다른 길을 걸으셨지만 그들과 싸우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도 한국 불교의 전통 때문에 청년기에는 번뇌가 많았습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어요. 그래서 스승님께 이러한 어려움을 불평했더니 스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탑 앞의 소나무가 되어라.’

나무가 어릴 때는 탑이 높아서 그늘에 가린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서 커지면 오히려 나무가 탑을 가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 ‘탑을 시비하지 말고 너나 잘 자라라’ 이런 얘기입니다. (웃음)

그런 관점에서 지금 나부터 편하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붓다도 처음 시작할 때는 혼자서 시작하셨어요. 탑은 그냥 두고, 나무가 자라도록 합시다. 그들은 전통문화를 지키는 쪽으로 두고, 우리는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갑시다. 이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역할 분담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조화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한국불교를 기준으로 봤을 때도 인도의 불교역사 학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 주세요.
  • 지금 세상에는 리더십이 부재합니다. 아시아에는 최근에 민주화 운동과 자본주의 반대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불교에서 이런 단체들과 어떻게 연대해야 할까요?
  •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여기까지만 질문을 받고 대화를 나눈 후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테라바다의 전통을 가진 스님들에게 마지막으로 양해 말씀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서로의 전통과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한 이야기가 아픔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계신다면 그 아픔에 사과드립니다. 본의가 아니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여러분을 뵙겠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가 넘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고, 오전에는 경전대학 즉문즉설을 하고, 오후에는 만일준비위원회와 간담회를 한 후 평화재단 통일의병 정기총회에 참석해 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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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화

부모찬스, 동생찬스!
이해는 가는데 마음에서 용서가 안되네요ㅜㅜ

2022-01-27 02:31:16

고경희

나는 어떤가?

2021-12-30 23:04:31

곽정호

감사합니다 스님
탑 앞의 소나무가 되어라
소중한 말씀이네유

2021-12-26 13: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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