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9.2 가을감자 심기, 공동체지부 공청회
“내가 상대에게 1순위인지 늘 확인받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오늘도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비닐하우스 4동을 모두 정리하고, 가을 감자를 새로 심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비닐하우스로 다 같이 소풍 갑시다. 놀기 삼아 일하는 거예요. 명상종도 챙겨갑시다.”

평소와 다르게 준비물에 명상종이 추가되었습니다.

“15분마다 한 번씩 종을 쳐주세요. 종소리가 나면 모든 동작을 멈추고 잠시 명상을 하겠습니다. 일만 하다 보면 알아차림을 놓치기 때문에 종소리를 듣고 잠깐 동안 알아차림을 환기하는 거예요.”

먼저 참외와 수박, 고추, 옥수수를 모두 수확하고 줄기를 다 걷어냈습니다. 줄기를 걷어내자 바닥에 깔려 있던 잘 익은 참외들이 노랗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줄기에 가려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썩어갈 뻔했습니다.


“참외가 아주 잘 익었네요.”

수박과 호박도 아직 크기가 작았지만 같이 수확했습니다.


낫으로 수박 줄기를 걷어내던 스님이 묘당 법사님을 불렀습니다.


“낫으로 걷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에요. 포클레인으로 걷어냅시다.”

묘당 법사님이 포클레인을 몰고 와서 수박 줄기와 참외 줄기를 한 번에 싹 걷어냈습니다.

“행자님들이 일했으면 스무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포클레인이 스무 명이 할 일을 하네요. 그래서 묘당법사님이 포클레인을 더 좋아하나 봐요.” (웃음)

비닐하우스 2동과 3동에서는 행자님들이 고추를 수확했습니다. 모두가 바쁘게 몸을 움직이며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명상종 소리가 울렸습니다.

“땡~”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동작을 멈추고 명상을 했습니다.


30초 동안 정적이 흐르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정비가 되었습니다.

거름을 모으기 위해 사용하던 한쪽 구석도 포클레인으로 싹 치우고, 거름을 비닐하우스 안에 골고루 뿌렸습니다.

비닐하우스 앞에 있던 흙무더기도 모두 트럭에 실어서 비닐하우스 안에 골고루 뿌렸습니다.


“수고했어요. 식사하고 다시 일합시다.”

오늘은 발우공양을 하지 않고, 오전 10시에 다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오후에는 관리기로 땅을 갈고 두둑을 만들고 비닐 멀칭을 했습니다.



“줄을 똑바르게 해 주세요. 자꾸 꼬불꼬불해지려고 해요.”

관리기가 지나가면 두둑이 만들어지고 비닐과 점적 호스가 함께 깔렸습니다. 행자님들이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고 비닐멀칭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가을 감자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향존 법사님도 와서 일손을 도와주었습니다.

지난 6월에 구미 아도모례원에서 감자를 많이 수확해서 창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온도 조절 때문인지 싹이 많이 나 있었습니다. 싹이 난 감자들을 골라서 반으로 자르거나 4분의 1 조각으로 잘랐습니다.

“제가 먼저 감자를 심으면서 앞으로 나갈 테니까, 행자님들이 손으로 흙을 덮어 주세요.”



스님이 파종기로 구멍을 뚫으면 향존 법사님이 감자를 파종기 속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순식간에 감자를 두 줄 다 심었습니다.

“가을 감자는 수확량이 적다고 하니까 실험 삼아 두 줄만 심읍시다. 나머지 공간에는 여러분들이 먹고 싶은 채소를 심으세요.”

가을 감자는 일반적으로 수확량이 적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실험 삼아 심어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심으면 11월에나 수확할 수 있어요.”

비닐하우스 전체를 깨끗하게 정비하고, 두둑을 다섯 개 만들고, 감자를 두 두둑 심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옥수숫대는 모두 트럭에 싣고 소를 키우는 동네 어르신에게 가져다준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오전에 4시간만 울력을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울력은 오후 4시가 되어서 끝이 났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오후 5시부터 공동체 지부 공청회에 참석했습니다. 9월 25일부터 온라인정토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면 공동체 지부의 지회 구성, 모둠 편성, 지회장 선출 방식, 의사결정 방식을 각각 어떻게 할지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고 찬반 표결을 통해 하나씩 결정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청회를 마치고 나니 저녁 7시가 넘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정토대전 경전팀과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28일 행복학교 특강에서 소개하지 못한 즉문즉설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내가 상대에게 1순위인지 늘 확인받고 싶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차별을 받았습니다. 오빠와 비교했을 때 애정표현에서부터 채벌의 정도까지 차별은 다양했고 저는 늘 2순위였습니다. 저는 독점욕이 강하고 내가 이 사람에게 1순위가 맞는지 늘 확인받고 싶어 하는 1순위 병이 있습니다.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제가 1순위인지 불안해하고, 만약 남자친구가 남동생은 차로 바래다주고 저는 바래다주지 않으면 화가 치밉니다. 어떻게 하면 제 카르마를 이기고 남자친구의 1순위가 저라는 것을 믿고 사랑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을까요?”

“질문자가 괴로운 이유 자체가 1순위 병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질문의 내용이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1순위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돼요. 1순위가 되어서 뭐 하려고 그래요?”

“엄마에게는 항상 오빠가 1순위였고 저는 오빠만큼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1순위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항상 느꼈습니다.”

“1순위가 되고 싶으면 죽을 때까지 늘 배신감을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엄마한테는 오빠가 1순위여서 배신감을 느끼고, 결혼하면 남편에게 또 다른 누군가가 1순위여서 배신감을 느끼고, 또 회사에 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1순위여서 배신감을 느끼고, 이렇게 죽을 때까지 배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늘 1순위가 되려는 경쟁 속에 헐떡거리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 누구든 영원한 1순위라는 것은 없습니다. 가끔 상황에 따라 있을 뿐이에요. 엄마에게는 오빠가 1순위라고 자기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 나이가 60대라면 옛날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옛날 사람은 다 전통적으로 아들 중심,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자랐습니다. 저만 해도 어릴 때 어머니가 식사 시간에 숭늉이 필요하면 항상 딸에게 시켰어요. 걸레 가지고 오라 할 때도 딸을 시켰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집안일은 다 딸에게 시켰어요. 그런데 바깥에서 무슨 농사를 짓거나 힘쓸 일이 있으면 그런 일은 당연히 아들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옛날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도 있었지만 ‘안사람’, ‘바깥사람’ 하고 부르듯이 일에 대한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어요. 한마디로 직업이 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되면서 두 가지 변화가 생겼어요. 첫째, 여성도 밖에 가서 일을 하게 된 겁니다. 바깥일이 꼭 남자만 하는 일이 아니라 여자도 하는 일이 되었어요. 여성들이 ‘우리도 바깥일을 할 수 있다’ 하면서 사회 진출을 한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바깥일만 하고 싶지 안일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좋게 말하면 여성에게 직장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안일과 바깥일 두 가지를 다 해야 되는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 결과 여성들이 힘들게 된 거예요. 육아도 해야지, 가사도 해야지, 직장도 다녀야지,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 겁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육아와 가사를 자기도 맡아서 해야 한다는 훈련이 문화적으로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예요. 여성은 학교교육을 통해 바깥일을 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고, 안일도 집안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집에서도 바깥일만 배우고,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바깥일만 배웠기 때문에 안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경험이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두 가지 일을 다 하게 되니까 갈등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예 남자도 안일을 나눠서 맡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 문화적으로 점점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젊은이들은 가사와 육아 문제 때문에 부부갈등이 덜 생길 거예요.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런 갈등이 거의 없습니다. 부부가 공동으로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과도기에는 중간에 끼인 세대가 제일 힘듭니다. 옛날 사람들은 내가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나도 또 며느리가 들어오면 시어머니 대접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끼인 세대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대우하고 살아왔지만, 자기는 시어머니 대우를 못 받는 겁니다. 회사에서 남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입사해서 선배들을 깍듯이 대하는 환경에서 자랐는데 요즘 입사하는 후배들은 자기를 선배 대접을 안 해주고 같이 맞먹는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삶에 대해 분별심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나는 선배를 깍듯이 모시는 경험도 해보고, 선후배 없는 시대도 경험해 보고, 두 가지 경험을 다 해볼 수 있는 거죠.

질문자의 어머니는 그런 시기를 사신 분이에요.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냐고 핀잔을 들어야 했고, 아들은 논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낸 그런 시대를 사신 겁니다. 그때는 유산도 다 아들한테만 줬지 딸한테는 안 줬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제도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관습은 그대로 남아있는 겁니다.

어머니는 그런 배경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질문자를 그렇게 대한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현대에 태어나서 교육을 받다 보니까 이것을 차별로 자꾸 인식을 한 겁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차별한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이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께 왜 오빠랑 나를 차별하냐고 물어보면 본능적으로 ‘내가 언제 차별을 했냐’ 하고 말씀을 하셔야 되는데, 오빠는 너보다 더 힘들게 컸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니까, 차별을 인정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빠가 힘들게 컸다는 말은 차별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죠. 더 어려웠으니까 즉 같은 형제 중에서도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고, 건강한 아이가 있다면, 엄마는 누구한테 더 신경을 쓰겠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한테 더 신경을 쓰겠죠.

그리고 큰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작은아이가 태어나면 일반적으로 엄마는 작은아이한테 신경을 더 많이 씁니다. 그래서 큰아이가 질투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처럼 만약 질문자도 오빠가 아닌 언니와 둘이 자랐다 하더라도 엄마의 태도는 비슷했을 거예요. 엄마는 그때그때 자기 마음에 따라 ‘큰 게 참아라’ 하고 말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작은 게 어디 언니한테 대드니?’ 이렇게 말할 때가 있는 겁니다.

엄마는 아무 의식 없이 그때그때 대응을 하는데, 언니 입장에서는 ‘엄마는 늘 동생만 편들고 나만 야단맞았다’ 하고 생각하고, 동생 입장에서는 ‘또 나만 야단맞았다’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해자는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을 거의 못합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차별했다고 생각을 하겠어요. 차별을 한다면 관습적으로 하는 행동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인 겁니다.

어쩌면 질문자가 너무 경쟁의식을 가지고 대응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죽을 때까지 늘 경쟁하고 살아야 되니까 삶이 피곤해져요. 그래서 이것은 꼭 여성 차별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임금 앞에서 신하들이 서로 시기 질투를 많이 했습니다. 임금이 주인이기 때문이에요. 주인의 관심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이익이 크게 달라질 때는 누구나 다 주인의 관심을 받고자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에요.

질문자가 늘 상대의 관심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주인의 자세가 아니라 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이 상황을 여성 운동을 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노예근성에서 생겨난 문제예요.

‘상대에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내가 주체로 서지 못하는 것이구나. 상대에게 종속된 노예근성을 갖고 있는 거구나.’

이렇게 자각하고 그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상대가 누구한테 관심을 두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예요. 관점을 이렇게 갖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하기도 어려워지고, 결혼생활을 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저는 1순위로 사랑하는 것만 사랑이고, 2순위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서 제가 1순위로 사랑받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1순위에 집착을 했던 것 같아요. 혹시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려고 그래요?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늘 구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평생 거지로 살고 싶어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나, 안 하나?’ 이러면 늘 남을 쳐다보고 전전 긍긍하면서 살아야 되잖아요.

질문자는 전통적인 봉건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현대 여성이라면 왜 사랑을 구걸합니까? 내가 사랑을 해야죠. 질문자는 역 앞에서 깡통 놓고 돈을 구걸하는 사람으로 살래요? 지나가면서 돈을 던져주는 사람이 되어서 살래요? 왜 돈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 살지 구걸하는 사람이 되어서 살려고 그래요?

옛날에는 사회 시스템이 남자 중심으로 되어있어서 여자가 그렇게 안 하면 살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여자도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구걸하지 마세요. 누구를 좋아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자유예요. 오늘 나를 좋아했다가 내일 다른 사람을 좋아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에 정말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의 마음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어요. 내 마음도 컨트롤이 안 됩니다. 그가 어제까지 나를 좋아했어도 내일부터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그동안 고마웠다. 그래 잘 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자세가 되어야죠.

안 그러면 질문자는 늘 질투하고 복수하고 배신당하고 한평생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아직 30대도 안 되어 보이는데, 왜 조선시대 여성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요? 당당하게 자기중심을 갖고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질문자와 같은 사람은 좀 끈적끈적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남자들이 겁을 내요, 한번 붙으면 껌 딱지처럼 붙어서 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에요. 좀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아 들었어요? 질문자처럼 평생 구걸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남편한테 구걸하고 부모한테 구걸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랑고파병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는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노예근성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을 소화하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생의 주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질문자는 얻는 사람이 될래요? 주는 사람이 될래요?”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웃음)

“사랑을 구걸하지 마세요. 얻고자 할 때는 나한테 주는 사람이 없어질까 봐 두려움이 생기지만, 남에게 줄 때는 받는 사람이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돈을 주고 싶은데 받을 사람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사랑도 장사 속으로 하니까 ‘밑지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생각을 뜯어고쳐야 돼요. 사랑을 구걸하면 죽을 때까지 껄떡거리고 살아야 합니다. 늘 상대가 나를 배신했다는 배신감에 잠 못 이루는 그런 미래가 이미 예약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번에 그런 생각을 탁 버리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댓글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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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i

스님 감사합니다

2021-11-07 21:06:21

ㅎㅎ

구걸하지 않고 주겠습니다

2021-09-13 19:09:11

아로미

형제자매 지간에도 인정 이나 애정을 바라는 욕구가 특히 강한아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제아이도 남동생만 예뻐하고 자기를 차별했다고 지금도 울면서 그때 일을 말하곤 합니다 마음이 정말 쓰라립니다

2021-09-11 1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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