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8.14.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농사일
“하나의 경구를 읽고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는 날입니다. 두북 수련원에는 새벽부터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새벽 4시 30분, 맑은 종송 소리가 랜선을 타고 전국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스님은 조용히 명상을 했습니다.

예불을 정성껏 한 후 5시 정각에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행자 만일결사 중 제10차 천일결사, 제6차 백일기도 중 27일째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이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아침 정진 잘하셨습니까? 오늘은 좀 시원합니다. 비가 오고 있어요. 오늘로서 6차 백일기도를 시작한 지 4주가 지났습니다. 한 달이 다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경전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탁발한다고 해서
비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정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비구가 될 수 없다.

이 승단에서 선악을 버리고
청정한 삶을 살면서
오온을 관찰하며 사는 이를
진정한 비구라고 한다.

“탁발한다고 해서 비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는 출가를 했습니다. 집을 나와 출가를 하면 사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일단 머리를 깎고 다 떨어진 헌 옷을 입습니다. 음식은 걸식을 합니다. 탁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잠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잡니다. 마음이 어떻든 이렇게 생활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집이 뭐예요? 따뜻한 음식이 있고 옷이 있고 안온한 잠자리가 있고 가족이 있는 곳입니다. 또 사회적 지위도 있고요. 그런데 출가를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집을 나왔다. 이제 거처는 나무 밑이나 동굴이다. 옷은 화장터에서 시체를 싸고 버린 분소의를 주워 입는다. 음식은 남이 먹다가 남긴 음식을 얻어먹는다.' 이런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결단을 필요로 했습니다.

결단을 하고 출가를 해서 외형적인 모습을 바꿨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있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면서 마음에 욕심과 성냄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다면 이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집을 버리고 나온 결단은 참 소중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스승인 서암 큰 스님께서는 이렇게 큰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사람이 스님이 아닐세. 기와집이 절이 아니야. 어떤 사람이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스님이고 수행자야. 논두렁이라 하더라도 수행자가 머무는 그곳이 절이라네. 이것이 불교야."

우리는 그 지침에 따라서 '밥 먹고 잠자고 똥 누는 내 집에서 마음이 청정하다면 바로 이곳이 절이다. 내가 가정생활을 하더라도 내 마음이 청정하다면 내가 바로 수행자다.' 이런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인 법구경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출가 수행자의 모습을 한다고 해서, 밥을 빌어먹는다고 해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을 없애야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 해탈에 이를 수 있어요. 이것이 바른 법입니다.

“정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다”

출가해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른 법에 따라 수행자로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모양만 갖고, 이름만 갖고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정토회에서 전법 활동가라고 불리고, 법사라 불리고, 공동체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고 성질내고 살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사람은 좋은 일을 하는 착한 사람이지 수행자는 아니에요.

“이 승단에서 선악을 버리고”

좋은 일 했느니 나쁜 일 했느니, 착하다느니 악하다느니 이런 분별을 넘어서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런 시비 분별을 뛰어넘어야 괴로움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청정한 삶'이란 욕심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삶이 굉장히 소박하고 가볍고 괴롭지 않은 거예요. 우리가 잠깐 사로잡혀서 괴로울 수는 있지만, 그 앙금이 남아서 꽁 해 있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청정한 삶이 아닙니다. 앙금이 남아있다면 때가 낀 거예요.

“청정한 삶을 살면서 오온(五蘊)을 관찰하며 사는 이를 진정한 비구라고 한다”

오온을 관찰하며 사는 이는 '나라고 할 것이 없구나’,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구나’,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없구나’ 하고 제법(諸法)이 공(空)한 도리를 증득한 이라는 뜻입니다. 보고 듣는 작용(색), 괴롭고 즐거운 작용(수), 이것저것 생각하는 작용(상), 이거 해야지 하는 작용(행), 인지하는 작용(식), 이런 작용만 있지 거기에는 어떤 ‘나’라고 할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내 것이라는 게 있으며,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모든 괴로움이 다 여기서부터 빚어집니다. 이렇게 늘 오온이 공한 도리를 관찰하며 사는 이가 진정한 수행자입니다.

부처님 당시나 그 이후에도 큰마음 내서 출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자질구레한 욕심을 내고 이권을 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나 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초기 출가자들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계율이라는 것도 없었어요. 집까지 버리고 가족까지 버리고 왕위까지 버리고 출가를 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성추행을 하겠어요? 무엇 때문에 욕설을 하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무엇 때문에 술을 먹고 취하겠어요? 그러려면 그냥 세상 속에서 살죠.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출가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그런 짓은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단을 탁 내리고 출가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자라고 존경을 받다 보니 사람의 심리라는 게 또 이 안에서 작은 것을 못 버리고 또다시 재물과 보시, 명예와 지위를 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제 얘기도 하지 말고, 내일 얘기도 하지 말고, 지금 깨어 있어라.’

이렇게 가르치는 불교 안에서 출가 수행자가 된 사람이 전생 얘기를 하거나 내생 얘기를 하고, 관상과 손금, 사주, 명당자리를 보고 운명을 점친다는 것은 세속적 관점을 못 벗어난 겁니다. 그 결과 이익을 본 사람들이 추종을 하고 많은 보시를 해서 큰 집을 짓고 생활한다는 것은 비록 모양은 출가자의 모양이지만 그냥 세속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이익을 탐하다 보니 사람들은 ‘아, 부처님이 저 스님에게 가피를 주셨구나. 나도 저 스님을 따르면 가피를 얻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청빈하게 사는 승려를 보고는 ‘부처님의 가피를 본인도 못 입어서 제대로 못 사는데 저 사람 말을 들어서 내가 어떻게 가피를 입겠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수행을 해서 해탈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을 구하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거예요. 출가자의 모양을 해서 존경도 받고, 마음에서는 욕망을 쫓아 온갖 이익을 누리는 겁니다. 이게 더 큰 욕심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요즘만 있는 게 아니라 옛날에도 있었나 봐요. 그래도 옛날에는 이런 사람이 소수여서 그들을 경책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은 오히려 이런 사람이 다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반이 중요한 이유

모양과 형식이 필요 없는 건 아니에요. 모양과 형식은 엄청난 결단을 통해 취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양과 형식만 취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크게 결단을 했지만 살다 보면 사람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친구를 잘 사귀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수행적 관점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 사람과 같이 지내야 자신이 좀 부족해도 따라 배우는 것이 있는데, 세속적 이익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자꾸 모여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게 정당화 됩니다.

목걸이 귀걸이 이런 사치품만 얘기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줄 착각합니다.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잖아요. '참 이상하다. 어떻게 저런 얘기를 할 수 있나?' 하지만 그 사람들끼리는 모여서 내내 그런 얘기만 하니까 세상이 그런 줄 아는 거예요.

이념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적인 세력은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런 줄 알고, 보수적인 세력은 또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니 세상이 그런 줄 압니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끼리 모여서 맨날 얘기하니까 일본이 나쁜 줄 알고, 일본 사람들은 일본 사람끼리 모여서 맨날 얘기하니까 한국 사람이 나쁜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끼리끼리 모여서 살면 진리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수행하는 데는 도반이 중요하다. 가르침을 믿고 바르게 정진하는 이를 가까이해야 세속에 물들지 않게 된다.’

친구를 구분해서 사귀라는 얘기가 아니라 항상 수행자는 수행의 길로 가는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수행의 길을 벗어난 사람끼리 편을 모아서 얘기하면 공동체 안에서 수행하는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하나의 경구를 읽고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이 내용을 귀담아들으면 한 번만 탁 듣고도 정신이 바짝 드는데, 입으로는 계속 읽어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얘기라는 걸 몰라요. ‘아, 이게 내 얘기구나’ 이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아, 저 얘기는 스님들 얘기이구나’, ‘아, 저런 사람도 있지’ 이렇게만 생각해요. 항상 이 얘기가 나를 위한 얘기라는 관점을 갖는다면 우리는 하나의 경구를 읽고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스님은 다음 일주일도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것을 당부하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생방송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습니다. 스님은 농사팀 행자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요. 오전에는 울력을 취소합시다.”

두북 공동체 행자님들은 오랜만에 여유롭게 휴식을 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해가 났습니다. 논둑과 못둑에 예초를 하기 위해 봉사자 두 명이 찾아왔습니다. 스님도 작업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예초기를 메고 논둑으로 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봉사를 하러 온 거사님 두 명과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예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왱’ 하는 예초기 소리가 한참 동안 계속된 후 논둑이 깨끗해졌습니다.

논둑은 거사님 두 분에게 맡기고 스님은 못둑으로 올라가서 예초기를 돌렸습니다.

못둑에는 풀이 가슴 높이까지 자라 있었습니다. 줄로 된 예초기를 사용하다 보니 키가 큰 풀은 쉽게 잘리지가 않았습니다. 풀이 계속 예초기에 감겼습니다.

“아이고, 차라리 낫으로 베는 게 낫겠어요.”

예초기로 잘리는 부분만 최대한 작업을 한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날로 된 예초기를 가져와서 나머지를 다 벱시다.”

스님의 작업복에는 땀이 흠뻑 배어 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에는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산 앞밭에 배추 모종을 심은 후 오전에는 외국인을 위해 영어 통역으로 즉문즉설을 하고, 오후에는 논둑에 예초기를 돌리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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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행자의길~부처님따라 행하는길스님법문 들으며 한발한발 나갈수 있어 감사합니다

2021-08-31 11:15:52

심공

五蘊의 空한 道理
비움과 채움의 갈등 속에서~~

2021-08-25 08:27:35

상진

하나의 경구를 읽고도 이 이야기가 나를 위한 이야기라는 관점을 갖는것이 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21-08-24 22: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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