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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산 앞밭에 땅을 뒤집고 돌을 고르는 일입니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트랙터가 드디어 밭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먼저 트랙터가 땅을 뒤집으며 밭의 외곽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땅 속에 큰 돌이 있으면 로터리 칼날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소리가 나는 지점에는 큰 돌이 있는 거예요. 괭이로 돌을 뽑아냅시다.”
소리가 나는 지점마다 스님과 행자님들이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내었습니다.
돌을 아무리 골라내어도 트랙터가 한 번 지나가면 또 돌이 새로 나왔습니다.
“스님, 돌이 계속 나와요!”
마치 땅 속에서 고구마를 캐듯이 돌을 골라내는 일에 점점 재미가 붙었습니다.
어느새 트랙터는 밭의 외곽에서 안쪽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밭 전체를 한 차례 로터리 작업을 한 후 스님이 밭의 바깥쪽을 더 넓히자고 제안했습니다.
“바깥 경계면에 땅이 더 남았거든요. 최대한 바깥쪽으로 한 바퀴 더 돌아 주세요.”
스님의 제안대로 하니 밭이 조금 더 넓어졌습니다.
“수고했어요. 최소 10평은 더 넓어졌네요.”
골라낸 돌은 바깥 경계면에 가지런하게 쌓았습니다. 만물은 제자리가 있다는 명심문처럼 돌의 제자리를 찾아주었습니다.
간혹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 없는 큰 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너무 큰 돌은 포클레인으로 들어서 바깥쪽으로 옮겼습니다.
발우공양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 밭에는 돌이 많이 보였습니다.
“발우공양 시작 시간을 30분 연기합시다.”
스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30분 동안 더 돌을 주워 내었는 데도 돌은 계속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제 마칩시다” 하면서도 돌을 계속 주워 냈습니다. 행자님들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스님! 발우공양해야 하는데요. 일을 마치자고 해놓고 계속 돌을 줍고 계시면 어떡해요?”
“아니. 땅 속에 고구마가 계속 보이는데 어떻게 이걸 안 캐고 가요?” (웃음)
스님이 밭을 나오자 울력이 끝이 났습니다.
“수고했어요.”
농사일을 마치고 9시 30분에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얼마 전 수확한 단호박이 맛있게 삶아져서 반찬으로 나왔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오후에는 비닐하우스로 가서 고추를 수확했습니다. 지난번에 진딧물 때문에 병을 앓았던 고추는 약을 한 번 쳐준 이후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빨갛게 익은 고추가 고랑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고추 수확을 한 후 다시 산 앞밭으로 갔습니다. 오전에 로터리 작업을 끝냈기 때문에 오후에는 두둑을 만들고 비닐 멀칭을 했습니다.
“오늘 밤에 비가 오면 땅이 질어지니까 지금 비닐 멀칭을 합시다.”
6시 30분이 되어서 겨우 멀칭 작업이 끝났습니다. 땀을 씻고 바로 법회를 준비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1500여 명의 시청자들이 시도별 밴드를 통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요즘 농사를 짓고 삽니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전 아침에 두 시간 일하고,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 다섯 시 이후에 두 시간 일을 해요. 낮에는 더워서 일을 못하는데, 내일 비가 온다고 해서 오늘은 낮에 가을배추 심을 밭에 두둑을 만들었습니다. 좀 덥기는 해도 구름도 끼고 온도도 그리 높지 않아서 일을 할 만했습니다. 무더위가 다 간 건지, 아니면 태풍 때문에 잠시 시원해진 건지 모르겠네요. 어떤 해에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서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이 8월 말이기도 했거든요. 지나 봐야 알겠죠.
저희는 폐교에서 살고 있는데 지난주까지만 해도 정말 많이 더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살만 합니다.” (웃음)
이어서 즉문즉설이 무엇인지 간단히 소개한 후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소방관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삶에 의욕을 잃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매우 이타적인 사람입니다. 저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저의 가장 큰 행복이며 아버지는 그중에서 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일 끝나고 아버지와 같이 술 마시면서 도란도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소방관이셨는데, 초등학교 때 뉴스에서 소방관의 수명이 55세라는 기사를 확인하고 아버지께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행복은 곧 저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못해드린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날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길을 가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계속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2남 5녀 중 다섯째로 결혼 전까지 할머니에게 월급도 다 드리고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시고 살았을 정도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저희한테 보여주셨는데요. 아버지가 할머니께 하는 모습을 본받아서, 저도 아버지께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에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고 능률도 많이 떨어져서 직장을 그만둘까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 인생의 낙이 아버지였는데 없어져서 너무 외롭고 고독하고 허망합니다. 제가 다시 일어서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물건을 하나 잃어버려도 섭섭하고 내가 좋아하던 애완동물이 죽어도 울잖아요. 하물며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겠어요?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친밀할수록 슬픔이 더 큽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소원할수록 슬픔이 작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슬픈 거예요.”
“네, 맞아요.”
“어떤 사람은 부모가 돌아가신 건 별로 안 슬픈데, 자기가 키우던 강아지가 죽으면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슬퍼합니다. 죽은 강아지를 화장하고 탑을 세우고 불교신자면 49재를 지내기도 해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돈을 들여서 뭘 해도 아깝지 않는 거예요. 이게 우리들의 정신작용입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아끼던 것을 잃어버리면, 집을 한 채 잃은 것보다 더 아쉽지 않습니까? 돈을 어렵게 번 사람은 돈을 빌려주고 못 받으면 정신이 없어지는데, 이게 사실은 집착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인간의 괴로움 중에 팔고(八苦),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는데 그중 4가지 괴로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육체적인 괴로움입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에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입니다. 둘째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괴로움입니다. 도저히 같이 못 살 정도로 서로를 싫어하는 데도 결혼해서 애들 때문에, 한 직장에 동료나 상사라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정말 꼴도 보기 싫은데 만나서 얘기해야 되고 같이 일해야 되고 몸을 섞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보다 싫은 사람과 함께 하는 괴로움이 더 크다고 해요. 셋째 구부득고(求不得苦),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데 그게 뜻대로 안 돼서 생기는 괴로움입니다. 넷째 오성음고(五盛陰苦).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五陰)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해서 생기는 괴로움입니다. 그중 질문자는 첫 번째, 애별리고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거예요.
애별리고 중에서도 누구와 헤어졌을 때 제일 슬플까요? 애인이나 배우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 그 부모의 아픔이 가장 큽니다. 그런데 이게 다 집착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따라 죽는 사람을 보고 세상에서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정신적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집착으로 인한 정신질환이 생긴 거예요.
보통 정상인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굉장히 아쉽고 슬프지만 세월이 흐르면 점점 잊고 좋아져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아무리 달래도 계속 울고불고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아이고, 놔둬라. 백약이 무효고 세월이 약이다.’
인간의 뇌는 시간이 흐르면 잊게 되어있기 때문이에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슬퍼해도 10년, 20년 지나면 한이 좀 남아있지만 그들도 웃고 살아요. 질문자도 앞으로 3년, 5년 지나면 웃는 일이 생길 거예요. 결혼하고 애 키우면 아버지가 그립기는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상태는 아니에요. 살아있는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따라 죽는 경우가 있죠. 옛날에는 이런 사람을 아주 좋게 평가했는데, 심리적으로 보면 다 질환에 속합니다. 질문자도 만약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버지가 잊혀지지 않고 슬픔이 더 심해지거나 지속된다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지금 질문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는 상태거든요.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봅시다. 질문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살아갈 의욕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1년쯤 지나면 지금보다 나을까요, 심할까요?”
“좀 나을 것 같아요.”
“3년이 지나면 어떨 것 같아요?”
“더 나을 것 같아요.”
“결혼하면 어떨까요?”
“좋아질 것 같아요.”
“질문자가 좋아졌는데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오시기라도 했나요?”
“아니오.”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게 아니라 똑같이 돌아가신 상태인데도 세월이 흐르니까 점점 나아지잖아요. 그러면 그 3년 정도 슬퍼하면서 몸부림치다가 나아지는 게 좋아요, 어차피 아버지가 살아오시는 건 아니니까 지금 나아지는 게 득이에요?”
“지금 나아지는 게 득인데 자꾸 울컥울컥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놔두면 될까요?”
“그런 증상은 집착에 따른 병이니까 먼저 관점을 잡아야 해요. 보통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서 조금씩 조금씩 슬픔이 옅어지는 길을 걷는데요. 수행이란 지금 탁 살펴보는 거예요.
'어차피 세월이 흐르면 좋아질 건데 3년간 병을 앓고 좋아지는 게 좋냐, 지금 바로 좋아지는 게 좋냐? 지금 좋아지면 되지 굳이 그걸 3년 앓을 이유가 있나?'
지혜로운 자는 이 이치를 깨달아서 바로 슬픔에서 벗어납니다. 어리석은 자는 3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 좋아집니다. 만약 산사태가 났다면 가만 내버려 둬도 세월이 흐르면 숲은 우거집니다. 10년, 20년, 30년 지나면 빈 땅에 씨앗이 떨어지고 나무가 다 자라는데, 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훨씬 빨리 복구가 되겠죠? 인위적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에요. 이런 이치를 알면 금방 회복이 됩니다. 이치를 모르면 많은 시간을 슬픔에 빠져 삽니다. 질문자가 ‘스님 말씀이 이치에 맞지만 현실에서는 잘 안 됩니다.’라고 한다면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아직 마음으로는 안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그것도 괜찮아요. 슬픔이 일어날 때마다 관점을 이렇게 잡으세요.
'아, 이건 내 집착이구나. 아버지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나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현재의 나를 괴롭히는구나.'
아버지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고 나의 습관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이것은 집착하던 대상과 헤어져서 아쉬운 거거든요. 아버지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한(恨)은 두 종류예요. 원한이 맺히면 한이 됩니다. 누군가를 많이 증오하다 보면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잖아요. 다른 하나는 좋은 것을 빨리 잃었을 때 생기는 아쉬움이 한이 됩니다. 질문자는 좋아했던 아버지를 잃은 아쉬움이 큰 거예요. 좀 더 누리고 싶은데 못 누려서 아쉬움이 한(恨)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이 한은 결국 어디로 갈 위험이 있나요? 심해지면 결국 살아갈 의욕을 잃어서 자살하는 쪽으로 가게 돼요. 남을 죽이느냐 나를 죽이느냐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정신질환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해야 해요. 그 정도 누렸으면 뭐가 아쉬워요? 조금 전에 질문한 다른 사람들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에게 학대받았다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질문자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도 받고 자라니 좋았잖아요. 나는 충분히 누렸다는 관점을 가지세요. 좋은 걸 더 가지려는 건 욕심이에요.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거기 집착해서 슬픔에 빠지지 말고 좋은 기억으로 간직한다면 오히려 더 삶에 큰 활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자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면,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해요. 남을 위해서 사는 걸 굉장히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데 남을 위해서 살면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원망을 하는 거예요. 남편을 위해서 살았는데 남편이 딴 여자를 만나면 엄청 미워하게 됩니다. 부모를 위해서 살았는데 부모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부모를 원망하게 돼요. 질문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다’고 했는데 그 말이 본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올 씨앗이라는 거예요.
부모가 보통 자식을 위해서 살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자식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엄청난 배신감과 괴로움이 생깁니다. 자식을 위해서 산 게 아니라 내가 자식 키우는 일이 재미있었던 거예요, 자식이 스무 살이 넘으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어릴 때 잘 갖고 놀았다. 이제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질문자도 스무 살이 넘었잖아요. ‘아버지, 그동안 저를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살았다는 것도 좋은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살았다면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결혼했는데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늙은 여자를 사랑하면 고부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본인은 스스로 현명하고 효녀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칭찬할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오히려 아버지 계실 때 아버지를 위해서 산다는 착각 속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계시지 않으니 이제는 내 인생을 내 마음껏 살겠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다 하고 나니 생방송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방청객 중에서 즉석 질문은 받지 못하고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야기한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일을 재미있게 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장 걱정했어요.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아버지와 좋았던 과거에 집착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구나 알았습니다.”
스님은 질문자를 위해 다시 한번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직장 그만두고 살아보세요. 손해를 왕창 보면 정신이 듭니다. 그래 봤자 아버지가 살아오지도 않잖아요. 슬퍼한다고 아버지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보라는 거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집착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사로잡혀서 과거에 매여 사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본인만 불행해져요. 앞선 질문자는 부모와 나쁜 관계에 사로잡혀 못 헤어나고, 질문자는 부모와 좋은 관계에 사로잡혀서 못 헤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똑같은 거예요. 악연으로 만나서 못 헤어나나 선연으로 만나서 못 헤어나나, 못 헤어나는 건 다 똑같아요.”
“벗어나기 위해 빨리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한다는 말은 아직 못 벗어났다는 얘기예요. 벗어나 버리면 노력할 것도 없어요. 법문 딱 듣고 '아, 바보 같은 짓이구나.' 하면 노력할 게 뭐가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이 말은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직 못 일어났다는 거예요?”
“못 일어난 거예요.”
“그래요. 못 일어났다는 얘기예요. 계속 누워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하고 왜 엄청 애를 쓰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그래요? 그러니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벌떡 일어나버리면 각오하고 결심하고 노력할 일이 없어져요. 그냥 일어나버리면 됩니다. 질문자는 지금 일어나라고 하는데 일어나지는 않고 계속 누워서 ‘일어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열심히 노력할게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은 누워있어요. 그렇게 노력하세요. 애쓰면서 힘들어하면서 많이 노력하세요.” (웃음)
“감사합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오전에는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서 농사일을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날이 개면 논둑에 예초기를 돌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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