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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제주 개발 공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초청 강연을 하고, 저녁에는 서귀포 예술의 전당에서 행복한 대화 강연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주변 바닷가를 산책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 30분에 제주시로 출발했습니다.
한 시간을 달려 오후 2시 30분에 제주 개발 공사에 도착했습니다. 강연에 앞서 백경훈 사장을 만나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함께 사무동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3시가 되어 제주 개발 공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오늘 강연을 하게 된 인연에 대해 소개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반 기업에서는 강연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두 무료로 강연을 하고 있어요. 돈을 받고 하는 강연은 없습니다.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오지만 대부분 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군인, 경찰, 공무원처럼 공공을 위해 일하는 분들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런 곳엔 가급적 강연을 갑니다.
그런데 제주 개발 공사에서 강연을 하게 된 데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예전에 정지영 감독님이 4.3 사건을 주제로 영화를 만든다고 저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주 개발 공사가 영화 제작을 후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러던 중 강연 요청 목록에 ‘제주 개발 공사’가 들어왔어요. 제가 그걸 보고 ‘제가 제주에 가게 되면 그때 한번 해 보자.’고 해서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저는 문제를 바라볼 때 윤리나 도덕적인 잣대를 기준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관점에서만 봅니다.
‘이 사람이 이런 문제로 지금 괴로워하는구나.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도둑이 도둑질을 하다 들켜서 도망가고, 경찰은 그를 쫓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도둑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잡히지 않게 해주세요.’겠지요. 경찰의 소원은 ‘잡게 해주세요.’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쁜 놈은 잡혀야 한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자비란 그런 게 아닙니다. 자비란 두 사람의 어려운 마음이 같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세음보살이 도둑으로 화현해서 경찰에게 잡혀 준다면, 도둑의 문제도 해결되고 경찰의 문제도 해결되겠지요. 이것은 자신을 희생해서 타인을 구제하는 정신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세상의 고통을 안고자 하셨어요. 오늘 이 자리도 어떤 문제든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며 질문을 받아 보겠습니다.“
이어서 1시간 30분 동안 일곱 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살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 머리로는 ‘목표도 달성하고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나는 이미 내가 할 일을 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머리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정말 통제가 잘 안 되더라고요.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운전할 때, 자려고 누웠을 때, 샤워할 때까지도 계속 생각이 납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은데, 이와 관련하여 좋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의 정신 작용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경계가 뚜렷이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생각’과 ‘마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마음’은 심장에 있고, ‘생각’은 머리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둘 다 뇌의 작용입니다. 생각은 주로 대뇌, 특히 대뇌피질의 활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생각은 의식의 작용이고, 마음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 작용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볼까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잖아요. 이렇게 익숙해지는 상태를 다른 말로 하면 ‘습관화’, ‘자동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동화된 상태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생각은 ‘이럴까? 저럴까?’ 하며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어떤 여성을 보았는데 얼굴이 예뻐서 호감이 확 간다면, 이것은 생각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은 어떻게 할까요? 쳐다보면 안 된다고 하겠죠. 왜냐하면 옆에 아내가 있으니까요. (모두 웃음) 생각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너 이러다 집에 가서 혼난다.’라고 경고를 해줍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그쪽으로 관심이 가요. 이게 바로 마음과 생각의 차이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아이가 내일 시험을 봐야 해서 ‘오늘은 꼭 밤을 새워서 공부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떨까요? 공부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졸린 겁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 나 너무 졸려. 조금만 자고 공부할게. 내일 시험이니까 꼭 12시에 깨워줘.’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12시에 깨우면 아이는 일어나지 않아요. ‘괜찮아, 조금만 더 자고 할게.’ 이런 식이죠. ‘너 아까 꼭 깨워 달랬잖아!’라고 해도 ‘아니, 괜찮다니까...’ 하며 잠꼬대인지 반항인지 모를 말을 합니다. 결국 엄마는 ‘너, 내일 아침에 나한테 원망하지 마!’라고 하게 되고, 아이는 ‘네, 그런 말 안 해요.’ 하고 자버립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는 어제 안 깨워줬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이처럼 ‘공부해야지!’ 하고 결심하는 건 의식의 작용입니다. 잠이 들면 의식은 쉬고 무의식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잠결에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에 엄마 말을 거의 듣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거예요. 내일 아침에 좋아하는 친구하고 소풍을 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합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부탁합니다.
‘엄마, 나 4시에 나가야 하니 3시에 깨워줘.’
‘너, 못 일어날 텐데?’
‘아냐, 꼭 가야 해!’
그래서 엄마가 다음날 3시에 깨우러 가면 아이는 이미 깨어 있습니다. (모두 웃음) 왜 그럴까요? 소풍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무의식의 작용이기 때문에, 잠든 동안에도 그 마음이 계속 작용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눈을 뜨게 되는 거예요. 생각과 마음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말할 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습관입니다. 이 습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수 있어요. 화를 벌컥 낸 사람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대부분 “나도 모르게 그랬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일어난 것’을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거나 ‘습관적으로 그랬다’고 표현하는데, 사실은 다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無知)’입니다. 의식의 상태에서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질이나 습관 중 많은 부분은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의식해서 하는 행동보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소화되거나 내분비 기관이 작동하는 것 등은 모두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나마 우리가 의식적으로 잠시 통제할 수 있는 건 팔을 올리거나 내리는 것, 걷는 것, 잠시 호흡을 멈추는 정도에 불과해요. 이 정도만 의식으로 조절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전부 무의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하면 우리 몸속 장기들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상하면 우선 소화가 안 되지요. 이것은 소화 작용이 무의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각오하거나 결심하는 것은 습관을 고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화나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을 고치는 데는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각오하고 결심해도 그것은 의식의 작용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상황에서 탁 부딪히면 무의식이 먼저 자동 반응해 버립니다. 그 반응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의식이 그 반응을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다른 말로는 ‘마음 챙김’이라고도 하죠. 화가 날 때 자기가 화가 난 줄을 ‘탁’ 알아차리는 것, 욕심이 올라올 때 그것이 욕심인 줄을 ‘탁’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느새 화가 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화가 난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는 거예요. 참는 건 의식의 작용입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참아질 때가 있고, 못 참게 될 때도 있습니다. 늘 이런 식으로 반복하죠.
스트레스는 언제 받을까요? 대부분 마음이 억압을 받을 때 생깁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할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참고 억누르는 것 또한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스스로 극복하려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각오하거나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야 하면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지 말고,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건, 일어난 상태일까요? 아직 누워 있는 상태일까요? ‘일어나야지!’ 하고 다짐하고 결심할 때는 여전히 누워 있다는 뜻이에요. 누운 채로 100번을 각오하고 결심해도 여전히 누워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각오와 결심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오하지 말고, 결심하지 말고, 알람이 울리면 그냥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일단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야지!’ 하고 다짐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상태인데 또 뭘 각오하고 결심하겠어요?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일단 해 본다.’는 명심문이 있습니다. 일단 일어나 보는 겁니다. 일단 해 보는 거예요. 일단 멈춰 보는 겁니다.' 이걸 멈춰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이렇게 망설이지 말고, 멈춰야 할 때는 그냥 일단 멈춰 보는 겁니다. 해 보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는 거예요. 그렇게 해 보면서 자신을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항상 각오하고, 결심하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각오나 결심, 노력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동물들은 이런 각오나 결심, 노력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스트레스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동물들도 좁은 공간에 가둬 놓고 자기 성질대로 살지 못하게 하니까, 가축들 역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가축에게 병이 많은 겁니다. 병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여러분이 스트레스 없이 살고 싶다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내 마음대로만 되나요? 하고 싶은 걸 못 하기도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수행(修行)이란 무엇일까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야만 길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을 능히 안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참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안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훈련을 하면 스트레스가 훨씬 줄어듭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상황이 안 되면 안 해도 괜찮고, 하기 싫으면 안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안 하고, 해야 할 상황이면 하기 싫어도 그냥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몸이 좀 찌뿌둥해서 일하기 싫더라도, 갑자기 비가 온다 하면 벌떡 일어나 마당에 있는 곡식을 거둬들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파 죽겠는데 비는 왜 오냐?’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자꾸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첫째, ‘알아차림’을 연습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예요. 둘째, ‘기꺼이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가볍게, 그냥 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처에 가면 ‘기꺼이 한다.’, ‘가볍게 한다.’, ‘일단 해 본다.’ 같은 명심문을 자꾸 주는 거예요. 이걸 실제로 해 보면,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건 전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하기 싫다.’는 마음에 사로잡혀서 힘든 것이지, 막상 해 보면 별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얘야, 송아지를 지붕 위에 올려라.” 하시면, 대부분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 마세요!” 하고 바로 반응하지요. 그런데 ‘기꺼이 한다.’는 건 뭘까요? 일단 송아지를 끌고 지붕 밑에까지는 가 보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께 “아버지, 송아지를 끌고 오긴 했는데 지붕 위에는 도저히 못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요? “그래? 그럼 다시 갖다 매어 놔라.” 하시겠지요.
이처럼 누가 하라고 했다고 해서 꼭 다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첫걸음을 내딛고, 다음 단계를 물어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스트레스를 한결 덜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자꾸 생각으로 참고, 각오하고, 결심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 오히려 그 스트레스가 또 다른 스트레스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고로 한 팔을 다친 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존감을 지키는 법이 궁금합니다.
자폐 장애가 있는 막내를 형제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할까요?
욕망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성취를 해보고 내려놓는 것과,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과거를 자꾸 떠올리며 후회하거나 비교하게 됩니다. 아름답게 나이 드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우리 몸은 대부분 빈 공간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허무한 것 아닌가요?
인간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의 개념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불교에서 윤회의 개념은 무엇인가요?
큰 박수로 강연을 마친 뒤 곧바로 저녁 강연 장소인 서귀포 예술의 전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곳곳에서 봉사자들이 제주 시민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6시 50분에 강연장에 도착한 스님은 대기실에서 서귀포 시장, 문화 관광 체육국장, 서귀포 예술의 전당 관장, 공연기획팀장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차담을 나눈 후 강연 시간이 되어 함께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강연장에서는 사전 공연으로 퓨전 국악 밴드 원율의 대표 이하나 님이 흥겨운 국악 공연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 큰 박수 속에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700여 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습니다. 박수갈채와 환호를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다섯 명이 먼저 스님과 대화를 나눈 후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총 열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후 가슴속에 남은 원망과 슬픔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저는 저와 가족이 다시 행복해지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섯 살 된 딸·아들 쌍둥이를 키우던 아빠입니다. 그런데 올여름 방학 때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에 있는 처형 댁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내는 불의의 사고를 겪었습니다.
저는 독실하진 않지만 천주교 신자입니다. 성경도 찾아보고, 신부님께도 말씀을 드리고, 여러 책과 유튜브도 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은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힘든 건 화가 너무 많이 난다는 점입니다. 보호자였던 아내를 볼 때도 화가 나고, 쌍둥이 동생보다 언니들과 노는 게 더 신났던 딸아이에게도 화가 납니다. 누나들도 셋이나 갔는데 단 한 명도 아들을 보지 않았다는 것도 화가 나요. 가족들이 놀러 왔다고 휴가까지 냈던 형님과 처형도 뭐가 바쁘셨는지 아내 혼자 다섯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갔다가 그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도 화가 납니다. 그리고 제가 믿고 의지하던 분들도 사고 이후에 제 손을 놓아 버리더라고요. 그런 분들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도 큽니다.
아내는 시간이 좀 흘렀지만 죄책감 때문에 여전히 많이 힘들어합니다. 딸아이는 엄마, 아빠의 슬픔을 자기가 해결하지 못해서인지 상담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자존감이 굉장히 낮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가족들을 볼 때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믿었던 사람을 다시 볼 때마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지금은 ‘살아간다.’기보다는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저와 아내와 딸이 다시 행복해지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여쭙고 싶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질문자만 행복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질문자도 슬퍼해야죠. 죽지는 못하더라도 죽을 만큼 슬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좀 더 슬퍼하세요. 아직 6개월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건 너무 빠르잖아요. 한 10년은 슬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아빠가 6개월 만에 멀쩡하게 산다면, 아이가 볼 때 어떻겠어요? ‘아빠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나 보다.’ 이렇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한 10년은 울고불고해야 ‘아, 아빠가 나를 사랑했구나.’ 하고 아이도 느낄 것 아니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제가 가장이니까요. 제가 실의에 빠져 계속 슬퍼하는 모습을 아내와 딸에게 보이면 책임을 놓아 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가장의 책임이 뭐가 중요합니까? 질문자가 10년 슬퍼하면 직장생활도 어려워질 테고, 얼마 안 있어 실직할 겁니다. 부인도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겁니다. 딸아이도 성장하면서 계속 상담 치료를 받아야 하겠죠. 그러면 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아들을 뒤따라가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길이 뻔하잖아요.
질문자가 슬픔에 젖어 있을수록 부인의 죄책감은 더 커질 겁니다. 엄마, 아빠가 슬퍼하면 딸은 더 우울해질 거고요. 아이에게 ‘왜 동생과 놀아 주지 않았니?’, ‘왜 잘 돌보지 않았니?’ 하고 다그치면 나머지 가족들도 다 떠나갑니다. 가족들은 ‘사고인데 나한테 어떻게 하라는 거냐? 사고 날 줄 알았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죠.
질문자처럼 생각한다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이태원 참사는요? 놀러 갔다가 골목에서 미끄러져 150여 명이 죽는 일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도 그런 일이 이 세상에서는 일어났어요. 그러니 아이 한 명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저도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했습니다. 골목길에서 미끄러져 두세 명이 죽는 사고는 생길 수도 있겠죠. 메카나 인도에 백만 명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건물이 무너져 50명에서 100명이 압사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런데 한국의 골목길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압사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죠. 그런데 그런 일도 일어나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질문자 아들의 사고도, 질문자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냥 하나의 ‘사고’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고로 질문자의 삶이 슬픔과 원망 속에 빠져 있고, 아내는 죄책감 속에 살고, 딸은 우울해져 있다면, 아이 한 명이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안으로 온 가족이 다 따라 죽거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이 되겠죠. 그러면 죽은 아들이 하늘에서 가족을 보며 ‘그래, 내가 죽었는데 가족들이 잘 살면 안 되지. 다 같이 죽자!.’ 이렇게 생각할까요? 아니면 ‘내가 사고로 죽었더라도 엄마, 아빠, 누나는 잘 살아야지.’ 이렇게 바라겠습니까? 결국 질문자가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자가 운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확실하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아들을 따라 죽을 것인가? 아들은 떠났지만 남아 있는 가족만큼은 행복하게 살 것인가?
‘아들이 죽었는데 어떻게 행복하게 살겠나?’ 이렇게 생각하면 우울하게 살다 죽으면 됩니다. 질문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시니 성경 이야기를 하나 해 봅시다. 사람의 머리털 하나를 희게 하거나 검게 하는 게 사람의 능력입니까? 하느님의 영역입니까?”
“독실하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모두 웃음)

“사람의 머리털을 희게 하거나 검게 하는 것도 하느님이 하신다는 구절을 읽어본 적 없어요?”
“없습니다.”
“그럼 천주교 신앙에서는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사람의 영역입니까? 하느님의 영역입니까?”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자는 천주교 신자인데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럼 솔직히 ‘아들이 죽어서 내 신앙이 흔들렸다.’고 하시면 됩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하신다고 믿었는데 내 아들이 딱 죽고 보니까 ‘하느님이라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못 받아들이겠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겠다.’ 하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겠다면,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하느님이 하신다고 되어 있으니 이렇게 되었을 때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도, 그 일이 내게 왔을 때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나쁜 게 아닙니다. 이러한 신앙 덕분에 자식을 잃은 사람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고, 부모가 죽은 사람들도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일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하는 거예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미 일어난 일을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받아들이면 가족이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면 남은 가족 모두가 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자가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받아들이고 희망을 갖고 산다면, 부인의 죄책감은 어떻게 될까요?”
“줄어들 것 같습니다.”
“그럼, 아빠와 엄마가 좋아지면 딸은 어떻게 될까요?”
“좋아질 겁니다.”
“그러면 가족이 좋아지는 길을 선택하는 게 좋겠습니까? 나빠지는 길을 선택하는 게 좋겠습니까?”
“좋아지는 길이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길이 싫다는 거죠? 그럼 자기 좋을 대로 하세요. 자기가 가기 싫은 걸 어떡하겠어요. 질문자는 아들을 따라 죽을 겁니까? 아니면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겁니까?”
“정신 차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5년 뒤에 정신 차리면 딸은 성장하는 5년 동안 슬픔 속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질문자가 정신 차려도 딸은 이미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희생시키고 정신 차리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지금 정신 차리는 게 낫습니까?”
“지금이 낫습니다.”
“그럼 지금 정신 차리면 됩니다. 무엇 때문에 ‘알기는 알겠는데 안 된다.’고 말합니까? 여기서 ‘안 된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 되면 고통이 더 커지고, 되면 고통이 줄어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자기 좋을 대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이게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일반적으로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즉 어리석은 마음에서 보면 어려워요. 그러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둘이 살다가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생각해 따라 죽는 길이 있고, ‘네 몫까지 내가 살겠다.’ 하고 더 당당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둘 중 어떤 길을 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밝은 곳으로 갈지, 어두운 곳으로 갈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납치하여 강제로 나에게 마약을 투여해서 성매매를 하게 만들었다고 해 봅시다. 그러다 1년 만에 구출이 되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마약을 1년 동안 했으니, 마약에 중독이 되어 있겠죠. 그래서 내가 마약에 다시 손을 대면 처벌을 받을까요? 아니면 죄가 없다고 할까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시작했지만, 지금 마약을 찾는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 선택’입니다. 마약을 다시 하면 마약 사범이 되는 겁니다. 마약을 강제로 놓은 사람들 때문에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할 거예요? 남이 어떻게 했든, 지금 내가 마약 중독이 된 상태라면 스스로 마약을 끊어야 내 인생이 새롭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내게 와서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는 한 나는 마약을 계속할 거야.’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들이 강제로 먹였든, 내가 자의로 시작했든, 지금부터 어떤 길을 갈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입니다.
밝은 길을 가기로 선택하면 밝은 길로 가는 것이고, 계속 원망하며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두운 길로 가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생이 어떠했는가?’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내가 지혜로 밝은 길을 갈 것인가? 어리석음으로 어두운 길을 갈 것인가?’ 이 둘 중에서 지혜로운 길을 가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인들의 가르침도 모두 같습니다.”
“알고 있던 정답 그대로, 더 열심히, 조금만 슬퍼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두 시간을 투자했는데 아깝지 않으십니까?”
“네.”
“다행입니다. 여러분, 문제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큰 눈으로 보면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문제라고 집착하는 것을 ‘색(色)’이라 하고,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깨닫는 것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합니다.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고,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중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내 운명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지, 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곧바로 로비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강연장을 나와 숙소로 향했습니다. 밤 11시에 숙소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제주 공항을 출발하여 청주 공항에 도착한 후 곧바로 충북 영동으로 이동하여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고양시에서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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