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2.20(오후) 경전반 즉문즉설, 온라인 일요 명상
“아내와 장모에게 배신을 당해 괴롭습니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 눈이 내린 후 아직도 문경 수련원 곳곳에는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계곡물은 꽁꽁 얼었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문을 열면 찬바람이 휘익 하고 들어왔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스님은 즉문즉설을 이어갔습니다.

오전에 외국인과 영어 통역으로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오후 3시부터는 이번 가을에 입학한 경전반 학생들과 함께하는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국내외에서 950여 명의 경전반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질문을 받았습니다. 7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그중 한 남자분은 아내와 장모로부터 엄청난 배신을 당했다며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통해 어떻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아내와 장모에게 배신을 당해 괴롭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연기법 등을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제가 당한 큰일에는 법문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내와 장모로부터 엄청난 배신과 경제적 타격을 받은 것을 도저히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여기 어떤 물질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한 숟가락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독이라고 했는데, 그 물질을 어떤 약을 먹어도 치료가 안 되는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조금 먹였더니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면 특효약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실제로 그 물질에 약성과 독성이 있을까요? 약성과 독성이 있다면, 독성이 있다가 약성으로 바뀌고, 약성이 있다가 독성으로 바뀐다는 건데, 이 말은 이론적으로 안 맞습니다. 본래 그 물질에는 ‘약이다’ ‘독이다’ 하는 실체가 없어요. 어떤 조건에서는 독성으로 작용할 때도 있고, 약성으로 작용할 때도 있는 겁니다. 본래 약성이다, 독성이다 할 게 없다는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승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표현했어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약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독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이에요.

그런데 제가 즉문즉설을 할 때는 공이니 색이니 무아니 무상이니 이런 용어를 안 쓰잖아요. 즉문즉설은 일상용어를 사용하니까 이해하기가 쉬운데, 지금 질문자는 경전반에 입학해서 이런 불교철학 용어들을 배우다 보니 그 뜻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겁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방법

그럼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전 부인은 처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질문자한테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결혼할 때부터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요?”

“아니요. 처음에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돈을 가져가고, 나를 속이고, 나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면 전 부인이 원래 좋은 사람인데 변해서 나쁜 사람이 된 거예요?”

“...”

“전 부인은 예전에는 질문자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였는데 지금은 질문자한테 손해가 되는 관계가 된 겁니다. 즉 과거에는 약성으로 작용을 했는데, 지금은 독성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에는 좋은 여자라고 했다가 지금은 나쁜 여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의 가르침으로 설명하면, 전 부인은 본래 좋은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여자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에요. 전 부인은 전 부인 나름대로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 사람입니다.

옛날 인연의 조건에서는 질문자에게 아내가 좋게 작용을 하니까 좋은 여자라고 했다가 지금의 조건에서는 질문자한테 손해가 되는 관계로 작용하니까 나쁜 여자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본래 좋고 나쁜 건 없습니다. 지금 나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작용할 뿐이에요. 그래서 만약 질문자가 손해난 것이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되고, 방법을 강구하면 질문자가 손해 본 것 중에 일부를 되찾을 수 있겠다면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있으면 노력을 해야 되고, 가능성이 없으면 포기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능성이 없는데 자꾸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이유

포기를 해도 되고, 노력을 해도 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은 미워하는 거예요. 배신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를 미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미워할 게 없어요. 사람이 관계를 맺다 보면 이익이 될 때도 있고 손해가 될 때도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주식을 사면 주가가 올라갈 때는 좋아했다가 떨어지면 기분이 팍 나빠집니다. 그렇다고 주식을 미워하지는 않잖아요. 주식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처럼 여자라고 하는 주식을 샀다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는 주가가 좀 올라가서 덕을 보기 때문에 잘 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가가 팍 떨어져서 후회가 되는 거예요. 후회가 되면 주식을 팔든지, 나중에 또 오를지도 모르니까 좀 더 가지고 있어 보든지, 질문자가 선택하면 되지 주식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법문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거예요. 전 부인을 미워하는 것은 공부를 하다 보면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전 부인과의 관계에서 손해 본 것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마라는 뜻은 아니에요. 손해 본 것을 되찾을 수 있으면 노력해서 되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노력한다고 되찾아지는 게 아닌데도 계속 붙잡고 있으면 바보예요. 그때는 포기를 해야 됩니다. 포기를 해도 되고, 노력을 해도 되는데, 다만 미워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아내는 장모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장모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딸을 키운 대가를 저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몇 배로 벌려고 했던 겁니다. 제가 대기업을 다녀서 돈도 좀 벌었기 때문에 아내는 그 돈의 대부분을 처갓집으로 몰래 가져갔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집에서 셋째 아들인데, 그 와중에 저희 부모님과 두 형님이 사정이 어려워져서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수십 년간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서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혼하고 나서 제가 아내를 다시 사랑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원래부터 집사람을 굉장히 좋아했었거든요. 집사람도 사실은 저를 그렇게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싫어하니까 집사람도 실망하고 떠난 거죠.”

“네,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을 했으면 누가 벌어도 공동의 돈인데 그 돈이 시댁에 가듯이 처가에도 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처가에 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 싶어 이혼을 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왜 미워하고 원망하느냐 이 말이에요.”

“제가 수십 년간 처가에 가는 돈을 전혀 몰랐어요.”

“그건 질문자가 바보라서 그런 거죠.”

“네, 제가 바보 같았습니다.”

“그러면 ‘내가 바보였구나’ 이렇게 알고 끝내야죠.”

“제 통장을 완전히 와이프에게 맡기고 살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걸 모른 건 질문자가 바보인 거죠. 가족이 죽어도 내가 모르면 살아있다고 하듯이 돈이 처가에 가도 내가 모르면 나한테 돈이 있는 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돈이 처가에 가 버렸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오고, 못 찾아오면 포기를 해야죠.”

“제가 모르고 살았으면 괜찮은데 알아버리니까 문제가 된 거죠.”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제가 말하는 요점은 지나간 일을 두고 왜 미워하느냐 이 말입니다. 질문자가 부인을 미워하면 부인이 괴로울까요? 질문자가 괴로울까요?”

“제가 괴롭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일을 뭐 때문에 하느냐 이 말이에요.”

“원래 제가 신혼 때 부인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아직도 좋아하는 감정은 있습니다.”

“좋아하니까 미워지겠죠. 질문자가 지금 저에게 질문한 것은 반야심경 공부가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거잖아요. 그에 대한 대답을 제가 하는 겁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

장모는 딸을 이용해서 돈 좀 벌려고 한 거예요. 장모가 보기에는 사위가 셋째 아들이니까 시가에 신경을 안 써도 될 줄 알고 돈이 100퍼센트 자기에게 올 줄 알았는데 70퍼센트만 오고 30퍼센트는 안 온 상황인 겁니다. 그래서 장모는 자기 나름대로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장모는 자기 재주껏 돈을 확보한 것이지 장모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딸을 돈 잘 버는 사람한테 시집보내서 그 돈을 자기가 가져오겠다는 목표를 세운 겁니다. 질문자는 지금 손해가 났으니까 기분이 나쁜 것인데, 제가 옆에서 봤을 때는 ‘장모가 재주 좋네’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네. 그런데 그 와중에 저희 부모님은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셨거든요.”

“그것은 질문자와 질문자의 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겁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기 소원대로 다 못 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내는 자기를 키워준 어머니가 고마워서 가능하면 어머니 말을 안 거스르고 들으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 겁니다. 남편을 좋아하는 것보다 어머니의 은혜에 메여있는 게 더 크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삼자 간에 누구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각각 이해관계가 다를 뿐이에요.

결과적으로 돈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결론이 났으면 이런 인연은 해체시키는 게 좋습니다. 각각의 인연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잃어버린 돈을 되찾아올 수 없으면 포기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질문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돼요.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어젯밤에 강도 만난 꿈을 꾼 것을 갖고 지금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야심경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 깨달아야 해요.

‘두 여자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여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내가 자기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사람은 서로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아가는구나. 부처님이 옳고 그름은 본래 없고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그 말이 맞는구나.’

이렇게 깨닫고 과거를 툭 털어버리고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면 반야심경을 공부한 효과가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어디 가서 반야심경 공부한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늘 아내와 장모를 미워하고 욕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공부를 하나 마나인 거예요.”

“어떨 때는 용서가 되는데, 어떨 때는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용서한다는 것은 전 부인이 잘못했는데 질문자가 봐준다는 뜻입니다. 전 부인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한 행동입니다. 장모는 장모 나름대로 재주를 피워서 한 행동입니다. 전 부인은 키워준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다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잘한 거예요. 그러니 전 부인과 장모 둘 다 잘못한 것도 없고, 용서할 것도 없어요, 각자 인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해관계가 지금 안 맞아떨어진 거예요.”

“사실 아내도 저를 좋아했었어요. 중간에 장모가 그런 역할을 하는 바람에 이혼을 하게 된 거죠.”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 같네요. 아내와 장모를 자꾸 그렇게 분리해서 보면 안 됩니다. ‘아내는 착한데 장모가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아내와 장모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장모를 포기하면 아내도 포기해야 하고, 아내를 가지려면 장모도 같이 갖는 마음을 내야 해요. 질문자가 장모까지 안고 갈 수 없으면 아내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미련을 버려야 돼요. 지금 질문자는 약간 정신적으로 공허한 상태 같아요.”

“네, 맞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미련을 못 버리고 전전긍긍하면서 살면, 질문자의 남은 인생도 자꾸 초라해져요.”

“신혼 때부터 20년간 다른 여자는 안 쳐다볼 정도로 집사람만 굉장히 좋아한 상태에서 이렇게 단절이 되니까 제 인생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아요.”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열렬히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좋은 게 나중에도 반드시 좋은 게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어떤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여자가 죽어도 이렇게 공허한 상태가 안 되었을 겁니다. 뭐 때문에 열렬히 사랑해서 열렬히 미워하는 거예요?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열렬히 미워하는 과보를 고통스럽게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같이 현명한 사람은 좋아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좀 해 보면 어때요?”

“스님께서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에 반대되는 괴로움이 따라온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지금 저에게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걸 알았다면 이제 정신을 차려야죠. 지나간 일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딱 버리세요.

‘열렬히 사랑도 한번 해봤고, 열렬히 괴로워도 한번 해 봤으니까, 중생 노름 충분히 해봤구나. 앞으로는 열렬히 사랑할 것도 없고, 열렬히 미워할 것도 없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관점을 한번 바꾸어 살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마침내 환한 미소를 보였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자가 관점을 확실하게 바꿀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관점만 바꾸면 인생이 홀가분해집니다

“불교 공부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평생 지어온 삶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습관대로 살아서 괴로움에 빠져 산다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루를 살아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돈에 너무 매이지 마라는 겁니다. 지위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지위에 너무 매이지 마라는 거예요. 나이 드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나이 드는 대로 그냥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있는 부인도 버리고, 있는 자식도 버리고, 있는 돈도 버리고, 있는 지위도 버리고 출가를 해야 했는데, 질문자는 아내가 알아서 집을 나가 버렸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돈을 뺏겨서 괴로운 게 아니고 아직 집착이 덜 버려져서 괴로운 거예요. 출가를 하려면 돈을 버려야 하는데, 아내와 장모가 돈을 가져가 버리니까 버리기가 얼마나 쉬워졌습니까. 집안 청소를 하려면 혼자서 다 치워야 하는데 아내와 장모가 가구의 3분의 1은 가져가 버렸으니 청소하기가 얼마나 쉬워졌어요?

생각을 이렇게 좀 바꿔 보세요.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다시 보면, 아내와 장모는 굉장히 고마운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원래 갖다 버리려고 했는데, 그들이 알아서 다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질문자 해야 할 일이 많이 덜어진 겁니다.

‘가져가 줘서 고마워. 안 그래도 내가 다 갖다 버리려고 했는데 재활용해서 쓰겠다고 가져가 주니 고마워.’

이렇게 생각을 탁 바꾸세요. 그래야 내 속에 있는 미움과 원망이 없어져요. ‘용서해준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오늘은 용서했다가 내일 아침엔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진심으로 ‘다 가져가서 고맙다. 가져가려면 싹 다 가져가지 왜 남겨 놓고 갔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야 질문자의 인생이 홀가분해져요.

한 때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했고, 돈 좀 벌어서 살아 봤고, 이런 것들은 눈 감을 때 다시 돌아보면 다 꿈이에요.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 해요. 죽기 전에 조금 일찍 버렸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젊을 때 일찍 버렸고, 질문자는 부처님보다 조금 늦게 버린 겁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버린 거예요. 여기 있는 어떤 사람도 죽을 때는 다 버리고 가야 해요. 한국에서 최고의 부자라는 사람도 죽을 때 동전 한 닢도 못 가져갔어요,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일찍 버린 걸 가지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점을 이렇게 가져보세요. 질문자가 불행한 조건에 처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세요.”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코로나 19로 생활이 단조로워지면서 대중매체를 접하는 시간 많아졌는데요. 보이는 것만을 보고 쉽게 판단하고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대중매체를 볼 때 일어나는 마음은 어떻게 살펴야 할까요?
  • 나라고 할 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도 없다고 하셨는데, 실생활에서는 개인적인 신념이 있어야 좋은 성과를 내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신념과 무상, 무아를 어떻게 구분해서 봐야 하나요?
  • 목적의식이 너무 뚜렷하면 경계에 빠지기 쉽다고 하셨는데, 세속적인 삶을 사는 저희들은 어느 정도의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 오온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없고,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꿈에서 깨고자 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 수행을 하고 있는 나도 실체가 없는 것인가요?
  • 깨달은 사람이 속세에 살며 보살행을 하는 것이 '화작'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삶과 화작을 하는 삶이 모순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 부처님은 제자들을 많이 거느려서 그들을 통해 경전을 남길 수 있었지만, 원효대사는 화작 이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후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특히 마지막에는 ‘화작’에 대해 궁금해하는 질문이 연이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화작이란 어떤 수행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화작이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의 질문지를 보니 화작(化作)에 대해서 관심이 많네요. 화작이라는 것은 ‘걸림 없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부가 ‘청소하는 것이 특별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청소를 할까요? 그냥 청소를 할까요?”

“그냥 청소합니다.”

“가정주부가 밥을 할 때 ‘밥하는 것이 특별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밥을 할까요? 그냥 밥을 할까요? 그냥 밥을 합니다. 농사꾼이 씨 뿌리고 김매면서 ‘특별한 일을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할까요? 그냥 할까요?”

“그냥 합니다.”

“짐꾼이 짐을 싣고 운반하면서 특별하다고 생각할까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만약 스님이 ‘스님이다’하는 상(相)을 가지고 있으면 ‘스님이 청소도 하네’, ‘스님이 짐도 운반하네’, ‘스님이 농사도 짓네’, ‘스님이 밥도 하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거예요. 그런데 화작이란 아무리 유명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빗자루 쥐면 청소부처럼 청소하고, 호미 쥐면 농사꾼처럼 농사짓고, 짐을 들 때는 짐꾼처럼 짐을 들고, 밥할 때는 공양주처럼 밥하고, 장사할 때는 장사꾼처럼 장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은 세모난 그릇에 넣으면 세모 모양이 되고, 네모난 그릇에 넣으면 네모 모양이 되고, 그릇 모양에 따라 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야!’, ‘이건 내가 싫어하는 거야!’ 하면서 좋고 싫고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게 힘이 드는 거예요. 좋아하는 걸 그만두는 것도 힘들고,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도 힘들고, 그런 자신을 이겨내려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좋음도 놓아버리고 싫음도 놓아버리면

그런데 좋고 싫고를 놓아버리면 주어지는 대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청소할 일이 있으면 청소를 하고, 공부할 일이 있으면 공부를 하고, 법문을 할 일이 있으면 법문을 하고, 농사지을 일이 있으면 농사짓는 일을 합니다. 이것을 ‘화작’이라고 해요.

누가 봐도 농사지을 때는 농사꾼처럼 보이는 거예요, 만약 농사를 짓고 있는데 스님처럼 보이면 화작이 아직 못 된 겁니다. 화작은 ‘삶에 걸림이 없고 자유롭다’ 이런 의미입니다.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주어지는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것은 욕구입니다. 욕구대로 살고자 하면 왕의 길을 가야 해요. 그러나 화작이란 자기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주어지는 대로 그 조건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화작을 하게 되면 어디를 가도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왕의 자유는 권력을 갖고 있을 때만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비난과 보복이라는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소통이란 내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나의 말을 상대가 잘 들어주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독재입니다. 소통은 상대의 말을 내가 잘 들어주는 것이에요.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노예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분별없이 이해하고 받아주면 그것이 소통이라는 뜻입니다.

부부지간에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내가 상대의 말을 잘 안 받아준다는 뜻이에요. 아이와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내가 아이의 말을 안 들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아이에게 독재자 식의 소통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끝내자 오후 5시가 다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1월 달에 또 여러분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갖겠습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방송을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8시 30분에 스님은 다시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코로나 9 사태 이후 37번째 진행되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외국인을 포함해 4천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온라인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인사말을 건넨 후 곧바로 지난주에 외국인이 올린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총 3명의 외국인이 질문을 올렸는데 그중 한 명은 명상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명상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나요

“명상을 하면서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과거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내 성격의 일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저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요? 심리치료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고 이미 치료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명상을 통해서도 치료가 가능한가요? 아니면 제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건가요?”
(Through meditation, I have come to realize that my present is a product of my past. I also see my past experiences unconsciously manifesting in my present as part of my personality. Do you think it is wise to try to revisit traumatic experiences from my past to heal and free myself from suffering? I know that therapy helps and I have already done it, but could this also be achieved through meditation or do you think I am wasting my time?)

“상처가 심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즉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응급치료에 해당하는 약물치료도 받아야 합니다.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정 조절이 안 된다면,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 약물치료나 심리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시급한 증상이 아닌 경우는 꾸준히 명상을 하면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명상은 그런 트라우마를 일부러 꺼내는 게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상태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가수면 상태와 비슷하게 됩니다. 잠을 잘 때 꿈을 꾸듯이 무의식 세계에서 저절로 상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명상을 시작하면 초기에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나 아주 자극적인 일들만 머릿속에 떠올라요. 명상을 할 때는 자극적인 행동이나 자극적인 것을 보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것들이 계속 떠올라서 집중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에 점점 더 집중하여 고요함을 계속 유지해가면 이런 장애들은 나중에 대부분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내가 일상에서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처들이 떠오릅니다. 생각하지도 못 했던 어린 시절에 어떤 사건들이 떠오르게 되면 바로 감정이 결합되어서 슬픔이 일어나거나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 과거의 경험은 나에게 상처로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었던 겁니다.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면 결국 감정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아무리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계속 호흡에 집중하면, 그 생각이 떠올랐다가 감정에 영향을 주기 전에 사라집니다. 또다시 떠올라도 여전히 호흡에 집중하면 또 사라지고, 이런 과정이 반복됩니다. 호흡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과정을 여러 번 거듭하면 나중에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도 전혀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기억은 되는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가 되면 상처가 상당 부분 치유가 된 겁니다. 과거의 사건을 기억은 하지만 감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일을 보듯이 볼 수 있게 됩니다.

치유를 하려고 일부러 의도하는 게 아니라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계속 유지하면 치유가 저절로 된다는 겁니다. 마치 접시에 담긴 수분이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증발하듯이 명상을 하면 상처가 저절로 소멸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 호흡을 놓치고 그 생각을 골똘히 하거나 거기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아무리 명상을 오랫동안 해도 이 과정이 반복될 뿐 치유는 되지 않습니다.”

답변을 마치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탁! 탁! 탁!

죽비 삼성으로 명상을 시작하고, 죽비 삼성으로 명상을 마쳤습니다. 스님이 채팅창에 소감을 올려달라고 말하자 수백 개의 소감이 올라왔습니다.

“잡음 같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쫒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편안하지만 좀 피곤합니다.”
“Lots of little thoughts I did not engage with relaxed and a little tired.”

“번뇌가 망상으로 나타났지만, 명상 덕에 해소하여 흘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마음 덤덤합니다.”
“I had a lot of distractions but I was out to be able to meditate through the distractions right now. I feel numb and relaxed.”

“망상으로 빠졌다가 돌이키며 편안하게 했습니다.”
“I thought I was just distracted but that I was able to come back to the meditation.”

“스님 말씀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하다 보니 잠깐잠깐 스치는 생각을 떨치고 편안하게 잘했습니다.”
“As you have instructed and I was relaxing mind that I was engaged meditation I was and that allow me to get away from the distracting thoughts

스님은 소감을 주욱 읽어준 후 이에 대한 조언도 짧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주일간 편안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방송을 마치자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스님은 영어 통역을 해준 국제국 활동가들과 오늘 진행된 영어 통역 즉문즉설에 대한 참가자들의 반응, 미국 대선 이후의 동향, 미국의 코로나19 상황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내일은 동지입니다. 동지법회를 한 후 여러 부서와 하루 종일 화상 회의를 했습니다.

온라인 일요명상은 아래 유튜브 영상으로 다시 보기 하실 수 있습니다.

▲ 영상 보기

전체댓글 46

0/200

유재원

감사합니다

2020-12-30 09:22:18

박범숙

늘 감사합니다

2020-12-28 18:12:44

김정숙

스님에 글만읽으면 마음이편안해짐니다
감사합니다

2020-12-28 07: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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